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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시라는 말은 원래 시경詩經에 실린 고대 중국의 노래 가사를 가리켰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냥 시라고만 했다. 시경이란 명칭은 시가 지 금의 모습으로 정비된 후 약 1,600여 년이 지난 남송南宋 초에 등장했다. 곧 시가 처음 부터 운문을 대표하는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가 지금과 같이 장르 명칭 으로 쓰이게 된 것은 시경이 지니는 대표성 때문이었다.

시경은 서주西周 초인 기원전 11세기 무렵부터 춘추시대 중엽인 기원전 6세기 무렵 까지, 민간이나 조정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를 모아둔 책이다. 여기에는 총 305편의 노 래 가사가 실려 있는데, 한대漢代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공자가 노魯나라 왕실에 보 관되어 있던 앞선 시대의 시 3,000여 수를 305편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곧 시경의 시 는 지금 전하는 가장 오래된 시인 셈이다. 여기에 ‘복고復古’를 표방했던 중국인의 심층 심리가 더해지면서, 후대에 출현한 운문은 모두 시경의 자손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시는 모든 운문을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야릇한 경전 시경

우린 믿는가의 여부를 떠나, 사찰이나 성당 입구에만 들어서도 왠지 모를 숙연함으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경전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믿음마저 충만할 때면, 책에 불과한 경전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도 신성한 경전에 야릇한 이야기가 있다면?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부분이 그 렇다면 어떠하겠는가?

들에 죽은 노루, 흰 띠풀로 포장하였지요.

봄을 품은 아가씨, 꽃미남이 유혹하네.

숲 속의 땔나무, 들판의 죽은 사슴.

흰 띠풀로 묶었지요. 옥 같은 아가씨 가만히 서 있네요.

“가만 가만 천천히, 앞치마 건드리지 말고, 삽살개 짖지 않게 해요!”

지금이라면 고급 향수에 비싼 보석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갔을 것이다. 구애하러 가는 마당에 죽은 노루나 사슴, 심지어는 땔나무 가지라…. 아무리 흰 띠풀로 예쁘게 포장했 더라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정경이다. 하지만 당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겨울에도 내복을 안 입고, 봄에 보릿고개를 면한 지가 몇 년이나 됐는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얼음 박힌 손발로, 초근목피를 캐먹으며 연명했던 것이 우리네 삶이었다. 하

물며 지금으로부터 최소 2,400여 년 전에야! 나름대로 멋을 낸 흰 띠풀로 포장한 노루 한 마리라면, 그것은 거의 ‘대박’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슴과 땔나무까지 얹어준다? 이건 바로 ‘갈대밭’으로 직통할 만한 거래였다. 다만 그 능력 있는 남자와 ‘야합野合’하는 것 을 누구도 몰라야 했다. 소리가 나면 안됐다. 눈치 빠른 삽살개가 짓는다면 만사가 끝장 이다. 매사에 조심조심, 아무리 급해도 치마 벗길 때조차 소리가 나서는 안 됐다.

음란함이 존재하는 층위

그런데 이 정도를 갖고 ‘야릇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계면쩍다. 이보다 더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가 ‘경전 중의 경전’이 라 할 수 있는 시경에 실려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도 ‘바른 소리[정풍正風]’라 하 여, 교화의 전범으로 추앙됐던 「소남召南」장에 수록된 시였다.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경전의 이름으로 이른바 ‘남녀상열지사’를 가르쳐야만 했다. 더군다나 성인 중의 성인 공자가 3,000여 편의 시 가운데서 예의범절에 합당한 것만을 추려 뽑았다고 하지 않던 가? 그렇다면 대체 잘려나간 2,700여 수의 시는 얼마나 심하다는 것인지….

