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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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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파

래리의 가정교육과 가족만이 래리와 구글을 움직이는 원동 력이 아니었다. 세르게이도 마찬가지였다. 세르게이가 공산주 의 러시아에 살면서 어렸을 때 겪은 일과 부모가 겪은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에 사는 동안 세르게이의 가족은 국가 주도 반유대주의, 정치적 검열, 전체주의 때문에 고통 을 받았다.

세르게이는 10대 때 잠깐 러시아에 살았고 그곳에서 그가 겪은 억압적인 정부의 태도 때문에 그의 가족은 촉각을 곤두세워야했다. 정부의 태도 때문에 세르게이는 몹시 화를 내며 모스크바의 경찰차에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가 이런 심각한 생활을 벗어나려고 노력할 때 세르게이는 가장 강렬한 말을 전했다.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줘서 고마워 요”라고 말했다.

2010년 봄, 세르게이는 그의 가족이 겪은 난민의 삶을 뉴욕 타임즈 기자에게 전 했다. “그 경험은 분명히 나의 견해와 우리 회사의 견해를 형성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두서없이 러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다. 구글은 중국과 문제가 있었다.

중국에는 만리장성이라는 군사 방어의 경이로움과 인기 있는 관광지도 있지만 중국의 대 방화벽이라 알려진 것도 있다. 대 방화벽이 하는 일은 중국 정부는 무료 티베트에 대한 정보 검색, 정치적 시위와 같은 온라인 자료의 접근을 검열하고 제 한한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인권 침해 문제와 그 밖의 다른 정보들을 중국 시민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2002년 중국어로 구글 검색이 가능해진 이래로 중국의 검열은 피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점점 더 많은 자료를 차단하면서, 때때로 구글 홈페이지 전체가

차단되었다. 그것은 큰 사업상의 문제였다. 2005년까지 중국은 1억 명 이상의 인 터넷 사용자들의 본거지였다. 이제 구글은 허점이 많은 사이트가 됐다. 사용자가 로그인을 할 때 마다 사이트가 다운되어 구글에 다시 로그인을 하고 싶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들은 완전히 중국을 떠나거나 중국 정 부와 타협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선택이 엄청난 딜레마를 낳 았다. 구글 강령은 어떻게 하고? 구글 임무는 어떻게 하고?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사람들이 제한적으로 구글에 접속할 바에 아예 접속을 완전히 차단하는 게 나을까?

그리고 구글은 여전히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시장을 포 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2006년 구글은 많은 논의를 거쳐 물리적으로 중국에 위치 하는 새로운 중국어 검색을 시작했다.

구글은 중국 정부와 협의해 민주주의, 인권, 대만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검색을 검열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정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구글은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용 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글은 또한 사용자들이 검색한 정보가 차단되었을 때 사용자에게 통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글은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악하지 말라’는 강령 이 있던 회사가 어떻게 중국 정부와 협력하고 이런 주제들을 검열할 수 있는가?

그 논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2010년 대규모 사이버 공격이 있었다. 구글의 전문가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냈다. 구글은 이번 공 격이 중국 내부에서 발생했으며 수십 명의 중국 인권 운동가들이 작성한 지메일 계정이 해킹되었다고 믿고 있다.

구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응하여 세르게이와 래리는 중국 본토를 기반으로 한 검색엔진을 차단시 켰다. 대신 사용자들은 구글의 홍콩에 기반을 둔 사이트로 우회하여 접속했다. 세 르게이는 이 방안이 사람들에게 검열이나 필터링 되지 않은 검색 결과를 받아 볼

효과가 있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구글 에 검색하면 결과가 제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구글이 아닌 중국에 의해 차단되었다. 래리와 세르게이에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장벽을 부수다

당신이 운동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단 지,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그 마을, 아니 그 나라에 처음 왔고 그 나라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아무도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페인 출신의 한 젊 은 축구선수가 북아일랜드의 포르타다운(Portadown)에 있는 자신의 새 구장에서 마주한 상황이 바로 이 상황이었다.

축구 연습이 한창인 운동장에서 포르타다운 청소년 축구 클럽 코치는 알베르토 발 데(Alberto Balde)가 운동장 옆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경기 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알베르토는 코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코치는 한 단어의 스페인어만 알고 있었다. 올라(안녕).

그럼 이제 구글 번역기를 꺼내보자. 코치는 휴대전화를 꺼내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 기 시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대화가 가능했다. 알베르토는 가능한 많은 기술을 배 우고 훈련하며 팀에 합류했다. 구글 번역기는 모든 지시사항을 알베르토의 어머니 에게 전달했다. 지역 주민들이 그가 넣은 골의 수에 대해 들었을 때, 알베르토는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곧 영국의 프로 축구팀에서 파견된 임시 스카우트라는 새로운 구경꾼들이 있었다.

“작은 소통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놀라워요.” 글렌 트레이너(Glen Traynor) 코치가 말했다. “모두가 알베르토를 사랑하죠. 그는 언제나 포르타다운 소년으로 기억 될 거예요. 그는 이제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트레이너는 구글이 제작한 동영상에서 알베르토와 구글 번역기에 대해 이렇게 말 했다. 그 비디오는 130만 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고 영국 스포 츠 전문 채널 스카이스포츠에서 비디오가 방영되기도 했다.

알베르토는 2017년 알베르토는 북 섬에 있는 작은 마을의 알베트로 팀이 원할 때 마다 그를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조건하에 2018~2019시즌에 맞춰 프리미어리 그 미들즈브러 축구클럽에 입단하기로 합의했다.

구글의 임무는 세계의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정보는 많은 다른 언어로 나온다.

외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의사소통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벽 이었다.

구글은 이 문제를 꼭 해결하고 싶었다. 프로그래밍 시간, 어휘, 정의, 규칙, 예외, 그리고 언어를 배우고 말하고 번역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지루한 이야기들과 관련 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구글 프로그래머들은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06 년에는 무료 온라인 번역 서비스인 구글 번역기가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첫 번째 번역은 영어와 아랍어 번역이었다.

구글 번역기의 ‘hello how are you’ 아랍 번역 스크린 샷

10년 전에는 5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달 구글 번역기를 사용했다. 이해를 돕자 면, 미국에는 약 3억 2천 6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구글이 매일 얼마나 많은 단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가? 1400억 정도의 단어를 번역하 고 있다.

오늘날 구글 번역기는 당신의 폰으로 쉽게 다운로드 될 수 있다. 당신은 타자를 치 거나 말하거나 사진의 텍스트를 찍어서 번역 할 수 있고, 전화 카메라를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번역본을 볼 수도 있다.

실시간 이슈는 구글 번역 패턴에서 많이 나타난다. 프린스가 죽은 지 1주일 후에 ‘퍼플 레인’의 번역은 놀랍게도 2만 5천 퍼센트나 증가했다.

구글은 구글 번역 어플을 갖는 것이 당신의 주머니에 통역사를 두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이젠 당신이 언어를 모르는 나라에서 축구팀에 가입을 하고 싶을 때 언 어는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는다.

구글 번역기 로고(구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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