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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사 및 과학사에 반영된 과학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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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사

(가)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B.C 640 - B.C 370)

생명의 근원과 발생에 대한 인간의 사고는 무척이나 오래된 고민이었다. 그 가운데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고뇌를 사색할 수 있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그리 스인들의 사고와 과학문화 발전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일어났다. 첫째, 자유 로운 사상적 풍토와 민주주의 정치는 안정된 시대를 열었고 이는 곧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둘째,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된 도시의 번영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 는 식량자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농업 생산량의 증대를 위해 식물과 동물에 대 한 과학지식을 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그리스에서 철학자 탈레스(Thales, B.C 640 - B.C 546)는 물이 만물 의 근원이라 주장하고 그 당시의 자연관을 변혁하려 했다. 탈레스는 세계가 물로 둘러 싸인 원반 모양의 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며 기후 현상인 강수를 원반 모양의 대 지 위에 있는 물이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물이 대지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라 보았으며 나일강 하구 삼각주의 퇴적을 예로 들었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물이며 더 나아가 생명의 근본 역시 물이라 보게 되었다. 탈레스의 이러한 생 각이 이전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것은 다른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세계의 구성 과 생성에서 신의 존재와 힘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 은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약 B.C 611 - B.C 546)로 이어졌다. 아낙 시메네스는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며 세계의 여러 원소들은 갖가지 밀도를 갖는다는 주 장으로 이어졌으며 물이나 흙이 공기가 압축이 되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물과 공 기 이외에도 우주의 근원을 불이라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약 B.C 540 - B.C 475)라는 철학자도 있었다. 그는 불이 물로, 물은 다시 흙으로, 다시 그 반대 과 정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상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약 B.C 490 - BC 430)는 흙이라는 원소를 더해 4개의 원소가 만물을 이루는 근원이라 주장하였다. 엠페 도클레스는 4개의 원소가 서로 결합하여 물질을 이루며 혈액, 근육은 네 개의 원소가 동등한 비율로 혼합되었고 뼈와 같은 경우는 불, 물, 흙이 4:2:2의 비율로 혼합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엠페도클레스는 구멍이 뚫린 관을 통한 실험으로 눈에 보이지 않

은 공기 역시 물질 중 하나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오진곤, 1990). 이 시대의 과학자 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5]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약 B.C 640 - B.C 546 Thales 만물의 근원은 물 약 B.C 611 - B.C 546 Anaximenes 만물의 근원은 공기 약 B.C 540 - B.C 475 Herakleitos 만물의 근원은 불 약 B.C 490 - B.C 430 Empedocles 4원소설

[표 Ⅳ-5]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들과 주장

(나) 과학의 시작(B.C 384 - B.C 322)

고대 과학의 시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 - B.C 322)가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분야는 생물학이었는데 주의 깊은 관찰을 토대로 동물의 종을 계통적으로 분류하였고 해부에 대한 지대한 업 적을 이루었다. 그는 500종이 넘는 동물을 해부하고 관찰한 결과 기존과는 다른 분류 체계를 세워 동물을 분류하였고 특히 고래는 새끼를 낳는다는 사실과 태반이라는 기관 을 고려하여 고래를 포유동물에 포함시키는 무려 2,000년을 앞선 분류를 하기도 하였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물체가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주장하였으며 그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눈 계통표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생물의 위계 사상으로서 식물과 동물 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동물이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진화적 사상을 대입시 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생에 관한 주장으로는 생물은 어버이 없이 자연환경으로부 터 생긴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하면서 뱀장어는 진흙으로부터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 한 주장은 그 당시 알려진 뱀장어는 생식기나 알이 발견된 적이 없고 알이 빠져나오는 관 역시 없다는 해부학적 지식 때문이었다(오진곤, 1996).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이 없는 이론보다 현상의 실제가 앞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실증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특히 생물학 관련 업적에서 정확한 관찰력과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세심한 분류 체계는 연구방법의 큰 진전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 레스의 세계가 변화가 없는 고정된 것이라는 관점은 생물체 역시 종과 종이 고정된 것 이라는 생각으로 중세 그리스도교의 비호를 받았다. 자연물의 존재 의미와 변화는 신

