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전북 지역의

2. 응지인의 성격

정조의 「농서윤음」에 호응하여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인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 하고자 한다. 정조에게 응지농서를 올린 전북 지역의 응지인의 성격을 같이 살 펴본다. 정조는 「농서윤음」에서 조선의 농정을 개선하고, 전국의 농법 현실을 종합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다고 공공연하게 요구

하였다. 정조가 애타게 도움을 달라고 고대하던 상대는 바로 「농서윤음」의 직 접 수령자인 대소신서(‘小大臣庶) 즉 관료, 유생, 백성들이었다. 정조의 「농서윤

음」에 호응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료, 지방 유생, 서민 등이 자신의 견문과 경험

을 바탕으로 농업기술과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작성하여 정조에게 진 정(進呈)하였다. 정조에게 자신의 지혜와 방략을 적어 올린 이들을 응지인(應旨 人)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팔도의 응지인들이 정조에게 올린 농서(農書) 들이 바로 응지농서(應旨農書)라고 지칭할 수 있다.

정조는 「농서윤음」에 호응하여 응지(應旨)하는 두 가지 방식을 사려 깊고 친 절하게 제시해주고 있었다. 하나는 장소(章疏)의 형식으로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하여 올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책(簿冊)의 형태로 농서(農書)를 만 들어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각지의 응지인(應旨人)은 혹은 상소를 올리 거나, 혹은 책자를 올렸다. 이와 같이 두 가지 형식으로 팔도의 응지인들이 정 조에게 올린 농서(農書)들이 바로 응지농서(應旨農書)라고 지칭할 수 있다.

응지인들이 응지농서를 저술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대부분 농사전문가인 노농(老農)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노농의 도움을 받아서 얻은 식견이나, 또는 노농의 행적에 대한 견문(見聞)에 근거하여 응지 농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또한 응지인 중에는 스스로 노농(老農)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십년 동안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의 수고로움’과 ‘농민 들의 괴로움’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하였다. 응지인 중에는 정조와 지근 거리에서 세자(世子)의 사부(師傅) 자리를 맡고 있던 고관(高官)이 있었고, 반면 에 서울에 살고 있던 서민(庶民)도 있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사람들 은 중앙 관리와 지방 수령 그리고 지방 유생이었다. 중앙 관리로 활약하던 응 지인 중에 정약용(丁若鏞), 박지원(朴趾源), 서유구(徐有) 등은 정조와 규장각 을 중심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응지농서의 응지인 중에는 정조와 특별한 학문적인 측면의 교분(交分)

을 쌓았던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정조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든 선집류(選集 類)의 교정(校正)에 참여하여 정조와 친분을 맺은 인물들이었다. 즉 교정유생 (校正儒生)으로 정조의 편찬사업에 관여하였다가 응지농서 응지인이 된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주도한 편찬사업 과정 특히 교정과정 에 참여한 인물은 지방의 유생으로 지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지 방의 여론 주도층을 정국 운영에 깊숙히 개입시켜 자신에 대한 지지기반을 광 범위하게 만들고 또한 확고하게 다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정조 의 교정 유생으로 선발된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전북 지역에서 응지농서 를 올린 응지인이었다.

1798년 정월 『어정대학연의유선(御定大學衍義類選)』과 『어정주서집략(御定 朱書輯略)』를 교정하는 유생이 전라도 전역에서 선발되었다.34 이는 당시 전라 도 관찰사였던 이득신(李得臣)이 주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총 14명의 유생을 뽑 아 교정에 참여하게 하였다.35 광주 목사 서형수(徐瀅修)와 순창 군수 서유구 (徐有)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전라도내의 교정유신을 선발하여 광주 향교에 서 교정작업을 수행하게 하였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36

정조의 어정책자 교정사업에 교정 유생으로 참여하였다가 뒤에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인이 된 인물을 전라도 지역에서 여러 사람 찾아볼 수 있다. 담양(潭 陽)의 남극엽(南極曄), 순창(淳昌)의 신보권(申輔權), 고부(古阜)의 박도흠(朴道 欽), 영광(靈光)의 이대규(李大奎), 능주(綾州)의 남익(南), 장흥(長興)의 위백

34) 전라도 담양의 유생으로 선발된 남극엽의 사례에서 교정 유생 선발 상황을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南極曄, 『愛景堂遺稿』 卷3, 營抄再校.

35) 李得臣은 1797년 5월 전라도 觀察使에 임명되었다<『正祖實錄』 권46, 正祖 21년 5월 辛亥 (47- 22)>.

