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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물질로의 DNA 발견 및 구조규명에 대한 과학사 및 과학사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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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전물질로의 DNA 발견 및 구조규명에 대한 과학사

(가) 멘델의 유전법칙(1822 - 1900)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사로서 수도원의 농장

•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와 맬서스의 ‘인구론’이라는 타학문 과의 연계를 통해 진화론을 주장한 점.

가설 설정과 예측

• 핀치새가 다양한 부리를 갖게 된 원인을 추측하는 과정에서 먹 이에 따른 적응이라는 가설로 다양한 변종들이 출현하게 되었 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자연선택설을 주장한 점.

과학 지식의 역사성

• 자연신학으로 인해 진화론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 기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한 점.

창의성 • 다윈의 진화론이 ‘지질학 원리’와 ‘인구론’의 영향을 받은 점.

과학과 문제 제기

• 진화론 이후에 유전적 변이의 출현원리와 성 선택 그리고 감정 을 진화적 관점에서 해석해낸 점.

자료의 분석과 해석

• 다윈이 핀치새의 부리라는 자연 현상을 먹이에 따른 분화로 분 석하여 진화에 대해 생각해낸 점.

과학 연구 과정 에서의 협력과

공동 연구

• 다윈보다 빨리 진화에 대한 논문을 쓴 월러스가 다윈과 함께 공 동저자의 형태로 논문을 발표한 점.

과학적 이론과 법칙

• 다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통해 이론은 현상을 설명하 는 것이며 법칙은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점.

과학적 지식에서 사회·문화의

영향

•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적으로 잘못 해석되고 적용되어 강자의 논리 를 정당화하고 우생학을 통해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때 사용된 점.

에서 9년간의 완두콩 교잡실험을 통한 자료로 유전법칙을 설명하였다. 이 연구에서 멘 델은 완두콩의 형질이 잡종으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두 형질 중 첫 번째 자손 세대에서 한쪽 부모의 형질만 발현이 되는데 이때 발현되는 형질을 우성이라 하였고 다시 이 첫 번째 자손을 다시 교배시키면 두 번째 자손세대에서 첫 번째 자손세대에서 발현되지 않았던 형질을 갖는 개체가 나타나는데 이를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이 실 험결과에 의아해 하였다. 당시 유전현상은 양친의 형질을 물감을 섞듯 혼합되는 ‘혼 합설’이었는데 이런 방식은 첫 번째 자손에서 어버이의 형질이 나타나지 않다가 두 번째 자손에서 갑자기 발현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손에서 첫 번째 자손에서 보이지 않던 형질이 발현되는 개체의 비율이 전체의 1/4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여 멘델은 부모의 형질이 후대에서 섞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 었다. 멘델은 이 실험결과가 보여주는 유전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자 완두의 키뿐만 아 니라 떡잎의 색, 콩깍지의 색, 씨의 형태라는 다른 여러 대립형질을 이용하여 동일한 실험을 수행한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형질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결과가 나타남을 관 찰하여 ‘유전 인자’라는 것이 쌍을 이루며 이 ‘유전인자’는 다음세대로 전달될 때 대립형질이 서로 결합되지 않고 따로 분리되어 양친으로부터 각각 하나씩을 받게 된다 는 것을 알아내었다. 멘델은 자신의 실험을 1865년 뷔론 자연사 학회에서 ‘식물잡종 에 대한실험'(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 1865)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고 당대 저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렸으나 아무도 이 발표에 관심을 갖지 않았 고 이해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이 학자들 중에 포함된 다윈은 당시 진화론으로 유명한 학자였지만 진화에서 중요 한 형질의 다음세대로의 유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는 판게네시스 (pangenesis)이론으로 체세포에 있는 제뮬(gemmule)이 생식세포에 모여 다음세대로 전 달된다는 어떻게 보면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유전을 설명하였다. 안타깝게도 다윈은 멘델의 논문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방치하였으며 멘델의 업적은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35년간 묻혀있게 된다. 멘델의 연구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점은 사람들이 그를 과학 자가 아닌 신부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명한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있었 다. 그리고 그 당시 과학계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때라서 대다수의 과학자 들이 진화론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란 점도 멘델의 실험은 주목받지 못한 이유 중 하 나였다. 게다가 그의 연구는 당시 유전현상이 ‘혼합설’로 이해되던 시대에 ‘입자 설’의 개념을 도입했기에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으며 생물학 연구에 수학적 통

계의 기법을 사용한 그의 논문은 당시 생물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쑨이린, 2009).