의 목적의 실현이라는 목적론을 과학에 적용시켰다는 점과 계통표로 드러나는 위계 사 상은 교회가 지배하던 사회의 계급제도와 위계의 끝에 신이 있다는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핵심적 내용이 되었고 의심 없는 진리로 여겨지며 근대 과학자들의 많은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오진곤, 1990; 오진곤, 1996; 김성연, 이덕희 김상민, 1995). 아리스토 텔레스의 주장을 [표 Ⅳ-6]으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B.C 384 - B.C 322 Aristoteles 계통표 자연발생설 [표 Ⅳ-6]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다) 중세암흑기와 르네상스의 시작(476 - 1400)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과학적 성과들은 중세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대로 바뀌기 까지 큰 발전이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는데 종교적 권위에 의한 방해가 가장 큰 이유였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론과 목적론은 중세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인간계와 자연계 는 신의 의지와 섭리로 설명하고 정당화하기에 이용하기 쉬운 사상이었으며 이러한 전 통적이고 권위적인 성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절대불가침의 진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찰과 실험은 완전한 존재인 신이 창조해낸 세계를 의심하 는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졌으며 당시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종교의 권위와 맞물려 이러한 탐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오진곤, 1990; 오진곤 1996).

이러한 중세의 몰락과 함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과학의 발전사에 있 어 이 사건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 사상으로 회귀를 주장하는 르네상스 운동은 신이 중심이던 중세 사회에서 인간이 중심이던 그리스 사회로의 회귀를 뜻하며 이로 인해 학자들은 더 이상 신의 섭리를 탐구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자연을 있는 그대로 탐구할 수 있는 학문 연구의 기회를 살릴 수 있었다(오진곤, 1990; 오진 곤, 1996).

과학은 17세기에 접어들어 과학혁명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폭발적인 진전을 이루 었다. 생물학에서는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 - 1703)이 현미경을 이용한 미시세 계의 관찰을 시작하였다. 그는 ‘현미경 관찰’(1665)이란 저서를 통해 현미경으로 관

찰한 여러 생물들을 기술하였고 특히 현재 ‘세포(Cell)’이라 불리는 단어의 시작이 되었던 코르크의 관찰로 유명한 과학자이다(쑨이린, 2009; 오진곤, 1996). 이 시대의 과학자와 주장 내용을 [표 Ⅳ-7]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665 Hooke ‘현미경 관찰’(1665)에서 다양한 생물들을 소개

[표 Ⅳ-7]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자와 주장

(라) 자연발생론과 생물속생설(1579 - 1895)

새로운 식물들이 속속들이 발견되면서 식물의 명명은 혼란스러워졌다. 과학자들마다 같은 종류의 식물에 다른 이름을 붙여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명명에 대한 통일적 규칙 이 없어 식물의 구분에 더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린네(Carl von Linne, 1707 - 1772)는 ‘자연의 체계’(1735)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속명과 종명의 순서로 식 물의 이름을 명명하는 ‘2명법’ 규칙을 제창하였다. 그는 식물의 분류에 있어 공통점 과 차이점을 연구하던 가운데 종의 개념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접근을 하였다. 기독교 적 믿음이 독실했던 린네는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 후 종은 불변의 상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믿었다. 하지만 1742년 식물에서의 변이를 관찰하고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되는데 초기 그의 불변론은 제한된 가변론으로 바뀌게 된다(오진곤, 1990; 오진곤, 1996; 쑨이린, 2009).

기원전 6세기 밀레토스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는 식물과 동물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식물과 미개한 동물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했 다. 자연발생설에 가장 처음 의심을 품은 하비는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628)에서 ‘썩은 고기가 구더기를 만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밝혔고 사람의 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작은 알에서 미생물들이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고 하였다(쑨이린, 2009). 하지만 17세기 반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 1579 - 1644)는 밀가루 낱알을 땀으로 더러워진 셔츠와 함께 항아리에 넣으면 쥐가 발생한다 는 것을 목격(1642)한 후 자연발생설을 지지하였다(구자연, 2009).

