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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결권 행사와 기업의 가치

제 2 장

1. 의결권 행사와 기업의 가치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는 기업 소유자인 주주와 경영진 간의 주인-대리인 문 제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로 간주된다. 특히 기관투자자 중 연기금은 자산운용의 중요한 목적이 장기적인 수익 증진이므로 의결권 행사를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할 유인이 크다. 그런데 기관투자자가 의결권을 행사하여 기업의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서는 기업에 대한 상시적인 감시를 통해서 기업과 기관투자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 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경영 감시 인력의 충원이 필요하다.

기업의 주주와 경영진 간의 주인-대리인 문제는 미국 기업 지배구조상의 고전적 인 문제이다. 한국과 같이 최고경영자가 피라미드형 지배구조의 정점에서 작은 지분 을 가지고 기업의 경영을 총괄하는 기업 지배구조하에서는 지배 소주주와 일반 소

액 주주 간에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기업의 일반 소액 주주들은 기업 경영 감시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경영진을 감시할 수 없고, 감시가 가능한 경우에도 지분이 분산되어 있어서 지분을 집적하기 위해서는 의사 조정과정을 거쳐 야 하기 때문에 경영진을 견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영진은 기업의 가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발생한다.

기관투자자는 이러한 일반 소액 주주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어서, 의결권 행사 를 통해서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주주이다. 우선 기관투자자는 대규모 주식 보유 가 가능하기 때문에 의사 조정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지배 소주주를 견제할 수 있 는 지분을 집적할 수 있다. 그리고 기관투자자는 주식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지속 적으로 기업의 경영을 관찰해야 하므로 의결권 행사에 필요한 기업 감시비용을 절 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관투자자는 투자자들의 자산 가치를 증진시키는 서비스 를 제공하는 기업이므로, 투자 기업의 가치 하락을 저지할 유인이 존재한다.12)

대표적인 기관투자자로는 증권사(mutual fund), 연기금(pension fund), 보험사 등 자 산 투자를 통해 가입자의 자산을 증식하는 금융기관이 있으며, 은행의 주식 투자가 허용되는 경우 기업의 주거래 은행 역시 기관투자자로 분류된다. 미국의 경우 2000 년대 이후 헤지펀드와 같은 사모펀드가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기 관투자자로 대두되고 있다(Klein and Zur, 2009).

이들 기관 중 연기금은 특히 의결권 개입을 통한 기업 가치 증진을 추구할 유인이 12)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외에도 주주와 경영진 사이의 주인-대리인 문제를 치유하는 해법

은 존재한다. 우선 스톡옵션과 같이 경영진에게 기업 가치가 증진된 성과를 급여의 일부로 제 공하여 경영진이 기업 가치를 제고할 유인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주주의 이해를 대표하는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가 주주의 지분을 대리해서 기업을 인수하고 경영진 개편 등 구조조정을 수행하여 다시 매각하는 적대적 인수 · 합병을 시행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의 주가는 경영진의 노력 이외의 변수의 영향에 민감하게 변화하므로, 경영진의 급여 중 일부는 고정급여로 제공 하여 경영진의 위험을 덜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Salanie', 1997). 또한 인수 · 합병의 경우 적 대적 인수 · 합병은 경영진의 전면 교체를 수반하는 극단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에 기존의 경영 진이 경영 방식을 개선하여 기업 가치를 제고할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약점이 있다(Pound, 1993). 실제로 기존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도입되면 인수 · 합병은 점차 우호적인 성 격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적대적 인수 · 합병을 통한 경영진 견제 는 1980년대에 급격하게 확대되었다가, 스톡옵션이 확대되고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에 대 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보다 우호적인 형태로 전환되었다(Holmstrom and Kaplan, 2001).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증권사나 보험사는 가입자들이 상시적으로 투자 자금을 회수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런데 이들이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업의 주식을 일정 기간 보유해야 하 는데, 이는 유동성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증권사나 보험사의 경우 주식 을 보유한 기업의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의결권을 활용하여 기업 가치를 제고하기보다는 주식을 매도하여 유동성을 확보하는 Wall Street Rule을 선호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연기금은 투자자들의 자산을 장기적으로 관리하여 은퇴 이후의 소득을 제공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유동성 확보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면 장기 적인 수익에 대한 수요는 강하다. 그래서 특정 기업의 주식을 장기적으로 보유하고, 의결권에 개입하여 기업 가치를 제고할 유인이 여타 기관투자자보다 강한 것으로 인정된다.13)

실제로 미국의 예를 보면 기관투자자가 주주총회에 독자적인 의안을 상정하여 의 결권을 행사하는 형태의 경영진 견제 행위는 공공연금이 거의 독점하고 있으며, 노 동조합기금이 일부 참여하고 있다. 미국에서 1987~1994년간 주주가 독자적으로 상 정한 의안 2,042건 중 기관투자자가 상정한 건은 463건으로 22.7%이며,14) 이들 중 연기금이 상정한 건이 344건에 달한다. 특히 연기금은 기업의 인수합병 방어 시도 를 억제하거나 이사회의 독립성을 제고하는 등 기업 경영진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 는 의안을 주로 상정하였다(Gillan and Starks, 2007).