멘델의 업적은 그가 죽고 난 후에 그 진가를 평가받게 된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고 35년이 지난 후 식물학자인 휴고 드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는 패랭이꽃의 털이 유전되는 규칙성에 대해 연구하다 우연히 멘델의 논문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 내용을 ‘독일 식물 학회보’에 ‘교배의 분리 규칙에 관하여’(Das Spaltungsgestetz der Bastarde, 1900)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 업적과 합께 멘델의 실험의 재발견을 알렸다. 이와 같은 시대에 카를 코렌스(Carl E. Correns, 1864-1933)역시 멘델의 법칙 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옥수수와 완두콩을 이용한 독자적인 식물교배를 통해 유전의 법칙에 대해 알아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멘델이 자신과 같은 실험을 통해 유전의 법 칙을 알아낸 것을 알게 되었고 1900년 4월 21일 드브리스의 논문을 접한 후 ‘잡종교 배 행위에 관한 멘델의 법칙’(G. Mendel's Regel über das Verhalten der Nachkommenschaft der Rassenbastarde, 1900)을 발표하였다. 멘델의 법칙은 또한 체르 마르크(Gustav Tschermak von Seysenegg, 1871-1962)에 의해서도 발견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완두콩 교배실험에서 발견한 규칙이 과거 멘델이 말한 것임을 깨닫고 드브리스 와 코렌스의 논문이 발표된 것을 접한 후 ‘완두의 인공교배’(Über künstsliche Kreuzung bei Pisum sativum, 1900)라는 논문을 드브리스와 코렌스에게 보내 자신의 발견을 알리게 된다. 이들 세 명의 과학자들은 각자 독립적인 연구를 통해 유전의 법 칙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들은 유전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멘델의 연구를 재 발견 했다고 하며 자신들의 공적을 멘델에게 돌렸다(쑨이린, 2009; 오진곤, 1996; 장 혜경, 2006). 이 시대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15]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865 Gregor Johann

Mendel ‘식물잡종에 대한 실험'(1865)을 통해 유전법칙을 주장함.

1900 Hugo de Vries ‘교배의 분리 규칙에 관하여’(1900)를 통해 멘델의 유전 법칙을 재발견함.

1900 Carl E.

Correns

‘잡종교배 행위에 관한 멘델의 법칙’(1900)을 통해 멘델 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함.

1900

Gustav

Tschermak von Seysenegg

‘완두의 인공교배’(1900)를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 견함.

[표 Ⅳ-15]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표될 당시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나) 멘델 이후의 유전학(1909 - 1941)

