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옥(韓屋)이라고 부르는 전통 가옥 중 양반들의 주택은 사회적 신분과 남녀 성차에 의해서 주거 공간을 구분했다. 특히 남녀유별(男女有 別)이라는 남녀 성차에 의한 구별이 건물 배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남녀라는 성별을 기준으로 공간을 구획하는 원칙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 활에 지대한 영향을 준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제기되었다. 주자가례 에서는 단순히 주택 안에서의 공간을 구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물리 적 공간의 구획을 통해 부부 간의 생활 규범을 제시하면서 나아가 남녀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했는데 ‘중문(中門)’을 경계로 주거 공간을 내외로 구분 하고 여성들의 생활공간을 그 안쪽으로 한정시켰다.3) 또한 남자아이는 9세 가 되면 춘추와 여러 사서(史書)를 읽게 하고, 10세가 되면 외부의 스승 에게 나아가 밖에서 지내며 맹자를 비롯한 여러 경전들을 읽고 배우게 했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논어와 효경을 읽고 배우게 했지만 중 문을 나가서는 안 된다며 열녀전과 여계 등을 읽고 누에치기·길쌈·바 느질·요리 등의 여공(女工)을 배우게 했다.4)
문화적 맥락」,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7,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8.
3) “凡爲宮室, 必辨內外, 深宮固門, 內外不共井, 不共浴室, 不共厠. 男治外事, 女治內事. 男 子晝無故不處私室, 婦人無故不窺中門. 男子夜行以燭, 婦人有故出中門. (必擁蔽其面如葢 頭面帽之類).” 주자가례 권1 통례(通禮).
4) 八嵗, 出入門戸, 及即席飲食, 必後長者, 始教之以亷讓. 男子誦尚書, 女子不出中門. 九嵗, 男子誦春秋及諸史, 始爲之講解, 使曉義理. 女子亦爲之講解論語孝經, 及列女傳女戒之類, 略曉大意. (古之賢女, 無不觀圖史以自鑒, 如曹大家之徒, 皆精通經術, 議論明正. 今人或 教女子以作歌 詩, 執俗樂, 殊非所宜也.) 十嵗, 男子出就外傅, 居宿於外. 讀詩禮傳, 爲之 講解, 使知仁義禮知信. 自是以往, 可以讀孟荀楊子, 博觀群書. 凡所讀書, 必擇其精要者而 讀之. (如禮記學記大學中庸樂記之類, 他書倣此.) 其異端非聖賢之書傳, 宜禁之, 勿使妄 觀, 以惑亂其志. 觀書皆通, 始可學文辭. 女子則教以婉娩(娩音晚. 婉娩, 柔順貎) 聴從, 及 女工之大者. (女工, 謂蠶桑織績裁縫及爲飲膳, 不惟正是婦人之職, 兼欲使之知衣食所來之 艱難, 不敢恣爲奢麗. 至於纂組華巧之物, 亦不必習也.)” 주자가례 권1 통례.
이와 같은 주자가례의 규범적 내용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한집에 사는 부부일 지라도 남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해야만 했고, 이를 실천하 기 위해 하나의 가옥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남성들의 공간과 안채를 중 심으로 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점차 분할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건립된 가옥들에서는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을 이루고 있지만, 17세기 초 가옥들 에서는 사랑채와 안채가 평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지붕구조는 분리 된 상태가 나타난다.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가옥들에서 평면적으 로, 구조적으로 사랑채가 분리된 이른바 별동형 사랑채가 나타난다.5) 하나 의 가옥에서 사랑채와 안채가 분할되어 간 현상은 조선사회가 점차 유교화 되어 가는 과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주자가례의 규범적 내용을 실천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풍속으 로 인해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자칫 폐쇄적인 공간으로 이해되기 쉽 다. 예컨대 가옥의 구조를 ‘口’자 형태로 건축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부 녀를 유폐시키기 위한 물리적 기제로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안동, 하 회, 양동 등의 경북 지역에서 부녀 유폐가 극심하게 일어났다고 전제하고, 이곳에서 ‘口’자형 가옥이 매우 높은 빈도로 발견된다는 점을 근거를 들기 도 한다.6)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그동안 조선 후기 여성들의 생활공간이자 규방가사의 창작과 향유가 이루어지는 규방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口’자 형태의 주택의 성격을 폐쇄적으로 보는 것은 겉으로 드러 난 현상의 일면만을 강조한 것이다.7)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柳雲龍, 1539
∼1601)의 종택인 안동 하회의 양진당(養眞堂)은 후면에 사랑채가 돌출된
‘口’자형의 날개형 가옥으로, 대문에서 사랑채로 진입할 때 넓은 사랑마당 을 두고 4칸 정면이 창호로 닫혀 있는 구조이기에 자칫 폐쇄적인 공간으로
5) 김종헌·주남철은 사림들에 의해 유교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가던 16, 17세기에 이러 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추정했다. 이들 논의의 핵심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사랑채와 안채의 분화라는 주거공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김종헌·주남철,
「한국전통주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정에 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 집 12권 2호, 대한건축학회, 1996, 84-85면 참조.
6) 홍형옥, 한국주거사, 민음사, 1992, 190-191면 참조.
7)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한 당시에 양반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가족들 의 일상생활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서 가옥의 폐쇄적인 형태가 나타났다고 해 석하기도 하다. 천득염, 「한국 건축의 변화 양상」, 국사편찬위원회 편,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경인문화사, 2011, 41-43면.
