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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와 소통의 정치

VIII. 결론

1. 시민사회와 소통의 정치

근대적 사회구성에 있어서 시민사회는 일상적 삶의 다양한 양식과 관련된 제도들로 구성 되어 있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사적 영역에서 형성된 공공성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사적 경제체계 및 공적 행정체계와는 구분되는 질서로서의 ‘생활세계’에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완전한 사생활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일상생활의 제도와 시민운동을 포괄하 는 시민사회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일상적 삶의 양식과 욕 구가 공공의 제도와 운동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시민사회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고 무엇보 다도 이 영역의 이상적 지향은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자율적 사회통합을 지향한다는 점에 서 ‘소통의 정치’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오랜 권위주의 국가의 억압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을 거치면서 시민사회는 점차 소통의 질서를 확장했다. 특히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 민주화는 크게 신장되었고, 동반적 으로 시민사회는 자율적 공간을 팽창시켰다. 외견상으로 보아 다른 어떤 사회보다 활발한 한국의 시민운동은 제도정치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 더러 노무현 정부의 개혁개방정 책은 거대한 탈근대정치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권위주의의 폐쇄적 질서를 허물었 기 때문에, 권위주의 이후의 민주화는 당연히 소통의 질서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시민사회의 합리적 소통은 자율적 공공성에 바탕을 둔 사회통합의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저항의 전략에 바탕을 둔 정치․경제개 혁운동을 추구함으로써 균열과 대립의 구조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상의 제도영역에는 여전 히 권위주의 시대의 법적 장치와 불합리하고 폐쇄적인 관행이 유지됨으로써 합리적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통합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사회통합으로부터의 이탈과 사회적 균열이 확산된 데는 무엇보다 지구적 수준에 서 전개되는 거대전환의 사회변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변동의 계기는 1980년대 이래 지구적 수준의 거대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화와 정치민주화의 경향을 동반하는 세계시장주의의 거대경향은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요소들을 경쟁과 효율의 시장가치로 바꿈으로써 근대 사회구성체의 주요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제도적 관계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이러한 거대경향이 드러내는 시장의 팽창은 근대 사회질서에서 사회 관리의 보편적 담당자였던 국가의 능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즉 시장화의 경향은 노동시장을 비롯한 경제영역과 사회적 삶의 영역을 양극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사회갈등을 관리해야하는 국가의 공공성을 크게 약화시 킴으로써 다양한 수준의 사회균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중첩되어 더욱 심각한 사회적 균열은 제도정치와 시민사회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대립의 질서이다. 2000년대 한국의 정치권력이동은 그간의 민주화과정에서 불완전했던 정 치권력교체를 마무리하는 의미를 가졌다. 문제는 이 같은 권력교체가 분단체제의 이념적 균 열과 중첩되어 사회균열을 새롭게 확대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첩된 균열의 구조는 권위주의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를 소통의 정치로 전환시키 는데 결정적 장애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균열은 한국의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무거운 족쇄이자 변화의 발목을 옭아맨 덫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균열의 구조를 우리사회에 독 특한 극단적 주관주의의 갈등문화로 보고자 한다. 아울러 ‘사회권력’의 민주화를 통해 이를 넘어섬으로써 시민사회와 일상의 삶에서 소통의 정치를 확대하고 나아가 다양한 제도영역과 구조적 결합을 이루는 ‘시민공동체 패러다임’을 전망하고자 한다.

2. ‘공공성의 재구성’과 시민운동의 새로운 주기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세 영역이 서로 다른 질서로 구분된 것은 근대 사회구성에 대한 핵심적 설명방식이었다. 나아가 탈근대의 논리에서도 서구 신사회운동 혹은 삶의 정치는 시 민사회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운동정치의 양식으로 설명됨으로써 이 같은 세 영역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성을 갖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구분에서 시민사회의 공론장과 다양한 사 회운동은 국가 및 시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거점으로 간주되어 각 영역은 대립과 견제의 관계가 강조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서구 중심부사회에 불어 닥친 이른바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위기는 1980년대 이후 크게 확산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경향으로 이어졌고,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물결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된 시장화의 거대경향은 어느 사회든 경쟁과 해체의 경향을 보편화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 구성의 핵심적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질서를 재편시켰다. 이러한 변 화는 일반적으로 시장의 팽창과 국가의 축소, 그리고 시민사회의 강화라는 경향으로 평가되 었으나 실제로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관계는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조화되고 있다.