이러한 상황에서 레디(Francesco Redi, 1626 -1697)는 17세기 말 하비의 의견에 동 의하여 생물속생설을 지지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이는 최초로 대조실험이 수행된 자

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실험으로서 세 개의 플라스크에 각각 고깃덩이를 넣고 입구를 열 어놓은 플라스크와 거즈로 덮은 플라스크, 양피지로 입구를 막은 플라스크를 가지고 실험을 수행하였다. 실험 결과 세 개의 플라스크의 고기는 모두 썩었지만 구더기는 입 구를 열어놓은 플라스크에서만 관찰되었다. 레디는 ‘곤충에 관한 실험’(1668)이란 논문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여 자연발생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오진곤,1996; 쑨이 린, 2009).

로버트 훅의 현미경에서 더욱더 개량된 현미경을 통해 1675년 레이우엔훅(Anton van Leeuwenhoek, 1632 - 1723)은 최초로 미생물을 발견하였다. 레이우엔훅은 자연발생설 을 믿지 않았으며 당대 과학자들은 레디의 실험을 통해 파리와 생쥐, 구더기와 같은 생물이 생물속생설을 따른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몇몇 과학자들은 미생물의 엄 청난 증식 속도를 보며 미생물과 같이 작은 생물들은 자연발생설을 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구자현, 2009; 쑨이린, 2009).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은 실험을 바탕으로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 였다. 니덤(John Needham, 1713 - 1781)은 양고기 수프를 이용하여 실험(1745)을 하였 다. 그는 양고기 수프를 플라스크에 담아 입구를 코르크 마개로 막은 후 뜨거운 재를 이용하여 30분간 가열한 뒤 방치했을 때 미생물이 번식하는 실험 결과를 얻게 된다.

이 실험 결과는 1748년 ‘영국 왕립학회보’에 발표되고 ‘스스로 생장하는 힘’ 즉,

‘생기력’을 주장하며 자연발생설을 옹호하게 된다(쑨이린, 2009).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 1729 - 1799)는 이러한 주장에서 실험 과정의 오 류를 지적하며 반박하게 된다. 스팔란차니는 양고기 수프가 충분히 멸균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생물이 여겼다고 생각하여 니덤의 실험이 뜨거운 재로 30분간 가열했던 것에 반해 수 시간 동안 끓이는 실험(1765)으로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 생물속생설 을 옹호하였다. 이 실험 가운데 스팔란차니는 미생물들의 종류에 따라 열을 견디는 정 도가 다름을 발견하였고 충분한 가열로 인해 미생물이 생기지 않은 플라스크의 마개를 열면 다시 미생물이 발생함을 보며 미생물은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것이라 주장하였 다. 이러한 실험을 결과를 접한 니덤은 스팔란차니의 과도한 가열로 인해 ‘생기력’

이 사라짐으로써 미생물이 발생하지 못했다는 반론(1769)으로 다시 생물속생설을 반박 한다. 이 반박에 스팔란차니는 끓인 수프를 공기 중에 노출시켜 미생물이 다시 발생하 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니덤의 반론을 재반박한다(쑨이린, 2009; 이충호, 2000).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의 대립은 파스퇴르와 푸셰의 논쟁으로 다시 시작된다. 펠 릭스 푸셰(Felix Pouchet, 1800 - 1872)는 자연발생설을 지지 하는 과학자로 자연발생

