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평면에서 매체의 물질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사실 재현적인 의미에서 유사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회화작품에서 물질이 그대로 노출된 채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재현의 유사성을 뛰어넘는 또 다른 회화적인 가치를 창출한다.51) 비 오는 날 과거 동양에서는 담벼락 에 멋진 산수화가 그려졌다. 이것이 산수화가 되기에는 빗물이 담벼락에 만드는 자연스러운 얼룩과 산수화를 볼 수 있는 감식안, 이 두 가지만으 로도 벽에 멋진 산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비단이나 종이에 수성으 로 그려진 많은 산수화를 즐겼던 동양인의 훈련된 눈은 빗물이 만든 자 연스러운 얼룩에서조차 과도할 정도의 투사능력이 발휘되면서 그의 마음 속에 자연스러운 효과가 풍성한 산수화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스러운 효과는 벽이 비에 젖어감에 따라 우연한 효과로 시시각각 불완전 한 형상들을 만들어 내고 이는 훌륭한 투사의 스크린이 되어준다.

11세기 중국 송제(宋帝)가 진용지(陳庸之)의 작품을 논한 것을 보면 작 품제작에 이러한 자연스러운 효과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겼는지 알 수 있다.52) 불완전한 물의 자국에서부터 생명력을 가진 산수화를 찾아내

51) 토니 고드프리는 피터 도이그(Peter Doig)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그는 그의 이미지가 물질적으로는 불완전한 채, 완결되어 보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또한 도이그의 작품 은 현실의 대상을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칠해진 표면이 어떠한지가 중요한데, 즉 표면 에 대한 지각이 큰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Godfey, Tony, 『Painting Today』, Paidon Press, 2014, pp. 250-56

는데 생기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비롯하기 때문에, 송제는 자연 스러운 물질의 흔적으로부터 대상을 투사해 내는 마음의 훈련이 중요하 다는 것을 화가에게 충고하고 있다. 정확하게 묘사될 때 제공된 많은 정 보량은 인식의 편리함이 늘어나는 만큼 상상의 여지를 줄인다. 반대로 비단 위에 물 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남은 흔적에서는 환영이 정확하게 인 식되는 가능성을 줄어드는 만큼이나 보는 이의 능력이 더욱 유도되는 것 이다. 송제가 말하는 하늘이 만든 그림53)은 인간의 마음속에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음악54)이 자동적으로 작동되게 만드는 그림을 말한다. 화가 가 자연스러운 효과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은 동양의 산수화를 제작하는 법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도판 11]<인왕제색 도>에서 정선이 종이에 활달한 필치로 축축한 바위를 그려 넣은 붓 터 치나, 만년의 렘브란트 작품들에서 보이는 큰 붓의 거친 터치들에서 우 리는 알아보는 쾌감55)을 맛본다. 렘브란트의 후계자들은 이 ‘알아보는’

놀이를 회화의 주된 즐거움으로 여겼다. 인식을 방해하는 상충되는 요소 만 제거된다면, 평면의 특정한 구역에서 거친 붓질이나 물의 흔적은 아

52) “이 작품은 기법은 좋으나 자연적인 효과가 결여되어 있다. 그대는 낡아 황폐해 버 린 벽을 하나 잡아 그 위에 하얀 비단조각을 씌어 놓아라. 그리고 아침이나 저녁이나 그것을 쳐다보라. 마침내, 그 비단을 뚫고 그대가 그 무너진 벽의 폐허를 볼 수 있을 때까지, 그 튀어나온 부분, 평평한 부분이며 갈라진 틈새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내내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눈에 새기면서 말이다. 그 중 튀어나온 부분을 산으로, 더 낮은 부분을 물로, 움푹 패인 부분은 협곡으로, 갈라진 틈새는 실개천으로, 밝은 부분은 근경으로, 어두운 부분은 원경으로 생각하라. 이 모든 것을 완전히 그대 속으 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이내 그대는 사람과 새와 식물 그리고 나무들이 그 안에서 날 고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대는 그대의 생각대로 붓을 움직여도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사람이 아닌 하늘이 만든 그림처럼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진용지의 눈은 열렸고, 그때부터 그의 양식이 좀 더 나아졌다.”