그런데 주총에서의 의안 상정 및 투표 행위는 기관투자자의 경영 개입 형태 중 경 영진과 기관투자자의 의견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형태이다. 기관투자자들 은 의안 상정 이전에 경영진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비공개적인 대화를 통해서 의견 을 조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의안이 상정된 이후에도 경영진과의 의견 조율을

13) 주거래 은행은 주거래 기업 대출이 많아지면 부실 발생 시 예금인출사태(Bank run)에 직면 할 부담이 커진다. 그러므로 시장에 주거래 기업의 채산성에 대해 부정적인 신호를 제공하는 의결권 행사에는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다.

14) 10.4%는 투자자들이 연합해서 상정하였으며, 66.9%는 개인이 상정한 경우이다(Gillan and Starks, 2000).

시도하여 주총에 회부되기 전에 상정된 의안을 철회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는 다 음의 실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British Telecom 사내 연금은 주식 보유 기업에 대한 의결권 개입을 위해 설 립한 Hermes UK Focus Fund(HUKFF)를 설립하였다. 이 기금(HUKFF)은 1998∼

2004년간 30개 기업의 경영에 간섭하였는데, 경영진과 평균 9.7회에 걸쳐서 교신 및 대면 접촉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였다. 반면 실제로 주총에서 독자적인 의안을 상 정한 경우는 1개 사, 경영진의 의사에 반대를 표시하기 위해서 여타 투자자들의 투 표를 규합한 경우는 2개 사에 그쳤다(Becht et al., 2008). 그리고 미국 대학교직원연금 인 TIAA-CREF(Teachers Insurance Annuity Association-College Retirement Equities Fund)는 1992∼1996년간 45개 기업의 주총에 독자적인 안건을 상정하였지만, 이들 중 71%인 31개 기업과는 주총 이전에 개별 접촉을 통해서 합의를 도출하였다. 특히 연기금 이외의 기관투자자들은 이러한 비공개적인 경영진과의 접촉을 통한 합의 도 출을 선호한다(Gillan and Starks, 2007).

그러므로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는 주총에서의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기업의 경영진과 지속적인 비공개 접촉이 선행되는 일련의 협의과정의 최종 단계이다. 이러 한 비공개 접촉과정은 기관투자자가 주주와 경영진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 고 기업의 암묵적인 정보를 파악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기관투자 자가 의결권 행사를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의결권 행사 이전에 기업 경영진과의 지속적 접촉을 수행하여 기업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 고, 이를 잘 활용하여야 한다.

특히 기업 경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적자본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영 국의 예를 보면 적극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들은 개별 기금운용인력이 동시에 1∼2건의 의결권 행사 건을 관할하도록 하는 반면, 시장을 추종하는 소극적 자산운용사들은 개별 기금운용인력이 동시에 10여 건의 의결권 행사 건을 관할하도 록 할당한다(Hendry et al., 2007). 이는 적극적 운용사들은 가치 하락이 우려되는 기 업의 주식을 자유롭게 매도할 수 있는 반면, 소극적 운용사들은 개별 기업 주식을 일정 정도 이상 보유해야 시장을 추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식 매도보다는

장기 보유를 선호하는 연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의 경우, 동시에 다수의 기업과 효 과적으로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제1장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기존의 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의 효과에 대한 실증 연구는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가 기업의 가치를 제고한다는 일관된 증거를 제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지만15) 인적자본의 양과 질이 부족하며,16) 그나마 이들 인적자본도 의결권 행사보다는 자산운용에 우선 투입되고 있는 현상도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기관투자자들이 자산 운용에 투입하는 재원(자산의 0.5~1%)은 의결권 행사에 투입하는 재원(자산의 0.005%) 의 100배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Black, 1997).

인적자본의 중요성은 2000년 이후 새로운 의결권 행사 기관투자자로 대두된 헤지 펀드 및 사모펀드의 성과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연기금과는 달리 사모펀드의 의결권 개입은 기업 가치를 증진하는 뚜렷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의 경우 2003∼2005년간 헤지펀드 혹은 사모펀드가 주식 보유 기업의 경영진 의사에 반하 는 의안을 주총에 제출하면 해당 기업의 주가는 5.1∼10.2% 상승하였으며, 1년 뒤 에는 11.4~17.8% 더 상승하는 효과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사모펀드들은 의결 권 행사를 협상 조건으로 활용하여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기업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기업의 성과를 제고하는 것으로 파악된다(Klein and Zur, 2009). 이러한 사모펀드의 경영 개입 성과는 유럽 벤처캐피털의 경우에도 확인되었는데, 특히 벤처 캐피털 투자자들 중 주식 보유 기업의 업종에서 경력을 쌓은 투자자가 있을 경우 성 과가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Bottazzi et al., 2008).

그런데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급인력을 확충하고, 이들의 역

15) 그 외의 요인으로는 ① 기관투자자들의 경영 간섭은 주총에서의 의결권 행사보다는 투자 기 업 경영진과의 비공식적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 ② 기관투자자들의 경영 간섭이 독자 적 의안 설정이나 이사회 참여와 같은 적극적 간섭보다는 소극적인 찬반투표에 그치고 있는 점, ③ 자산운용에 비해서 의결권 행사에 대한 투자가 적은 점, ④ 대부분의 의결권 개입은 공 공연금에 의해서 수행되는데 공공연금은 비경제적인 동기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점이 거론 된다. 실증적 효과 부재 및 그 원인에 대한 기존 연구 결과는 Black(1997) 참조.

16) 영국의 경우에 대해서는 HM Treasury(2004), Black and Coffee Jr.(1994), 미국의 경우에 대 해서는 Coffee Jr.(199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