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적’ 창립의 배경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국제적인 여성단체이다. 19세기 중반 인 1855년, 런던의 몇몇 여성들이 산업화의 파도에 영향을 받아 여 성의 해방과 참정권, 노동권, 교육권 등을 외치는 기도회를 개최하 고 그 밖에도 크리미어 전쟁(Crimean War)에 종군하였던 간호사들 을 위한 여성전용 숙소 설치, 도시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경 클래 스나 클럽 활동 등이 YWCA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한국Y반백년사 , 1976:9). 그 후 북미 YWCA의 창설(1866년)을 거쳐 체계적인 조 직화가 진행되어 1894년에는 세계 YWCA가 창설되었다.110) YWCA 의 탄생 배경에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통신 수송수단, 산 업의 급격한 발전과 세계 무역의 확대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응한 기독교 부흥(리바이벌)운동의 고양, 그리고 그 속에서 꽃핀 선교 사 업의 열의와 그 확대,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진출 등이 손꼽힌다.
영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YWCA가 도시의 젊은 여성을 위한 기숙 사를 제공하고, 직업교육과 여성들의 상호 이익을 표방했던 것에 비 해, 한국YWCA는 신앙을 높이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조직한 단체 라는 차이를 밝히고 있다. 특히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 적인 힘으로 "여성들을 깨우치고 낡은 굴레를 벗겨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감에 불탔으며, 그것은 국권회복과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도 통하는 길"이라는 의식이 충만했다(이원화, 1976). 한국YWCA가 자 주적으로 조직화된 바탕에는 민족주의적 여성운동이 기반이 된 것
110) 본부는 영국 런던, 1930년에는 제네바로 이전하였다.(「한국 YWCA 반백년」, 1976:10.)
으로, 창설자 3인 중 김필례의 공헌이 큰 것으로 나타나 있다(박혜 경, 2013).
YWCA의 창설자는 김필례, 김활란111), 유각경112) 세 사람으로 알
111) 김활란(金活蘭, 1899년 ∼ 1970년 2.10)은 1899년 2월에 출생했다.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에 의해 일곱 살에 세례를 받고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 다.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1920년에 김보린, 홍에스더 등과 함께 7인 전도대를 만들어 평양, 안주 등 북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폈다. 1922년 아펜셀러의 소 개로 김필례를 만나면서 YWCA 창설의 작업을 구체화시켜 갔다. YWCA 기성회 창설 직 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김필례와 함께 1924년 세계YWCA협회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 한국의 가입을 신청하고 승인을 얻어냈다. YWCA 창립 기성회 회장을 맡았고, 이후 세계YWCA 지도자 상습학교에서 6 주간의 강습을 받기도 했다. YWCA회장으로 활동한 동시에 여학사협회를 창설했고,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전의 7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김활란은 주로 이화학당을 무대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했다. 김활란은 탁월한 영어실력과 감동적인 웅변능력을 가진 것 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활란은 YWCA 창설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 초기 YWCA에는 김필 례와 유각경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보스턴 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25년 9월에는 철학석사를 받았으며, 1931년 10월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1930년대 초 각종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에 힘써왔으 나, 1936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해 친일 칼럼,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41년 창 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의 친일 활동으로 비판을 받 게 되었다. 김활란에 관련된 내용은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참 조.
112) 유각경(兪珏卿, 1892년 ~ 1966년 9.7)은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의 거두였던 유길준의 조카로, 유만겸, 유억겸에게는 사촌 누이가 된다. 한성부에서 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 난 그는 유길준의 동생인 아버지 유성준을 따라 기독교에 입문했다. 유성준은 양반 가문 에서 태어나 옥중에서 성서를 읽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며, 일제 강점기에도 참 여관과 중추원 참의를 지내 친일파로 분류된다. 1910년에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장로 교의 주선으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에 유학했다. 이때 그는 나중에 좌익 여성 운동가가 되는 유영준 등과 함께 협화여자전문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유아 교육을 전공하 여 귀국한 뒤에 유치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1914년 귀국하여 모교에 서 교사로 일하면서 김필례, 김활란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 했다. 신간회에는 김활란과 함께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고, 1927년 근우회(회장 김활란) 를 설립했고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근우회(槿友會)’라는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유각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YWCA 회장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 조선예 수교장로회의 여전도회 회장을 지냈다. 유각경은 1938년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 수 통합될 때 이를 주도하였고, 친일 단체 애국금차회(1938)에 간사로 참여하였으며 조 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 가담하여 각종 연설회에 초청 받아 친일 연설을 했다. 