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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경숙의 『외딴방』과 충동의 글쓰기

2.3. 허물어지는, 허무는 글쓰기

서영채는 희재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외딴방 의 서사 정점에 위치한 다는 사실이 다소 기이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바 있다.74) 실제로 희재언 니라는 인물은 노조원들과 같이 부조리함에 맞서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서 노동서사의 핵심 인물로 적합하지 않으며, 화자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에서 성장서사의 조력인물로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희재언니 의 이름은 외딴방 서사의 처음부터 등장하며, 희재언니의 죽음은 소설의 정점에 위치하고, 서사의 끝까지 계속된다. 화자와 희재언니와의 관계는 동지애나 자매애, 혹은 어떤 명칭으로도 명확하게 설명될 수 없는 채로 남 아있다. 우선 희재언니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서른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골목, 열다섯살부터 공장에서 미싱질을 하던 봉제공, 산업체학교 에 다니다가 그마저도 포기한 채 고향에 있는 남동생을 위해 밤낮없이 돈 을 벌어야 했던 희재 언니. 화자가 기억하는 희재언니는 늘 희미한, 어렴 풋한,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이다. 희미한 기억 속, 한 줌 허리와, 미싱 바늘에 찔려 붉게 부풀어 오른 손, 햇빛을 보지 못해 늘 허옇게 떠 있던 얼굴. 그러나 무엇보다 화자가 기억하는 희재언니는, 외딴방의 이미지와 고스란히 겹쳐져 스스로 외딴방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골목이다. 그곳의 전신주이고 구토물이고 여관이다. 그녀 는 공장 굴뚝이며 어두운 시장이며 재봉틀이다. 서른일곱 개의 외딴방들이 그녀, 생의 장소다. …(중략)… 그녀는 마음속에 욕망이 없었다. 그녀가 보살펴줘야 한 다는 그 사람과 동생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해야겠다든지, 무 엇이 돼야겠다든지…… 무엇이 좋다든지,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중략)…

외사촌의 발랄함이나 나의 우울은 그곳에 살면서도 늘 그곳 사람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한 데에서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 외딴방 , 331면

74) 서영채, 앞의 책, 413면.

희재언니가 외딴방 그 자체가 되어버렸음은 화자가 외딴방에서 살았던 사 년의 기억 중심에 희재언니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동시 에 희재언니는 화자와는 다르게 외딴방에서 도망치고자 하지 않았던 사람 이라는 의미도 된다. 희재언니는 외딴방을 벗어나고자 무언가를 붙잡지 않 는 사람이었다. 그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해가며, 자신에게 주 어진 생을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희재언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나.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 또한 ‘그럼 게임’을 통해 전화 교환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 교환원 자격증을 따서 은행에 근무하고 싶다고도 했다. 남동생에게 줄 이백만원을 다 모으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계획도 있었고, 아이를 갖고 싶다 고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희재언니가 외딴방 그 자체로 화자에게 기억 되는 이유는, 그녀가 외딴방의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분해 탈출하려 발버둥치지도, 그렇다고 현실에 체념하고 모든 걸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 안에서 주어진 자신의 생을 담담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희재언니의 삶은 서른일곱 칸 외딴방에서 외따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이 었고, 그것이 희재언니를 속물적인 시각에서 외딴방과 공순이임을 부끄러 워했던 ‘나’나 외사촌과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 희재언니 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 … 나만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도 그러 는 걸까?” 라고 말하며 울었던 이유는, 그리고 결국 스스로 세상을 떠났 던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고, 그것은 후에 그녀의 임신 때문이었음 으로 추정된다. 늘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그녀였음에도 아이를 낳는다면 홀로 키워야 하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귀가 가 조금만 늦어도, 남자와 거리를 다니기만 해도 화자의 큰오빠와 같은 사 람들의 시선에 늘 “행실이 나쁜 여자”로 비춰져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화 자의 큰오빠는 희재언니와 사귀는 남자를 본 이후로 그녀를 더욱 경멸했 으며, 희재언니가 들리게끔 큰 소리로 화자에게 ‘그 여자’와 어울리지 말 라고 당부한다.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에 최적화 되어야만 했던 희재언 니의 몸은, 회사를 나서면 그녀의 몸을 옥죄는 또 다른 시선에 갇혀 있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위보다 더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는 구조적인 착취

로, 여성의 몸가짐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형태의 구속으 로서 구조적인 가난처럼, 개인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인 압력 과 더불어 삶의 불합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여성적 몸 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불합리성조차 당연하게 인식되어 은폐되는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재언니는 가해자를 지목할 수 없는 구조적 사회 인식의 피해자이며, 죽음의 명확한 이유조차 댈 수 없어 이해도 보상도 받 지 못하는,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다.

