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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한국기독학생운동의 특징

우리나라에서 학원선교의 시발점은 1896년 배재학당에서 기독학생 들이 중심이 된 협성회로부터 시작되었다. 협성회는 WSCF의 창설 자인 모트(John R. Mott)와의 교류를 통해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진 선각자 윤치호가 중심이 된 모임이었다. 이후 1901년 9월에는 기독 학생들로만 조직된 ‘기독학생회’가 조직되어 본격적인 학생기독운동 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YMCA라는 명칭으로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활동은 3·1독립운동 등 민족운동과 계몽운동이었다(한국YMCA 운동사·I, 2008).

1901년 협성회의 후신으로 배재학당에 학생YMCA가 조직되면서 시작된 YMCA학생운동은 일제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학생운동이 었다. YMCA학생운동은 3·1운동을 전후해 학생단 독립운동과 조선 학생대회 창립의 산파역을 담당하며 한국 민족운동사상에 나름의

입지를 마련하였다.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학생YMCA 는 1910년대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거의 유일한 학생운동 조직이었 는데, 3·1운동 이후 지도력 다수가 검거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 면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 같은 역경 속에서도 1920년대 전 반 YMCA학생운동은 3·1운동을 거치며 고양된 민족의식을 바탕으 로, 기존의 종교운동 영역을 넘어 신문화의 계몽자로서 폭넓은 활동 을 전개하였다(장규식, 2007)

학생YWCA가 조직된 것은 YWCA가 창설되던 1922년 11월, 이화 학생기독청년회가 처음이다. 학생YWCA는 1922년 제1회 하령회에 11개 학교, 1923년 제2회 13개 학교, 1926년에는 15개 학교로 확대 되었다. 이화에서는 고등부와 전문부가 합동으로 학생YWCA 활동 을 하다가 1926년부터 이화여전 YWCA와 이화여고보 YWCA로 분 리되었다. 1927년부터 YWCA와 YMCA는 매년 합동으로 하령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YWCA와 YMCA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연합활 동을 시작했다. 서울 우이동에서 ‘전진하자’는 주제로 열린 제 1회 남녀 기독학생 하령회를 필두로 1928년에는 ‘보아라’, 1930년 금강산 하령회에 이어 1931년의 주제는 ‘굳굳이 서자’를 내걸었다. 하령회는 해마다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국사, 경제, 심리학, 사회학, 농업에 대 한 강연과 지도자적 자질과 민족정신, 독립사상을 함양하며 학생들 이 지역사회에 공헌해야 하는 의지를 키워주었다( 한국YWCA반백 년사 , 1976). 이러한 모임에서 젊은 학생들은 당대 저명한 개화인사 와 애국적 지도자들을 만나 새로운 사조와 지식을 흡수할 수 있었 으며 독립을 성취하려는 애국정신을 길렀다. 1920년대 후반 YWCA 와 YMCA의 학생운동은 농촌사업에 착수하고, 연합활동을 한층 강 화하면서 실제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 운동을 모색하였 다. 이 활동은 YWCA와 YMCA의 농촌사업으로 이어졌다. YWCA 와 YMCA의 연합하령회는 회를 거듭하며 학생들의 주도성을 강화 했는데, 1930년 제4회 연합하령회에서 발족한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 년회연맹은 그 결실이었다(장규식, 2007). 학생YWCA 하령회는 1938년 일본경찰의 방해를 받아 중단될 때까지 해마다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선교계를 위시한 교회 계통의 사 립학교들은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 숭실전문․중등학교가 폐교되고

뒤이어 대구 계성과 신명, 평북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 서울 의 보성, 정신, 경신학교와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 등이 문을 닫은 후(김양선, 1970) 학생YWCA도 활동을 중단했다.