한자문화권에서 경전은 통치의 정통성과 합법성이 근거하는 원천이었다. 또한 성인은 우주자연의 섭리를 체득한 후, 그것을 기초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정초한 문명의 제작자 였다. 그들은 순수해야 했다. 그 어떤 사악함도 개재되어서는 안됐다. 그래야만 인간사 회의 악을 제압할 수 있는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시경

305편을 한 마디로 개괄하여,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사무사思無邪]”고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달랐다. 시경에는 ‘음시淫詩 : 음란한 시’라 칭해질 만한 시가 생각 외로 많다. 하여 시경을 읽다보면, 행간의 이념적 의미보다는 문면의 감각적 느낌이 먼저 다가섰고, 그 여운도 훨씬 오래갔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시경 학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 든, 감각을 지우고 그 자리를 이념으로 채워야 했다.

「야유사균」 시는 무례함을 싫어한 것이다. 천하가 큰 혼란에 빠지고, 폭력이 횡행하게 되자 음란한 풍조가 생겼다. 그러나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게 되자, 비록 난세에 처했지만 무례함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문왕은 공자의 이상형으로, 중원에 인문적 기초를 놓은 성인이었다. 시경 학자들은 그 런 문왕의 권위를 빌어 이 시를 교훈적으로 해설하였다. 문왕이 워낙 훌륭한 인물이었 던지라,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교화는 빛을 발했고, 그 결과 서로 마음만 맞으면 혼례도 없이 바로 합방하던 풍속을 창피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화된 ‘옥 같이 고운 아가씨’는 절차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꽃미남’에게 합당한 절차를 밟으라고 충고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비단 이 시뿐만이 아니었다. 음시로 ‘오독(?)’될 가능성이 있는 시에는 여지없이 교훈 의 외피가 입혀졌다. 아무리 해도 미화가 불가능할 경우는 당시의 폭정과 혼란을 풍자 한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누가 봐도 선정적인 시를 성인이 그대로 놔둔 까닭은, 음란했

던 세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를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 는 “어째 이런 일이!” 하는 마음을 미리 품고서 음시를 대해야 했다. 또 내용 자체가 아 닌 그런 현상을 초래한 당시의 폭정에 분개해야 했다. 시가 경전인 이유를 텍스트 바 깥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힘주어 강조한다. “시경은 순일하고, 추호의 잡됨도 없 다. 따라서 당신이 만약 그것을 읽을 때 야릇한 감정이 솟는다면, 당신은 곧 음탕한 자 이다. 음란함은 시경의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음란한 시를 읽는 법

학자들은 시경에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한 음시가 많은 이유를 민요에서 찾는다. 시 경 305편의 시 가운데 절반이 넘는 160편이 민간에서 채집한 민요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 견해는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거나 임금이 조회할 때 부른 노래 가운데도 상당 수의 음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적이지 않다. 백성이야 생업에 쫓겨 교화 받을 틈이 없었고, 그래서 야합도 하고 음란한 노래도 불렀다고 치자. 그와는 정반대였 던 지배계층이 ‘공개적’으로 그랬다는 것은 그들의 생리상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 다. 그럼에도 그들조차 음탕한 노래 가사를 쓴 까닭은 무엇일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 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500여 년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우리의 뇌리에 떠오르는 경전은 엄숙주의의 화신이다. 성리학적 세계질서에 의해 신분별로, 성별로 견고하게 짜인 차별의 윤리는 개 개인의 생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사유도, 욕망도, 상상력도 덩달아 제한됐고, 이 모든 것이 경전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이제 경전은 삶의 실제와 괴리된 채 권력의 지지 아 래 사람과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 자체에 내재한 가치와 잠재력은 오히려 부차 적인 것이 되었다. 훨씬 주된 것은 기존의 정치사회적 권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라는 과제였다. 여기서 경전은 엄숙주의와 만났다. 이점은 경전 의 엄숙함이 정치사회적인 층위, 곧 경전 바깥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해준다. 엄숙함이 애 초부터 경전 그 자체에 본원적으로 내재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아무리 음시를 ‘야하게’