1900년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유전학이 생물학의 한 분야 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베이트슨(William Bateson, 1861-1926)은 1900년 5월 왕립 원예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멘델의 법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멘델의 유전법칙 을 과학계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그의 저서 ‘멘델의 유전 원리’(Mendel's principles of heredity, 1909)를 통해 유전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설명하였다. 지금 까지 쓰이는 많은 유전학의 전문용어들은 이 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특히 이 책에 서 그는 유전질환중 하나인 알캅톤뇨증의 증상을 유전자와 효소와의 관계에서 찾아 유 전자와 유전정보의 발현의 관계에 대해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과학계 에서 유전자와 효소라는 용어가 이제 막 등장한 시점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30년이 지난 1941년이 되어서야 조지 비들(George W.Beadle, 1903-1989) 과 에드워드 테이텀(Edward L.Tatum, 1909-1975)의 붉은빵곰팡이 실험을 통해 밝혀지 게 된다. 이들은 이 실험은 ‘빵곰팡이 속에서의 생화학 반응의 유전학적 조 절’(Genetic Control of Biochemical Reactions in Neurospora, 1941)이라는 논문을 통해 유전자가 효소의 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밝혀내었고 1유전자 1효 소설의 개념 정립의 기반이 된다. 멘델의 법칙이 아직 학계에 재발견되지 않았을 19세 기 후반 세포학의 발달은 세포에 있어 핵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과학자들은 세포의 분열에 있어 염색체의 분리현상을 통해 체세포분열과 감수분열을 알고 있었으며 1900 년 멘델의 법칙이 재발견된 후 이러한 핵의 분열과 멘델의 법칙이 말하는 유전현상과 의 유사성을 인식하여 유전자란 것이 염색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품게 되 었다. 베이트슨은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을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모건 (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초파리 실험을 통해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을 것이 란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모건은 멘델의 법칙을 접하고 나서 이 법칙이 완두콩뿐만 아닌 동물에게서도 적용이 되는지와 아직 실험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추측단계일 뿐인 유전인자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다. 모건은 1908년에 엑스레이 광선을 통한 초 파리의 돌연변이의 유발을 이용하여 연구를 시작 했는데 1910년 5월 암실에 방치한 초 파리들 중 기존의 붉은 눈이 아닌 흰 눈 초파리가 탄생하게 된다. 흰 눈의 초파리와 붉은 눈을 가진 초파리의 교배실험에서 처음 1세대 자손들이 모두 붉은 눈 이였다는 것 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부합하였다. 하지만 1세대 자손들을 다시 교배하여 얻어 진 2세대 자손들에서는 멘델의 이론과 달리 붉은 눈 초파리와 흰 눈 초파리가 3:1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흰 눈의 암컷은 한 마리도 없는 결과에 모건은 흰 눈이라는 형

질이 성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를 추측하게 된다. 이러한 모건의 생각은 성을 결정짓는 유전자와 눈의 색을 결정짓는 유전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 는 ‘초파리의 열성유전’(Sex-limited inheritance in Drosophila, 1910)이라는 제목 의 논문으로 발표되어 흰 눈이라는 형질이 성별에 따라 달리 발현됨을 발표하였다. 그 는 1911년에 1910년 발표한 논문에서 열성유전이 X염색체상에 존재함을 말하며 흰 눈 초파리의 유전 현상을 반성유전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본격적으로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모건과 그와 같이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멘델 유전의 메 커니즘’(The Mechanism of Mendelian Heredity, 1915)과 ‘유전자 이론’(The Theory of the Gene, 1926)을 통해 염색체의 역할과 유전자에 의한 형질의 유전을 정립하였다 (쑨이린, 2009; 정혜경, 2006). 이 시대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16]

과 같이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909 William Bateson

‘멘델의 유전 원리’(1909)를 통해 유전학의 기틀을 마련 함.

1910 Thomas Hunt Morgan

‘초파리의 열성유전’(1910)을 통해 유전자가 염색체 위 에 있음을 밝힘.

1941

George W.Beadle &

Edward L.Tatum

‘빵곰팡이 속에서의 생화학 반응의 유전학적 조 절’(1941)을 통해 1유전자 1효소설의 개념을 정립함.

[표 Ⅳ-16]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업적

(다) 유전물질로의 DNA(1869 - 1952)

멘델의 법칙이 재발견되고 유전학이 정립됨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는 유전물질이 대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실 DNA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졌었다.

미셰르(Johann F. Miescher, 1844-1895)는 백혈구의 세포핵을 화학적으로 분석하기위 해 병원에서 쓰고 버려진 붕대에서 얻어진 고름으로부터 백혈구를 채취하였고 분석 결 과 핵 속에 산성을 띠는 물질을 발견하여 이를 핵 안의 물질이란 뜻의 뉴클레인 (nuclein)이라 명명하였다(Ueber die chemische Untersuchung von Eiterzellen, 1869). 하지만 이것이 유전정보를 담은 기본입자임이 밝혀지기 까진 80년이란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1902년 영국의 의사인 개로드(Archobald Garrod, 1857-1936)는 알캅톤

