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은 1960년부터 대서독 비방 프로그램인 흑색채널(Schwazkanal)방송을 시작하였 다. 1971년 SED의 제8차 전당대회는 동독 TV프로그램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SED서 기장으로 선출된 호네커는 전당대회에서 동독TV프로그램을 ‘지루’하다고 비난하면서
자체TV에 오락성 향상 프로그램을 촉구하였다. 그 당시 서독 TV시청을 금지하였던 종 전의 대서독 방송정책을 폐지하고 “동독 국민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TV채널을 선택할 수 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동독 국민들의 서독 TV시청을 허용하였다.
1980년대 동독의 방송정책은 서독방송들과의 경쟁에 역점을 두었다. 서독방송의 전파 월경과 동독인들의 호응은 동독체제에 위협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이러한 위기감이 프 로그램에 반영되어 경쟁 중심적 제작 및 편성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독의 방송프로그램에서 드라마와 오락 부문을 살펴보면, 제1TV 프로그램 내에서 가장 많은 방송시간을 차지하였던 드라마는 동독인들의 오락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1TV가 방송하였던 영화 및 TV드라마, 시리즈물에는 서독이 제작하였거 나 참여하였던 드라마가 일부 차지하였다. 해외에서 수입된 영화, TV드라마들의 대다수 는 구소련을 비롯하여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들이었다.
1980년대 들어와서 악화된 동독 경제 사정상 외국 프로그램을 수입하는 데 한계가 있 었기 때문에 나치 하에서 제작된 오락 영화를 방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독TV는 1년에 약 500편의 국내 및 해외에서 제작된 영화를 방송하였다.
오락 프로그램 가운데 쇼, 무용 및 퀴즈, 대담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이 들 프로그램들은 서독TV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요시간대에 방송되었다. 이들 프로그램들 은 동독의 유명 연예인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진행방식과 형태 등이 전체적으로 서독 프로그램과 유사하게 구성되었다.
다음으로 뉴스정보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시사뉴스(Aktuelle Kamera)와 정보 프로그 램(다큐멘터리, 매거진 프로그램, 생활정보 프로그램)은 각각 제1TV, 제2TV 전체 방송 시간의 14%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사 뉴스 프로그램은 국가행사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매거진 프로그램의 정치 보도 형태도 프로파간다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제1TV가 월요일 21시 25분부터 20분간 방송하는 흑색채널(Schwarzer Kanal)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60년부터 방송되기 시작한 흑색채널은 월요일에 방송되었고 제1채널, 제2채널에서 재방송되었다. 흑색채널은 동독인들이 서독 사회에 대해 갖는 동경심의 허구성을 밝히
면서 동독인들이 서독 TV를 시청함으로써 발생하는 정치 사회적인 부정적 영향을 중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Schnitzler는 서독 부호 출신 으로 2차대전후 서독방송사에서 종사하다 동독으로 이주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주로 대 서독 흑색선전 프로그램을 제작, 진행함으로써 동독TV의 정치 프로파간다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서독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몰락과 호전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일방적인 흑색선전은 교묘한 진행 방법을 통해 마치 동독 사회주의 당의 노선과는 무관한 동독인 전체의 의견인 것 같은 인상을 시청자들이 갖도록 제작되 었다.
1980년 이래로 동독 TV방송사는 주요 방송 시간대에 흥미 위주의 오락 프로그램 방 송을 강화한다는 기조로 프로그램을 개편해 왔다. 이러한 동독 TV방송사의 프로그램 개 편은 1978년에 서독의 ARD와 ZDF가 단행한 프로그램 개편 내용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써 1982년 말 이래로 동서독의 TV에서 20시부터는 오락 프로그램이 방송을 지배 하는 방송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편성은 1983년 제 1TV 프로그램은 주 평균 약 92시간 방송하였으며 제2TV 프로그램은 58시간 방송하였다. 제1TV, 제2TV는 상호보완적으로 편성되었고 대평 쇼프 로그램과 같은 오락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는 주말에 편성되었다. 정보 프로그램은 주 로 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에, 교육 프로그램은 주로 제2TV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 사 이에 방송되었다.
