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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90년대 한국문학에 나타난 신경숙·은희경·김형경의 소설이 여성 주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성장의 글쓰기가 됨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성장은 한 개인의 몸과 마음이 자라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면 서 공동체 안에서 공유된 이념과 역사를 내면화하여 세계 내적 개인으로 자립함을 뜻한다. 특별히 소설에서 성장은 성숙한 인간됨의 순간이며, 다 른 말로 하자면 사유와 행동의 주체됨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장은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으로서의 순간, 개인이 성숙한 내면성에 도달하는 순 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소설론이라는 장르로 성장을 파악하고자 할 때, 이분법적인 몸의 성별에 따라 성장이 다르게 규정되곤 했다. 여성 성장을 규정하며 반 성장이라거나, 초월적인 다른 성장으로 명명하려는 시도가 그 예다. 그러 나 성장은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적 성숙의 과정이므로, 성별에 따라 다른 성장의 내용을 지정하는 것은 여성적인 성장을 환상적인 어떤 것으로 축 조하거나, 여성에게는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게끔 만드는 두 가지 위 험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여성 성장소설은 반성장소설적인 장르를 구축하고 있다거나, 혹은 여성의 성장담이야말로 진정 성장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지양하고자 했다. 이 연구는 성장소설로 호명되었으나 성장 부정의 흔적들로 인해 텍스트 내부에 균열 이 존재하는 소설들을 검토하면서, 여성-성장은 몸-쓰기인 글쓰기로서 이 해될 때 가능한 것이며, 여성 주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성장이 이루어진다 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장에서는 먼저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 하고, 주체됨은 구성된 사회적 조건들의 반복을 중지시키는 자리로서만 존 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언술하거나 발화를 통해 고정되는 ‘나’는 반복되 는 행위 양식이라는 조건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 언어에 의해 먼저 구조 화되지 않고는 인식 가능성 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

로 여성-성장의 진정한 의미는 ‘나’라는 정체성을 위해 배제되는 비언어적 물질이 필연적이었음을 깨닫고, 자율적 행동의 근원으로서의 ‘나’를 공고 히 하는 데 실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세 소설의 표면적인 성장 부 정은 주어진 성인 여성의 기표로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 었다는 고백이 되며, 동시에 내러티브 속에서 멈춤과 지연, 모순과 같은 증상과 함께 드러난다. 세 소설에 나타난 서사의 머뭇거림, 환상성, 비일 관성 등은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성차를 몸의 기관으로 형상화하 는 과정에서 추방되고 배제된 비언어적 물질, 즉 몸의 물질성 그 자체이 다. 이러한 순간들은 완전한 의미의 불가능성을 그대로 소설에 노출시킴으 로써, 언어를 통해 구성된 ‘나’라는 주체의 온전함을 의심에 부친다. 그런 데 규범에 의해 나의 정체성 바깥으로 배제된 것들은 ‘나’의 정체성을 공 고히 만들기 위해 축출된 것이면서, ‘나’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럼으로써만 ‘나’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젠더로 의미화 되지 못 한 물질 그 자체로서의 ‘몸’이라고 부른다면, 이를 감각하는 것, 이러한 몸 들을 정체성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채, ‘나’이지만 ‘나’ 아닌 채로 존재하는 그 상태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여성적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세 소설은 이러한 진실을 드러낸다. 각 작품의 스타일과 구성은 다르나, 공통적으로 강렬한 감각에 의해 촉발된 글쓰기는 농도 짙은 고백적 정서 를 전달한다. 신경숙의 경우처럼 죄책감에 육체적 고통을 겪거나, 은희경 의 경우처럼 슬픔에 의한 분열을 보이거나, 김형경의 경우처럼 트라우마의 반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들이 기입 된 글쓰기는 그 자체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열림의 상태라는 수행적 행 위, 수행적 글쓰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 소설은 여성 주체의 가능 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경숙의 경우 육체적 고통에 의해 충동적으로 촉발된 고백적 글쓰기를 통해, 언어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수 행한다. 화자는 부재했던 소녀시절의 온전한 복원을 희망하면서 자서전적

으로 글을 써 내려가지만, 망각을 통해 억압하려고 해도 손의 기억에 의해 거부되는 희재언니의 무의미한 죽음은 기억의 매끄러운 봉합을 실패하게 이끈다. 이러한 글쓰기는 도망치고자 했던 화자의 부끄러움과 정면으로 맞 닥뜨리게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화 자의 정당화 논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화자는 그녀들의 실 존, 타자에의 열림을 보이게 된다.

은희경의 소설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지닌 화자가, 어른이 아니고서는 전달할 수 없는 냉소적 통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 린다. 이러한 분열된 문체적 특징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 된다. 아이가 자신의 성별을 자각해 여성이 되어 가 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몸의 물질화 과정이며, 여성이 자신의 몸에 주체가 될 수 없는 사회적 강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은희경 소설은 여성 몸에 기입된 여성성의 자연성을 부정하면서 몸의 유연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반적 의미의 성장을 회의하게 한다.

김형경의 글쓰기는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몸의 행위로 촉발되는데, 치명적 인 폭력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압도적인 무게감을 지니고 있 다. 성장을 완료했다는 작가의 말과는 달리 거식증과 구토, 숨 막힐 듯 답 답함과 목이 메어 있는, 극복하지 못한 몸의 상태를 동반하는 글쓰기의 현 재성은 결코 ‘다 지난 일’이 될 수 없는 고통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증상들로 인해 과거를 딛고 성장했다는 화자의 주장의 신뢰성이 무너지면 서, 글쓰기는 저자의 의도를 배반한다. 그러나 나의 무너짐은 사실상 나의 성숙의 도달이 된다. 그것은 ‘나’라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 없이는 형성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타자에의 열림을 보여주는 윤 리적 행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결코 완전히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의 고통을 언어로 적어 내려가면서, 그것을 나의 지나간 기록으 로 덮어 버리고자 했던 시도는 깨어지고, 다시금 ‘나’의 완전함과 성장에 대하여 회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패의 지점에서 독자와 청자의 자리를 필연적으로 포함시키면서, 글쓰기는 타자를 향해 열리는 몸-쓰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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