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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의 비유와 변계소집상

잘 하는 남자여! 비유하자면, 밝고 깨끗한 파지가頗胝迦 보석과 같다.

만약 푸르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제청帝靑이나 대청大靑의 마니摩尼 보배와 비슷하니,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 보배라고 취하는 까닭에 유정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약 붉게 물든 빛과 합하면 곧

호박琥珀의 마니 보배와 비슷하니,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호박의 마니 보배라고 취하는 까닭에. 유정有情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약 초록으로 물든 빛과 합하면 곧

말라갈다末羅羯多 마니 보배와 비슷하니,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말라갈다 마니 보배라고 취하는 까닭에. 유정有情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만약 노랗게 물든 빛깔과 합하면 곧

금의 모습과 비슷하니,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진짜

금의 모습인 양 취하는 까닭에, 유정有情들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239)

善男子! 譬如 淸淨 頗胝迦寶, 1

若與靑染色合 則似帝靑·大靑 末尼寶像; 由邪執 取帝靑·大靑 末尼寶 故惑亂有情. 2 239) 解深密經 권2 제4 「一切法相品」 (T16, 693b2-10).

若與赤染色合 則似琥珀 末尼寶像; 由邪執 取琥珀 末尼寶 故惑亂有情. 3

若與綠染色合 則似末羅羯多 末尼寶像; 由邪執 取末羅羯多 末尼寶 故惑亂有情. 4

若與黃染色合 則似金像; 由邪執 取眞金像 故惑亂有情. 5

[1] 파지가頗胝迦 – 원어가 sphāṭika이므로 색파지가塞頗胝迦라 하고, 줄여서 頗胝迦, 파려頗黎, 파리玻璃라고도 한다. rock crystal, 즉 수정水晶, 수옥水玉, 백주白珠로 번역 한다. 무색 투명한(淸淨) 구슬 종류이다. 배경의 색을 그대로 띠는 구슬이다.

末尼寶 - Cintā-maṇi, 음역하여 ‘真陀摩尼, 震多末尼’라 하고, 절반 의역해서 ‘摩 尼 宝珠, 末尼 宝珠, 摩尼宝, 瑪尼宝’ 등이고, 의역해서 ‘如意 宝珠, 如意宝, 如意珠’

등이라 한다. 귀중한 보석이다.

[2] 파지가는 “‘푸르게 물들이는 색’과 더불어서 합해지면, ‘왕 푸른, 큰 푸른’ 마니 보배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서, ‘왕 푸른, 큰 푸른’ 마니 보배 로 취한다. 그러므로 유정有情을 혹란惑亂시킨다.”

染色 - 물들이는 색깔. 물든 빛깔. 이는 앞에서는 ‘雜染’이라 했다. 잡다하게 물들 임이다. / 邪 - 사악한, 그릇된, 나쁜. 邪執 - ‘그릇된 집착’. 여기에서는 있는 그대로

(眞如)를 보지 못 하고, ‘물들인 색(染色)’을 진짜 색깔이라 집착하는 것이다. 변계소집 상의 경우, 대상의 모습·속성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8식의 씨 앗이 드러난 것이다. / 取 - 취하다. 가지다. 이는 바로 앞의 執과 같은 뜻이다. 執하 니 取하게 된다. / 惑亂 - 어지럽혀서 미혹시키다. 착각하게 만들다. 亂은 배경색을 보석의 색으로 생각하게 어지럽힘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미혹됨’이다. / 有情 - “情(생명)을 가짐”, 생명체, 사람. sattva를 현장은 직역 ‘有情’으로, 구마라집은 의 역 ‘衆生’으로 번역했다. 둘 다 사람을 뜻한다. / 帝靑 ① 하느님 푸른, 임금 푸른.

푸른 색의 왕, (큰 골짜기 = 왕 골짜기) ② 제석천의 왕관의 푸른 보석의 색깔.

[3] “‘붉게 물들이는 색’과 더불어서 합해지면, ‘호박琥珀’ 마니 보배의 모습과 비슷 하다. 사악한·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서, ‘호박’ 마니 보배로 취한다. 그러므로 유정

有情을 미혹시켜서 어지럽힌다(惑亂).”

호박琥珀은 나무의 수지樹脂액이 굳어서 단단해진 보석이다.

[4] “‘녹색으로 물들이는 색’과 더불어서 합해지면, ‘마라갈다’ 마니 보배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악한·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서, ‘마라갈다 마니 보배’로 취한다. 그러 므로 유정(有情)을 미혹시켜서 어지럽힌다.”

marakata, 末羅羯多, 摩羅迦陀 - 에메랄드emerald 보석이다.

[5] “‘노랗게 물들이는 색’과 더불어서 합해지면, ‘금’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악한·그 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서, ‘진짜 금의’ 모습으로 취한다. 그러므로 유정(有情)을 미혹 시켜서 어지럽힌다.”

* 해심밀경 은 ‘변계소집性’이 아니라 ‘변계소집相’이라 한다. 즉 3性이 아니라 3 相을 말한다. - 오직 대상의 모습 속성(相)만 이야기한다. 법상法相의 비실재, 공을 계속 논증한다. 반대로 주관의 인식 과정은 건드리지 않는다.

물들이는(染色) 배경색은 靑 赤 綠 黃의 넷이다.

