•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지난 30년, 앞으로 30년

문서에서 국토연구원 30 년사 (페이지 62-65)

이 건 영

제6대 국토연구원장(재임 1993. 9. 7~1997. 3. 26)

도로기능은 건설부에, 철도와 항공기능은 교통부에, 해운기능은 항만청으로 분리되어 있어 서 여러 정책 간에 많은 조율과 갈등이 있었다. 교통망이라는 것은 철도와 도로 또는 해운과 서로 경쟁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정책결정을 하거나 연구할 때는 항상 이 점에 유의하여 대안별로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여야 하며 때로는 서로 보완적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그러나 담당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이 같은 정책조정 업무가 수월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당시 교통관련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계 부족이 심각하였다. 각종 통계는 거의 행정적으로 보고되는 운수영업자료에 근거하였는데, 이것은 세금을 두려워하는 업계 사정상 왜곡되어 있었다. 그래서 실제 사람이나 화물의 움 직임을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교통량자료도 부실하였다. 그래서 용역사업을 하면서 통계자료를 축적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1980년대 이후 우리가 만든 또는 만들고 있는 신도시의 유치함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 나가야 할 선진적인 도시의 모델일까 하는 점이다.

어떻든 이렇게 30년을 보내며 연구원은 국토개발 분야 연구를 선도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 기회에 연구원이 좀더 기초적인 연구에 매진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동안 시급하면서도 굵직한 용역사업이 많았다. 게다가 연구원의 예산도 매양 부족한 상황 이라 불가피하게 용역 위주의 사업추진을 하여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나하나 검증하고 정 책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기초연구, 도시개발의 기본적인 콘셉트, 배치와 밀도, 토지제도, 도시개발과 교통수요와의 관계, 환경친화적인 개발의 방법론 등, 이러한 기초연구가 바탕이 되어 실제 용역사업의 도구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초연구보다 용역사업에 치중하다 보니 물론 자의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정치적인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새만금이나 그린벨트해제, 청주국제공항, 신행정수도, 혁신 도시 등은 아무래도 사전에 충분한 연구가 뒷받침되기 전에 정치적 회오리에 휩쓸린 것 같 아 지금도 안타깝다.

/ 061 060

사항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항상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분석하고 대안 을 모색하고 여론을 수렴하여야 한다. 그 중심에 연구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각종 통계정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통계는 연구사업의 첫 단계인데, 아직도 주택통계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른다. 교통통계는 흘러가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 통계가 아주 부정확하고 따라서 연구방법이나 분석도 주먹구구인 것이 많다. 역사적 자료에 대한 수집노력도 필요하다.

앞으로도 연구원이 할 일은 많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 서서 착실하게 선진 국다운 국토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직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우리 국토환경은 낙후되어 있다. 게다가 앞으로의 국토환경은 단순히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선진화가 이루 어지도록 그리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도록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연구원은 계속 이 같은 작업의 역군이 될 것이다.

062

국토연구원이 아니었다면, 결코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가 없다. 국토연구원 덕분에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도 나는 국토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면서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도시나 교통에 관한 학문이 아닌 일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1980년대 초반 국토연구원의 수석연구원이 되면서 나와 국토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후 청와대와 건설교통부에서 국토정 책의 입안자로서 경험을 쌓았다. 지나고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1996년 봄 건설교통부를 퇴 직할 때까지 신도시건설을 비롯하여 도로, 항만, 공항, 철도, 댐 등 각종 국토개발 사업의 입안 자로 참여하면서많은것을배웠다. 땅을다루는일을 하다보니 자칫잘못하면각종이권에얽힐 수있는 만큼, 특히 처신에 조심해야 했다. 앞만 쳐다보고 사심 없이 일했다고 생각된다.

1997년7월국토연구원장으로부임하면서나는국토정책의입안자에서국토학자로새롭게자리매김 할수있었다. 재임동안제4차국토종합계획수정계획을입안하였고, 동북아를국토연구에접목시켰 다.또한국토의지속적개발을위한선언으로서연구원의명칭을‘국토개발연구원’에서‘국토연구원’

으로개칭하였고, ‘21세기국토포럼’을설립하여국토에관한의견수렴공간으로활용하였다.

1997년 11월 원장직책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국가적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정부지원이 줄어드니 직원들 봉급을 제대로 줄 수가 없었다. 밤새워 고민했다. ‘새 출 발을 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하에 설립 20년간의 군살을 빼는 구조조정을 필두로 연구원의 재도약작업을 시작하였다. 지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당시 인력감축으로 인하여 연구

/ 063

문서에서 국토연구원 30 년사 (페이지 6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