일제하 YWCA와 YMCA의 학생운동은 민족주의 노선의 합법적인 조직운동이었다. 학생YWCA운동은 동맹휴학이나 비밀결사를 중심 으로 전개된 일반 학생운동과 달리 문화운동·.물산장려운동·절제운 동·농촌운동 등 당시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과 궤를 같이하며 전개 되었다. 때문에 1925년 조선사회과학연구회의 창립을 계기로 본격화 된 사회주의 학생운동과는 그 길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장규식, 2007).

또한 학생YWCA운동은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에 가입하여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과 한국의 기독교운동을 연결하고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도자를 배출시킨 운동이기도 하였다. YWCA학생운동 은 YMCA와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흐름을 같 이 했으나, YWCA가 가지고 있는 W의 정체성, 즉 여성운동의 정체 성으로 역할을 서로 분리하면서 협력관계를 지켜갔다.

(2) 해방 이후 기독학생운동의 흐름과 영향

1945년 해방을 맞아 기독학생운동을 재건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 푼 기독학생들은 각 대학과 고등학교 단위로 자생적인 기독학생회 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서울에서 자생적인 기독학생회 들 사이에 연합활동을 위한 모임이 있었던 것을 비롯해서 이듬해에 는 대구, 전주, 광주, 순천, 목포, 부산, 대전 등 곳곳에서 연합모임 구성을 위한 접촉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안재웅, 1998).

해방 후 민족통일을 요구했던 학생사회가 1946년 신탁통치를 놓고 좌우로 대립하면서 이른바 ‘국대안 문제’(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문 제)로 한층 심화된 갈등을 겪는다81). 이러한 일반사회의 정치적, 사 상적 혼란의 주 무대는 학원이었다. 이때 기독학생들은 ‘학원을 그

81) 이점에 관하여 박상증 목사는 당시 서울대 학생들만 하더라도 대체적으로 이념적인 면 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을 때이며, ‘국대안 반대’라는 것에는 미군정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가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박상증, 2010).

리스도화 하자!’는 목표로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학원내의 신앙계 승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학원 내의 기독학생 운동은 어디까지 나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연합적인 크리스천 운동이어야 한다는 신 념에 차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각지의 대학들과 많은 고등학교 안 에 기독학생 모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하였다. 교회 안에 서도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스스 로를 ‘기독학생회’라고 불렀다(조병호, 2005).

1950년대 이후 좌우 이념이 팽팽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학원 안에 서도 좌우익 분열논쟁이 심화되면서 사회 일각에서 소신이 없는 학 생사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학생들은 힘을 결집할 필요 성으로 기독학생회들의 연합 협의체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 학생회는 서울대가 중심이었고, 특성은 ‘부흥적이며 신앙간증적인’

것이었다. YMCA는 연세대가 중심이었고, YWCA는 이화여대가 중 심이었다. 이와 함께 경동교회에 속한 기독학생회 등의 세 계열이 있었다82).

혼란한 시국 속에서 1948년 4월 25일, YWCA와 YMCA, 그리고 한국기독학생회 공동 프로그램으로 대학과 고교 기독교학생회 대표 들이 전국연합회를 결성하기 위해 중앙대학교 강당에 모였다. 그러 나 연합체 결성 직전에 서울대 기독학생회는 "통일체를 갖기 위해서 는 우선 모든 기독학생회가 대한 YMCA연맹이나 대한 YWCA연합 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한국YMCA, 1985:161)는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연세와 이화 기독학생회는 "기독 학생운동의 자율성 보장하에 YM/YWCA 연합회 학생부 위원들을 지도위원회에 포함시킨다"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서울대 기독학생회 는 타협에 불응한 채 소위 ‘신학적 이유’를 내세워 연합체 결성에서 이탈하고 말았다83). 따라서 서울대 기독학생회를 제외한 전국 18개

82) 캠퍼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학생회와는 별도로 ‘경동교회 기독학생회’가 당시 또 하 나의 영향력을 가진 학생회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8.15 해방 이후의 사상적 혼란 속 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으려는 학생들이 성서의 역사적 비판과 세계 교회 신 학에의 참여를 주장하며 새로운 신학 방법론과 교회의 비판을 들고 나온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당시 교회의 부목사인 강원용에 의해 지도 되었다. 이들은 그들이 속한 학교의 기독학생회와 연결하여 기독학생이 연합하는 데 촉매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한국YMCA운동사·II」, 2008:51).

