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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사람(vir bonus) 만들기다. 이 말은 퀸틸리아누스 의 말이다. 이는 사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양 교육 전통에서 중핵을 차지하는 개 념 가운데에 하나가 인성의 함양이기 때문이다. 인성의 교육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것 이다. 가정교육도 중요하고, 종교 교육도 의미 있다. 이는 아마도 농경 사회에서나 가능 한 교육 모델일 것이다. 요컨대 아버지가 교육적 모방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인성 교육이 이루어져 할 것이다. 하지만 이도 현재의 입시 중심의 중등 교육에서 거의 실천하기 어려운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입시 때문에 인성 교육 은 사실상 구조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을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본 연구팀은 퀸틸리아누스의 제안이 의미 있다 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모방이다. 이에 따르면,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모

방할 때에 가장 되기 쉽다. 하지만, 모방할 만한 좋은 사람은 역사적으로 드물다. 그런 데 역사적으로 검증된 좋은 사람을 담고 있는 매체가 책이다. 이런 매체가 고전이다. 퀸 틸리아누스의 말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키케로가 당대 법정을 군림했고, 혹은 후 대 사람들로부터 키케로라는 이름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연설의 대명사로 일 컬어졌는데, 이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키케로를 우러러 보아야 할 것 이고, 이를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며, 키케로를 몹시 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 자는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일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사학 교육제10 권 1장 112절)

물론, 성품이 착하고 온화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은 개인적인 인품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서 행해야 할 좋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가족의 가장으로서, 조직의 리더로서, 국가의 수장 으로서 행해야 할 좋음이 있다. 이는 개인 성품의 좋음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 차원의 좋음도 함께 중요시되고, 아울러 능력의 탁월함도 동시에 요청된다. 물론 여기에는 도덕과 윤리의 좋음도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좋은 사람의 모방이 중 요하다. 이것이 교육의 요체이다. 가족 범위의 모방 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사회 차원에 서 그리고 인류사적인 차원에서 좋은 사람을 모방하는 방법은, 직적 대면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한, 대부분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 접할 수밖에 없고, 이 경험을 제 공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따라서 인성 교육의 본체가 실은 고전 교육이다. 또한 인성 교육을 개인적 성품의 교육을 넘어서는 지평으로 확장시켜 사회적 인격의 함양까지 포 함시켜야 하는데, 이를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고전 교육이다. 참고로, 고전이란 무 엇인가의 물음과 관련해서 퀸틸리아누스는 다음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와 관련해서 지 적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는 “시간의 검증”에 대한 언표이다. 즉 고전 이란, 당대의 취향을 넘어선 것이라는 소리다. 둘째는 “유익함”의 언표다. 설령 소위 “취 향” 내지 “선호도”에 있어서 나름 “독자적인 판단”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어떤 유용함을 지닌 것이기에 고전이라는 소리다. 셋째는 고전이 반드시 옛날 것이어야 함을 고집하지 는 않는다는 점이다. 넷째는 “탁월함”의 언표이다. 퀸틸리아누스는 이를 통해서 최고의 시인, 연설가, 역사가, 철학자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약간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가능한 한 많은 책들을 읽는 것이 좋다는 점은 인정한다. 마 지막은 구체적으로 퀸틸리아누스가 표현에 유용한 것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는 퀸틸리아누스가 연설가 교육에 유용한 작가들 혹은 시인들을 중심으 로 고전을 선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퀸틸리아누스가 말 잘함을 목적 개념으로 삼아 고전 읽 기를 강조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고전 읽기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기르는 데에 무 게 중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읽어야 할 무엇 이 고전이 아니라는 점, 탁월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읽어야 할 무엇이 고전이 아니라는