그런 희재언니의 죽음에 그녀를 유난히 따랐던 화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빈집에 문을 잠그는 일을 부탁받았고,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잠가버렸지만 실은 홀로 그 안에서 쓸쓸하게 죽 어갔을 희재언니는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번번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아픔 그 자체다. 희재언니의 죽음은 화자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만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의 입처럼 공포스러움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처음 화자가 하계숙의 전화를 받고 시도하려고 했던 글쓰 기는 희재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목적을 가지 고 있었다. ‘나’는 그저 험한 세상에서 “순결한 한 가지”를 붙들고 열심히 살았을 뿐 그녀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나’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은, 그러 나 과거를 하나하나 밝히는 고백적 글쓰기를 통해, 글쓰기가 결핍된 나를 채우려는 욕망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사실만을 드러내게 되었다. 희재언니 의 죽음에 자신이 개입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원망했던 화자는 그러나 자 신의 글쓰기가 반성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희재언니의 죽음을 애써 의 미화하려고 했던 시도로서의 글쓰기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결국 글쓰기를 통해 희재언니의 존재는 화자가 죽음의 비의미성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게끔 만들며,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한다. 소설에서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 누군가 이 방으로 들어온 것 같다.

… 누구세요? 라고 물어도 나야, 라고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이 내 등뒤에 서서 내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 그만, 불을 끄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인기척이 따라와서 내 곁에 웅크리고 누 웠다.

… 희재언니야? - 외딴방 , 196-196면

어둠 속의 욕조에서 등을 뗐다. 그것이었다. 내가 만난 죽음. 세면장에서 나와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빈집에 돌아와 문을 열적에 내 가슴에 예리한 날을 들 이댄 문장들은 산문집을 출간하며 내가 새로 써서 넣은 내가 만난 죽음 속에 담 긴 문장들이었다. 몇 번이고 고치고 또 고쳤는데도 아직 날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내 가슴을 향해 끝을 들이대는, 날.

…(중략)…지워진 문장들 속에 그녀가 서 있다. - 외딴방 , 328면.

위의 인용문은 소설에서 유령과 같은 희재언니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 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벗어났다거나 상상에 의해 구성되어 신경숙의 이 소설이 나르시시즘적이라는 오명을 받기까지 했던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죽음 자체를 마주하는 순간, 비의미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순간, 신경숙에 의해 채 죽지 못한 희재언니가 삶도 죽음 도 아닌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소설이 몸이 되는 순간으로 읽어야 한다.

먼 길을 돌아 ‘나’의 죄책감을 해명하려고 했던 화자는, 결국 희재언니를 글로 ‘재현’해 보려던 노력에 실패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비로소 그녀 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말이 말로 성립 되지 않는 곳, 침묵의 장소, 기록이 될 수 없는 곳에서 등장한다. 왜 나였는지, 왜 나는 살아남고 그녀 는 죽었는지, 왜 그녀의 죽음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지 ‘알지 못하는’

진정한 무의미의 장소에서 ‘나’로 표상한 ‘글쓰기’는 완전히 무너진다. 희 재언니와의 침묵의 대화는 말하는 주체의 허상과 결함을 드러난다. 아감벤 은 주체가 처음 의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앎과 말함의 어긋남이 전제되 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 말하는 주체는 곧 인간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의미하지만, 말하는 주체는 불가피하게 앎의 불가능성, 즉 말할 수 없음의 간극을 그 안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존재’와 ‘말할 수 있음’

을 동등하게 사고하고자 하는 주체는 상상적으로 구성된, 거짓된 주체일 수밖에 없다.75) 그러므로 이 만남은, 나의 글쓰기가 그려낸 희재언니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