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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3. 민화의 종류와 특성

1) 민화의 종류

다양한 유형으로 이루어진 민화는 생활양식과 오랜 역사가 밀착되어 형성되었다. 익 살스럽고 소박한 형태, 아름다운 색채, 파격적인 구도의 특징은 한국적인 미를 강렬하 게 드러낸다.

민화는 장식장소와 용도에 따라 종류를 달리 한다. 민화의 내용별 주제를 대략 일곱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한다. 첫째, 꽃과 새가 어우러져 아름다음 조화를 이루는 화조도 (모란꽃, 매화, 난초, 연꽃, 석류, 학, 꿩, 오리, 봉황, 나비, 벌 등), 둘째, 호작도는 호랑 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그림으로 호랑이가 주가 되어 그려져 있으며 까치가 등장하기 도 한다. 셋째, 십장생도는 상상의 선계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

32) 정병모 지음,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출판사 다홀미디어

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열 가지의 장생물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넷째, 문자도는 충 효 혹운 삼강오륜의 교훈적 의미거나 길상적인 뜻을 지닌 글자를 통하여 바라는 소망 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렸다. 민화 문자도는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의 유교 적 윤리관을 압축시킨 여덟 글자를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병풍으로 그린 그림이다.

글자의 획 속에 그려진 문양은 길상적인 뜻이 담긴 길상문이다. 다섯째, 산수화는 산과 계곡등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장식용 민화다. 채색을 많이 하여 필법이 대단히 자유롭다. 여섯째, 책거리는 책을 중심으로 문방사우나 이와 관련된 물건들을 구경한다 는 뜻이다. 주로 선비들의 사랑방이나 서재에 장식되었던 이 책거리 그림은 학덕을 쌓 기 위해 애쓰는 문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 글 읽기를 즐기고 학문의 길을 추구했던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고스란히 유추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 곱 번째, 풍속도는 농사를 짓고 베를 짜는 모습, 사냥하는 장면, 일상생활, 사람이 태어 나서 죽을 때까지의 평생을 그린 그림이다.

2) 표현적 특성

민화의 조형미 연구는 민화 종류의 표현방법을 통해 한국인의 미의식과 생활정서를 바탕으로 한 민화의 구체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유행하였던 장식적인 그림은 민화에 과감히 반영되어 고정된 형식이 새로운 형식으로 전이되었다.

고사(故事)가 담긴 그림은 민간 설화나 민간 신앙과 관련된 내용과 그림을 하나로 일치 시켰다. 왜곡과 과장된 자유로운 그림형식은 일반 서민들의 정서를 과감히 표현해냈다.

민화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같은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 이것은 그만큼 풍부한 창조 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민화의 자유분방한 특징은 조선 후기 예술 정신이다. 민중 적 예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단순미, 소박미, 해학미, 파격미, 천진미 등과 함께 전체 적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산수화처럼 모든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지 않은 단순미, 이 루고자하는 소원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소박미, 호작도 속 호랑이의 천진하고 해학적인 모습을 표현한 특징은 우리 조상들의 주술적인 신앙이 반영된다.

민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유롭다. 그래서 한 시점을 동시에 표현하기도 하고, 도상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거나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한 자유로운 형식의 그림이다.

서민들 안에 깃들여진 생활정서와 해학적인 정서가 결합되어 그 시대의 회화로 발전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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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 예절문자도(유교문자도)

효,제,충,신,예,의,염,치 이외에도 수,복,강영 등의 글자와 짧은 문장을 그림문자로 그려 병풍이나 족자화했다.

출처 : 네이버 미술검색

제2절 민화문자의 목적

‘효제충신 예의염치’는 유교를 국가 기강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 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부터 이 여덟 글자를 교육의 골격으로 삼았고 신언 서판의 중심으로 키워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지켜 진 저변에는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의 내용을 그림을 통해 교화시켰다.

삼강이란 일종의 윤리규범으로 임금과 신하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자지간 즉 부위 자강(父爲子綱), 부부지간 즉 부위부강(夫爲婦綱) 등의 관계르, 왕과 아비와 남편이 위이 고 먼저라는 교육을 강제했던 것이다. 또 오륜이란 군신유의(君臣有義)를 통해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부자유친(父子有親)을 통해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친애를, 부부유별

[그림 3-3] 비백호자

조선조후기 성명미상의 비백호자

예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7×39cm, 도쿄 일본민예관

(夫婦有別)을 통해 부부 사이의 예의 분별을, 장유유서(長幼有序)를 통해 선후배 사이의 서열을, 붕우유신(朋友有信)을 통해 친구사이의 신뢰를 가르쳤다. 즉 삼강오륜이라는 기 초교화 위에 ‘효제충신 예의염치’를 인간관계와 인격수양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던 것 이다. 이 여덟 글자는 주로 병풍 한 폭에 한 글자씩 넣어 여덟 폭 병풍으로 되어 있는 것이 주종을 이루며 여기에 그림을 함께 넣어 아름다운 예절문자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효(孝)를 통해 부모를 공경케 하고 제(悌)를 통해 형제간에 우애와 화목을 가르쳤고 충 (忠)을 통해 나라에 충성케 하고 신(信)을 통해 사람 사이의 믿음을 존중토록 했다.예(禮)를 통해 예절을 지키도록 했고 의(義)를 통해 인간관계에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염(廉)을 통 해 청렴과 검소함을 치(恥)를 통해 부끄러운 생각이나 행동을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이것을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설이나 고사를 그림으로 풀어서 아름다운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중 국 에 는 민 화 문 자 의 하나인 혁필 이 있다. 혁 필을 비백서 ( 飛 白 書 ) 라 한다. 가죽에 안료를 묻혀 서 그리는 방식은 근대 에 와서 이 루어진 일이 고, 그전에는 대나무나 버 드나무를 붓 처럼 부드럽 게 다듬어 그림을 그렸 다. 현재 활 동 작 가 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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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조각이 가죽보다 잘 그려지기에 가죽보다는 중절모의 -천 조각을 더 선호한다. 붓 이 외의 재료를 갖고 그림을 그리는 전통이 화단의 한편에서 줄곧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혁필화는 처음에 문자도처럼 먹과 더불어 사용되거나 먼저 그림의 내용을 그린 후 나 중에 글씨모양의 빈 공간에 먹을 입히는 필법으로 그려오다가 차츰 수성칼라 잉크로 발전 변모해 온 것이다.

