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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상 무자성

무엇을 일러서 모든 법의 ‘상무자성無自性’의 성격이라 하는가?

답 :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이다. 왜 그러한가?

이는 ‘임시 이름’이 세워짐에서 말미암아 모양·속성이 된 것이요,

‘스스로 모습’(自相)이 세워짐에서 말미암아 속성·모양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상 무자성’의 성격이라 이름짓고 설명한다.

云何 諸法 相無自性性? 1

謂 諸法 遍計所執相. 何以故? 2

此 由假名安立 爲相, 3

非 由自相安立 爲相, 是故 說名 相無自性性.242) 4

낱말 풀이

[1] 相無自性性 - “相의 自性이 없음의 성격”, ‘모습’이 ‘스스로 존재하는 성격’(自 性)이 없음이라는 성질, 성격, 특징.

[2] 謂 - (답변해서) 말하다. 이르다. / 諸法 - 모든 사물, 대상 사물. / 遍計所執相 - “잡은 바를 두루 계산하여 나온 ‘모습’”

[3] 假名 ① 임시 이름 ② →名假, 假에 이름을 붙이다. 假 - 임시적인 것, 가짜.

현상의 모습·속성은 실재가 없고, 8식의 씨앗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임시적 인 것, 가짜’(假)라고 한다. 그것에 붙인 이름이 ‘假名’이다. 따라서 속성이 임시적인 것이면, 이름도 임시적인 것이다. ‘임시 이름’이라 한다. 용수는 ‘空 假 中’을 말한다.

바로 이 ‘假’와 뜻이 같다. / 安立 ① 세워 놓다. (安=安頓 놓다.) ② 딛고 서다. 여기에 서는 주어가 假名이다. 假名이 행위자가 아니므로 ‘세워놓다, 딛고 서다’ 등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수동태로 번역해야 한다. “假名이 安立되다.”

[4] 自相 - ‘스스로 모습이 됨.’ (종자의 현행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 - 이는

‘自性’(스스로 존재하는 성격)에 준하는 말이다. 自相은 假名·名假와 반대되는 것이다. “自 相이 安立되다.” / 說名 - 이름짓고 설명하다.

전체적인 의미

1. 相無自性性은 遍計所執相의 본질이다.

2. 변계소집의 ‘相’은 ‘相 無自性’의 성격을 가진다. 자성이 없는 相이다. 왜인가?

3. 변계소집의 상은 ‘假名’이 安立한 것이다. ‘自相’이 安立한 것이 아니다.

4. 결론. 변계소집의 相은 ‘相 無自性’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에서 핵심은 假名 대 自相·自性의 대립이다. ‘임시적인 이름’(假名)은 많은 뜻을 담고 있다. 아무튼 임시적인 것이다. 自相은 ‘자체적인 모습’, 自性은 ‘스스로 존재하 는 성격’이다. 임시 존재와 자체 존재는 정반대이다.

앞에서 여러번 설명했듯이, 대상의 속성·모습은 계속 변화한다. 이유는? 8식의 씨앗

242) 解深密經 권2 제5 「無自性相品」(T16, 694a15-b1). 이하 인용문 모두.

이 계속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 속성·모습을 지칭하는 말은 ‘불변의 것’

(自性)을 대상으로 한다. 말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변화하는 대상의 모습을 고 정시키고, 일정한 것으로 만든 뒤에, 즉 자성이 있는 것으로 만든 뒤에, 그것에 이름 을 붙인다. 변화하는 모습·속성은 ‘임시적인 것’(假)이다. 거기에 붙인 이름도 ‘임시 이 름’이 된다. - 바로 이것을 ‘변계소집의 모습’이라 한다.

所執은 ‘잡는 것’이다. 변화하는 모습·속성에서 ‘불변의 것’(自性)을 잡는 것이다. 그 리고 그것을 두루 계산해서(遍計) 이름을 붙인다. 요컨대 변화하는 현상의 모습 속성은 실체가 자성이 없다. ‘相 無自性’이다. 비어(空) 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은 실체가 없 다.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그것을 파악하려 든다. 말이 가진 ‘자성’을 그것에 씌운 다. 그러다 보니 현상의 모습은 실재하는 것이 된다. 임시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변계소집의 상을 ‘망상 분별’이라 한다. 망상인 이유는 말을 가지고 모습에 붙이다 보니, 모습이 실재하는 것, 자성을 가진 것으로 착각한다. 파지가 보주의 비유에서는

‘惑亂’된다고 한다.

