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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들이여, 세일즈맨이 되라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100-106)

ReSEAT 전문연구위원 박장선

년 한국기계연구소는 중장기발전계획 수립에 착수했 다. 당시 연구소장 K박사는 연구소가 발전하려면 지금의 조직 형태를 대폭 개혁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 시 한국기계연구소라는 우산 속에는 온갖 기계기술 분야와 또 재 료기술 분야가 연구부와 연구실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중장기 발전계획의 기본방향에는 우선 연구의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기계 와 재료 연구그룹을 각각 독립시키고, 기계연구 분야를 다시 전문 분야별 대단위 연구조직으로 발전시킨다는 철학이 포함되어 있었 다.

연구원들이여, 세일즈맨이 되라 97 우선순위 1번으로 고려한 것이 항공기술 분야였다. 당시 연구원 6명으로 구성된 항공연구실은 기계공학연구부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작은 조직으로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항공과 관련된 기초연구를 하는 수준이었다. 연구실에는 2명의 리더가 있었는데 C박사가 항공 엔진 분야, S박사가 항공 유체역학 전공으로 서로 다른 연구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행기나 항공엔진개발 연구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즈음 소장은 정책연구실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항공연구실의 두 리더를 부른 자리에서 항공연구실을 항공연구소로 발전시키기 위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필자와 S박사는 중장기계획 수립과 병행하여 항공연구소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한 은밀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관의 앞날을 위해 큰일을 해내려면 굿부터 시작하는 법. 1박 2일 코스로 전 직원이 참여해 중장기발전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때 의도적으로 정책연구실과 항공연구실이 한 그룹을 형성하여 분임 토의하였다. 그 결과 발표한 토픽이 ‘웅비 2000’이었다. 이는 항공 연구소를 향한 연구원들의 날갯짓을 상징하는 표현을 담고 있다. 이날 발표된 ’웅비 2000‘은 10개의 사례 중 최고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항공연구소로 웅비하기 위한 계획수립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계획의 뼈대를 그리고, 항공연구실의 S박사가

국내외 동향과 수준, 항공연구소를 만들어야 하는 목적과 연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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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던 걸로 기억한다.

연구원들이여, 세일즈맨이 되라 101 장관의 주문내용과 필자의 소견을 인용해 항공연구소 설립계획안을 발표한 뒤 토론이 이어졌다. 바로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항공연구소 설립 계획안 작업에 착수했다. 수차례의 토론과 수정작업을 거친 후 초안이 완성되었다. 소장은 이미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하기 위한 준비를 지시 한 상태였고, 당시의 과학기술처와 항공연구소 설립계획안 협의가 진행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문연구소의 우주공학연구실을 통합하여 한국 기계연구소 부설 한국항공우주연구소로 출범하는 계획안이 이사회를 통과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드디어 우리나라 항공⋅우주개발 연구의 모체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대덕 연구단지 중심에서 항공기, 인공위성, 발사체, 위성영상, 달 탐사의 꿈을 키우는 요람으로 성장했다.

1988년 어느 날, 한국기계연구소 발전 워크숍에서 항공연구실과 정책 연구실이 한 팀이 되어 우리의 비전으로 제시했던 ‘웅비2000’이 한국 항공우주연구소를 잉태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기계 연구소 기관장의 철학과 관련 연구원들의 열정, 정부의 항공우주관련 정책과 결합하면서 오늘의 한국항공우주연구소가 탄생했음을 모두가 기억해주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연구원들이여! 미래를 향해, 우주를 향해, 웅비 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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