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YWCA의 재건
해방을 맞아 새롭게 여성운동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한국YWCA도 재건을 했고, 당시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도 독립된 여성운동조 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직후, 여성운동이 민족주의와 공산주 의의 사상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국YWCA는 당시 좌, 우익으로 나뉘어 진 여성운동 진영에서 한국YWCA는 관 변화되지 않은 순수 여성운동단체로 분류되고 있고, 당시 여성들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현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여성운동을 펼쳐 갔다. 이를 위하여 국내적으로는 조직과 연합회 회칙을 정비하고 국제적으로는 세계 YWCA에서 다시 정회원으로 승인을 받는 등 굳
건한 조직과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우익/보수 중립적 정치화된 단체 대표적
단체
대한부인회(50년대) 재건부인회(60년대) 새마을부녀회(70년대)
YWCA 활동주체 중산층 여성 중산층 여성 목표, 이슈 회원의 친목도모 여성지위향상
활동내용
상시적 동원(정부의 시책 을 선전, 집행)
봉사, 취미활동
일시적으로 동원 (정부 시책에 참여)
취미, 봉사활동
여성지위향상을 위한 활동
활동방식 제도화된 방식 제도화된 방식 정부 관계 매우 협조적 협조적/일시적 갈등
<표 14> 50-60년대 지배적인 여성단체의 성격
<출처 : 서미라, 2002:24>
6·25동란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1951년 부산으로 옮겨가게 되 었고, 당시 수많은 난민과 전쟁고아, 이재민과 무의탁 소녀 등을 위 한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한국YWCA는 세계YWCA와 미국YWCA 의 상호협조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해외의 지원을 받게 되 어 여성들과 고아들을 위한 복지운동을 전개했다.
전쟁의 피해로 가족을 잃은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한국YWCA는 부산의 동례 농예원 을 복구하여 여성들을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했다158). 동래 농예원
158) 동래농예원은 1948년 8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로부터 한국 선교회를 통해 기증받 은 후 부산YWCA에서 농촌 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회가 부산으로 피난하면서 이를 다시 위임받아 직접 운영하기로 하고 한국재건위원 단(UNKRA)의 도움으로 동래농예원을 복구했다.
사업을 통해 한국YWCA는 가족을 잃은 소녀들을 위한 숙소와 교육 을 제공했다. 또한 부산YWCA를 중심으로 YWCA 회원들은 뉴욕 YWCA와 유엔본부에서 보내 온 우유를 배급하는 일을 맡았다159). 한국YWCA80년사 에 기록된 한국YWCA 30주년 사업보고에는 1952년에 농예원 직업기술훈련 참가자수는 35명, 부산, 대구, 대전, 순천YWCA가 실시한 4개의 야학교는 242명, 서울, 조치원등 2개 양 재학원에 57명, 8개 영어반에 84명, 2개 성경반에 35명, 2개의 주간 공민학교에 연인원 500명, 서울에서 열린 2개의 강습반(독어, 타이프 반)에 15명, 서울에 있었던 유치원에 75명이 참가했고, 차츰 시국이 안정되면서 이곳에서는 농예, 재봉, 축산, 원예, 수예, 편물과 가내수 공업, 요리 등을 가르치는 시설과 정상적인 사업체계를 갖추는 등 불우한 여성들을 상대로 한 기술교육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한국YWCA 80년사 , 2006). 복구와 재건과정에서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힘쓴 YWCA는 당시 여성들이 받는 차별대우와 법적 지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1954년 제 18회 전국대회를 통해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이태영 이사를 중심으 로 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를 중점사업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YWCA의 노력은 일제시대부터 사회문제 연구부를 설치하고 여공문 제나 여성노동문제, 여성해방문제에 앞장서 온 역사적 맥락을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YWCA는 1954년 프로그램 연구부 안에 사 회문제부를 재설치하고, 우선과제로 사회에서 여성의 차별대우와 법 적 지위에 대한 연구를 시행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YWCA의 관심은 1956년과 1958년 두 차례의 전 국대회에서 거듭 확인되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를 통한
159) 박에스더가 전시에 미국YWCA에 보낸 편지에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부 산YWCA는 피난민촌의 한 천막에서 아동들을 위한 우유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천막 은 눈비를 가릴 정도의 허술한 집이지만 여기에서 매일 400, 500명의 아동에게 우유죽 을 끓여서 배급합니다. YWCA 회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나와서 유엔 구호기 구(UNCACK)로부터 배급 나온 우유를 가지고 죽을 만듭니다. 어린이들은 12시부터 시 작되는 급식시간을 기다리다 못해 아침 10시부터 밥그릇, 깡통 등을 가지고 줄을 섭니 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절대로 줄을 떠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애처로운 광경 을 제 짧은 글로 어찌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천막 옆에 이들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아동진료소를 설치하는 것이 저희들의 희망입니다. 1953년 1월 12일" (김현자, 2003:101)
