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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識無境’은 “오직 의식뿐, 대상(境)은 없다”는 뜻이다.

세친이 유식 20론 을 써서 ‘無境’, 즉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네 가지 논증을 한 다. 그러나 “오직 의식만 존재한다”와 “대상은 없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 은 아니다.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별개로 ‘오직 의식만 존재함’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증명은 없다.

이처럼 ‘無境’을 증명하면, 반문을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지각하고 있는 이 많은 것들은 무엇이냐? - 이에 대한 답이 ‘唯識’이다. 이를 유식 30송 에서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대상은 존재하지 않음”(無境)인데, 내 앞에 현상들이 존재한다 면, 이는 ‘없음이며, 있음’이라는 모순이 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도 식이다. “사물=실체+속성”인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속성’은 마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음의 그 부분을 8식 알라야식으로 상정한다.

‘無境’의 증명은 반드시 8식의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는 꿈의 구조와 비슷하기는 하나, 같지 않다. 알라야식의 씨앗이 펼쳐져서 드러나는 현상 세계, 사물의 속성은 꿈 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꿈은 내 개인이 꾼다. 그러나 알라야식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만약 꿈처럼 모두가 각자의 알라야식을 가진다면, 서로 대화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현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 유식唯識 - 8식 이론

유식 불교에서는 8개의 의식을 말한다. 1-5식까지가 전5식, 6식은 의식意識, 7식은 마나식, 8식은 알라야식이다.227)

붓다는 사람을 ‘色 受 想 行 識’이라는 다섯 무더기(五蘊)라고 한다. 몸은 色이다.

나머지 넷은 마음에 해당된다. 受는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임, 想은 생각하고 추론함, 行은 행위이다. 識은 이 셋이 만들어낸 ‘의식’이다.

또한 붓다는 감각 기관으로 6근을 말한다. “眼 耳 鼻 舌 身 意”가 그것이다. 이 두 이론을 종합하면, 대충 유식의 8식 이론에 접근할 수 있다. “眼 耳 鼻 舌 身”이

227) 길희성 저, 인도 철학사 , 소나무, 2020), p.187 ; 다케무라 마키오(竹村牧男) 저, 유식의 구조 , 민족사, 1989, pp.25-28 참고.

전5식, 즉 5온의 수이고, ‘意’가 6식이다. 5온 중 想에 해당된다. 이는 전부 식에 포함된다.

여기에는 7식과 8식이 없다. 7식은 유식학파 이전에도 이 비슷한 것을 주장한 파가 있었다. 8식은 유식학파가 주장한다. 유식이 성립한 이유는 오직 하나, 8식 때문이다.

7식과 8식 이론과 학파는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된다.

1-6식까지는 대부분의 학파가 인정한다. 7식 마나식은 아집을 생산한다. 이는 붓다 의 무아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정했다. 그러나 8식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다.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자부犢子部는 5온과 다르지만, 5온을 벗어나지 않는 ‘푸드갈라’를 주장한다. 그것이 윤회의 주체이다. 푸드갈라가 8식과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푸드갈라만으로 8식을 설명할 수는 없다. 8식을 가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 한 이론이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3) 무경無境 - 3성 이론

무경無境이라 하여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서 유식 철학은 시작된 것 같다. 대 상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상의 존재의 성격을 나누게 된다. 그 성격을 셋으로 나눈 것이 ‘3성’ 이론이다.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그것이다. 해심밀경 은 ‘性’이라는 말 대신에 ‘相’이라는 말을 쓴다. 그 셋이 없는 것을 “생 무자성, 상 무 자성, 승의 무자성”이라 한다.

이처럼 ‘대상의 비실재’(無境)를 주장하는 것에서, 어느덧 유식唯識으로 초점을 바꾼 다. 현상 세계의 근원인 8식 알라야식의 씨앗 이론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1-7식과 결 합이 된다. 1-7식은 인식론이다. 그러나 8식은 존재론이다. 8식 알라야식은 반드시

‘대상의 비실재’(無境)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인식론적 설명은 할 수 없다.

무경無境을 설명하기 위해서 8식의 존재를 말한다. 뒤에 가면, 무경無境보다는 주로 유식唯識만 말하게 된다.

통설에 따르면, 중관이 존재론, 유식이 인식론이라 한다. 공 개념은 존재론, 식

개념은 인식론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이론을 살펴보면, 중관이 인식론이고, 유식 은 존재론이다. 공이므로 인식론이고, 식 이므로 존재론이다. 8식이 대상의 존재 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용수의 중론 은 타학파의 이론을 논파하는 것 이다. 이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 이론들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한다는 것이 다.

(4) 중관과 유식의 반대 지점 - 無識 唯境

유식이 ‘唯識無境’을 주장했다면, 중관은 반대로 ‘無識 唯境’을 주장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볼 때 그렇게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지, 중관이 그것을 주장 한 것은 아니다.

