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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과의 인연

윤승혁 전 조합장은 농촌지도소의 지도사로 9년을 재직하다 농협으로 전직 했다. 농촌개발을 위해 일하겠다는 대학 때의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지도사가 되었는 데, 지도사는 활동 범위가 기술적인 면에 치우쳐 폭이 좁았다. 이보다는

생산, 유통, 지도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농협이 자신에게 적합한 직장이라 생각되었다. 1974년 전남 농협에서 단위조합 참사 공채시험이 있어 응시했는 데 수석으로 합격 했다. 참사는 요즘 직제로 보면 단위 조합의 전무 에 해당된다. 나주군에서는 환직을 해줄테니 농사계장을 해보라는 권유도 있었 지만 농협을 택했다. 당시 지도사 직급은 현재의 6급 공무원에 해당되는 데 농 협 참사는 이보다 월급도 적고 사회적 지위도 낮아서, 조건만 보면 농협으로 전직할 이유가 없었지만 미래를 생각해보니 농협이 자신에게 적합한 직장이라 생각되었다.

농협에서도 지도사업이 중요

윤승혁 참사는 남평농협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조합장에게 건의하여 발령받 기 1달 전에 지도소에서 같이 근무하던 직원을 스카우트해서 먼저 조합에 근무 하게 했다. 남평농협이 당시 형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실질적인 영농지도 를 하는 단위조합이 된 배경이었다.

영산강 상류에 위치한 남평지역은 일찍부터 채소농이 발달한 지역으로 수익 성이 떨어지는 벼농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윤 참사는 식량자급이 가장 긴급 한 농정과제였던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이는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는 나주의 뒤떨어진 벼농사 기술을 개선시키기 위해 벼못자리부터 고치기로 하였다. 농협 은 대형 못자리를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공급해주는 사업, 육묘대행사업(수도묘 은행사업)을 실시했다. 전국 최초의 일이었다. 당시 고건 전남지사가 지역 순시 를 하다 대규모의 못자리를 보고 호기심이 일어 남평농협에 들렀다. 지사는 못 자리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윤 참사를 치하하면서 일하다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지사에게 이야기하라는 말을 하였다.

생각보다 빨리 조합장이 되다

윤승혁 씨가 참사로 근무한지 4년째에 조합장이 그만 두는 사고가 발생했다.

첫 조합장부터 내리 3명째 중도하차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9. 조합 주변 에서는 남평농협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는 조합을 잘 아는 사람이 조합장이 되어야 한다며 윤 참사에게 조합장 출마를 권하였다. 윤 참사는 언젠가 조합장 으로 나설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당시에는 시군조합장이 시장 군수와 협의하여 단위농협 조합장을 임명하였 는 데, 전남지역본부에서는 조합장 후보자를 대의원 선거를 통해 복수추천을 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는 작업의 일환으로 남평농협을 시범조합으로 선정 했다. 하지만 대의원들은 윤승혁 참사를 단수 추천하여, 1977년 8월에 조합장 이 되었다. 그는 조합장에 취임하면서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상탁하부정(上濁 下不淨)이라는 글을 써서 책상서랍에 넣어놓고 서랍을 열 때마다 이를 보았다.

앞을 보는 사업개발

1970년대 후반 농번기 노동력 부족현상이 심화되면서 농업기계화의 필요성 커졌다. 1980년대 초 윤 조합장은 정부의 농업기계화사업을 적극 수용하여 남 평조합에 기계화영농단을 조직했다. 논 200정보를 목표로 육묘에서 수확 건조 까지 일관작업을 하는 기계화사업에 3억 5천만 원을 투입해 농기계 50대를 구 입했다. 이 사업은 일손부족을 해결하고 노동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지역사회 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농기계화사업으로 직원들이 많이 고생했다. 모심을 때는 전 직원이 여기에 매달려야 했고, 자기 고유 업무는 야근이나 주말근무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 직원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조합에 애정을

9 남평조합은 1969년 이동조합에서 면조합으로 통합되었다.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합을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도 차츰 수습이 되어갔다.

