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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 표현에 따른 캘리그래피

제4장

3. 조형적 표현에 따른 캘리그래피

캘리그래피 표현기법은 모필의 다이나믹한 변화에서 오는 율동미와 차별성, 비대칭이 주는 긴장의 해소, 형태와 여백이 주는 공간미, 해체와 통합의 반복에 의한 리듬감, 먹 의 농담 차이로 인해 조형적으로 역동감을 준다. 따라서 캘리그래피적인 기법은 시각적 인지효과와 주목성을 높이는데 효과적이다. 또 대칭구조로 형태적 안정감을 줄 수 있

[그림 4-4] 필압, 필속을 활용한 작품

김성태 작(作)

다. 완전대칭형은 균형적이며 안정 적이다. 근사대칭형은 거시적 대칭 이나 배치 상에 변화가 있는데 빈 번한 형식이다. 반전대칭형은 상반 된 비대칭으로 매우 주목성이 높다.

또한 자연스러움이 최대한의 장점 이므로 과대한 기교는 피하는 것이 좋다. 잘 절제된 여백도 캘리그라퍼 의 수준 높은 의식이 나타나는 부 분이다.

캘리그래피의 조형적 표현에는 점, 선, 면, 색, 구성으로 이루어진 다. 점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선과 면은 뼈대고, 색은 옷이며, 구성은 조화다. 캘리그래피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비구 상적이면서 추상적인 모양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전의 캘리그래피는 광고를 꾸미기 위한 보조적인 디자인의 일부에 불과 했다. 지금 은 수많은 컬러와 이미지와의 통합을 통해 빠르게 발전해 가는 디지털 시대와 발맞춤 을 하고 있다. 짧은 몇 글자가 시각적인 상징성을 갖고 인지 작용을 발휘하면서 추상선 형적 형태에서 탈출하여 림듬감을 갖고 공간속에서 확장되어 음악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캘리그래피가 상업적 필요성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예술성을 포함한다는 의미이 기도 하다. 캘리그래피는 종종 예술인가 아닌가의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여기서 예술의 정의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볼츠가 규정한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감성적 지각 이론으로서 미학을 규정하는 볼츠44)에게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이 어 떤 계기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 설정은 불필요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은 도처에서 미적 체험이 가능하고, 또 전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매체를 통해 확산되는 예술적 체험은 결국은 예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예술 개념이 볼츠가 규정한 예술 개념과는 다른 합리적 사고가 전제된 예술 개념일지라도 말이다.

현재의 매체환경에서 예술과의 연관성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44) 노르베르트 볼츠(1953~), 독일의 철학자, 미디어 이론 연구, 현 독일공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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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환경 디자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미학 이론을 대신해서 하나 의 디자인 과학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픽 디자인과 상품 디자인에게 자리를 내어준 예술과 예술가의 창조성과 천재성은 디자인 환경과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매체 미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 이 아니라, 미디어환경 디자인이다라고 볼츠는 논한 바 있다. 이때 예술가는 하나의 카메 라맨과 유사하고 또 프로그래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즉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실행’한다. 미디어환경 디자인은 우리에게 유희 공간의 확장을 가 져오며,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미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미적 기본 체험을 가능케 한다. 그 리고 이 때 예술가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얼마만큼 창조적인 의도를 내놓는가일 뿐이다.

따라서 볼츠는 현대의 매체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컨셉트적인 예술”45)이라고 주장한다.

볼츠의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종말은 한편 타당성이 있다. 현대의 매체예술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지금의 현실에서 예술철학과 미학에 대한 관심도 많은 매체 등을 통해 예술작품을 손쉽게 감상하고 또 더 나아가 예술작품 을 좀더 쉽게 창작할 수 있게 된 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자신이 가진 손재주의 한계 때문에 재현할 수 없었던 것을 컴퓨터의 도움으로 쉽게 만들어 내기도 한다. 모든 사람 이 관객인 동시에 제작자일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 라,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작품에 여러 가지 변형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 쩌면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확대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을 둘러 싼 비의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예술에 대한 확대라는 긍정적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야 할까?

예술은 물론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숭배가 바로 예술 외적인 조건에서 산출되었던 것처럼, 이제 즐김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에도 이 전의 예술에 대한 숭배적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상품에서 우리 가 미적 체험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상품이 숭배적 가치를 띠고, 또 마치 고급문화에 대한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었던 전통적 예술작품처럼 즐 김으로서의 예술은 특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라는 기준은 무엇일까.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만 존재 한다면 더 이상 논할 일고의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포기하는 것과 예술이 가지고 있는 비판적 유토피아적 계기마저도 포기한다는 것은 완 45) 노르베르트 볼츠, 윤종석 역, 「구텐베르그-은하계에의 끝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

문학과 지성사, 2000

전히 다른 문제다.

사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공격을 하면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예술 중에 는 분명 감히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기 힘든 저급한 예술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 이 대중을 위해 생산되고, 대중적 방식으로 생산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저 급예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라는 기준은 필요치 않지만, 진지하게 예술로서 고민한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한다. 46) 그렇다. 캘리그래피는 상업적 예술이지만 예술인 것은 분명하다. 고민의 흔적 이 어떤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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