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기독교 전파의 특징과 기독교 사회운동의 등장 한국의 기독교의 전래는 1832년 충남 보령군에 영국의 로드 애머 스트호가 들어와 조선과 통상할 때 네덜란드 선교사 칼 구출라프 (Karl Gutzlaff)가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성경을 배포하는 데에서 비 롯되었다는 기록과 조선의 외곽지대인 만주와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화100년사 , :36-37). 그 러나 본격적인 선교활동은 1884년 9월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 1885년 4월에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1885년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해였다. 개혁의 실패로 젊은 개 화당 인사들이 축출되었고 사회적 혼란이 가속화되었던 시점에 기 독교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수용한 동기에 대해서 민경배는 "생명과 재산의 보호 그리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민경배, 1981). 외세의 약탈과 권력의 억압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보 호하고 재산을 보존하면서 나라를 구할 힘을 새로운 종교적 복음에 서 찾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YMCA대회에서 각 나라의 목적문에 삽입하도록 권고된 ‘캄팔라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 하면서 그 이전에 온건하고 체육 활동 중심의 YMCA를 사회운동으로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목적문에는 ‘민중의 복지향상’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는데 이 단어의 삽 입을 놓고 당시 YMCA에서는 논쟁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기독학생운동 출신의 리더십이 한국YMCA의 지역운동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현재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지 역YMCA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한국 여성의 삶은 외세의 침략과 봉건주의적 억압 속에서 고 난의 연속이었고, 이들에게 남녀가 평등하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공 동체의 신앙인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비전과 희망으로 나타났다. 배 재학당에 이어 첫 여성 선교사인 스크랜톤(Scranton) 부인에 의해 이화학당이 시작되었고, 이화학당에서 시작한 주일학교는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55명의 여성들이 출석하게 되었다(장병욱, 1979). 한국여 성들의 적극성을 본 선교사들은 전도사업에 주력했고 전도사업에 부인들을 고용하여 지방순회를 담당하게 했다. 당시의 보고를 보면 그들 중 한 부인은 6개월간 140회의 집회를 가졌으며 50가구를 방 문하여 전도했다. 또 한 부인은 8개월 동안 3천명의 부인들을 상대 로 전도하여 주일학교를 조직하며 입교시켰다. 따라서 그 한 해 동 안 여신도의 수는 4배로 증가할 수 있었다.(이효재,1985)94) 한국개신 교의 입교인 숫자는 매년 급증하였고,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파의 교 인 수는 1909년 말 경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전래는 서구기독교의 팽창역사에 따라 이루 어졌다. 한국 기독교회는 미국의 교파형 교회가 전래되었고, 특히 19세기말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결과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되었다. 이러 한 신앙은 1907년 대부흥회를 거치면서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 렸고, 일제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 신앙양태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 다.
1884년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이래 한국의 기독교는 정치, 사회, 문화의 전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기독 교 전래과정은 서구의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선교사들 의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과 내세를 약속하는 보수적인 교리였 다. 이러한 보수적 신앙의 특성은 이 땅 위의 세계문제에 대처하는 태도가 다분히 심리적인(영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사회적인 관 심보다는 종교적인 관심이 훨씬 큰 신념체계를 갖는다. 따라서 이러
94) 제13회 감리교 선교부 연례총회(1897년)에서 여선교사들은 부인상대의 전도업적이 선 교활동의 어느 분야에서보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신도들의 신앙 적 체험과 반응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들을 보고하였다.(「The Krean Repositry, Vol. 4」, 1987. 이효재 1985 재인용)
한 신앙을 가진 이들은 입신의 동기가 구국이나 개화의 방편 등과 같은 사회적인 요소보다 순수한 종교적 요소가 더 중요시 되었다(노 치준, 1993). 선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보다는 ‘무조건적인 사랑’
을, 악에 대한 저항보다는 인내와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사 회 구조적인 폭압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죄악에 대한 회개를 설교했다(김승태, 2013:37).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입장은 일제하에 약자로 있었던 한국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 나, 일제의 편에서 강자의 논리를 약자에게 순응하도록 설득하고 강 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김승태, 2013:37).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 교부 총무 브라운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 면서 "악이 어디에 어떤 것의 비호 아래 존재하든 악을 대적하는 선 교사들의 의무"라 말하고 있다95).
