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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중관 철학과 ‘락샤나’ 개념

⑴ 아비달마 논서는 ‘생·주·멸’을 유위법이라 한다. 존재한다고 본다. 이는 경험적 상식적 입장이다. 용수는 그것이 유위법도 무위법도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생·

주·멸’이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립이다.

십이문론 의 제4장 「특징에 대한 검토(觀相門)」에서도 소의 특징, 물단지의 특징

, 수레의 특징, 사람의 특징 등의 비유를 들어 생·주·멸이 유위상도 무위상도 아 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224)

‘생·주·멸’이 성립하지 않음은 앞의 게송에서 보았듯이, 이성적 추론으로 증명한다.

무한 소급의 오류가 그것이다. 반면 아비달마는 경험적 인식에 근거해서 ‘생·주·멸’이 존재하는 것, 유위법이라 한다. 일반인이 볼 때는 그것들은 존재하는 것이고, 용수의 논증이 황당한 것이다.

⑵ 용수는 ‘락샤나’ 개념에 근거해서, 이성적 추론을 전개한다. ‘락샤나’를 구마라집 은 ‘相’이라 번역한다. 그는 ‘니미타’도 ‘相’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참된 이해를 막는 다.

인식의 과정은 단순화하면 이렇다. “대상 사물의 속성 모습 → 감각 지각하면 ‘표 상 인상’ → 관념 개념, 이성적 사유와 추론” = 인식 모형 p

이를 단순화하면 ㈀ 감각 지각한 ‘표상 인상’, ㈁ 이성적 사유를 하는 ‘관념 개념’이 다. 전자는 경험론이고, 후자는 합리론(이성론)이다. - 이는 서양 근대 철학의 경우이 다. 불교는 이 도식이 정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 붓다와 아비달마는 경험론이다. 감각으로 지각한 내용이 ‘표상 인상’을 수집하 고, 정리하고, 분석한다. 5온 6근 18처 등이 다 그런 결과이다.

㈁ 용수는 개념과 관념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추론한다. 이성적 추론의 결과 이론 체계를 만들기 보다는 아비달마 철학을 논파하는데 집중한다. 자성自性이라는 개념에 근거해서 논파하고 실체가 ‘비어 있다’, 즉 ‘공’을 주장한다.

용수는 ‘관념 개념’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락샤나’라는 개념을 쓴다. 왜 그러한가? 이성적 사유는 ‘관념 개념’을 가지고 한다.

앞에서 제시한 인식 모형 p에 따르면, ‘표상 인상’과 짝이 되는 것은 ‘관념 개념’이 이다. 즉 감성과 이성의 차이이다. 그런데 붓다·아비달마 대 용수의 차이는 ‘표상 인 상’(니미타) 대 ‘속성 모습’(락샤나)이다. 논리적으로 이는 원래 같은 것이다. 그런데 두 철학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두 개념, 즉 니미타와 락샤나이다.

왜 용수는 ‘관념 개념’ 대신 ‘속성 모습’(락샤나) 개념에 근거해서 논리적 추론, 이성 적 사유를 하는가? - 답은 간단하다. 그의 목표는 아비달마 철학, 나아가 붓다의 사 상을 논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니미타’(표상 인상) 개념에 근거하면, 논파할 수 없다.

그냥 경험론으로 가야 한다.

224) 김성철, 百論/十二門論 (서울: 경서원, 1999), pp.275-287. 참고.

그래서 ‘표상 인상’에 대응하는 사물이 가진 ‘속성 모습’(락샤나)로 간다. 락샤나에 근 거하면, 아비달마 철학과 붓다의 사상을 논파할 수 있다. 아비달마가 말하는 개념들, 예컨대 5온 6근 18처, 5위 75법 등을 다 ‘락샤나’로 바꾼다. 그것들은 원래 ‘표상 인 상’(니미타)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사물의 속성 모습(락샤나)로 간주하 고, 그것들이 가진 논리적 문제를 이성적 추론으로 보여준다.