읽지 않고 교훈적으로 읽고자 해도, 텍스트 그 자체에서는 엄숙함의 근거를 도통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숙함은 오히려 음란함 속에서 배태되었다. 단순히 노래가사 모음집이었던 시가 하 필이면 공자의 손길을 거쳤고, 그에 의해 학습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자, 시는 더 이상 평범한 텍스트여서는 안됐다. 어서 빨리 시‘경’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전에 어울리는 권위를 지녀야 했다. 음시라는 관념은 이 과정에서 고안되 었다. 시경이 엄숙한 경전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의 인지상정을 읊은 노래가 음시로 규정되었고, 그런 음시를 비판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시경의 엄숙함을 역설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음란한 시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후적인 필요에 의해 허 구적으로 가공됐다는 것이다. 결국 음란함도 또 엄숙함도 다 시경 바깥에서 ‘불순한’

의도 아래 덧씌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시경은 엄숙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시는 그럴 필요가 없 다. 더군다나 민요란 절대 다수가 공감하고 애용하는 것, 고달픈 삶 가운데 민중의 통쾌 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 ‘남녀상열지사’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당시 는 인력이 유일한 국력의 원천이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 지식이 국력을 좌우하는 지금 과는 사뭇 달랐다. 거친 노역을 너끈히 이겨낼 건장한 인구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일.

이는 지배계층이 그 무엇에 앞서 고려하고 챙겨야 할 국가대사였다. 결혼 적령기에 이 른 선남선녀의 짝짓기는 단순히 ‘엄숙-음란’의 구도 곧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적․경제적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훗날 인력 운용에 여력이 생기고, 국가사회를 떠받칠 수 있는 여타의 사회자본이 확충 되자, 민중이 그저 자신의 삶을 유쾌하게 노래했던 시가, 지배계층이 사회적 생산력의 안정적 확보 방안을 노래했던 시가 하루아침에 음시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 니하게도 시경 학자의 해설이 일리가 있게 된다. 결국 음란함은 ‘나의 마음’에 있었던 셈이다.

중원 기획의 매체media였던 시경

시경에는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지역의 민요가 담겨 있다. 중원은 지금처럼 중앙집 권적으로 묶여있지 않았다. 문명의 조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천자(당시의 공식호칭은 ‘왕王’이었다)는 자신이 직할 통치하는 지역을 빼고는, 친족이나 공신에게 일정 지역의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렇게 천자로부터 일정 지역의 통치를 직접 위임받은 자를 일러 ‘제후諸侯’라 했고,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을 일러 ‘국國’이라고 했다. 따라서 중원은 천자가 거주하는 직할통치지역(이를 ‘경기京畿’라고 불렀다)과 다수의 ‘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은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로서의 속성을, 문명의 중심에 대한 주변부라 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국’을 우리나라의 특별시나 도 정도의 규모로 봐서는 곤란하다. 못 돼도 영남이나 호남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 주변에서도 쉬이 경험할 수 있듯이, 땅 덩어리가 이 정도 규모가 되면 틀림없이 말이 서로 달라진다. 지 리산은 골짜기마다 말이 틀렸다고 하지 않던가? 말을 달리하면 사유도 달라지고, 기질 과 감각도 함께 달라진다. 곧 문화 자체가 이질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같이 강력 한 중앙집권을 일구어낼 수 있는 각종 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각 지방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장 여러 ‘국’에서 온 관료들 이 중앙정부에 모여 회의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통역이 필요했던 게다. 아니면 오늘날 과 같은 국가가 지정한 공용어가 있어야 했다.

민중이 지은 것이든 지배층이 지은 것이든, 시경에 음시가 담기게 된 또 다른 이유 가 여기에 있다. 통역을 쓰자니 국가기밀 유지에 문제가 있었고, 공용어를 만들자니 효 율적인 보급이 문제였다. 지금 같이 매스 미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첨단 고속 인터넷 이 깔린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무교육기관도 없었다. 당시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