YWCA의 사회문제에 관한 사업과 활동은 앞에서 기술한 구호사업 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각 지방 조직이 6·25 동란의 타격으로 약 화되었기 때문에 자체의 힘을 사회문제 해결에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건 과정에서 한국 YWCA는 여성의 복지문제 해결과 함께 여성의 권리 회복을 우선과 제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민법 제정운동을 시작으로 한 가족법 개정운동이 시작되었고, 청년운동에서 이어진 지역 활동은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2) 가족법 개정운동
이 시기 YWCA는 여성의 법적지위 향상, 직업적 참여에 따른 아 동문제 및 직업을 위한 능력계발 등의 여성문제를 중요시하여 논의 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 제정되는 민법상의 여성의 지위를 남녀평 등의 민주헌법에 입각하여 향상시키기 위한 움직임은 비록 소수층 에 한한 것이기는 하나 한국여성의 사회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구적 역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법률편찬위원회는 각 분과 소위원별로 법률초안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다가 6·25로 이를 일시 중단하고 수 복 후 다시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신민법 제정은 여성의 법적지위가 이조시대의 관습법에서 탈피하여 평등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기초안 작성과 심의과정에 들어서면서 법 률제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YWCA연합회는 여성문제연구원, 대한부인회, 대한여자기독교절제회, 대한여학사협회, 대한천주교부인 회, 대한여자기독교절제회, 대한불교부인회 등 8개 단체와 연합하여 법률편찬위원회 김병로(金炳魯)위원장 앞으로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 한 의견을 반영한 ‘여성단체의 민법(특히 친족상속권)제정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160)( 한국YWCA 반백년사 , 1976:134)
160) 건의서에는 호주권 관계, 혼인관계, 친권문제, 양자문제, 호주상속인의 순위문제, 재산 상속문제, 유류분 문제 등 남녀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종래의 누습을 타파할 것 등의 7개 항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민법기초위원회에서 작성한 친족상속법 초안은 여러 부분에서 민주화를 위한 법제정을 시도하고 있으나 여성단체들의 요구에 미 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신민법이 통과되기까지 한국YWCA와 여성문제연구회가 중 심이 되어 90여회의 강연회와 10여 차례의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 는 주로 국회의원 중 민법소위원회 위원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반대, 찬성 입장을 경청하고 여성단체연합은 우리나라 여성의 현실을 호 소했다. 친족상속권 차별조항 철폐운동은 가부장적 의식이 뿌리 깊 이 내려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찾으려는 최초의 시도로써 YWCA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한국YWCA 80 년사 , 2006).
연합회는 프로그램부 안에 사회문제부를 두고 간사 박순양이 실무 를 맡고 변호사 이태영, 전 연합회 부회장 최이순, 연합위원 유성순 이 위원이 되어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와 법적 지위, 여 성들로 하여금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당면한 문제들을 연구 조사했다. 1957년 공청회에는 여성문제연구원 장화 순, 대한여학사협회 홍용욱, 대한가정학회 회장 표경조, 대한 YWCA연합회 최희섭 등 여성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과거의 관습 법이 "처의 재산을 부부 공동관리제로 하여 남편들이 관리 사용실권 을 흔히 남용된 것"으로 지적되어 "부부가 각기 재산을 보유하고 또 는 스스로 이를 사용수익(使用收益)할 수 있는 별산주의(別産制)"를 주장하기로 했다. 즉 "소속이 불분명한 재산은 소속이 투명하게 판 명될 때까지 부부 공유로 하고 여성들의 이혼의 자유, 이혼 시 재산 분배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야 함"을 추가했다(정광현, 1967).
이와 관련하여 YWCA는 이태영이 작성한 여성과 친족상속법 을 소책자로 발간하고 YWCA 회원들과 일반여성들에게 널리 배부하여 여성권리에 대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인 자유당 은 ‘동성동본불혼제의 철폐’를 반대하는 유림들의 압력에 부딪혀 친 족상속법을 민주화시키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통과된 신민법은 호주제도 폐지 대신 실현성이 희박한 입부혼(入夫婚)을 제 정하는 한편 동성동본불혼을 위시한 여러 가지 관습법을 그대로 유 지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한국YWCA 80년사 , 2006).
한국YWCA가 중심이 되어 통과시킨 신민법은 1958년 2월 22일 법률 제471호로 공포되었다. 이태영이 법제월보 에 신민법과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