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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원예조합 목찬균 전 조합장

농협과의 인연

목찬균 씨는 고교와 대학시절 4-H운동의 핵심 멤버였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농촌 현장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는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고향은 동

두천으로 고등학생 때는 양주군 4-H연합회 부회장을 했다. 1958년 서울 시립 대 농대에 입학해서도 대학 4-H의 멤버로 활동했다. 1964년 졸업하고 바로 고 랭지 농업을 하겠다고 대관령으로 들어왔다. 모교의 이원호, 박찬호 교수 등 은 사님의 영향이 컸다. 그 당시 4-H운동을 하던 친구들 중에서 일부는 공무원이 나 정치인이 되어 위로부터 개혁으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된다고 주장을 했지 만 자신은 현장 참여를 통한 농촌개발을 주장했다. 농협운동은 그러한 관점에 서 중요한 농촌운동의 일부라 생각했다. 그는 새마을운동을 할 때도 소득과 직 결된 새마을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 데 같은 맥락이다.

그가 농협의 일을 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대관령종서협동조합에서 채종 포사업을 하게 되면서였다. 1962년 설립된 대관령종서조합은 처음에는 비료배 급이 주 역할이었는 데, 1963년부터는 감자를 수매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목 찬균 씨는 조합은 농민 중심으로 운영해야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고, 이에 동 조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조합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합을 운 영하던 사람들은 농민 중심이 아니라 조합 중심으로 생각했다.

농업정책 담당자들과의 교류

고랭지 농업을 하다보니 농림부와 관계되는 일이 많아졌고, 정책과 관련하여 의견을 표시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농협중앙회와는 미8군에 채소를 군납하면 서 협력관계를 맺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시 중앙회 수원지부장으로 있으 면서 경기도가 군납할 여름 채소를 대관령에서 개발해서 납품한 염태근 지부 장이 강원도 농협본부장으로 영전되어 오면서 농협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게 를 되었고 나중에는 농협의 이사까지 되었다.

국립종자공급소 강원지소가 대관령에 설치되자(1976.7) 목찬균 씨는 감자채 종포를 운영했다. 종자공급소에서는 품질 좋은 씨감자를 많이 생산하기를 원했 지만 농민들의 기술수준이 문제였다. 정부는 농민 지도를 강화하여 농민의 기 술력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려 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목 전

조합장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농림부 강상원사무관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 하기에 씨감자의 수매가격을 대폭 인상하라고 이야기 하였다. 당시 kg당 1백 몇 십 원 할 때인데 3백 원으로 책정하라고 했다. 강사무관은 처음엔 펄펄 뛰더 니 결국 수긍하여 수매가격을 3백 원으로 결정했다. 아주 파격적인 가격 인상 이었지만 농가의 호응 역시 예상을 뛰어넘어 그 성과가 나타났다. 수매가 인상 은 그 다음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것이 채종포사업을 목표보다 적어도 수년 은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센티브를 이용하여 농민의 기술습득 의지를 자극하여 기술보급을 앞당기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장에서 보 이는 문제가 정책입안자들에겐 잘 안 보이는 한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고랭지 시험장과 주위 농민들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고랭지 시험장의 연구 결과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으니 농민들은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군납을 해서 돈을 좀 벌었고 목찬균 씨는 이들의 지도자로서 이 계통에서 이름 이 나게 되었다. 중앙무대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다보니 정책건의를 많이 할 수 있었다. 농림부 채소과장은 대부분 고랭지 시험장을 거쳐 갔다.

한 번의 낙선 후 무투표 조합장이 되다

대관령원예농협 조합장의 유고로 치러지는 보궐선거에 출마를 권유받았다. 선거등록만 하면 당선될 것이라 했는 데, 등록하고 나니 서울사람이 나왔다는 소리가 돌았다. 이 지역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조합장을 맡기겠냐는 의미다. 대 관령에 들어와 3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선거를 한다니, 갑자기 서울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선거인심을 보고 정이 떨어졌다. 그리고 낙선했다.

그 다음에 또 조합장을 하라고 추대했으나, 선거로 뽑는 조합장은 안 하겠다 고 했더니 경합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아 무투표 당선되어, 1995년 3월 조합장 이 되어 2기를 연임하고 2003년 3월 퇴임하였다. 연임 때도 선거는 치루지 않 았으며, 3선도 권유받았으나 70대의 나이로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산지유통사업의 추진

