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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4. 근대의 캘리그래피

전히 다른 문제다.

사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공격을 하면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예술 중에 는 분명 감히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기 힘든 저급한 예술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 이 대중을 위해 생산되고, 대중적 방식으로 생산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저 급예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라는 기준은 필요치 않지만, 진지하게 예술로서 고민한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한다. 46) 그렇다. 캘리그래피는 상업적 예술이지만 예술인 것은 분명하다. 고민의 흔적 이 어떤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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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6] 캘리그래피의 활용예

제2절 현대의 캘리그래피 기법의 특성과 조형원리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 넓게는 일반적으로 활자에 의하지 않은 서체(書體), 좁게 는 서예를 의미한다. 기호나 상징을 기계 따위를 이용하여 나무나 돌에 새긴 경우는

‘레터링’이라고 부르지만, 캘리그래피의 본질은 레터링과 대조적으로 자와 컴퍼스 등 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캘리그래피는 우리나라와 중국, 그 리고 일본에서 회화와 서예가 거의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회화와 서예가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를 아름답게 쓰 려는 시도는 동양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래픽디자인은 시각적 언어를 정확히 전달하고 어필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 은 자연적인 시각자극을 원한다.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동양적 캘리그래 피인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많은 시각적 자극을 원하게 되어 문자만으로 이루어진 캘 리그래피에 감성이 곁들어진 민화문자의 발전 형태인 캘리그래피가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한번 사용되고 버려지는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캘리그래피가 아닌 소장하고 감상 하고픈 지속적이고 예술적인 캘리그래피도 일각에서는 시도 되고 있다.

[그림 4-7] 캘리그래피의 인터넷배너광고예

출처:NS홈쇼핑 인터넷배너창

처음부터 문학적인 작품의 목적으로 사용한 필적(字體, uncial)과 문서와 편지에 사용 한 필적(흘림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몇 개의 뚜렷한 양 식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데, 펜을 쥐는 방법의 차이, 그리고 관습의 차 이에서 개인적인 차이도 생긴다. 이것이 서양에서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목적에 맞게 특별한 필적을 사용한 중세이며,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특징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

런데 르네상스 이후 회화 표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캘리그래피 가 20세기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기호 및 운동 표현으로서의 그 역동적이고 암묵적인 표현력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적 캘리그래피는 한글을 주로 사용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흔히 한글 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때 그 과 학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치밀한 것이 아름답지만 한글의 경 우 그러한 시각만으로 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조금은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과학적 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1.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답다’는 그 시대 문화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며

‘선(善)하다’와 같거나 비슷한 의미이다. 아울러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칭찬할 만 하다’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곧 ‘아름답다’는 공간을 초월하여 느끼는 공통감이다.

2. 윤리적 아름다움이 발현된 것이 덕(arete:탁월성, 윤리성)이며, 자기의 역할에 충실 한 상태, 곧 가장 자기다울 때를 말한다. 인간의 덕은 ‘품성의 탁월성. 즉 윤리성)’이 고 사물의 덕은 ‘기능의 탁월성’이다.

3. 참된 예술품은 참된 이치에 따라 제작된 산물이며, 참된 이치란 자연과 기술, 이론 과 실제, 지식과 기술, 경험과 학문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상 태이다.

세종대왕의 예술가로서의 태도가 훈민정음에 잘 드러나 있다. 첫째, 세종대왕이 훈민 정음을 창제한 가장 큰 이유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라는 대목에서 그의 백성을 향한 덕을 알 수 있다. 둘째, 훈민정음 꼬리글에서도 나오듯이 한글은 배우기 쉬우며 그 기능 또한 천지자연의 소리를 적을 수 있는 확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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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진 열린 구조의 글자로서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치는 오래도록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셋째, 한글은 우주의 이치에 따라, 그 글자는 소리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은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에 의존하거나 자연을 창조적으로 모방했을 뿐 아 니라 지적인 덕이 충만한 높은 감성을 느낄 수 있다. 한글은 안으로의 아름다움과 밖 으로의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고, 만든 사람의 정신적인 아름다움 또한 전달해주는 문자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정신은 캘리그래피의 특징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다. 아름다 운 한글을 캘리그래피로 표현한다면 더욱 우리글을 빛나게 해주는 가치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우리 한글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캘리그래피이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든 한글에 캘리그라퍼의 감성을 실은 캘리그 래피는 환상의 조합인 것이다.

