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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은 대중적이고 현상적인 관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쟁참여자와 일반대중은 경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현상적 관심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경쟁에 대 한 룰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공정거래정책은 정책의 정당성과 유 효성에 보다 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현상적 관심 의 대상인 경쟁의 과정과 결과가 강조될 때에 경쟁 자체는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특히 과학적인 분석과 객관적인 근거 에 기초하지 않은 자의적인 공정거래정책의 입안과 집행은 법과 공정거래 당국의 규제권위를 저하시킨다.

공정거래정책의 집행은 공정거래 당국의 독립성과 무관하지 않 다.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정책은 그 출범부터 독립적 기관에 의하 여 입안되고 집행되지 않았다. 비록 정부부처로서 공정거래위원회 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지만 아직 규제기관으로서 독립성을 갖 추고 있지는 못하다. 이는 공정거래정책이 순수한 경쟁정책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정부의 다양한 정책적 목적에 의하여 오염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은 1975년 당시 시행되고 있던 「물가안 정에 관한 법률」에 공정거래 내용을 첨가하여 「물가안정과 공정 거래에 관한 법률」을 입법화하면서 출범하였다.1) 그러나 물가안 정과 경쟁촉진이라는 서로 다른 목적은 경제정책이라는 상위개념 에 의하여 조정되고 조화되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에서 시행되었다.

1) 공정거래위원회(2001).

경쟁정책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독립된 행정 부처가 된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경쟁촉진은 산업정책, 중소기업 지원정책, 소득재분배 정책 등과 서로 연관되어서 최종 적으로 행정부의 경제부처에 속해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하여 시행된다. 현 공정거래법에도 이러한 내용이 이곳저곳에 반영되어 있다. 공정거래위원장은 기획예산처,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건 설교통부, 노동부 등의 중앙부처의 장관과 함께 경제부총리인 재 정경제부 장관이 주재하는 경제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한다. 경쟁정 책이 다른 정부의 경제정책과 조화되고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기본인식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정책은 정부의 다 른 정책과 독립되어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경쟁정책 은 정부의 다른 정책과 갈등 및 긴장관계에 있는 경우가 당연히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정을 공정거래법 자체에서 소 화하게 될 때 공정거래법은 투명성을 상실하게 되고 정부 정책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공정거래정책 이 독립된 준사법적 기구에 의하여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공정거래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 다. 우리나라 정치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입법‧사법‧행 정부문간의 균형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민주주의적 정 치제도에서는 입법‧사법‧행정부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주요 정책이 조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행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하고 힘이 커서 정치 삼부간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못 하다. 오히려 행정부 내의 정부부처간 알력과 갈등이 존재하여 서 로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 결과 많 은 사람들은 공정거래정책도 엄정한 법집행이라는 차원보다는 경 제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절되는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과 같은

성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피규제자인 기업들도 경기가 나쁘고 수출이 잘 안 될 때는 공정거래법규를 적당히 집행 하며 경기가 좋고 가격이 오르는 경우에는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 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을 규율하는 장치인 기업지배구조 는 내부통제와 외부규율로 구분할 수 있다. 내부통제방식은 대주 주, 소액주주 및 기관투자가를 포함한 주주와 기업의 주요 이해관 계자들의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가 직접적으로 기업의 방향과 경 영성과를 감독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반면에 외부규율방식은 기업 조직의 외부, 즉 시장에서 경쟁과 선택의 원리를 통해서 경영진을 규율‧견제하는 수단을 의미하며 시장규율 메커니즘market discipline mechanism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장규율 메커니즘이 발현되는 경로는 크게 자본시 장, 금융시장 그리고 상품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본시장 규 율메커니즘은 유가증권의 매매를 통한 주가의 변동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의결권 행사, 주주제안, 대표소송 등 다양한 주주권 행 사와 M&A를 통해 기업경영이 주주의 이해에 합치되도록 경영진 을 견제하는 장치이다. 자본시장에서 선택의 주체는 주주이며 관 련 법규로는 증권거래법과 유가증권 관련 법규 및 상법을 들 수 있다. 한편, 금융시장 규율메커니즘은 부실대출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행하는 신용평가 및 대출심사과정 또는 대출자금의 원활한 상환을 위해 행하는 사후 감독과정을 통해 경영진을 감독‧견제하 는 장치로서 채권자 및 금융기관이 선택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법규로는 은행법과 은행업 감독관련 법규, 금융지주회사법, 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 보험업법 및 보험업 감독규정, 종 함금융회사에관한법률, 상호저축은행법, 신용협동조합법, 신탁업 법, 증권투자회사법, 증권투자신탁업법 등이 있다. 상품시장 규율

메커니즘은 동종기업간 경쟁, 기업의 생산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를 통해 경쟁력이 상실된 기업을 퇴출시키고 효율성이 큰 기 업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경영진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소비자가 선택의 주체이다. 관련 법규로는 공정거래법을 들 수 있다.