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그는 유기물, 물, 공기, 온도의 조절로 자연발생을 일으킬 수 있다 생각하였고 이 네 가지 요인이 배아나 알의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자연발생’(1859)을 통해 기술하였다(쑨이린, 2009; 최가영, 2013).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 - 1895)는 생물속생설을 지지하던 과학자로 푸셰의 이러한 실험 결과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자연발생설을 비판하기 위해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공기 속에 있음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 였는데 양쪽이 뚫려있는 관을 살균과정을 거친 솜으로 막고 며칠이 지난 후 솜을 회수 하였다. 회수된 솜을 알코올과 에테르로 헹궈 미생물을 관찰하였고 이 실험 결과 공기 중에는 각종 미생물이 있다는 것과 온도와 습도에 따라 관찰되는 미생물들이 매우 다 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백조목 플라스크를 활용한 파스퇴르의 실험은 푸셰 의 자연발생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생물속생설을 검증하였다. 이러한 실험내용은

‘자연발생설 비판’(1861)이라는 보고서로 발표되었고 자연발생설에 종지부를 찍는 듯하였다(김경호, 2006; 쑨이린, 2009). 점차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의 논쟁이 과열 되는 가운데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자연발생설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수 있 는 실험을 고안하는 자에게 앨럼베르상의 수여와 함께 2,500프랑의 상금을 포상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상과 포상금은 ‘공기 중에 존재하는 유기 미립자에 관 한 소고’(1862)를 발표한 파스퇴르에게 돌아가게 되었지만 푸셰는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를 이용한 자신의 실험으로 파스퇴르의 실험을 비판하였고 결국 두 과학자의 실험을 프랑스 아카데미 위원회를 통해 검증하려 하였으나 푸셰는 두 번의 논쟁(1860 년, 1864년) 모두 포기함으로써 자연발생론은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김경호, 2006;

쑨이린, 2009; 최가영, 2013). 하지만 푸셰의 실험이 방법적 오류나 분석의 방법이 잘 못된 것 이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실험방법은 뚜렷한 오류나 잘못된 실험절차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푸셰의 실험은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결과를 보이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사용했던 실험재료에 있었다. 그가 사용한 실험재료는 건초달 인 물로써 고초균을 사용했었다(쑨이린, 2009). 고초균은 내생포자를 형성하는 균으로 강력한 피막을 통해 극단적 환경에서도 사멸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내생포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기압 보다 높은 15 psi(pound/square inch)의 압력 하에서 121℃

로 15~20분간 가압증기멸균을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실험재료를 택한 푸셰는 당시 기 술력으로 고초균을 완벽히 멸균시킬 수 없었고 이와 같이 멸균이 어려운 실험재료의 특성 때문에 그의 실험 결과는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결과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과

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8]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628 Harvey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628)에서 생물속생설을 주장

1668 Redi ‘곤충에 관한 실험’(1668)을 통해 자연발생설 비판 1675 Leeuwenhoek 미생물 발견

1735 Linne ‘자연의 체계’(1735)를 통해 2명법 제창

1745 Needham

‘A Summary of Some Late Observations Upon the generation,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of Animal and Vegetable Substances’(1748)에서 자연발생설 주장

1765 Spallanzani

‘Saggio di osservazioni microscopiche concernenti il sistema della generazione dei Signori di Needham e Buffon’(1765)에서 자연발생설 비판

1859 Pouchet ‘자연발생’(1859)에서 자연발생설 주장

1861 Pasteur ‘자연발생설 비판’(1861)에서 자연발생설 비판

[표 Ⅳ-8] 자연발생론과 생물속생설을 주장하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마) 최초의 생명체(1924 - 1969)

1924년 소련의 생화학자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 1984-1980)은 그의 저 서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 1924)를 통해 초기 지구의 상태가 유기화합물을 합성하기 적합한 환경이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 했을 것이란 주 장을 하였다. 그는 초기 원시지구에 암모니아로 부터 형성된 시안화물로 인해 다수의 아미노산이 생성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유기물들이 모여 최초의 원시 생명체가 탄생했 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무기물에서부터 유기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화학적 진화라 부르는데 이러한 과정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 하였 다. 만약 이미 생명체가 존재 하는 상황이라면 무기물들이 모여 원시생명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기존의 생물체에 포식을 당하게 되므로 원시 생명체가 생성이 된다면 다시 새로운 생명체가 발생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었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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