흔히 잘된 캘리그래피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서법에 충실했는가, 창의적인가에 따라 말해야 할까? 그것은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객관 적인 증거 즉, 가독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가독성은 눈에 잘 띄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49)

가독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판독성(legibility)과 가독성(readability)을 포함한 말이 다. 판독성은 어떤 글자가 그 글자 고유의 모습으로 순간적으로 정확히 보이느냐를 말 하는 것으로 찰나에 스쳐가도 그 글씨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면 판독성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활자는 판독성을 측정할 수 있는 중요 대상이다.

한편 가독성은 시각 자극을 통해 들어온 글자들의 의미를 알려고 하는 행위가 일어나 는 과정 전반에 걸친 것으로, 주어진 시간에 많은 양의 글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면 그 글은 가독성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독성이 좋은 글자’라고 하지 않고

‘가독성이 좋은 글’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독성은 읽는 이의 익숙함과 비례 한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아야 하며 쉽게 읽히며 편안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소비자들 은 자신의 환경이 아무리 빨리 바뀌어도 그들 스스로는 여전히 보수적이며 자신의 취 향에 맞는 서체에 익숙해 있다.

가독성은 글자꼴만큼이나 활자의 배열 등 물리적, 심리적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 에 쉽게 단정할 수 없으며 판독성과 가독성을 혼동할 수 있으나 실제 이 둘은 전혀 다 른 차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독성과 가독성이 좋다고 할 때 충족

49) 이용제,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 세미콜론, 2009

[그림 4-8] 캘리그래피 포장디자인 활용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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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조건 역시 각각 다르다. 넓은 의미에서 ‘잘 읽히는’가독성을 논할 때 이 둘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잘된 캘리그래피란 무엇인가? 내가 제작한 캘리그래피가 의뢰인의 생각과 부합되지 못 한다면 아무리 완벽하게 작업했다 하더라도 그간의 노력은 무의미하다 할 수 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지속가능하게 작업되어야 하고 그러길 바래야 한다.

로버트 L.피터는 “디자인은 문화를 창조한다. 문화는 가치관을 형성한다. 가치관은 미 래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우리 자녀들이 살게 될 세계에 책임이 있다.”고 논 한바 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 았다. 우리 직업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는 우리 모두한테 달려 있다.

그 선택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명예를 존중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 이다. 의사, 법률가, 기술자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럴 때 사회는 디자인의 힘, 희망 찬 미래에 디자이너들이 맡게 될 특별한 역할을 진실로 알아보아 줄 것이다.

우리가 가진 힘과, 그 힘에 따라오는 책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휘할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이전에 인류는 10만 세대쯤 살아왔을 것이고, 앞으로 적어도 그보다는 더 긴 세 대가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첫 6천년은 문명의 집단 유년기였다. 거기서부터 지 금까지가 하나의 문명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인류진화 이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한테 달려있다. 물건과 생각을 먼 거리, 먼 미래로 수송할 전문가인 상 품 디자이너와 광고 디자이너한테.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기발할뿐만 아니라 지혜로 워야 한다. 근사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인류의 미래에 부합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 인류가 한참 잊혀진 과거가 되어 버린 먼 미래의 어느 날 몇 만년 뒤 먼 미래의 인류가 인류문명의 청소년기인 지금을 돌아볼 즈음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것을 밑거름 삼아 창조적 에너지를 사용한 방식을 보고 감동할 것이다. 우리 선대가 남겨주신 귀중 한 유산인 민화문자를 아껴 연구하고 더 나아가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다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캘리그래피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50)

50) 데이비드 B.버먼, 「디자이너를 위한 디자인 혁명」, 시그마북스, 2010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