<그림 1> 기업지배구조 메커니즘의 분류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개별시장의 논리에 맡겨야 할 규율메 커니즘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려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성향은 공 정거래법에서도 나타난다. 증권관련 공시제도나 금융관련 규정에 서 명시하여도 될 사항이 공정거래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 그것 이다. 경쟁촉진과는 관계없는 기업내 주주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내용 그리고 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와 같이 금융관련법에서 규 정되어야 할 내용이 공정거래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 집행수단에 있어서도 지분제한, 출자제한, 채무보증제한, 의결권 제한 등 자본 시장 및 금융시장의 시장규율방식이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을 통해 공정거래법에 도입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어느 부처에서 어떤 법을 갖고 무슨 규 제를 하든간에 시장만 잘 돌아가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

다. 그러나 한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라는 제도적 운용은 문제시하 면서 한 국가정책의 governance는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 적 일관성이 결여된 태도이다. 사실 공정거래정책이 상품시장의 경쟁뿐 아니라 다른 시장규율 메커니즘까지 다루게 되면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경쟁정책이 경제력 집중 억제정책에 의하여 구축驅逐, crowd-out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 재 공정위는 인력에 비하여 많은 업무량이 폭주하고 있다. 한정된 공정거래위원회의 인력은 경쟁촉진 업무에만 전념해도 충분치 못 하다. 그런데 그 효과가 의문시되고 외국에서도 시행되지 않는 경 제력집중 억제정책에 상당한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 다. 또한 전문성이 다르고 적절한 집행수단이나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못한 공정거래위원회가 자본시장 및 금융시장과 관련된 시 장규율 메커니즘까지 관여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이 같은 규율 메커니즘의 통합적 관리는 법제도의 효율성 측면에서 중복규제라 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부가 이를 통해 경쟁의 촉진자가 아닌 경쟁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기 때 문에 자율적인 경쟁환경의 조성과 시장참여자의 경쟁력 향상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점은 국민의 정부 경제개혁 과정에서 보다 두드러 지게 나타났다. 국민의 정부 4대부문 개혁과제 중에서 기업구조개 혁은 「5+3」원칙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각 부처는 일 사불란하게 주어진 개혁과제를 수행하였고 공정거래위원회도 이 러한 정부의 시책에 맞추어 공정거래정책을 조정하여 나갔다. 특 히 「5+3」원칙 과제 중 ‘상호채무보증의 해소’, ‘핵심부문 역량집 중’,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차단’ 등 3개 분야에 대해서는 공 정거래위원회가 중심에 서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기업지배구 조 개선의 추진과 관련하여 집단소송제, 집중투표제 등의 도입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소수주주권의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반영하였다. 또한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관련하여 결합재무 제표의 도입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이 상당하였다.2) 이처럼 공 정거래위원회는 외환위기하에서도 규율메커니즘의 통합적 관리의 주요축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작 공정거래위 원회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상품시장의 규율메커니즘은 느 슨하게 적용하였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반도체, 자동차, 중 공업부문 등에서 심각한 기업결합이 나타나고 독과점력이 심화되 는 상황하에서 경쟁을 촉진하여야 할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경쟁정책은 시장경제질서를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는 시장참여자에게 시장경제질서를 올바로 예측하게 하며 이에 따라 자율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 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 경쟁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 아서 나타난 독과점문제에 있다.3) 독과점문제에 기인되지 않는 재벌문제는 다른 시장규율 메커니즘에 위배되지 않는 경우 건강 한 경쟁의 결과로 인식하여야 한다. 경쟁정책이 올바르게 입안되 고 집행될 때 재벌문제의 증상을 치유하기 위한 여러 대증요법식 의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불필요하다.

엄격한 경쟁정책이 공정거래정책의 주된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4)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 방

2) 공정거래위원회(2001).

3) 신광식(2000).

4) 경쟁정책 중심으로 공정거래정책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논의를 한 대표적 연 구로는 이승철(1997, 1999), 전용덕(1997), 이재우(1997, 1999), 전인우(1998), 좌 승희(1998, 1999), 황인학(1998), 신광식(2000), 한국경제연구원(2000), 성소미‧

신광식(2001), 한국개발연구원(2001), 강명헌(2002) 등을 들 수 있다.

문서에서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방안(상) — (페이지 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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