느껴진다.8) 이는 사랑채와 안채가 각각 별개의 마당과 출입문이 있어서 별 개의 채로 보이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사랑채가 안채(구체적으로 안대청)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밖에서는 폐쇄적인 구조로 보이지만 안에서 볼 때 에는 실제 거주하는 이들을 위해서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기능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9)
그리고 ‘口’자형의 구조는 경북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배치법이 아니라 지역과 건축형식을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주택 구조이기도 하다.10) 조선시대 박물학을 집대성한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중 특별히 건축·도구·일용품에 집중한 섬용지(譫用志)에서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조선의 주택을 중국의 주택과 비교하면서 조 선의 주택 모양과 그렇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 건물 제도는 모두 각각이 일(一)자 형태로 만들어져 서로 이어지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몸채인 방(房) 과 마루[堂]에 곁채인 상(廂)이나 무(廡)가 빙 둘러 이어지고, 용마 루와 처마, 마룻대와 서까래가 구부러져 꺾이면서 딱 붙어 있어 집의 모양이 구(口)자나 왈(曰)자, 또는 ‘ㄱ’자 둘이 마주하기도 한 다(ㄴㄱ). (중략) 그러나 중국 북방은 들판이 평평하고 넓어 비록 시골의 민가라 해도 그들 모두 차지할 수 있는 땅이 광활하다. 그 러므로 일(一)자로 된 집을 3겹, 4겹으로 지을 수 있다. 반면 남방 의 경우는 산이 가파르고 물이 굽이져 흐르므로 그 사이의 빈터를 따라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건물 제도가 구부러져 꺾이거나 붙 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천공개물이나 고금비원에는 모두
‘고랑기와[溝瓦]’를 논한 곳이 있다. ‘고랑기와’는 바로 지붕이 만나 고랑을 이루는 곳에서 낙숫물을 받는 기와이다. 여기서 남방의 집 제도에서 구부러져 꺾이는 곳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 의, 네 귀퉁이가 구부러지고 꺾여 구(口)자 형태를 이루는 제도와 다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집을 지을 때는 지세(地勢)에 따라야 한 다. 예를 들어 평평하고 넓은 땅을 얻었을 경우 몸채와 곁채가 딱 8) 윤일이, 한국의 사랑채, 산지니, 2010, 170면.
9) 홍현옥, 앞의 책, 160면.
10) 유기원, 「ㅁ자형 주거를 중심으로 본 영남지역 주거문화 특성」, 한국주거학회지 4-1, 한국주거학회, 2009, 6면.
붙지 않으면 참으로 좋다. 어쩔 수 없이 구부러져 꺾이게 지을 수 밖에 없다면, ‘고랑기와’에 특별히 유의하여 많은 빗물을 받더라도 넘치거나 새지 않도록 해야 된다.금화경독기11)
서유구는 중국의 주택 구조를 고구하면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북방과 남 방의 주택 구조가 달라졌다고 보고, 조선의 주택도 지세 곧 지리적 조건에 따라 ‘口’자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서유구의 의견을 고려할 때, 안채를 ‘口’자 형태로 건축한 현상을 폐쇄적인 가옥 구조 또는 여성의 생활 을 억압하기 위한 요소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욱이 서유구는
‘口’자형 주택 구조의 단점을 열거하면서12) 이 구조가 남녀 간의 내외를 방 해한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까지 했다.
집을 지을 때는 먼저 안팎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서울 안의 권문세가에서는 제아무리 크고 좋은 집이라도 종종 바깥채와 안채가 서로 이어지는 구조를 편하게 여긴다. 장마 때면 맨발로 드 나들고, 심하면 창문이 마주하여 안채의 소리가 바깥채까지 들리 니, 그 결점이 여섯째이다.금화경독기13)
서유구의 비판을 통해 18∼19세기 당시 한양에 거주하는 경화사족들이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위해서 ‘口’자 형태의 주택을 널리 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口’자 형태의 주택 구조가 경북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으며 폐쇄적인 성격으로 해석해서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1) “東制 中國堂屋之制, 皆各成一字, 不相連續, 吾東則不然, 房堂、廂廡回環連續, 甍, 霤, 棟, 椽曲折附麗, 其形或如口字, 或如曰字, 或二ㄱ互對. (중략) 然中國北方原野平嚝, 雖 村野民家, 皆得占地廣闊, 故能作一字屋三重四重耳. 若南方, 山隈水曲,隨隙地卜築者, 其 屋制不得不曲折附麗. 故天工開物, 古今秘苑 皆有論溝瓦者. 溝瓦卽室宇合溝處承霤 之瓦也, 是知南方屋制亦有曲折處, 特不如我東之四隅曲折合成囗字形耳. 凡營造宮室宜隨 地勢, 如得平矌之地, 堂屋, 廂廡不相附麗則固善矣. 不然而不得不曲折, 則特宜留意溝瓦, 令承受淫雨, 而不溢漏可也. 同上.” 서유구, 임원경제지 섬용지 1, 임원경제연구소 역, 풍석문화재단·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6, 94-97면.
12) 서유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ㅁ’자형의 주택 구조를 비판했다. 첫째, 목재가 썩기 쉬우며 둘째, 마당[中庭]이 작으며 셋째, 배수가 안 되며 넷째, 통풍이 잘 안 되 며 다섯째, 화재의 위험이 크며 여섯째, 내외간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서유구, 위 의 책, 95-96면.
13) “爲宮室, 先辨內外. 今京城內豪貴之家, 雖甲第傑構, 往往外舍與內室相連為便. 雨潦時, 徒跣出入, 甚或牕戶相對, 內聲出外, 其失六也.金華耕讀記.” 서유구, 위의 책, 같은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