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경숙의 『외딴방』과 충동의 글쓰기
2.1. 성장 부정의 고백과 진정성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외딴방』을 적확하게 독해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이 소설의 형식적 특이성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는 소설이 작가의 개인적 체험인 과거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재를 과거형으로, 현재에서 상기해내는 과거를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독 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직된 시간 구성은 이 소 설을 연구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성장담을 재현한 성장소설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게끔 했다.68) 그러나 기존의 성장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처럼 성
64) 신형철,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 신경숙의 소설과 애도의 윤리 학」, 문학동네 , 2010.8.
65) 김홍중, 「신경숙 문학의 몇 가지 모티프들」, 문학동네 , 2012.2.
66)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 출판사, 2017. 381-420면.
67) 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문학동네 , 2013. 23-33면.
68) 소영현, 『분열하는 감각들』, 문학과 지성사 2010; 윤지관, 「빌둥의 상상력:
한국 교양소설의 계보」, 『문학동네』, 2000. 나아가 허병식은 이 소설을 두고
“한 인간의 성장의 역사를 통해서 그가 교양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추구하는 서사를 일러 교양소설이라 부를 수 있으면, 신경숙의 외딴방은 하나의 교양소
장이 성인된 개인의 자기인식에 머무른다면, 신경숙의 『외딴방』의 화자는 확고하고 온전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전면으로 반박 될 수 있다. 그것은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지점이 다. Gabiel Sylvian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여성 성장소설을 쓰게 되었느 냐는 질문에 대한 신경숙의 답변을 보자.
I didn’t think of my work as “female coming-of-age stories”. I wrote about time periods. Time periods I couldn’t just let go by, that I felt stuck in.69)
저는 제 소설이 “여성 성장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시절에 대 한 이야기를 썼어요. 제가 건너오지 못했던, 그래서 매여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 절요.
자신의 소설을 여성 성장소설로 명명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작가의 인터 뷰 답변은, 정상적으로 지나오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장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말에서 『외딴방』을 ‘여성’의 이야 기로도,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히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엿볼 수 있 다. 물론 작가가 경계하는 것은 여성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이며, 시간적으로 나이 듦과 성숙을 일치시키려는 사고의 단순성일 것이다. 작가 에게 이 소설은 자신의 과거 상처에 대한 기록이자 특정 시간과 사건이 날것 그대로 명시되었으므로, 깊은 수준의 진실성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소설을 여성 성장소설이라는 명칭 아래 보편적 여성 성장의 전 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목할 것은 성장 부정의 외관이라기보다, 성장 부정을 고백하 설로서 탐색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라며, 이 작품을 한국 식 교양소설의 모범적 예로 일컫기까지 한다. 허병식, 「내적 망명의 서사, 유보 된 성장의 기획- 신경숙의 <외딴방>에 나타난 교양의 기획」, 『Foreign Literature Studies』, 2013, 328면.
69) Gabriel Sylvian, “Interview with Shin Kyung Sook”, Azalea: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 Culture(2), Hawai’i Press, 2008, pp. 53-62.
는 목소리에서 감지되는 진정성이다. 소설에 담긴 사적 진실성은 재현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작가가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에 내비친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라는 표현과도 공명한다. 그런 점에서 『외딴방』은 서영채가 지적했듯 “자전적인 소설이라기보다 오히려 소설이라는 이름을 빌린 자전이나 고백록”에 가깝다.70)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쌓아 올린 둑이 무너진 순간부터 화자는 물밀 듯 밀려오는 유년기 한 시절의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이는 소설이 선취하는 독특한 시간 구성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또한 연재 형식으로 창작된 이 소설은 첫 회를 발표한 후 발표된 원고에 대한 반응이 다음 회에 반영되었으며, 이러한 구성은 소설에 생생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그런 까닭에 소설의 현 장감과 그 입체성은 성공한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회상하는 잔잔한 미 담이 아니라, 감추어졌던 어둠과 부끄러움에 대한 내밀한 기록으로 전달된 다. 앞서 밝혔다시피 이러한 고백의 진정성이 발현되는 지점, 서사적 구조 의 독특성과 함께 봉합한 과거 기억의 올이 풀리는 지점에 놓여 있는 것 은, 바로 성장에 대한 부정이다.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었던 과거는 바로 성장이 없었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 지금은 1994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건 1979년. 그녀는 낮잠중인 나를 나무 라기나 하는 듯 전화를 걸어와서는 나야, 모르겠니? 하면서 16년 전의 교실문을 쓰윽 열고 있었다. - 외딴방 , 22면71)
(나) 너만 그랬겠니, 나라고 별 수 있었겠어. 그랬다. 내게도 여고시절이 있긴 있 었는데 여고시절의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나였다. … 내게는, 그리고 내게 전화 를 걸어온 그녀들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다. 토라질 틈도, 나뭇잎을 말릴 틈도 우 리들 사이엔 없었다. - 외딴방 , 25면
(다) 외딴방으로 걸어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 다.
70)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 출판사, 2017, 388면.