제 3 절 통일 동서독의 시사점 분석
동독은 1960년부터 대서독 비방 프로그램인 흑색채널(Schwazkanal)방송을 시작하였 고, 당시 서독은 동독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면서 서독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계몽 차원의 프로그램에 주력하였다.
동서독 관계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체결이다. 서독 사민 당(SPD)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총리는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였고, 정치 및 경제, 그리고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 및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5년~1970년대는 동서독이 수신제한시기였으며, 특히 1950년대에 폭발적으로 텔레 비전 수신기가 증가하자 동독에서는 방송 프로그램 수신을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고, 1971년부터는 침묵의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1980년 이루는 관용적 국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독정권은 서독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신을 금지하는데 실패하였 고, 침묵과 묵인 속에 동독주민들은 서독 방송 프로그램을 수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서 1980년대 이후에는 서독 방송매체 수신행위가 동독에서 엄격하게 처벌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일 전 독일의 상황이 남북한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힘들다. 우선 남한과 북한 의 TV 전파 송출 방식이 전혀 다르고, 주파수를 사실상 고정시킨 라디오를 보급하는 북 한을 상대로 온전한 형태의 교류는 매우 어렵다. 1989년 동구권이 붕괴됐을 때 북한의 관영매체들은 사실 보도는 외면하고 김정일에게 보내는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 행사 를 보도했다. 북한에 언론다운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동서독의 모델을 북한에 적용할 수 없다. 통일에 관련되어 독일의 사례와 국내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독일은 베 를린이라는 정치적 통풍구도 있었고 우편 교환과 방송 청취도 가능했던 데 비해 상대적 으로 남북한의 상호 상대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통일과정에서 큰 장애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독일통일 과정에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수신하는 데 큰 장애가 존재하지 않 았던 상황에서 서독의 방송미디어는 동독 주민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서독의 라리 오와 텔레비전은 동서독의 현실과 사회, 문화를 소통하게 하였고, 동서독에 있는 독일민 족의 이질성을 극복하녀 독일통일을 촉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독일에서 방송이 영향을 준 사회통합적인 측면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독 일의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해 보면, 서독주민이 동독을 이해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작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문화적 통합을 견인하는 기능을 하였다
고 보인다. 즉 남북 양측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 사회체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상호교류를 통해 공통분모를 만들어내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방송의 중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조할 것은 남북한 방송사 간의 협력은 방송체제와 운영방식, 내용이나 제작자 의식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 먼저 차이보다 공통적인 관심과 필 요가 있는 분야를 파악하고 관련분야 협력이 이루어져야 하며 특히 방송 프로그램을 통 한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 제공되어 사회·문화적 이해와 공동의식 형성에 기본적인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동서독 통일 이전에 서독의 대표적인 통일 및 동독 관련 프로그램은 제2공영방송 ZDF에서 방송을 시작한 ‘건너편’(Drüben)이라는 보도프로그램과 함께 그 후속 프로그 램인 ‘표식 D' (Kennzeichnen)라고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처음에는 통일관련 방 송 의무 구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분단된 독일의 현실 의 객관적 자료를 제공하면서 동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동독에 대한 부정적 이미 지에서 탈피하는데 기여한 프로그램 이었다.
보도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통일에 대한 방송의 역할은 의식적으로 통일을 다루지 않 았다는 것이 강조될 수 있다. 즉 서독방송의 동독에 관한 보도는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 서 특별히 취급되지 않고 여타 나라와 같은 뉴스가치에 의해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동독과의 분단 상황을 수용하고 동독을 한 국가로서 인정한 사 회 전체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에 대한 과잉반응은 없 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언론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서독언론에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독일 통일에 서독언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통 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독방송은 통일에 대한 의 식보다는 보다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평화롭게 같이 살아야 할 관계로서의 동독을 상정
보도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통일에 대한 방송의 역할은 의식적으로 통일을 다루지 않 았다는 것이 강조될 수 있다. 즉 서독방송의 동독에 관한 보도는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 서 특별히 취급되지 않고 여타 나라와 같은 뉴스가치에 의해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동독과의 분단 상황을 수용하고 동독을 한 국가로서 인정한 사 회 전체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에 대한 과잉반응은 없 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언론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서독언론에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독일 통일에 서독언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통 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독방송은 통일에 대한 의 식보다는 보다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평화롭게 같이 살아야 할 관계로서의 동독을 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