뇨증을 연구하는 도중 이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 대부분이 근친혼에 의한 자식 들임을 발견하고 이를 유전질환으로 보았다. 그는 호모젠티스산 산화효소의 결핍에 의 한 이 질환을 통해 특정 효소의 발현에 유전적 요인이 작용한다고 보았고 이는 유전자 와 효소와의 관계에 있어 유전자의 발현에 대한 연관성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개로 드의 이러한 주장(The Incidence of Alkaptonuria: a Study in Chemical Individuality, 1902)은 생화학적 분야의 연구 성과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30년 동안 유전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 지게 된다. 1920년 초반 영국의 그리피스 (Frederick Griffith, 1877-1941)는 폐렴쌍구균을 연구하던 도중 독성이 없는 R형이 독성을 갖는 S형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발견한다. 독성을 갖는 S형 균을 가열하여 독성 을 제거한 후 쥐에게 주입하고 다시 독성이 없는 R형 균을 쥐에게 주사하면 쥐는 폐렴 증상을 보이며 죽게 되고 쥐의 사채에서는 R형 균이 아닌 S형 균이 발견 된다. 이러한 실험은 이미 파괴된 S형 균에서 무엇인가가 R형 균을 독성을 띄는 S형 균으로 전환시 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현상은 형질전환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피스는 이러한 자신 의 연구를 ‘The Significance of Pneumococcal Types’(1928)이라는 제목으로 보고하 였지만 아쉽게도 그리피스 본인을 포함하여 이 연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1941년에 들어서야 비들(George W.Beadle, 1903-1989)과 테이텀(Edward L.Tatum, 1909-1975)이 수행한 붉은 곰팡이 실험을 통해 유전자와 특정 효소관의 상관 관계에 인식을 하게 되었고 유전자 하나당 하나의 효소의 생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1유 전자 1효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이를 이어 1944년엔 에이버리(Oswald T. Avery, 1877-1955)가 그리피스의 실험을 발전시키는데, 그는 폐렴균을 형질전환 시키는 물질 을 분리해 냈다. 폐렴균을 껍질과 세포액으로 분리한 후 세포액을 독성이 없는 R형 균 에 주입하면 R형 균은 독성을 띄는 S형 균으로 전환 되는데 이는 세포액의 어떤 물질 이 형질전환을 일으킨다는 단서를 제공한 것이었다. 에이버리는 이 세포액에 탄수화물 과 단백질과 핵산을 분해하는 효소를 첨가 했을 때, 오직 핵산을 분해하는 효소의 첨 가할 때만 형질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관찰함에 따라 형질전환은 DNA에 의해 이루 어진다고 결론짓게 된다(Studies on the Chemical Nature of the Substance Inducing Transformation of Pneumococcal Types: Induction of Transformation by a Desoxyribonucleic Acid Fraction Isolated from Pneumococcus Type III, 1944). 하지 만 그리피스와 에이버리의 폐렴균을 이용한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과학자들은 DNA가 유전물질이란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핵 속에 존재하는 DNA보다 다양한 기본 구성 원을 가지며 더 다양한 3차원적 구조를 취할 수 있는 단백질이 과학자들에겐 복잡한 유전현상과 발현을 조절하는 물질로 더욱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에이버리 역시 처음에

자신의 실험 결과를 믿지 못하였으며 실험도중 DNA를 순수하게 분리시키지 못한 단백 질이 혼합된 시료로 인해 형질전환이 일어났을 거라 믿었을 정도였다. DNA가 유전물질 일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1952년 허시(Alfred Hershey, 1908-1997)와 체이스(Martha Chase, 1927-2003)가 수행한 박테리오파지 실험(Independent functions of viral protein and nucleic acid in growth of bacteriophage, 1952)을 통해 증명된다. 그들 은 단백질의 구성하는 황과 DNA를 구성하는 인의 동위원소를 이용한 실험으로 대장균 속으로 들어가는 유전물질이 오직 DNA뿐임을 증명하였다. 박테리오파지의 DNA만이 대 장균 속에서 다시 복제와 번식되는 이 실험 결과는 유전현상의 주인공이 단백질이 아 닌 DNA임을 밝히는 결정적인 실험이 되었고 분자생물학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쑨이린, 2009; 장혜경, 2006). 이 시대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17]로 요약 하였다.