이 같은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재구조화 경향을 ‘공공성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각 영역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분석요소이자 이를 객관적으로 반영하 는 사회과학적 범주라고도 할 수 있는 ‘공공성’의 개념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공공성(公共性; publicness)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사적 이해를 넘어 형성되는 국가 혹 은 사회공유의 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과학의 대상과 범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21) 특히 공공성은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의 구성에 포괄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 21) 공공성에 해당하는 영어권의 용어로는 publicness, public relation, publicity, public sphere 등이 있다. 주 지하듯이 public sphere는 국가와 구분되는 사적 영역에서 형성된 공공의 의사소통 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버마스는 이 범주를 근대 부르조아 시민사회의 모순이 반영된 영역으로 주목한 바 있다(위르겐 하버마스, 2001:15-20). 이 범주가 갖는 공공성의 일반적 의미는 여론, 격분한 여론 혹은 적절한 정보를 갖춘 여론, 그 리고 공중, 공개성, 발표하다 등과 연관되어 있다(위르겐 하버마스, 2001:62). 이와 연속선에서 코헨과 아라토

문에 최근의 거시적 구조변동과 사회구조의 재구성을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개념도구가 될 수 있다.

우선, 국가는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법과 제도의 실질적 운영자로서 공권력에 기반한 강 제의 영역이며 권력을 매개로 작동하는 지배와 복종의 정치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그 자체가 공공성의 영역이다. 국가의 공공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른바 공공관리 (public administration), 공공정책(public policy) 등으로 불리는 정부의 행정기능 혹은 공 공지출을 통한 재분배의 기능이 특히 강조된다.

시장은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교환, 소비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며 노동과 화폐를 매개로 형성된 질서이다. 따라서 시장질서는 본질적으로 이윤의 추구와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를 가지 는 기업의 기부행위와 기업출연의 공익재단 등이 시장이 갖는 공공성의 지표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기부나 공익재단의 활동은 그 영역이 분석적으로는 시민사회에 해당한 다는 점에서 시장은 원칙적으로 공적 기능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시민사회는 국가와 시장경제 사이에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으로 가족과 같은 친밀성의 영역, 결사체 영역, 사회운동, 공적 의사소통의 형태들로 구성된다(Cohen and Arato, 1992:ix). 시민사회는 공적 담론의 생산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영역일 뿐만 아니 라 결사와 연대를 기반으로 국가 및 시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갖는 영역이다. 따라 서 이 영역의 공공성은 여론, 공중, 공개성 등과 관련되어 있는 공론장(public sphere)이 특 히 강조된다(위르겐 하버마스, 2001). 말하자면 시민사회의 공공성은 사회성원 누구나 접근 가능성을 가지며, 전체로서의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슈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이 영역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공적이다(Bhargava and Reifeldms, 2005: 16). 공적 담론의 소통과 함께 이른바 NGO 혹은 NPO 등의 다양한 결사체는 사회운동과 사회서비스를 주도 하는 시민사회 공공성의 핵심적 지표이다.22)

이처럼 시장영역에는 공공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고, 국가와 시민사회에는 서로 다른 공공 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구성의 어떤 영역도 공공 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령 공공성을 절차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으로 구분해 본다 면 ‘절차적 공공성’은 특정의 조직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공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따르게 되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 등 모든 영역의 활동에는 법적 절 차와 규제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국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적 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시 민사회와 시장도 절차적 공공성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사생활과 자 발적 결사체, 공론을 형성하는 커뮤니케이션 제도, 나아가 사회운동조차도 법률성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규정된다. 시장에서의 고용과 투자, 시장거래의 투명성과 책임성 등도 법적 규제에 따른 절차적 공공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절차적 공공성은

는 다원성(plurality), 사생활(privacy), 법률성(legality) 등과 함께 pubicity를 국가 및 경제와 구분되는 시민 사회의 주요구성요소로 설정하고 있다. 이 때 publicity는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제도로 규정된다(Cohen and Arato, 1992: 346). 일반적으로 publicity는 public relations의 하위범주로 조직이나 특정의 견해가 출판물, TV, 라디오의 뉴스, 토크 쇼 등 미디어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보다 상위의 범주로서의 public relations는 조직이나 특정입장이 공중과 의사소통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고용자관계, 투 자자 관계, 기업커뮤니케이션, 공동체관계 등을 포괄한다(Beckwith, 2006: 3-4). 이제 이 논문에서 사용하는 공공성의 개념은 국가, 시민사회, 시장에 내재된 공적 기능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적 기 능들도 포괄한다는 점에서 광의의 공공성(publicness)이라고 할 수 있다.