83) ‘서울대학 기독학생회’는 해방 직후 기독학생계에 큰 영향을 미친 학생회의 하나였다.

대학과 54개 중고교 기독학생들이 한국기독학생 전국연합회(KSCM) 을 결성하여 학생 기독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학교마다 개별로 존 재하던 기독학생회는 연합된 독자적인 학생기독단체로 정착하게 되 었다( 한국YMCA운동사 , 1985:217). 이로써 학생기독교 단체는 YMCA와 YWCA, KSCM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의 기구통합 문 제와 프로그램 협력관계가 중요과제로 떠올랐고 이후 기독교학생운 동의 구심점을 찾으려는 공동노력이 계속되었다84).

1959년 한국 신학대학에서 열린 세 단체 임원협의회에 이어 1961 년(3월 24-27일) 인하공대에서 전국 학생임원 춘기대회가 열렸다.

이때는 4.19혁명이 지난 후여서 "기독교의 정신무장"을 주제로 학생 운동의 방향을 심도 있게 모색했다(월간 한국YWCA , 1961년 4,5 월호:40). 이 협의회에는 10개 대학 YWCA, 27개 대학 YMCA, 10개 대학 기독학생회와 일본 SCM(기독교학생회)에서 지도자와 학생 6 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YW/YMCA는 군사 쿠데타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으로 교명이 바뀐 후 엘리트 교육의 중심이 된 서울대에는 좌, 우익의 이념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던 중간 노선의 학생들이 그리 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 중시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임’이라는 이름 으로 매주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의 주요 멤버로는 안병무, 장하구, 한철하, 오기영 등, 이후 한국교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들은 기성교회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활동은 부흥회, 철야기도회 등을 서울대 강당에 서 개최, 보수적 기독교 모임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교회 갱신’에 관심을 가졌으 나, 사회적 비전에 대해서는 당시 다른 학교의 기독학생회의 활동에 동의하지 않았고, KSCM 결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YMCA와 같은 세속화되고 비성서적인" 단체와는 함께 활동하지 않겠다고 선언, 퇴장하였다. 이후 서울대학 기독학생회는 중심 멤버들이 대학을 떠난 후 활동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한국YMCA운동사·II, 2008:49-50).

84) 이 시기 기독학생운동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인 이른바 난지도 총회를 계기로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이 소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1953년 6월 10일 장로교가 ‘기장’과 ‘예장’으로 갈라서게 되고, 기장과 예장의 양 세력은 두 번 에 걸쳐 기독청년들을 놓고 대결한다. 첫 번째는 1953년 부산의 금정산 KSCF 총회 때 이다. 이때 예장계에서는 "기독학생운동이 강원용이라는 신신학파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막아야한다"면서 회장선거에서 자기계열 후보를 내세워 당선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다. 두 번째는 1955년 8월 11일 서울 난지도 KSCF 총회 때이다. 서울 근교의 난지도에 전국 각지역 130여명의 기독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개회예배를 마친 후 정기총회를 개최 하기 위하여 회원등록 보고를 하려는 순간, 황성수 변호사 계열의 ‘기독학생신앙동지회’

학생들이 퇴장한다. 결국 양 진영이 별도로 총회를 개최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민경 배 교수는 이때의 분열에 대해 1953년 기장의 성립 이후 예장계의 황성수파와 기장계의 KSCF파가 결국 영도권 문제로 분열하고 말았던 것이라고 지적한다(조병호, 2007). 이후 기독학생운동은 진보적 그룹과 보수적 그룹으로 분리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