㈀ 無識 - 주관을 부정함

용수의 중론 은 모든 이론을 논파하고 부정한다. - 이론은 말에 의해서 구성된다.

말은 ‘불변의 존재’를 지시 대상으로 삼는다. 불변의 존재를 용수는 ‘自性’이라 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성격이다. 실제로 지시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에, 늘 변한다.

현실에는 ‘자성’은 없다. 따라서 말은 그 지시 대상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말로 구성 된 이론들도 지시 대상이 없게 된다. - 이렇게 해서 모든 이론을 논파한다.

말은 마음과 연관된다. 오직 마음만이 말을 사용한다. 감각 지각을 하던, 이성적 사 유를 하던 모두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말을 부정하는 것이고, 말을 부정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을 ‘無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담당하는 인식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파사破邪가 현정顯正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이야 기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다.

첫째, 분별지(vi·jna) 대신에 반야지(pra·jna)를 제시한다. 모든 이론은 말에 근거하고, 말에 근거한 것은 모두 분별지이다. 말은 대상을 쪼개야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 떤 사람을 ‘홍종욱’이라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홍종욱’과 ‘홍종욱 아닌 것’을 먼저 분리시켜야 한다. 그래야 말을 붙일 수 있다. 이렇게 분별해서 아는 것 대신에, 대상 을 전체적으로 직관하는 것을 ‘반야지’라 한다.

둘째, 두 가지 진리를 구분한다. 속제俗諦는 세속의 진리이다. 말로 구성한 이론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별지에서 나온 것이다.

진제眞諦는 ‘참된 진리’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은 진리이다. 이는 반야지로 인 식할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속제는 진제를 위한 수단 방편이 된다. 어떤 식의 수단인가? 파사破邪의 대상 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부수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을 깨면 현정顯正이 된다. 이것이 진제이다.

㈁ 唯境 - 대상의 존재를 긍정함

중관 철학은 모든 이론을 깨뜨리는데 힘을 쏟는다. 정작 대상 사물의 성격에 대해 서는 말이 없다. 대상 세계는 존재하고, 변화하고, 연기緣起로 엮여 있다. 이 세계를 이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다. 용수는 자신만이 붓다의 연기설을 정확하게 이해하 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자부한다. 모든 이론은 대상 세계 인식을 가로막는다. 이론이 가로막기 때문에, 연기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용수가 대상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중관은 주관 부 정, 객관 인정의 틀 위에 있다. 이는– 설일체유부의 ‘三世實有, 無我설’과 비슷하다.

대상 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실재로 존재한다. 반면 인간의 자아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유식의 ‘주관 인정, 객관 부정’은 경량부의 이론과 비슷한 틀이다.

경량부는 인식 주체를 감각 지각하는 것으로 본다. 지각하는 나는 ‘현재’에만 존재한

다. 현재 순간 지각되는 세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 미래에 존재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나를 기준으로 대상 세계를 보는 것이다.

(5) 유식 불교와 관련된 오해, 혹은 오류와 문제점

㈀ 一切 唯心造

어떤 사람들은 유식 사상을 규정하면서, ‘一切 唯識’ 대신 ‘一切 唯心造’라 한다.

이는 맞지 않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어떻게 마음이 대상을 만들 수 있 는가? 물론 꿈이나 환상 속에서는 만든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 그런 것이다. - 유식 이 이런 엉성한 이야기를 하는가? 현실에서는 마음이 대상을 만들지 못 한다.

유식에 따르면, 사물의 속성은 8식의 씨앗이 드러난 것이다. 이 드러남(現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결코 꿈처럼 혼자 자기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마 음은 ‘나’ 자신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8식은 내 의식을 벗어난 것이 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붓다는 무아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쓰지 않는 다. ‘마음’이라 하면, 당연히 ‘유아설’이 된다. 유식은 무아설을 지킨다. 따라서 唯識 이라 하지 唯心이라 말하지 않는다. ‘一切唯心造’는 중국 불교 승려 가운데 무신경한 사람들이 만든 말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유식 사상은 중관 사상의 공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의 부정적인 관점에 만족 하지 않고, 진리의 인식을 위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유식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들이 순전히 우리의 사고 작용에 의하여 구 축되거나 조작된 것이라면, 결국 이 사물들은 우리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하는 발상을 전개한다. 이 의식을 떠나서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마치 꿈과 같이 의식에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유식 철학을 ‘남가일몽, 일장춘몽’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 번역을 안 함, 실체화의 문제

유식 불교의 ‘의식’(識)에 대해서 이런 설명이 있다.

“아비달마에서는 인식의 대상은 식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식이 그것의 형상(形相 ākāra) 또는 영상(影像 pratibimba)을 띠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에서는 대상은 식이 변화한 것, 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불교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여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⑴ 번역을 하지 않음. ‘식’은 우리말이 아니다. 한자 識도 아닌 한글 ‘식’이라고만 쓰면 의사소통이 안 된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사 한자말 ‘識’ 혹은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