71) 이 논문에서 다룰 신경숙 소설의 판본은 다음을 따르며, 앞으로 인용되는 같 은 책은 제목과 쪽수만 표기한다. 신경숙, 외딴방 , 문학동네, 1999,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 외딴방 , 63면
위 인용문을 차례로 살펴보면, 서른둘의 전업 작가인 화자는, 산업체학교 시절 동창 하계숙의 전화를 받아 “침묵으로 내 소녀시절을 묵살해”버렸던 여고시절로 소환된다. 그리고 과거를 떠올린 화자는 자신이 애써 그 시절 로부터 도망쳤을 뿐 아니라 그 시절 ‘우리들’에게 성장이 부재했음을 다시 금 확인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문턱처럼 놓인 그 시절, 성장의 부재에 대한 고백은 이후 기억의 포문을 열어젖히는 가장 중추적인 동력이 된다.
이 고백은 독특한 윤리적 감각을 띠고 있는데, 남달랐던 자신의 소녀 시절 에 대한 연민이나 평범함에 대한 미련이 아닌, 부끄러움과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다. “넌 우리들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 혹시 네게 그런 시절이 있 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니?”라는 하계숙의 말은 화자를 속수무책 으로 휘두르며, 힐난의 목소리로 출몰해 육체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편안한 잠을 자고 깬 후면 어김없이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물이 되어 천장으로부 터 내 이마에 똑똑똑 떨어져 내렸다. 너. 는. 우. 리. 들. 얘. 기. 는. 쓰. 지. 않.
더. 구. 나. 네. 게. 그. 런. 시. 절. 이. 있. 었. 다. 는. 걸. 부. 끄. 러. 워. 하.
는. 건. 아. 니. 니. 넌. 우. 리. 들. 하. 고. 다. 른. 삶. 을. 살. 고. 있. 는. 것.
같. 더. 라. - 외딴방 , 47면
봄과 여름 동안, 얼음 물방울이 된 하계숙의 목소리가 내 이마 위에 똑똑똑 떨 어지던 어느 날부턴가 나는 원인 없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뜨겁디뜨거 운 숯덩이가 가슴 복판에서 타고 있는 것 같더니 나중에 그 숯덩이는 불쑥불쑥 목젖까지 치받쳐 오르며 입을 통해 바깥으로까지 나오려다가 다시 내려가곤 했 다. 속은 타는데 이마에선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 외딴방 , 73면
위의 인용문은 하계숙의 전화를 끊은 후 화자가 겪어내야만 했던 마음과 몸의 증상을 담고 있다. 분절된 호흡이 그대로 반영된 문장은 충격적인 장 면을 느리게 보여주는 화면처럼, 하계숙의 말이 화자의 마음에 비수가 되 어 꽂히는 감각적 효과를 그대로 전달한다. 그런데 화자가 고백하듯, 유령
같은 질책의 목소리와 신체적인 아픔은 그 시절을 진정 부끄러워 한 것에 서 온 것은 아니다. 비록 하계숙의 전화에 적극적인 부인은 하지 못했으 나, 그 시절을 “자랑스럽다고 여긴 적도 없었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 며, 순간적으로 부끄러웠다 하더라도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하계숙과 동급생들 그리고 산업체 야간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현 실이 부끄러웠다면 오히려 그 사실을 숨기고자 과장되게 부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계숙의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오래도록 마음으로 품고 있었던 대목은 부끄러움이 다른 대상을 향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전화를 끊은 후부터 화자가 끈질기게 시달리는 마음과 몸의 고통은, 부끄 러움의 원인이 자신의 내부에 있었으며 그것은 성장하지 못했다는 자의식 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화자의 부끄 러움이, 자신은 외딴방에서 “도망쳐나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날, 하계숙에게, 너는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더라, 고 말하던 하계숙에게, 너희들의 얘기를 쓰지 못한 건 가슴이 아파서였다고 했으면 변명이 되었을까. 그냥 생각만으로도 먼저 마구 가슴이 아파버려서 쓸 수가 없었다고. 미 안하다고, 그때 나는 겨우 열여섯이었다고. 그녀들을 부끄럽게 여긴 게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걸어 나오지 못했다. 나는 어떤 운명의 모습 앞에서 기 겁을 하곤 그곳을 도망쳐 나온 사람이었다. 도망쳐 나와서는 다시는 그 근처엔 얼씬 거리지 조차 않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멋도 모르고 그 징검다리를 건너왔지 만 그건 건너온 게 아니었다. - 외딴방 , 68면
위와 같은 화자의 고백적 어투는, 자신이 그 시절을 감당해내지 못했음에 서 오는 자책에 가깝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용문 (가)에서 시작된 ‘성장이 없던 그 시절’ 기억은 (나)의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한, 지난한 과거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거쳐, (다)에 이르러서는 화자의 행위의 정당성을 문책하기 시작한다. 이는 곧 화자에게 있어 기억이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은폐했다 는 사실이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알 게 한 건 다름 아닌 “내가 외경스러워 했던 글쓰기였다”고 고백한다.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