파지가 보배 (투명 구슬 p) + 배경색, 물들이는 색(染色 q) = 다른 종류의 보석(r) 실재 존재(파지가 보배, 무색 투명, 淸淨 p) + 물들이는 색(染色, 배경색 q) = 결과, 여러 색 깔의 보석(r)으로 착각(惑亂)하게 만든다.

대상 사물의 ‘모양 속성’(法相)의 본래 모습(眞如)은 무색 투명함(淸淨 p)이다. 그러나 그것을 물들이는 색(染色 q)이 물들여서, 그 색깔로 보이게 만든다. 이렇게 본 것이 현 상의 속성(r)이다. 淸淨은 ‘맑고 깨끗함’이다. 보석은 무색 투명함이고, 대상의 모습은 비존재이고 공한 것이다. ‘비존재(空)’를 ‘무색 투명’에 비유한 것 같다.

*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이 대상의 존재는 파지가 보석처럼 무색 투명한 것이라 규 정함이다. 보석에 색을 넣는 것은 배경색, 즉 염색染色이다. 사람의 경우 ‘그릇된 집 착’(邪執)이다. 이 집착의 정체는 무엇인가? 얼핏 ‘무명 욕망 집착 번뇌’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이론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해심밀경 은 기본적으로 용수의 공 사상으로 본다. 대상의 실 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실체, 즉 자성自性은 비어 있다(空).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믿는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말’을 쓰기 때문이다. 말은 자성自性에 대응해서 성립한다. 즉 ‘말 – 지시 대상’의 일치이다. 말은 고정되어 변하 지 않는다. 자성自性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 대상은 늘 변한다. 법상法相은 8식의 씨앗 이 계속 드러난 것(現行)이기 때문에 변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말 – 지시 대상’의 관계는 ‘불변(自性) - 변화’라는 대응 관계이다. 이 는 필연적으로 불일치할 수 밖에 없다. 이 둘에서 용수는 말의 자성을 부정한다. 이 에 따라서 말을 사용하는 모든 이론을 깨뜨린다. 파사현정이다.

해심밀경 은 이 도식을 일상 생활에 적용한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말을 쓴다.

말에 든 ‘자성自性’ 때문에, 말의 지시 대상으로 ‘고정된 존재, 불변의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릇된 집착’(邪執)이다.

그러나 용수가 말했듯이 지시 대상은 늘 변한다. 자성이 없다. 이 지점에서 용수는 말을 사용한 이론들을 논파하는 곳으로 달려간다. 반면 해심밀경 은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간다. 대상이 늘 불변하다고 믿는 이유는 그 대상에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말이 자성을 가졌다고 대상이 자성自性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대상의 자성을 부정한다. 이것이 법공法空이고 무경無境이다. 대부분의 유식 이론서는 여기에 머문다. 해심밀경 도 그렇다. 그러나

세친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유식 30송 에서 8식 알라야식의 씨앗이 드러 난 것이 현상 세계라고 한다. 즉 이 ‘드러남’이 사물의 모습이고 속성(相)이다.

* 파지가 보석의 비유는 이렇다. 보석은 투명하다. 배경색 때문에 물들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네가 접하는 대상의 모습, 현상은 투명하다. 네가 거기에 색을 칠해서 본 다. 색칠하는 주요한 붓은 ‘말’이고 언어이다. 대상의 자성이 없음을 알 때, 사람은 고 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이는 붓다의 이론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이렇게 말이라는 붓으로 색깔을 칠해서 본 모습이 ‘변계소집상’이다.

앞에서는 백내장인 눈으로 본 모습이 변계소집상이다.

* 여기에서는 어쨌든 대상의 모습·속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파지가 보석의 색깔은 있다. 그것이 환상이던, 무엇이 색칠한 것이든 간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 단 있다고 긍정한 뒤에, 그것의 존재의 성격, 존재의 농도를 분석한다. 그것은 투명한 마지가 보석에 배경색이 물들인 색깔이다.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은 색깔이다. 여기에 서 이렇게 대상의 자성, 실재를 부정한다. 대상은 공하다.

이는 대상의 모습·속성의 존재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것이다. 붓다가 ‘대상의 모습·속성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표상·인상‘이 된 것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과는 완 전히 다르다. 이 속성-표상은 니미타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의 모습은 ’ 락샤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붓다의 경험론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는 ’대 상의 모습·속성‘의 존재성을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따지고 있다. 경험론이 아니다.

* 相 개념을 통해서 붓다와 유식 불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중국에서 인도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니미타, 락사나, 삼전야’를 모 두 ‘相’으로 번역한 것이 문제이다. 번역자들은 그 세 낱말을 구별하지 못 한 것인가?

아니면 셋이 다 같다고 생각한 것인가? 티벳어 번역도 그런가?

인식 순서로 볼 때, “락샤나(속성) - 니미타(표상) - 삼전야(개념)”으로 연결된다. 이것 이 인식론에서 핵심적인 과정이다. 이 셋을 뭉뚱그려서 다 ‘相’이라 번역함으로써, 인 식론적 문제들을 완전히 은폐시켜 버렸다. 불교 안에서 이론 차이도 매몰시켜 버렸다.

‘相’을 니미타와 락사나로 구분할 때, 붓다와 대승의 차이가 명쾌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