혁필의 형태에는 글씨 중심의 그림과 장식 중심의 글씨 두 가지로 분류된다. 서예를 배웠거나 글씨에 자신 있는 사람은 대나무, 꽃, 나비, 학, 집과 같은 그림이 먼저였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록은 확실치 않으나 1600년 조선조 중기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비자가 원하는 성명, 당호, 고사성어, 가훈, 경전 등에 주로 작업되어 왔 다.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필히 기억해 둘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이 필법이 일본에 전해져 하나모지라는 단어로 유행되어 꽃그림이나 꽃글자로 발전해 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북경 등 뒷골목이나 천안문 근처에서 우리와 유사한 혁필화가 간헐적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민화문자의 하나인 혁 필화를 개량 발전하여 캘리그래피에 접목한다면 상당한 성공가능성이 있다.

문자도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자가 갖 고 있는 주술적 힘 때문이다. 문자가 의미하는 대로 소망이 이루어지고 문자가 바로 그 대상 자체라는 믿음, 그것이 주술이다.

문자도는 한자에 대한 주술적인 믿음에서 출발했다. 복(福)자를 그린 문자도는 행복을 가져다 주고, 수(壽)자를 그린 문자도는 오래 살게 하며, 녹(祿)자를 그린 문자도는 출 세길을 연다는 믿음이다. 또한 효(孝)자를 그린 문자도는 효심을 불러 일으키고, 충(忠) 자를 그린 문자도는 충성심을 높이게 한다. 오늘날 가훈과 급훈을 각기 가정과 학교에 걸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의 풍습이다.

조선은 유교국가다. 어느 시대보다 철저한 유교국가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유교 이념을 백성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실현하려고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실제로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시기는 3백여 년이 지난 뒤였다. 민화도 유교의 영 향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유교문자도’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의 문자도가 탄생한 것이다. 문자도란 원래 행복, 출세, 장수를 내용으로 하는 복록수(福祿壽)의 길상 문자도(吉祥文字圖)가 주류를 이룬다. 문자도가 시작된 중국을 비롯하여 한자문화권인 일본, 베트남, 부탄, 티벳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독 조선에서만 부모에게 효도, 형제간의 우애, 나라에 충성, 사람간의 신뢰,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 절,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의리, 청렴한 생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등 유교

적 덕목을 담은‘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유교문자도가 유행했다.

왜 조선에서만 유교문자도가 유행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이 원리주의적이라고 할 만 큼 철저한 유교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념인 유교의 가치를 백성들에 알리려는 국가의 이념인 유교문자도의 탄생에 일조를 했다.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천 년 넘게 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종교이기 때문에 국교 를 유교로의 전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치자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국가 체제 를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여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가묘를 설치하게 하며, 유교 이념 에 맞게 법전을 정비했다. 백성들의 생활에까지 유교가치를 확산시키려는 작업의 대표 적인 예가 1431년 세종의 지시에 의해 출간한 [삼강행실도]이다.

조선후기에 서민 사회가 성장함에 따라 양반문화에 대한 서민들의 동경이 높아졌는데, 이러한 변화가 길상문자도보다 유교문자도를 선호하게 되는 또 다른 동력이 된 것이다.

유교문자도는 점차 픽토그램처럼 그림문자화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유교문자도 의 기호가 더 이상 특정계층의 지식에만 머물지 않고 전계층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유교문자도는 점점 간결해져 아예 대표적인 상징 하나 내지 두 개가 획으로 대체되었 다. 획 하나, 그것도 첫 획인 점만 이미지로 형상화한 문자도다.

왜 문자가 기호화되고 상징화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 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문자도에 담긴 이야기가 당시대의 보편적인 내용이 되었다. 감상자는 문자의 뜻 을 대변하는 기호화된 상징을 하나만 보더라도 바로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일우는 “새롭게 단장한 문자도는 그야말로 ‘행실도의 민중 판’으로써 조선시대 내내 백성들의 유교 교육용으로 간행도 행실도 시리즈를 대체하 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논한 바 있다.33)

둘째, 문자도가 서술적 측면보다 장식성에 치우치면서 문자도의 상징물이 다른 장식 문양처럼 단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까닭은 성 리학적 이데올로기가 퇴색하고 유학을 기반으로 하는 지배계층의 분화가 심화되는 시 대적 현상으로 이야기가 갖고 있는 교화적인 측면보다는 장식적 효과가 높은 이미지적 인 측면에 주력한 것이다.34)

33) 박일우, 「민화 <문자도>의 기호학적 해석」, 『한국프랑스학논집』 제30집(한국프랑스학회, 2000), pp. 93-98

34) 이경남, 「유교문자도의 사상체계와 변천과정에 대한 재검토」, 『양명학』제23호(한국양명학 회,200), pp.30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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