붓다는 ‘욕망 집착’이 망상을 낳는다 본다. 여기에서는 ‘이름·말’이 대상을 실재 존 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망상 집착을 낳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큰 문제가 相과 性의 구별이다. 성과 상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붓다와 아비달마 이론에서는 ‘성性’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붓다의 이론은 경험론이 다. 니미타에 근거한다. 따라서 ‘相’ 개념이 중심이다. ‘性’ 개념은 아예 없다.

대승 불교에 오면, 어느 순간 ‘性’ 개념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自性’이 그것이다.

용수의 중관 사상에는 ‘성’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자성自性’은 sva·bhava이다. 영 어로는 self being이다. ‘sva·bhava’는 직역하면, ‘스스로 존재함’이다. 산스크리트어 나 영어로 보면 ‘性’이라는 부분은 없다. ‘sva·bhava’의 뜻에 맞게 ‘自性’을 번역하 면, “‘스스로’인 본성” “‘스스로’라는 본성”이다. 그러나 한문 문법에 따르면 ‘自性’은

‘자기 본성’이다. 이는 ‘스스로 존재함’이라는 ‘sva·bhava’의 뜻과는 별 상관이 없다.

번역을 다시 보자면, ‘sva·bhava’에서 sva =自, bhava =性이다. 전자는 맞다. 후 자는 틀렸다. bhava는 ‘존재한다’는 말이지, ‘性’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다 보니, 性을 넣어서 ‘自性’이라 한 것이다. 이 ‘性’은 용수 사상 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번 물꼬를 트고 난 뒤에는 계속 ‘性’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중국식의 사유 방법이 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심밀경 은 ‘변계소집相, 의타기相, 원성실相’이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相→性으로 변했다. 즉 遍計所執‘性’이라 한다. 이는 인도에 없는 용어인 것 같다.

* ‘相無自性性’에서 마지막 性은 ‘성격 성질 본성’이다. 이것에 해당되는 산스크리 트어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것 역시 ‘自性’의 ‘性’처럼 의미상 붙인 것이 아닌가? 인 도적 발상은 다 相이고, 중국식 사유가 性이다. 차이가 크다.

전체적인 의미를 볼 때, 마지막의 ‘性’이라는 말은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안 넣어

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아마도 번역자의 노파심 때문에 넣은 것 같다.

性 ① 본성 (본래 가진 성향) ② 본질, 성격. ③ 성품, (개인적 특질) 품성. ‘品’은 ‘상품 중품 하품’처럼 구별 기준이다. 불교에서는 ‘성품’이라 한다. 신유학 연구자들 일부는

‘성품’이라 하지만, 대부분은 ‘본성’으로 번역한다. ‘성품’은 틀린 번역이다.

* 변계소집의 相은 앞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첫째 말(의 자성)을 가지고 현상의 속성·

모습을 보기 때문에, 모습이 실재하는 것, 자성을 가진 것으로 집착하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둘째, 依他起의 모습을 찾을 때 변계소집의 모습에 근거할 수도 있고, 그것의 정체를 자각할 수도 있다.

통속적으로는 변계소집성을 ‘망상 분별’이라 한다. 이는 심한 이야기이다. 망상(妄 想)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보는 것이다. 정신병의 일종이다. 상상-공상-환상-몽상-망 상 순으로 심각한 것이다. 현상의 모습이 8식의 씨앗이 드러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것은 드러난 것으로서 존재가 있다. 절대로 망상으로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현상의 모습이 변하는데, 그것에서 불변의 자성을 씌우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 이 변계소집의 모습이다. 이것 역시 망상 분별은 아니다. 있는 모습에다 ‘자성’을 붙 이는 것이지, 없는 모습을 망상해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망상 분별’이라고 하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이론이 너무 천박해진다. 유식 사상이 그렇게 얄팍한 이야기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