[표 Ⅳ-17] 유전물질로의 DNA를 연구하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869 Johann F. Miescher

‘Ueber die chemische Untersuchung von Eiterzellen’(1869)을 통해 핵산의 존재를 확인함.

1902 Archobald Garrod

‘The Incidence of Alkaptonuria: a Study in Chemical Individuality’(1902)를 통해 유전자와 효소간의 상관관계 를 지적함.

1928 Frederick Griffith

‘The Significance of Pneumococcal Types’(1928)를 통해 형질전환 현상을 보고함.

1941

George W.Beadle &

Edward L.Tatum

‘빵곰팡이 속에서의 생화학 반응의 유전학적 조절’(1941) 을 통해 1유전자 1효소설의 개념을 정립함.

1944 Oswald T. Avery

‘Studies on the Chemical Nature of the Substance Inducing Transformation of Pneumococcal Types:

Induction of Transformation by a Desoxyribonucleic Acid Fraction Isolated from Pneumococcus Type III‘(1944)를 통해 형질전환의 원인물질이 DNA임을 주장함.

1952

Alfred Hershey &

Martha Chase

‘Independent functions of viral protein and nucleic acid in growth of bacteriophage’(1952)에서 박테리오파 지를 이용해 유전물질이 DNA임을 주장함.

(라) DNA 이중나선구조의 규명(1950 - 1953)

다수의 연구결과 과학자들은 점차 단백질이 아닌 DNA가 유전물질일 것이라는 생각 을 갖게 되었다. 생물학계의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 에는 생물학자인 왓슨(James Dewey Watson, 1928-)과 결정학을 연구하는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2004)이라는 두 과학자가 만나게 된다. 전공에서부터 서로 관련이 없을 것만 같았던 두 과학자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잘 보완하여 DNA 이중나 선구조를 규명하게 된다. 당시 과학자들은 생물체의 분자구조의 규명을 위해 X선 회절 사진의 패턴을 분석하여 3차원 구조를 수학적으로 풀이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원래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구조가 아닌 단백질의 분자구조를 연구하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단백질보다는 유전물질로 의심받던 DNA구조 규명에 더 큰 관심 을 갖고 있었다. 당대 유명한 화학자인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은 X선 회절 사진을 통한 정보를 모형에 대입하여 가장 적합한 형태의 구조를 찾는 방법을 사 용하곤 하였는데 왓슨과 크릭 역시 이와 같은 방법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의 구조 규명 에 매우 효과적임을 인지하고 폴링과 같은 방법으로 DNA의 구조를 밝히려는 작업에 착 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X선 회절 패턴 분석에 뛰어난 성과를 올리던 윌킨스 (Maurice Hugh Frederick Wilkins, 1916-2004)와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1958)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연구의 초기 과정에는 DNA를 구성하는 인산 골격의 길이와 각도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3차원 구조를 파악하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이러 한 가운데 샤가프(Erwin Chagaff, 1905-2002)는 여러 동물들과 사람의 DNA 함량을 비 교한 결과 아데닌과 티민 그리고 구아닌과 시토신의 비율이 1:1 이라는 연구 결과 (Composition of human desoxypentose nucleic acid, 1950)를 발표하게 되고 이 소식 을 접한 왓슨과 크릭은 염기쌍이 상보적 결합을 이룰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규명에 결정적인 시기는 1952년 2월이었다. 왓슨 은 윌킨스의 연구실에 방문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왓슨은 윌킨스를 통해 프랭클린이 1951년 찍은 B형 DNA의 X선 회절사진(51번 사진)을 보게 된다. 이 사진의 패턴을 본 왓슨은 DNA는 인산 골격이 바깥쪽에 위치하고 염기쌍이 그 사이를 채우는 구조일 것이 란 추측을 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만든 DNA 모형을 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연구내 용은 1953년 4월 25일 ‘DNA의 분자 구조모형’(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 1953)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게 된다. 이들이 제안한 DNA의 구조는 그 당시까지 얻어진 X선 회절 패턴과 생화학적 특징에 부합하는 모형으로 염기쌍의 상보적 결합을 통해 반보존적 복제 메커니즘을 제안하여 DNA 복제의 메커니즘 이해에 구조적 도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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