36) 正祖가 전라도 유생을 시켜서 교정하게 한 것은 眞德秀의 『大學衍義』와 丘濬의 『大學衍義補』

에서 가장 긴요하고 더욱 경계가 될 만한 것들을 추려 뽑아 손수 평점하고 채집한 『大學類義』

라는 책이었다(『正祖實錄』 권54, 附錄 正祖大王行狀 (47-294).

순(魏伯純) 등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37 전라도 지역의 응지인 가운데 상당 수가 바로 남극엽(南極曄)을 필두로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을 교정하는 유생 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교정유생으로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 인들은 중앙과 지방의 관료직에 있거나 지방 유생으로서 정조의 농업 개혁 구 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조가 추진하는 농정 개혁과 농서 편찬에 적극적 으로 협력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과 관련이 깊은 지역의 농업현 실에 의거하여 농업기술의 발달 그리고 농정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응지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시무책(時務策), 경세서(經世書), 농서(農書) 등을 상소(上疏) 또는 책자(冊子)의 형태로 정조에게 진정(進呈)하였다. 즉 응지농서 (應旨農書)는 2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장소(章疏)의 형식 을 갖춘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하여 올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책(簿冊)의 형 태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제출한 것이었다. 응지농서에 담겨 있는 농정(農 政), 농법(農法)에 대한 여러 응지인(應旨人)들의 개선론, 개혁론은 당대의 사회 개혁론, 농업개혁론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최근에 응지인들 가운데 학계에서 실학자로 손꼽히는 몇 명의 인물의 행적 에 대한 심도 있는 천착이 필요한 사실(史實)을 발견한 점을 소개하고자 한 다. 다름 아니라 박지원(朴趾源),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 등 몇 사람이 1797년에서 1798년 사이에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였고, 이들이 정조의 「농서윤

음」에 호응하여 응지농서를 올렸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들이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게 된 배경에 정조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소상한 탐색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박지원의 경우 1797년 7월에 충청도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가 1800년 6월

37) 南極曄, 『愛景堂遺稿』 권3, 雜著 大學衍義參校.

정조가 승하한 직후 8월에 이르러서야 양양부사로 임명되면서 면천을 떠났다.

면천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박지원은 정조가 내린 「농서윤음」에 호응하여 응 지농서를 올렸는데 그것이 바로 『과농소초(課農小抄)』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1797년 윤6월 황해도 곡산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곡산부사로 재임하던 때에

「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라는 제목의 응지농서를 올렸다. 또한 서유구는 1797년 7월에 전라도 순창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 조에게 응지농서를 올렸고, 그것이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疏)」라는 이 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3인이 각각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군현의 수령 으로 내려가게 된 시기가 1797년 윤6월, 7월이라는 점, 그리고 이들이 동일하 게 정조에게 응지농서를 올린 점은 무엇인가 정조와 이들 사이에 암묵적인 또 는 보다 분명한 교분(交分)이 있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한 대목이다.

응지인이 올린 상소와 책자는 내용의 측면에서 두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 었다. 농업기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농서(農書)라는 공통의 내 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양자는 정조의 「농서윤음」에 응하여(‘應旨’) 올린 것이 라는 작성 동기의 측면에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정조의 「농서

윤음」에 응하여 올렸다는 ‘응지(應旨)’의 특징과 농업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서

술을 담고 있다는 ‘농서(農書)’라는 성격에 의거하여 응지인이 올린 상소와 책 자를 함께 부를 때 ‘응지농서(應旨農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 이다.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인의 후손들은 응지농서를 포함한 선조의 문집을 간행 하는 작업을 선조에 대한 추숭 뿐만 아니라 가문에 대한 현창의 목적을 뚜렷 하게 갖고 진행하였다. 후손에 의해서 편찬된 문집에 포함된 응지농서는 활자 인쇄를 통해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농학적인 차 원의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농법의

정리 결과물인 농서가 인쇄, 간행되어 보급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는 점에 서 농서 편찬의 전체적인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현재 응지 농서를 살피는 연구에 이렇게 문집에 수록된 응지농서를 활용할 수 있는 자료 적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응지농서는 농업기술 뿐만 아니라 농정(農政)에 대한 주장도 담고 있었다.

응지인은 평소에 노농(老農)에게 전수 받은 농업기술이나 노농의 행적에 대한 견문에 의거한 식견에 근거하여 응지농서를 저술하였다. 또한 지역의 농업 실 정에 근거한 농업경영, 농지개간, 수리시설 등에 대한 나름의 방책을 제시하였 다. 이와 같이 응지인은 정조의 요구대로 조선의 농정을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 지 방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조선의 당대 농업기술을 지역적인 차원에서 정리 한 농서를 올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