윤 조합장은 농기계화사업을 추진하면서 4~5년 정도를 미리 내다보고 세우 는 중장기계획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합장이 바뀌더라도 조합장 개인의 선호 에 따라 조합사업이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합장 임기가 3년이 므로 임기보다는 긴 4~5년 정도가 적합할 것 같았다. 농자재백화점사업은 이 생각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농자재백화점

농기계화사업은 지역의 반응은 좋았지만 감가상각비가 3~4천만 원이나 들어 가 이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수년을 지속하다 보니 조합 재원이 바닥났다. 대 체 수익원의 마련이 절실해졌다. 대안으로 비료, 농약, 농용 필름, 기계 등의 농 용자재 구매사업을 기획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각종 농자재를 한 곳에서 구입 할 수 있다면 농민들에겐 더 없이 편리할 것이고, 조합 수익에 도움이 된다면 바로 농협이 해야 할 사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합의 안팎으로 반 대가 심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사업이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고민하던 차에 일본의 안성농협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 데 거기 서 농자재 구매사업을 훌륭히 해내고 있음을 보았다. 이에 확신을 갖고 ‘농용 자재백화점’란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예상되는 문제 중 미판매 재고, 외상대금 회수, 자금조달 등 세 가지 를 해결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전체 사업이 실 패로 끝날 위험이 있었다. 수없이 고민을 하다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미판매 재 고를 희망 품목으로 교환하거나 반품을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다 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다. 외상 문제는 일정 기간은 무이자로 해주고 그 이후부터는 대출금 이자를 적용하여 받는다면 문제가 풀린다. 운용자금 문제는

구입처에서 자재를 외상으로 매입하고 팔아서 갚아준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 래서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는 업체와 계약을 해야 한다는 계약지침을 만들 었다.

사업을 출범시키기 전에 ‘농용자재백화점’이란 이름으로 농민신문에 광고를 냈더니, 여기저기서 큰 반응이 나타났다. 자재업체들이 앞다투어 자기 제품을 사주라고 몰려들었다. 먼저 KBS에서 취재하여 방송하자, MBC도 뒤따라 보도 하여 홍보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다. 우려했던 세 가지 조건의 계약 문제도모 든 업체들이 수용하겠다고 나섰다. 구입은 외상으로 하고 현금으로 판매한 대 금으로 약 4천만 원 정도의 유동자금이 생겼다.

일을 정확히 정의하고 추진했더니 모두 잘 풀렸다. 조합원들은 농용자재 구 입, 신용 이용, 세상 소식 알아보기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조합을 찾는다. 그들 은 조합에서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자 조합을 더 이용하였다. 조합의 전 이용사업이 저절로 달성되었다. 1996년 무렵 조합원의 농가 조수익 대비 예수 금 순증 비율로 측정하니 약 70%로 분석되었다.

농용자재사업은 수익이 났지만 농기계사업은 그렇지 못했다. 농기계의 보급 이 늘어나면서 농기계 임작업을 하는 업체가 늘어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지조 건은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1980년에 시작한 농기계화사업은 7~8년 정도 운 영하다 중지했다.

쌀농업 대책

윤 조합장은 1990년 농업연수원 교육을 받을 때 농림부 양곡담당 공무원, 농 협양곡부장, 경제기획원 농업담당 공무원 등과 한 팀이 되어 과제를 수행했다.

자연스럽게 쌀문제를 팀과제로 선택해서 토론하고 대안을 강구한 결론이 일본 처럼 RPC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그 다음 해에 합덕, 의성 안계 등 세 곳에 RPC를 시범사업으로 도입했다. 남평조합은 1992년 RPC를 설치한 17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윤 조합장은 RPC를 도입하기 위해 남평의 미질 개선을 위한 연구 용역을 맡 겼다. 연구는 대상 농지 850정보 중 400정보에 토질 개선을 위한 객토가 필요 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객토 비용은 단보당 20만 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 정되었는 데, 농민들은 이 비용을 부담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윤조합장은 도의 회농림수산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나주군수에 비용 지원을 요청했더니 전례가 없어서 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농민과 군, 이웃 농협들을 설득해서 농협 1/3, 군 1/3, 자부담 1/3의 안을 만들어 합의했다. 객토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고, 남평 쌀의 품질은 완연히 좋아졌다.

품종 문제는 전남도 진흥원이 보유한 일본 종자를 시험재배를 거쳐 도입하 였다. 남평 쌀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밥맛 좋은 쌀로 평이 났다. 지금은 ‘왕건이 탐낸 쌀’로 브랜드화 되어 팔리고 있으며 소비자가 뽑은 맛있는 쌀로 선정되었다.

남평농협은 조합원이 원하는 쌀은 100% 팔아준다. 시중가격보다 5%를 더 주기 때문에 조합원은 불만이 없다. 판매가격이 하락하여 발생하는 손실이 발 생할 경우를 대비해 ‘미곡 유통 손실기금’ 50억 원 조성을 목표로 추진한 결과 2010년에 달성했다. 조합의 손익으로 유통손실보전금을 충당한다.

섬기는 리더십

주인은 비 맞고 있는 지게를 보지만 머슴은 보지 못한다. 주인의식의 차이다.

주인은 비 맞고 있는 지게를 보지만 머슴은 보지 못한다. 주인의식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