여유 있는 환경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명랑한 성격이었고 늘 자신감이 넘치는 연설을 해 명연설가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직후에는 근우회 출신들이 대거 포함된 좌우 연합 여성 단체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의 의견 차이로 곧 탈퇴하 였고 우익 여성 단체인 한국애국부인단을 조직했다. 이후로 장로교 여성계를 대표하여 이승만을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자유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필례는 초대 총무를 맡아 초기 YWCA의 실무를 총괄하고 지역 YWCA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가 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YWCA창설을 가장 먼저 발의한 사람도 김필례로 되어 있다113). 김필례는 한국 근 현대사에서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 교육에 앞장 선 기독교 여성활동가 로 알려져 있다(박혜경, 2013). 김필례는 한국YWCA를 창설한 주역 이었을 뿐 아니라 서울 정신여학교와 광주 수피아여고의 교장을 역 임했고, 서울여자대학교의 설립을 주도하는 등 기독교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했으며 대한 예수교 장로회 여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일제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을 하였으나, 다른 인물들에 비 해 지금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김필례는 1891년 11월 19일 황해도 장연의 소래에서 태어났다. 어 머니는 소래에 탄생한 첫 번째 교회의 여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하였 다.114) 1907년 정신여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한 후, 일본말이나 글자를 하나도 모른 채, 1908년 6월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학생 4 명과 함께 3개월간 일어교육을 받았고, 6개월 동안 심상소학교(현 초등학교) 교본 전 12권을 마친 다음 1909년 4월 동경 ‘여자학원’ 중 등부에 입학하여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YWCA를 접하게 되었다. 이 학교의 중등부 5년(1913년졸업), 고등부 3년 과정(1916년 졸업)을 거치는 동안 방학 때마다 기숙사가 폐관되면 학교 주선으로 YWCA 기숙사(나도쵸)에 보내졌고, 개학 후에도 YWCA 인사들의 방문이 있었으며, 고등부 시절에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학생 YWCA에 가입하여 임원이 되었다(홍일표, 2010). 이 기록으로 볼 때 김필례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YWCA활동을 경험한 것으 로 여겨진다(박혜경, 2013). 김필례는 일본YWCA 활동으로부터 기 독교 정신의 이론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당시 일본
113) 한국YWCA 역사 기록을 보면 1908년에 일본으로 유학 간 김필례가 도쿄 여자기독교 청년회가 경영하는 기숙사에 있으면서 YWCA 사업의 귀중함을 몸소 체험하고 한국에도 이런 회(會)를 창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스크랜튼 여사에게 YWCA 조직을 제안 하여 도움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한국YWCA반백년사」, 1976:12).
1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 ; 그 밖에 「정신75년사」, 김영삼, 계문출판사, 1962. ;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1978. 김영정, 「한말사회진출여성의 유형과 활동양상」, 「論叢 34」,이화여자대학교, 1979. 등 참조
인으로서 용기있게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잘못이다"라는 양심적인 강의를 한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꼬(川共德子)에 감동을 받고, 한국에 돌아간다면 YWCA를 창립 하겠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김필례는 당시 많은 한국의 여성 지식인들이 미국계 학 교의 교육과 유학을 다녀온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배경도 김필례가 한국YWCA 창립을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 이 되었다. 당시 일본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에서 유학을 하고 온 지식인들은 학문적 성취를 의심받기도 했 다115). 일본 유학생들은 일본어 구사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3.1운동 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직 간접적으 로 경험하면서 독립의식을 강하게 키우고 국내로 들어온 경우가 많 았다. 일본에서 유학한 이들 중 박인덕 등 일제 말기에 친일로 돌아 선 인물들도 있었지만, 김필례 등 많은 이들은 순수 신앙을 유지하 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김필례는 1908년 6월 일본에 유학을 가자마자 일본 도쿄 나도쵸의 YWCA 기 숙사에서 수많은 일본 YWCA의 사업과 활동을 직접 체험했으며, 미래의 조선 YWCA 창립을 염원하고 꿈꾸었다. 김필례가 일본에서 돌아와 한국 정신여학교에서 활동을 재개한 시점은 1916년이다.116) 따라서 1908년 6월부터 1916년까지 8년 정도의 중고교, 전문학교 시 절을 모 일본에서 보냈던 것이다117).
115) 국내 기독교 학교, 특히 선교 여학교는 사회적 평가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조선 최초 여자 박사였던 김활란도 학위를 받은 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껄렁한 미국 박사’라는 호칭이 붙었다(김지화, 2005).
116) 김필례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으로 알려진 세칭 ‘선천 110인 사건’1)에 오빠 김필순(세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생)이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하게 되자 학비 조달이 어려 워져 동경의 ‘여자학원’ 동창회의 장학금과 동경 유학생회의 학비 보조금을 받아가며 겨 우 학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한국YWCA반백년사」, 1976:24-25). 김필례는 정신여자중 학교 교사(1916∼1919년)를 거쳐 1922년 교감이 되었다. 그 해에 창설된 광주 기독교청년회의 첫 교육 사업으로, 서창균과 자선음악회를 주선해 기금을 마련, 광주시 양림동에 있는 유치원을 인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직후 1922년 김활란 과 만나면서 YWCA 설립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117) 예를 들어 ‘1914년 간다(神田) YMCA회관에서 개최된 여자학생대회에는 200명의 여 학생들이 참가했다’고 전하는 데 그 당시 김필례는 인근 동경 ‘여자학원’ 고등부에 재학 하면서 동시에 나도쵸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어 충분히 이 대회에 참석했을 개연성이 높 다. 그러한 예민한 성장 과정에 일본 YWCA와 학교 YWCA에서 배우고 익힌 것은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