중론 의 체제가 아비달마의 주요한 개념들을 논파하는 것이다. 그 개념들이 실제 로는 아비달마의 경험론적 지식의 축적물이었다. 즉 니미타의 산물이다. 용수는 그것 들을 비판 부정하기 위해서 ‘락샤나’로 바꾸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용수 논리적 추 론을 할 때 쓰는 ‘락샤나’들은 사실상 ‘관념 개념’과 같아진다.

⑶ 용수는 굉장히 공격 전략을 잘 잡았다. 니미타를 락샤나로 바꾸어서 이성적 추 론으로 논파했다. 실제로 붓다 이래로 이어진 전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끊어버렸기 때 문에 새 전통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대승 불교와 유식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종교이다. 끊임없이 이단, 혹은 다 른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불교라고 인정하면, 다 받아들여준다. 이는 기독 교나 이슬람교와 정반대의 성격이다. - 이렇게 보면 용수도 불교의 전통을 충실히 계 승한 사람이다. 이런 전통을 맨 처음에 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⑷ 용수가 의도적으로 ‘락샤나’를 가지고 논리적 추론을 했다. 그 결과가 파사 현정 이다. 서양 근대의 합리론(이성주의)는 이것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합리론의 특 징은 거대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헤겔이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로서 역 사,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 등이 그렇다. 이들은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용수는 왜 거대 이론을 만들지 않는가? ‘관념 개념’에 근거해서 논리적 추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핵심되는 개념이나 관념을 만들지 않는다. 예컨대 ‘절대 정신’, ‘맹목적 의지’ 같은 개념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에 사유의 재료로 아비달마 체 계의 용어들을 가져온다. 헤겔 등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 한다. 반면 용수는 상대의 용어(니미타)를 가지고 상대를 논파하고자 한다. 서로 정반대 이다. 세우고자 하는 자와 깨뜨리고자 하는 자의 차이이다. 개념이나 관념을 적극적으 로 용수는 만들지 않는다. 단지 상대의 이론을 가지고 추론한다.

⑸ 락샤나 - 속성

일반적으로 ‘락샤나’를 ‘특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문제가 많다. ‘특징’이라 하면, 철학적 논의의 맥락이 사라진다. ‘특징’이 아니라 ‘속성’이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속성’이라 해야 ‘실체’를 함축한다. ‘사물=실체+속성’이라 할 수 있다. 용 수는 자성自性을 부정한다. ‘자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실체에 해당된다. 자성 을 부정함 = 실체가 ‘비어 있음’(空)이다. 자성과 공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락샤 나’를 ‘속성’으로 번역하는 좋다. 자성의 부정으로 실체는 空하게 된다. 그래서 ‘속성’

(락샤나)만 남는다. - 이것이 바로 유식 불교의 ‘법상’(法相, 사물의 속성)이다. 유식은 唯 識無境이다. 無境 - 사물의 존재는 없다. 단지 사물의 속성(法相)만 있다. 그리고 이 속성들은 8식 알라야식의 씨앗이 드러난 것(現行)이다.

용수가 굳이 ‘상(相 락사나)’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自性’을 부정하겠다, ‘空’

을 증명하겠다. - 이런 의도가 있는 것은 명확하다. 이런 의도 때문에 ‘표상 인상’의 뜻인 ‘니미타’를 버리고, 사물의 ‘속성 모습’인 ‘락샤나’에 근거해서 사유한다.

‘특징’이라는 말은 ‘자성’과 연결시키기 어렵다. ‘속성’이라 하면, ‘자성’과 연결시킬 수 있다. ‘사물=속성+실체’이므로, 속성은 실체를 가정하는 말이다. 실체→자성과 연 결시킨다. 실체를 부정하고, 그래서 ‘空’이다.

