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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용의 효과

(1) 비용

영어 공용에 드는 경제적 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공용어 교체에 관 한 역사적 경험들은 공용어의 교체가 뜻밖으로 단기간에 걸쳐 아주 작은 비용 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어 공용은 공용어의 교체가 아니라 다만 세계의 표준 언어를 또 하나의 공용어로 삼는 것이므로, 과정이 비교적 원활하고 비용도 자연히 적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미 영어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므로, 영어 공용을 시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 시설은 갖 추어진 셈이다. 필요한 조치들 가운데 일차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들은 비용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정작 우리 시민들이 크게 치러야 할 것은 감정적 비용이다. 언어가 근본적 중요성을 지니고 민족어가 민족의 특질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므로, 모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에 대해 깊은 정을 품는다. 따라서 영어 공용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재촉할 조선어의 쇠퇴는 지금 우리 시민들에게 큰 감정적

119 -비용을 강요할 것이다.

비록 우리에겐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크지만, 그런 감정적 비용은 일회적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배운다면, 그들의 충성 심은 영어로 향할 것이다. 더러 사라진 민족어인 조선어에 대한 그리움을 품을 때도 있겠지만, 그들은 조선어를 모국어로 갖지 못한 사실을 슬퍼하지 않을 것 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다섯 세대 전 개항기까지 오랫동안 조선인들이 자신 들의 진정한 문자로 여겼던 한문이 실질적으로 사라졌지만, 누가 그런 사정을 슬퍼하는가? 누가 자신의 선조들이 한글을 천시해서 거의 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한글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가?

(2) 혜택

영어 공용에 드는 경제적, 감정적 비용은 일회적이지만, 영어 공용에서 나오 는 혜택은 영구적이다. 그래서 영어 공용의 혜택이야 우리 후손들이 주로 누리 겠지만,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혜택은 비용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클 것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번역 비용의 절약이다. 정보와 지식의 양이 빠 르게 늘어나는데, 번역은 고급 인력이 오래 투입되어야 하는 까닭에 번역 비용 은 보기보다 크고 우리 삶에 점점 큰 부담이 된다.

보다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이점은 정보 처리의 확대다. 세계적 중요성을 지 닌 정보들은 실질적으로 모두 영어로 되어있으므로, 영어 공용은 우리 시민들 의 정보 처리 활동을 크게 늘릴 것이다.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던 방대한 정보 와 지식이 우리 사회로 들어오고 처리되어 밖으로 수출될 것이다.

정보 처리의 확대는 여러 긍정적 효과들을 가져올 것이다. 잘 인식되지 못하 는 효과는 우리 문화가 얻을 활력이다. 영어 공용이 우리 전통 문화의 쇠퇴를 부르리라는 걱정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상황을 잘못 인식한 데서 나온 단견 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 영어 공용으로 사라질 부분들은 아주 작다. 우리의 문화의 주류는 이미 오래 전에 서양 문명으로 바뀌었다. 흔히 전통 문화라 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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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선조들의 삶이 남긴 자취들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 것들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진정한 뜻에서의 문화인 경우는 아주 드물다.

전통 문화에서 사라질 부분들을 막상 대신할 것은 훨씬 발전되고 활기찬 현 대적 문화다. 지금 우리 문화의 생장점들을 살피면 이 점은 자명해진다. 영어 공용은 실은 전통 문화 자체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화 활동들도 경제적 차원을 지녔으므로 너른 해외 시장은 우리 문화 활동들을, 학문이든 예 술이든 북돋울 것이다.

(3) 영어 공용과 우리의 정체성

영어 공용을 반대하는 논거로 흔히 나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 다. 이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단견이다. 그런 견해는 전통적 문 화가 어떤 사회나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 었다. 그런 가정은 옳지 않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환경에서 그가 차지할 자리를 가 리킨다.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문화적 유산들은 그가 그런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뜻을 지닌다. 영어 공용에 관한 논의에서 뜻을 지니 는 우리의 정체성은 미래의 대한민국 국민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는 삶의 본질을 ‘미래에 대한 관심’

으로 보았고 그런 관점에서 ‘한 국가가 존재하려면, 그것이 미래를 위한 목적 을 지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그의 관점을 따르면, 국민의 본질적 특질은 ‘미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과거의 공유만으로는 국가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가 ‘공통된 과거, 공통된 언어, 공통된 민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미래’를 지니지 못해서 결국 영구적으로 나뉘었 다는 사실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떠받쳤다.

우리가 미래에 있고자 하는 위치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선 영어 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구 제국’의 시대에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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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표준 언어인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 의 정체성을 보다 잘 다듬어내도록 할 것이다.

(4) 영어 격리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어 격리(English Divide)’라 불리는 현상이 다. 영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생존에 필수적 기술이 되었다. 그래서 모두 영 어 습득에 크게 투자한다. 안타깝게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에게 좋은 영어 교육을 마련해 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된다. 조선조에서 지배 계급은 한문의 습득을 통해서 지식을 독점했 고 피지배 계급들은 지식에 접근할 수 없어서, 신분 제도가 영구적으로 유지되 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영어 공용은 사회적 투자를 통해서 영어를 일상적으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영어를 통한 가난과 부의 세 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질적 조치다.

우리 사회에선 “영어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사람들만 배우면 된다”는 얘기 가 흔히 들린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혐오스럽고 실질적으로 해로운 얘기다. 외 국인들을 상대하는 직업들과 직장들은 내국인들만을 상대하는 직업들과 직장 들보다 대개 낫다. 보수도, 직업의 만족도도, 사회적 평가도, 전망도 모두 낫다.

자연히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직업들과 직장들을 얻을 것이다.

직업과 직장은 무작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사 람들만 영어를 배우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자식들이 영어 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게 좋은 직업들과 직장들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 되는 것을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고, 실제로 자식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이 도 없을 것이다.

만일 조선어와 영어가 함께 쓰인다면, 가난한 어린이들도 태어나서부터 이 내 일상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들이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서 그런 환경을 제공하는 길이 바로 영어 공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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