점, 유익하고 감동적인, 하지만 전문적인 역사가가 되기 위해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무엇이 고전이 아니라, 퀸틸리아누스에게 고전이란 좋은 연설가 즉 좋은 정치가이자 좋은 시민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즉 일상생활에 필요한 교양은 물론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요청되는 소양을 길러내는 무엇이었다. 중요한 점은 서양의 현대 교육이 퀸틸리아누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고, 여기에 서양의 고대 로마가 엘리 트만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서양의 현대 국가들의 교육은 대중교육과 엘리트교 육을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의 현실을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의 현 주소는 어디이고,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엄밀하게 엘리트교육은 없다. 그렇다면 대중교육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대중교육도 정상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 중등 교 육의 현주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는 이렇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시험 성적 향상만을 위해, 학교 수업은 물론 학원 강의를 통해서 답안지에서 정답과 오답을 골라 내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는데, 도대체 "다음 중 아닌 것은?" 문제의 답을 골라내는 것 이 학생들의 인생을 위해 습득해야 할 능력일까? 그것도 모자라 학원에까지 가서 밤늦 게 똑같은 연습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인가? 설령 이 훈련을 통해서 명 문대학을 진학했다 해서 이 교육 방식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골라내기 연습이란 말인가? 어쩌면 우리 교육은 공교육과 사교육 분야 모 두에서 실패했다. 대학에 와서도 과외를 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학 생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옆에 서 도와주어야 한다면, 예컨대 대학에서도 과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나간들 또 그곳에서 새로운 과외 선생을 찾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교육의 근본 목표는 한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립정신과 자생능력의 배양이 교육의 소임이다. 과연 교육 담당자들은 이러한 근본 목 적 실현에 충실하게 노력하고 있는가를 물어보면 과연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사 람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필자는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고 확신한다. 이 문제는 교육자 개별의 문제가 아니고 제도와 교육 방식 체계의 문제이 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사 개인의 희생에 입각한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은 어찌 보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 이다. 결국 입시 경쟁 때문이므로 이를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정확한 답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교육 문제는 이제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 니라 경제·사회의 복합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남의 집값 상승도 교육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현재 사교육 시장 자체도 한국 경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성장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설 학원에서 흡수하는 인력만 하더라도 여느 대기업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미궁으 로 빠져 들어가는 형국이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즉 교육 외적인 문제를 교육 내부로부터 일 단 배제시키고 보면 된다. 집값 문제나 사설 학원의 실업 구제 문제는 엄밀하게 교육

문제, 즉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모두 어른들의 문제일 뿐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한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계에서 필요한 능력을 배우 고 획득하는 것일 뿐이다. 이 사실에 주목한다면 어느 정도 교육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중 아닌 것?”을 골라내는 능력을 점수 매기는 방 식으로 진행되는 교육 평가 방식인데, 이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교육 문제는 근본적으로 복합 중병 상태에서 헤어날 길이 없 다. 왜냐하면 정답이 답안지에 노출되어 있는 한 학생들은 그 답안을 답안지에서 어떻 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연습만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입시 경쟁의 와중 에서 그런 것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과외 선생으로 모시고 혹은 그런 것만 전문으로 하는 소위 “족집게” 학원 강사만을 쫒아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인생에 는, 삶의 현장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매순간 정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함을 알 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모범 정답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 상황에서 정답을 찾고 만들어 가야 할 때, 이에 필요한 능력 배양이 아마도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이다.

학생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누군가 옆 에서, 지금처럼 엄마가, 학원 선생이 도와줄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따라다니며 아이들의 "누군가"가 되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누군가"는 학생들 스스로 내 면 안에서 스스로 길러야 하는 어떤 힘이고, 어떤 이다. 그 "어떤 이"란 다름 아닌 "또 하나의 나"이다. 이 "또 하나의 나"는 자기가 경험해 보지는 못한 시간과 세상에 대한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눈과 귀를 통해서 얻어진 통찰력을 지닌 "자기 안의 자기"

이다. "자기 안의 자기"를 발견하고 세우기 위해서는 하지만 "많이 읽어야" 한다.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은 책만큼 다양한 세계와 만나는 것이고, 읽은 페이지 수만큼 많 은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보고 들음"을 통해 비로소 "자기안의 자기"가 자생적으로 내면에 태어나고, 이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 이를 사람들은 "개성 (Personality)" 이라 부른다. 이 개성이 형성될 때, 자기를 위해 살 줄 아는, 즉 고귀함 (Nobility)을 추구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개성"이란 단순하게 '성격 의 급함' 혹은 '느긋함', '욱하는 성격'이 있음 등의 개인적 감정 발산 방식을 말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책 읽기를 통해서 오히려 외부 세계와의 무수한 교류를 통해서 형성 된 한 인격체를 뜻한다. 이 "인격체"는 자동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책을 통한 무 수한 교류를 통해서, 하지만 읽은 내용을 자기 식으로 내면화하고 체화하는 과정을 통 해서 생겨난다. 그런데 '자기 식 내면화와 체화'는 '요약-정리'하는 습관을 통해서 가능 하다. 자기 식으로 ‘요약-정리'하는 습관은 이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되 면 하나의 버릇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습관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대학에 와서도 "과외를 받아야" 하느냐 아니냐를 결정지을 것이고, 취직을 함에 있어서도 자기 스스로 개척해 나가느냐 아니면 누군가의 힘을 빌 어야 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기를 돌봐주고 지켜 줄 "또 하나 의 부모" 혹은 "그 누군가"를 학생들이 내면 안에서 기르고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면 안에서 그 누군가를 기르는 일, 그것은 "또 하나의 나"를 가꾸고 키우는 일이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