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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층의 처지와 대응

농촌과 농민의 변화 양상

2. 농민층의 처지와 대응

임진왜란을 경과한 후 17세기 토지소유권 발달과 양반층 농업생산에 변동이 크게 나타났다. 16세기 후반 이후 지주들은 대토지 농업경영을 농장적인 요소 를 띤 노비제적인 경영에서 병작제로 전환하게 되었다.206 17세기에 들어서면 사적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은 양안(量案)이라는 국가의 토지장부를 통해서 일 부 보장되었다. 물론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매매에 관련된 문서, 즉 토지문 기(土地文記)에 의해서 기본적으로 확보되었다. 매도자가 발급하여 매수자가 보관하고 여기에 증인(證人)의 서명이 들어있는 토지문기는 앞서 발행한 것이 연이어 붙어있기 때문에 실제의 토지소유자만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토지문기를 망실(亡失)되거나 소실(燒失)되는 등 사라졌을 때 관에서 입안(立案)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럴 경우 양안(量案) 기록은 토지소유 자의 소유권을 입증하는 방증자료로 이용되었다.

사적소유권의 발달 정도는 양안에 기재된 소유권을 국가가 어떠한 방식으 로 보장하는가에 따라 추적할 수 있다. 개인의 소유권을 제약하는 요소는 왕 토사상(王土思想)과 수조권의 존재였으며, 그러한 요소에서 근대의 배타적 소 유권과 차이가 있었다. 물론 조선 전 시기에 개인의 소유권 역시 점차 발전되 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토지소유권자에 대해 ‘기경자위주(起耕者爲主)’라는 용어를 통해 ‘영작기물(永作己物)’할 수 있도록 양전법(量田法)에 규정하기 시작 한 것이 17∼18세기 갑술양전(1634년)과 경자양전(1720년) 과정에서였다. 이 같 은 과정에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차원의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8세기 중엽에는 소유권자를 법제화하는 것이 보다 진전되었

을 기다려 점차 習俗을 바꾸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206) 李景植, 「16세기 地主層의 動向」, 『歷史敎育』 19, 역사교육학회, 1976, 139~183쪽.

다. 17세기 이후의 토지소유권 발달은 곧 조선국가의 사적소유에 대한 확인과 정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개별 소유권자의 권리를 확정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광무양안 단계의 관계(官契) 발급을 통해 완성된 사적소유권의 국가적 법 인 과정은 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토지소유권의 성장과정을 양안(量案)에 표시된 토지소유자에 대 한 기재 방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17세기 이후 조선후기 지주제 경영 의 양상은 토지소유권의 성장과 관련하여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을까.

먼저 17세기 이후의 지주 경영은 토지 소유와 경영의 분화과정을 통해 다양한 발전 양상을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토지소유의 집적 양상, 즉 대토지 소유 의 증대 경향에 따라 거주지 중심으로 토지를 집중시키면서 임노동을 고용하 여 지주경영의 생산성을 제고하려는 지주경영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전국을 대상으로 토지집적을 확산시키면서 중간관리인을 두어 병작(幷作) 경 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시도하는 방식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두 가지 지주경영은 신분제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작인농민과의 계약 관계가 발달하는 가운데 경영합리화나 조직적인 관리를 통해 생산성 제고를 꾀했다. 전자의 경우가 자작지(自作地)를 중심으로 소유지를 집중시키고 나아 가 집약적 경영을 행하는 형태로서의 경영지주(經營地主) 경영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면(面)단위를 넘어 군현·도 단위의 병작지(竝作地) 확대를 통해 부재지 주(不在地主) 경영을 행하는 경우였다.207

16∼17세기의 양반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상인층 및 부농층의 토지겸병에 의 하여 지주전호제라는 형태의 병작제의 발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 기에 존재하였던 농장제·자영농제·병작제의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조선후기에 는 병작제가 점차 우세하여졌다. 이러한 토지소유집중에 의한 병작제의 발전

207) 李世永, 「18・19세기 兩班土豪의 地主經營」, 『韓國文化』 6,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5.