22) 이러한 맥락에서 NGO혹은 NPO를 공공성의 범주에 따라 직능적 공공성(다양한 이익집단), 사회적 공공성(시 민단체, 종교단체, 사회복지 및 사회서비스 단체)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김상준, 2003).

사회의 대부분 영역에 걸쳐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따라서 공공성 재구성의 관점에서 우선적 으로 주목하는 것은 절차적 공공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의 영역이 실 제로 담당하고 있는 사회통합과 재분배를 위한 역할로서의 ‘기능적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 다. 말하자면 국가의 공공지출을 통한 재분배의 기능과 시민사회의 사회서비스 단체를 통한 복지의 기능, 시장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한 공적 기능 등이 직접적인 예가 될 것이다.

최근 세계시장주의의 확산에 따라 국가의 공적 복지기능이 약화되면서 공공성은 일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공성의 재구성’은 이 같은 공공성의 위기에 대응하는 거시적 사회질 서의 자기 조정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공성의 재구성은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공 적구조가 단순히 축소되거나 확장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영역 내부에 고유한 공적 기능이 다른 영역으로 할당되거나 새로운 기능적 공공성이 형성됨으로써 각 영역 간에 공적 기능의 호환성이 발생하고 구조적 경계가 불명확해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 시 민사회, 시장의 영역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따른다. 첫째, 국가주도의 공공성이 시민사회 및 시장에 할당됨으로써 국가공공성이 크게 약화된다. 둘째, 시장질서 내부, 구체 적으로는 기업조직 내부에 시장공공성이 새롭게 형성된다. 셋째, 시민사회 내부에는 NGO의 기능이 확대되고 NGO의 기능 가운데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이 크게 확장한다. 넷째, 국가, 시장, 시민사회 간의 제도적 수준의 협조관계가 강화됨으로써 협치(governance)를 통한 공 공성이 재구성된다.23)

이처럼 공공성의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국가, 시장, 시민사회에서 각 영역의 교호성이 높 아지고 협치의 관계가 확장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조적 수준에서는 이 같은 제 도의 개방이 공공성의 재구성에서 중요하게 포착되지만, 보다 근본적 사회변동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사사로운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의 해체는 공공성의 재구성과정을 정치․사회 과정 의 맥락에서 훨씬 더 명백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몸, 건강, 성 등의 이슈는 사적 친밀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사생활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변동과정에서 이러한 사 생활의 이슈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이슈로 공공화 되고 이러한 이슈는 다시 제도정치 및 정 부영역의 공적 이슈로 전환했을 뿐만 아니라 문제의 해결 방식 또한 정부, 기업, 시민사회 가 협치의 제도로 해결하는 경향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와 항의의 진지라고 하더라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제 도영역과 정부 및 시장요소가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바뀜으로써 공공성의 재구 성과정은 시민사회가 정부 및 시장에 대한 대립적 질서에서 협조적 질서로 전환하는 측면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사회변동의 조건에서 시민사회의 공적 활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은 적대적 저항의 전략에서 소통의 전략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이제 새로운 운동주기에 들어서 있다. 물론 사회운동이 뚜렷이 규칙적 인 주기를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사회운동을 언급할 때 주기론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운동의 형식적 유사성에만 주목하게 되고 실질적 차이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새로운 ‘운동주기’를 강조하는 것은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운 23) 최근의 국가이론은 대부분의 시각에서 국가와 사회의 불분명한 경계와 상호침투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러 한 경향은 첫째, 국가와 사회의 구성이 갖는 특수성과 상황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으며, 둘째, 국가와 사회 를 분리시켰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 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크리스토퍼 피어슨, 1998: 138).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제솝의 ‘전략-관 계의 접근’인데 국가능력은 국가체계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구조와 다양한 세력들이 취하는 전 략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국가는 제도적 고정성도 없고 공식적 실질적 통일성도 없는 다중적 경계를 갖는 제도적 총체라고 말한다(Jessop, 1990). 최근 제솝은 국가와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버넌스와 네트워크중심의 국가론을 제시하고 있다(Jessop, 1998;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