이러한 초기 기독교 선교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초기 기독 교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와 결합된 신앙으로 지속적으로 한국교회의 사회 참여를 시도하였고, 기독교의 영향은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남성과 동등한 자 격을 갖지 못했던 종래의 의식구조에 의해 억압받던 여성들에게 17 세기 이래 전파되기 시작한 여성해방의 사상과 동학혁명, 그리고 선 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의 전래는 큰 변화의 계기로 작동했다.
특히 한국 개화기 여성의 제1세대가 거의 대부분 기독교 교육을 받 은 이들96)이므로 기독교가 한국 여성들의 의식과 생활의 변화에 직 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1운동 때에는 남성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김마리아, 황애덕 등 기독여성들이 적극 참여했고, 선각적 여성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열망한 여성들이 전국에서 1만 명, 서울에서만 1천여 명 등 적극 참여하였고, 이 중
95) 1909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이 그의 저서에서 설명한 한국교회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정치운동으로부터 교회를 단호하게 떼어놓으려 하였다. 모든 강단에서 ‘현존하는 권력’에 복종할 것을 설교 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는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정치운동에서 활동 했다는 혐의를 받은 몇몇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 직분이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 는 출교당했다... 이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그리스도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대답했다."(A.J.Brown, 1919. 김승태, 2013에서 재인용).
96) 하란사, 박에스터, 황메레 등 개화기 1세대 여성지도자들은 거의 기독교 교육을 받거나 전도부인들이었다(이효재, 1985).
체포, 기소된 여성이 587명에 이르렀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제국 주의적 침탈과 팽창주의, 식민주의의 앞잡이로서 토착세력에 의해 배척받았으나, 한국에서만은 자강, 자립을 생각한 민족개량주의자, 실력양성주의자들인 엘리트들과 봉건 왕조 및 토호들의 착취에 시 달리던 서민들의 피난처로서 함께 수용되었다(이효재, 1985). 한국의 기독여성들은 일제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직후에도 한국애국부인회, 독립촉성중앙부인단,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등 여성운동의 주류로 활 동을 이어갔다(이승희, 1988. 주선애, 1985).
그러나 초기의 민족주의적 운동을 주도한 기독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접목되어 1930년대 말부터는 타협적, 순응적 태도로 변질되 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최민지, 1985), 해방 정국에서는 친미보 수반공체제의 형성과정에 기여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강인철, 1994). 반면에 1970년대부터 정반대의 양상이 보여지는 데, 최장집(1985)의 분석에서도 제시되었듯이 교회가 정치적 반대운 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다른 반체제세력에게 일종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다. 또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시민사 회 논의가 본격화되었을 때 ‘시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 형태 의 실험을 주도한 중요 세력을 배출하였다(강인철, 1994).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에서 기독교의 관련성 이 어느 한 영역에서만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보수주의적인 근본주의 신학을 중심으 로 한국교회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강인철, 1994) 선교사들 에 의해 전파된 복음중심적인 기독교 문화가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 사회운동과 결합하고, 지속적인 사회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유지되 어 왔다. 특히 보수적인 ‘복음주의적’ 교리를 받아들였던 교회여성들 이 다양한 형태의 기독여성운동조직을 결성하고 소위 ‘종교적 진보 주의’97) 정체성을 유지시켜 온 것은 한국의 기독교여성운동이 가진 독특한 정체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97) 강인철(1994)은 해방 이후 개신교 부문이데올로기 지형의 특성을 ‘정치화와 친미 보수 반공적 지형의 고착화’라는 개념으로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류한 지형도에서 NCC와 YWCA, YMCA 등은 ‘종교적 진보주의’ 그룹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보 수적 입장을 가진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