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 위에서 색채는 필연적으로 형태 안에 존속된다. 색채는 내적인 음향을 여전히 유지한 채 외곽선(outline)이 암시하는 대상과 함께 관계 맺는다. 형태를 만드는 외곽선은 평면에 가시성을 부여하지만 가시세계 의 외관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47) 말씨에 머무르던 색채에 형태가 제시 됨으로써 구체적인 어휘로 만들어진다.48) 색채로 뒤덮인 표면은 형태로 구분되어 보임으로써 둘로, 즉 물감이 칠해진 평면과 투사된 대상으로 쪼개진다. 이 분리와 새로운 접속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색채의 작용과 함께 형태가 지시하는 대상 자체가 갖는 고유한 감정적인 음향이 융합되 며 작용한다. 그래서 재현의 대상이 그냥 선택 되는 일은 없다. 형태는 평면 위에서 가시성을 제공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맡기도 하며 적극적으 로 형태를 왜곡함으로 대상 자체가 갖는 감정의 진동을 잡아 늘이거나 압축시킴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예술가가 색채의 건반을 두 드려서 감정을 작용시키는 것처럼 형태도 그 특성에 따라 영혼의 작용을
47) 메를로-퐁티는 선에 대해, ‘선은 가시세계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하는 것이 요, 사물들의 청사진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Merlleau-Ponty, Maurice, 앞의 책, p. 122
48) “형태는 그것을 가시성 속에서 설치하는 말들 없이는 진척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 여주는 매체라는 것이다.”
Ranciere, Jacques, 앞의 책, p. 165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경험적이다.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은 색채가 제거되어도 무엇임을 알아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 다. 이 같은 가시성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 보자. 흑백으로 촬영된 사진 ([도판 7])에서도 여문 봉우리에서 푸르른 봄철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심지어 튤립의 꽃망울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비슷한 어떤 꽃망울을 한 번이라도 본적이 있으면 이 꽃망울이 튤립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모른 채 봄철에 여문 꽃망울의 정취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경험 속에 있는 형체 는 기대된 색채를 유발한다. 꽃망울의 형태에서 봄철의 앳된 녹색을 상 상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가는 기대의 힘을 이용하여 예술적 목적을 위해 평면 위에서 형태와 색채를 새로운 논리로 관계시켜 간다.
[도판 7] 봄철 튤립의 꽃봉오리 사진
감정의 실체를 찾아 완결된 회화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 는 표현의 자유보다는 제약이 많아 보인다. 무엇보다 한 화면 안에서 색 채와 형태는 명확한 ‘내적인 필연성’49)을 갖추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감정의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화면 안의 색채와 형태는 통일된 논 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환영의 대기 안에서 일관된 색조를 유지하 는 것’, ‘가시성의 정도에 있어서의 통일감(혹은 의도적인 해체)’ 그리고
‘현실적인 대상의 선택’은 화가 고유의 논리를 위해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색채와 형태 그리고 대상이 화면에서 구성될 때 작품의 고유한 내적인 음향이 해를 입지는 않는지 계속 살펴가며 진행한다. 다 시 【작품 3】<밤 호수>으로 돌아가 보자. 푸른 기운이 감도는 사색적 인 녹색의 호숫가에서 한 인물이 서성이고 있다. 본인은 작업 과정 중에 실험하듯이 색채의 변화를 살피며 전체적인 분위기잡고 나서, 마지막으 로 인물을 호숫가의 숲 속에 그려 넣었다. 그러고는 며칠을 지켜보다가 인물을 닦아내고 새롭게 수정해 그려 넣어서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 지켜보게 된 이유를 후에 깨달 았다. 인물이 홀로 찾은 사색의 장소로서 호수는 충분한 작용을 하는 것 에 비해서 마지막에 그려진 인물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도판 8]) 첫 번째로, 전채적인 색의 구성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면적은 굉장히 좁은 것에 비해 세밀한 터치가 주는 형태의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것과 두 번째, 옷에 쓰인 색들이 사실의 색에 근거를 두고 무심코 그려 넣었던 것이 불분명한 음향을 낳았는데 이것이 전체적인 음향을 해치고 있다.
바로 잡기 위해 인물에서 사색적인 녹색과 충돌을 일으키는 난(暖)색을 모두 제거하고 전체적인 그림의 터치와 비슷한 단계의 붓질로 형태를 만
49) 칸딘스키는 순수한 예술적인 원칙인 내적 필연성을 강조하는데, 그 근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필연성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첫째, 창조자로서 모든 예술가는 자기의 고유성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시 대의 아들로서 모든 예술가는 자기의 고유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셋째, 예술의 봉사자 로서 모든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예술의 고유성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Kandinsky, 앞의 책, pp. 76-77
들기로 시도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에는 많은 의심 을 갖고 이렇게 수정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수차 례 붓을 들었다가 놨었다. 초보화가에게 재현의 문제와 영혼의 작용을 동시에 가늠하며 진행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어려웠던 도전은 새로운 성취가 되었다. 수정된 인물의 피부와 옷은 흰색에 가까 워짐으로 침묵이 흐르고50) 인물의 불안정 된 형태와도 어울리게 되었 다.([도판 9]) 이처럼 회화에서 형태와 색채는 내적인 연관성을 위해 사 실의 많은 부분들이 포기되고 회화의 합목적성을 위해 새롭게 변형된다.
형태로 가시성이 확보되면 이제 다른 요소들과 종합된다. 화가는 형태와 다른 조형요소들 사이의 작용에 개입하여 목적에 맞게 새로운 연출을 하 는 것이다.
50) “흰색은 물질적인 성질이나 실체로서 모든 색들이 사라진 세계의 상징과 같다. 이 세계는 우리들로부터 너무 높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런 음향도 들을 수 없다. 거기에는 커다란 침묵이 흐른다. 그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뛰어넘 을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무한으로 들어가는 차가운 장벽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 과 같다.”
Kandinsky, 앞의 책, p. 94
[도판 8] 【작품 3】<밤 호수>의 부분 수정 전 [도판 9] 【작품 3】<밤 호수>의 부분 수정 후
【작품 4】<썬베드>에서의 인물은 정반대의 작용을 목적으로 색채와 형태 가 만들어졌다. 화면에서 지배적인 색채 인 녹색의 뉘앙스가 노란색으로 기울면 서 활기를 갖는데 인물은 그보다 더 나 아가 혈색이 가득한 붉은 톤으로 그려 지고 있다. 붉은 기운이 도는 피부색과 함께 인물의 형태 역시 분명하고 자세 또한 견고하게 그려냄으로 뒤돌아선 인 물의 표정은 읽을 수 없지만 기쁨을 알 아챌 수 있다. [도판 9]와 [도판 10]에서 그려진 각각의 인물들의 형태는 작품 내적인 목적에 따라 다르게 사실로부터 왜곡되어 표현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