⑹ “모든 존재는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 ‘생·

주·멸’의 세 모습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

특징(相)이 ‘있다-없다’, 이는 모순이다. 모순은 오류이다. 예컨대 “나는 돈이 있다.

그런데 돈이 없다.” -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용수는 ‘생·주·멸’에 대해서 ‘있다-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셋에 ‘자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자성을 인정하면 ‘생·주·멸’이 각각 존재하는 셋이 된다. 그러면 셋 은 연결될 수 없다. 자성을 부정하면, 자성이 빔(空)이 된다. 용수는 ‘생·주·멸’의 세 모습을 인정한다. 다만 그것의 자성을 부정한다. 공하기 때문에 셋이 연결된다.

말은 자성을 인정할 때 성립한다. 말로 하는 이론은 다 자성을 가진 개념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성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자성 부정 은 이론의 부정으로 간다. 용수의 결론은 ‘희론(戱論) 적멸’이다. 상(相)의 존재를 부정 하는 것은 아니다.

자성을 부정하고, 공(空)임을 깨달으라는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 혜, 즉 반야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라.

4. 유식唯識 불교의 상相 개념 1) 유식 학파와 사상의 개괄 (1) 유식 사상의 형성과 전개

㈀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100여 년이 지난 무렵부터 승가(僧伽, Samgha)는 사원에 안 주하여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오히려 재가 신도의 삶과 종교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속과는 차별되는 승려들만의 전문적이고도 번거로운 이론적 논의를 일삼게 되면서, 계율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근본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다시 지말 분열을 일으켜 약 20여개의 부파로 나뉘는데 이를 부파 불교라고 한다.

각 부파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분석하 고 연구하여 체계화하는데 치중하게 된다. 이를 아비달마 불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 비달마 불교가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가르침에 치중하면 할수록, 일반 대중들은 어렵 고도 복잡한 교리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보다는, 기복을 구하는 쪽을 선택 하게 된다. 곧 그들은 세속적인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불탑 주위로 모였고, 이렇게 모 여든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행을 강조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대승 불교가 나타났다.

대승 불교가 태동하면서 새롭게 반야경般若經 , 화엄경華嚴經 ,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 경전이 편찬되기에 이른다. 대승 불교도들은 새롭게 형성된 이 가르침에 의거하 여 기존의 불교와는 달라진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이 아닌 사 상적으로 기존의 아비달마 불교와 차별성을 드러내게 된 것은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 이라는 대승 불교의 양대 산맥이 출현하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중관 사상은 용수(龍樹, Nāgārjuna) 보살로부터 시작되었다. 거의 그 혼자 중관 사상 의 전체를 만들었다. 반면 유식은 여러 사람이 만들었다.

유식학파는 4세기 초에 미륵(彌勒, Maitreya)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유가사지론瑜伽師 地論 과 대승大乘 장엄경론莊嚴經論 에서 비롯한다. 이후 무착(無着, Asaṅga: 310-390)이 유식 사상에 입각하여 대승 불교의 철학을 10개 항목으로 논한 섭대승론攝大乘論 을 저술함으로써 본격화된다. 5세기 무렵에는 세친(世親, Vasubandhu: 316-396)이 다른 학 파의 반박에 답한 논서로서, 무경無境을 설명하면서 게송과 더불어 풀이가 있는 유식

唯識 20론 과,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한 8식의 전변, 삼성과 삼무성, 보살의 수행 단 계 등을 30송으로 정교하게 정리한 유식唯識 30송 을 저술함으로써 유식 사상의 체계화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 두 저술이 유식 철학의 직접적 시초가 된다.

㈁ 유식 사상을 펼친 학파는 유가행파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유가사(瑜伽師, yogācāra)에서 유래되었으며, 원래 요가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 라서 유식 철학은 단순히 이론적 사변의 결과물이 아니라, 요가 수행을 체험한 사람 들이 주장한다. 요가 체험 속에서 유식唯識 무경無境과 8식을 확신했을 것이다. 단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