조합장이 되기 전 선진농업을 배우기 위해 해외 견학을 자주 다녔는 데, 가 장 인상 깊었던 것들이 육묘장, 선별기, 예냉시설 등의 유통시설이었다. 특히 육묘장은 하루 빨리 도입해 운영해보고 싶었다. 1990년 미국의 돌(Dole)과 흥 농종묘가 충남 입장에 육묘장을 지었다. 그 다음해에 정부도 전국에 4개 육묘 장을 도입하겠다는 발표를 듣고 맨 먼저 지원을 해서 대관령에 육묘장을 설치 했다. 육묘장을 잘 모르던 사람들이 그 효능을 알아보고 나중에는 서로 도입하 겠다고 치열한 로비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정책사업으로 시행 한 시설채소사업 중에서 확실하게 성공한 것이 육묘장사업이라고 하였다. 지금 은 약 200군데 정도 된다. 그가 조합장이 되었을 때 정부지원시설인 육묘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조합장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조합장이 되자 그는 농림부에 감자선별기 도입을 요청했다. 당시 박종서 채 소과장은 육묘장을 도입할 때 채소계장으로 일했던 박종서 과장이었다. 박과장 은 육묘장의 성공을 지켜보았던 터라 목 조합장을 믿고 지원해주었다. 그 다음 에는 예전부터 꿈꿔왔던 예냉시설을 400평 규모로 갖춤으로써 유통시설을 완 비하게 되었다.

다음 과제는 효과적인 출하조절을 통한 제값받기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 추는 것이었다. 대관령의 채소를 서울로 출하하면 소수의 상인들이 가격을 좌 지우지 하여 가격을 예측할 수 없었다. 가격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져도 서 울까지 가져간 채소를 가져올 수도 없어 현지에서 폐기하는 일이 흔했다. 만일 산지에서 공판을 할 수 있다면 출하조절을 용이하게 하여 불필요한 낭비를 없 애고 가격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지 공판장 개설 방안을 모색하던 차에 농림부는 4곳에 설치를 지원해준다 는 공고를 냈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최각규 강원지사를 찾아가 도비지원을 요 청했다. 사업설명을 들은 지사는 요청한 예산보다 많은 50억 원을 지원해주었 다. 현재의 고랭지 채소센터가 그 공판장이다.

산지유통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어느새 ‘목찬균이 하면 무엇이든 된다’는 소

리를 듣게 되었고, 관련 활동을 하기에도 쉬워졌다. 목 조합장은 농협중앙회에 고랭지채소협의회를 만들고, 고랭지 배추 수급안정사업도 만들었다.

고랭지 배추 수급안정사업

고랭지 배추의 수급안정 문제가 항상 골치였다. 중국배추 수입 문제로 중앙 대책회의가 있었는 데, 회의는 정작 논의해야 할 대책에는 관심이 없고 왜 국 산 김치가 비싼가를 놓고 논쟁만 하였다. 참석한 가공공장 대표들은 모두 고랭 지 배추의 수급 불안정 때문이라고 불평을 했다.

강상원 사무관이 목 조합장을 불러 고랭지배추 수급안정을 위한 대책을 만 들어 달라 했다. 예산을 지원할 테니 계약재배를 통해 수급 안정을 기할 수 있 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60억 원을 연 1~2%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예산당국과의 협의과정에서 예산이 160억 원으로 증액되었다. 목 조합장은 생산농가를 찾아다니면서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이들의 참여를 독려했지만 사용한 예산은 60억 원 밖에 되지 못했다.

사업이 끝나고 장관 주재의 평가회의가 열렸는 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160억 원의 예산사업을 60억 원 밖에 소진하지 못했으니 실패한 사업으로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목조합장은 이러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모 처럼 시도한 정책사업을 단 한번으로 접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아니다 싶었던 것 이다. 그는 사업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사업 첫해로 홍보가 덜 되고 그 이 점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니, 1년만 더 기회를 주면 반드시 성공시키겠 다고 참석자들을 설득했다. 모두들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이었지만 강운태 장관만은 의견을 달리했다. 강 장관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 중단해야 할 사업이지만 현장의 조합장이 저렇게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 1년만 더 하자”

고 결론을 지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고추 등 다른 채소 작목으로 확대되었 다. 목 조합장은 수급안정화사업의 전도사로 전국에 강의를 다니게 되었다. 지 금도 목조합장은 강운태 장관의 그 때 모습을 잊지 못하며 존경한다고 하였다.

목조합장은 전체적으로 자신이 제안하고 추진한 사업들은 모두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보통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하는 사업은 민간이 하는 사업보다 효율 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대관령원예농협은 다르다고 자부한다. 대관령의 산지 유통시설은 어떤 민간업자의 시설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산지유통

목조합장은 전체적으로 자신이 제안하고 추진한 사업들은 모두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보통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하는 사업은 민간이 하는 사업보다 효율 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대관령원예농협은 다르다고 자부한다. 대관령의 산지 유통시설은 어떤 민간업자의 시설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산지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