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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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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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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세기 후반 전북 농업의 역사적 현실을 살펴본 연구의 결과물이다. 앞으로는 농민들의 지혜와 노고를 본받아 '농사를 농사답게'라는 연구 의지를 마음속에 담고 실천에 옮겨 실험실의 형광등을 더욱 밝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론

연구 목적 및 필요성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8세기 후반 전북지역의 농업과 농촌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를 염두에 두고 18세기 후반 전북지방의 농촌 농촌 재건에 본 연구가 진전된다면,

연구 현황과 문제 제기

김용섭은 능지농경서를 구체적으로 분석, 고찰한 논문을 제출하였다.9 그리고 능지농경서를 편찬한 능지족(應旨人)을 농촌지식인으로 정의하였다. 한편 염정섭은 응지농서 편찬과 응지족 전체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들을 농촌 지식인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정조의 농업정책에 호응하는 우호세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수정적 입장을 제시했다. . 정책과 농업 개혁.10.

연구 방법과 연구 내용

정조는 기초자료를 모아 종합농학서를 편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농업행정에 큰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그 목적은 '농업전집'을 편찬하는 것이었다.23 새로운 농서 편찬의 방법은 전국의 농업기술 현황, 즉 농업방법을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전북 지역의

응지인의 성격

즉 유학자로서 정조의 편찬사업에 참여하다가 응지농서의 학자가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음'에 대한 응원의 편지가 게재된 사실이다.

응지농서의 특색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내려오기가 어렵습니다." 정조는 70세에 시골에 은거하여 완성한 장현경의 편지에 대한 장현경의 반응에 크게 분노했다58.

농업 기술의

지역적 성격

벼농사 기술의 전개

그가 완산에서 사망한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가 이식작업을 참관한 시기는 그 이전이었을 것이다. 비변사의 검토 보고서에서는 "실시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78. 그러므로 주앙을 여기에 허락하고 그곳에서 복무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상황과 이성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79.

밭작물과 상품작물의 재배

나무막대를 이용하여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경구법과 별개의 방법으로 평가되었다.93. 조선 후기에 가장 발달한 상업 농업은 인삼을 비롯한 약초 재배였다.98. 남초 재배로 인해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주산지를 확대하게 되었다.

개간·간척과

수리시설의 특징

개간과 간척의 실상

채굴과 매립은 토지소유를 목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가계농업을 위한 소규모 자연취락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대지주나 큰 재원을 투자할 수 있는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매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주한광지의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땅을 갈아엎는 조건이 가장 큰 요건이었다. 당시 최고 권력을 쥐고 있던 기관인 궁방이 간척지를 조성하고 매립마을을 형성하는 과정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123.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

이는 정조대왕에게 큰 신뢰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 응지농서를 발행한 응지족은 전북 지역의 수자원 현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전라도에서 도승으로 활동하며 응지농사에 관한 편지를 보낸 김하련(金夏璉)은 물레방아를 만들 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이우형을 지목했다.

농촌과 농민의 변화 양상

농촌 구조의 변화

농촌에서 농민들이 더욱 관심을 갖고 농촌사회의 경제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재산세, 특히 재산세라고 할 수 있다. 할당된 토지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다.170 그러나 실제로는 궁방과 아문과 일반 대중 사이의 토지 소유권 분쟁은 궁방과 아문의 과도한 징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응지인의 응진농서에는 전라북도 농촌과 농민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친 궁방전과 관련된 논의가 수록되어 있다.

농민층의 처지와 대응

C.210 더욱이, 민사 소송에서도 금으로 임대료를 징수하는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각 성을 적고 나중에 해당 성에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기 때문에 이를 모든 도현에서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때 농업임용이 지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주의점으로 지적되었다.233 노익원은 각 군의 농업기술의 보전과 전수, 농업을 통한 실천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결론

18세기 후반

전북 농업의 성격

또한, 지역간 가격차이가 클 때에는 다른 지방의 도시나 시세가 더 좋은 지방으로 이전을 하기도 합니다. 신청서를 게시한 주민들은 전북지역 상수도시설 현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전북지역 농민들은 자신들이 게재한 농업경영서의 내용에서 조선시대 대규모 농업행정을 담당하는 직책의 신설과 농업기술 전수, 농업 관행 장려 등을 구체적으로 요청했다. .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