Giles, H.A.,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hines Pictorial Art, Shanghai and Leiden』, 1905, p. 100: Gombrich, 앞의 책, p. 188의 재인용

53) Gombrich, 앞의 책, p. 188

54) “음악적인 음은 영혼에 이르는 직접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음악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향을 일으킨다. Kandinsky, 앞의 책, p. 64

55) 곰브리치는 암시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명쾌한 이미지 보다 더 생명력이 있 으며, 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Gombrich, 앞의 책, p. 197

주 효과적인 투사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56) 초연한 붓질로 효과를 얻어 내는 방식은 점점 대담해졌고, 현대의 많은 표현주의적인 작가들은 거친 붓질의 정도를 넘어서 물감을 들이 붓기까지 함으로 그 효과를 적극적으 로 활용하기도 한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과거의 시도에 비해 굉장히 과 격해 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회화를 접하는 우리들의 눈이 물질을 건너서 읽는 것에 점차 적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효과는 그려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이의 표 면과 뿌려진 물감의 우연한 작용 속에서 자리잡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컨 또한 물감의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우연한 효과가 그의 작품에 적 극적으로 개입되도록 유도하고 있다.57) 그런 다음 화면 위에 물감의 작

56) “모든 단서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굳이 소용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요 소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환영이 명확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순이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의 효과로써 더 많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Gombrich, 앞의 책, p. 197

57) 실베스터는 베이컨의 인터뷰를 기록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내 경우는 모든 그림이 우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이 보다 짙어집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예상은 합니다만 그대로 진행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그림은 물감에 의해서 자체적으 로 왜곡됩니다. 나는 아주 넓은 붓을 사용하는데, 내가 작업하는 방식으로는 종종 물 감이 어떻게 작용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물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능가하는 뛰 어난 작용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우연 중에서 어떤 것들을 보존할지 결정하는 것은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 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우연의 활력을 간직하면서 연속성을 지키고자 합 [도판 11]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종이에 수묵, 79.2 x 138.2 cm, 1751 [도판 12]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부분

용이 만든 활력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거나 지워내는 것이다. 화가는 자 신의 재료에 물성을 파악해감에 따라 우연을 다루는데 능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붓을 손에 쥔 것을 잊고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아 교와 분채와 먹 등의 재료의 독특한 물질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 요하다. 다시 고쳐서 그리는 것은 물질이 갖는 자연스러운 효과를 해치 기 때문에 제작의 채색의 순서를 신중히 고려하여 예상되는 물질의 배열 이 계획한 구역에 자리 잡도록 신중을 기한다. [도판 13]【작품 8】<피 날레>의 부분 1은 은행나무가 있는 마당의 뒤편에 펼쳐진 숲을 암시하 기 위해 어두운 초록색을 큰 붓질로 채색하였다. 화판을 새워놓고 칠했 기 때문에 두껍게 발린 일부는 흘러내려가면서 건조가 되었다. 결과적으 로 표면이 고르지 않게 채색된 부분의 농도가 자연스러운 흘러내리는 효 과에 의해 얼룩얼룩해짐으로 숲으로 암시된 이 구역의 면적에 투사의 가 능성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도판 14]【작품 8】<피날레>의 부분 2를 보면 좌측 집의 선명한 아웃라인과 아래에 그려진 나뭇가지는 환영의 공

니다.”Sylvester, David, 앞의 책, p. 147

[도판 13] 【작품 8】<피날레>의 부분 1 [도판 14] 【작품 8】<피날레>의 부분 2

간에서 대상의 전후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집 뒤에 있는 것처럼 여 겨지는 이 구역의 추상적인 면적은 정확히 재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자동적으로 마치 무성한 숲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을 건너 서 읽는 것은 ‘환영의 닻을 내릴 탄탄한 정박지’58)는 없지만 투사의 즐거 움을 크게 만든다.

초연하게 뿌려진 물감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배열을 남기 곤 한다. 그러나 물질이 평면 위에 아름다운 배열로만 가치를 지니는 것 뿐만 아니라 환영적인 가치를 부여하려면 화면의 구조 속에 다른 구성 요소들과 상호 관계 속에 적절한 곳에 배치되어야 한다. 【작품 9, 10】

의 두 작품은 제작 시기는 차이가 있지만 이와 같은 연구를 하던 중에 빠르게 그려 본 습작으로 화면의 다른 구성요소들이 모두 자리 잡은 후 에 마지막 단계에서 호분을 섞은 아교 액을 뿌려 넣었다. 비슷한 농도의 물감이 각각 다른 환영의 공간에서 주변의 요소들과의 관계에 따라 암시 의 임무가 달라졌다. 【작품 9】에서 뿌려진 호분은 언덕 위에 피어오르 는 연기를 암시하고 【작품 10】에서는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을 암시하

58) Gombrich, 앞의 책, p. 199

【작품 9】<석양바다 (Sunset on the horizon)>, Pigment on Korean paper, 60.6 x 72.7 cm, 2014

【작품 10】<추수 (Thanksgiving)>, Pigment on Korean paper, 91.0 x 116.8 cm, 2014

고 있다. 물감이 흘러내림이나 고인 채 굳어버린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물질의 배열이 이미지 내의 다른 대상들과 맺는 상호적인 관계에 의해 각기 다른 입체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 우연적인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물질 자체의 인상과 그것이 다른 요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예측함으로, 자 연스러운 물질이 주는 독특한 감정과 환영의 대상적 의미가 이미지 안에 서 종합되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