과정 중에서 농민층의 입장에서는 자작농민이 전호농민으로 사회적 처지의 변 화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시기가 내려올수록 더욱 심화되어, 18세기 말 에는 “호남의 백성들을 1백호(戶)로 친다면, 그중 남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租) 를 받는 자는 5호에 불과하고, 자기 땅을 자경하는 자는 25호 정도이며, 남의 땅을 경작하여 조를 바치는 자는 70호에 달한다.”라거나,208 심지어는 “자기 토 지를 가지고 자경(自耕)하는 자는 열에 한두 명도 되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지주전호제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되었다.209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병작제에 바탕을 둔 지주전호제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되었다. 병작제가 지배적인 형태 가 되면서 토지의 소유자인 지주와 직접 생산자인 전호 사이의 부담형태는 경 제외적 강제가 약화되면서 경제적 관계가 일반화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한편 개간과정에서 경작권이 분할되면서 소유권으로 성장하면서 그에 따 라 경작자인 전호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강화되어가면서 전호의 부담이 가벼워 지기도 하였다. 즉, 양반과 토호층이 진전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개간에 필요한 물력과 노력을 제공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이 노력을 제공하면서 개간 토지의 소유권이 분할되거나, 경작권이 농민에게 분급되면서 지주소작관계가 변화한 것이었다. 농민이 일정한 권리를 가진 토지는 도지권화(賭地權化)해가 면서 농민적 토지소유권이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전호의 지주에 대한 부담은 약화되었다.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수취체제의 변화 및 농민층 분화현상의 진전 등 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특히 신분제의 동요를 매 개로 한 사회적 여건의 변화는 지주전호제의 성격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 다. 조선후기에 지주제가 일반화되어가면서 차츰 지주제 내에서 소유자와 경작

208) 丁若鏞, 「擬巖禁湖南諸邑佃夫輸租之俗箚子」, 『여유당전서』1, 권9.

209) 朴趾源, 「限民名田議」, 『燕巖集』 권16.

자의 부담형태에 변화가 일어났고, 직접생산자인 전호의 지주에 대한 부담액이 점차 감소하여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나아가 19세기에는 지주제가 약화 되어가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당시의 지주제하에서 직접생산자의 소작료형태 가 반분타작(半分打作)하는 타조법(打租法, 定率地代)이 일반적이었는데, 18세 기 이후부터 한전을 선두로 하여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수전까지도 점차 도 조법(賭租法, 定額地代)으로 이행되었다. 그 도조법의 액수는 보통 수확량의 3 분의 1 내지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지대 징수 방법의 변화는 시기에 따 라 저절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지주와 전호의 역학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었다. 전호가 납부하는 소작료인 지대의 형태는 지주가 결정하는 것이었지만, 전호의 항조운동과 당시의 사회여건 속에서 지주는 도조법으로 지대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에 전반적으로 지대납부방식이 타조법에서 도조법으로 이행되었는데, 도조법으로의 전환은 부농에게는 경작을 통한 성장조건이 되었 다. 도조법이 타조법에 비해 소작료율이 낮다는 것뿐만 아니라, 경작자가 농업 경영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도조법하의 농민은 타조 법하의 농민보다 인격상 나은 처지에 있었다. 타조법이 수확의 절반을 수취하 는 소작제이므로 지주들이 수확량의 많고 적음에 직접 이해를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씨뿌리기부터 가을걷이·마당질에 이르기까지 감독자의 역할을 수행했 지만, 도조법은 정액지대이므로 그해의 수확에 관계없이 계약된 일정액을 받기 로 되어 있으므로 지주는 소작인의 농업경영에 대해서 타조법의 경우처럼 크 게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나아가 도조법은 18세기 말 이후 금납제(金納制)로 진전되면서 조선사회의 지대납부방식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특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궁방(宮房)에서 점차 금납으로 소작료를 징수하거나, 정부에서도 조세를 금납으로 징수하였

다.210 나아가 민전에서도 금납으로 소작료를 징수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금납 제 시행은 직접생산자인 부농의 자기경영을 강화해주는 것이며, 성장할 수 있 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부농(富農)은 곡물을 판매하여 화폐를 마련해 야 했고, 그 가운데서 상품화폐경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다. 또 한 상업적 농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방안도 강구했다. 즉, 금납제로의 지 대납부는 농업경영이 경작강제의 약화, 상업적 농업의 진전, 농민층 분해의 촉 진과 부농의 성장이라는 방향으로 크게 변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의 소농(小農) 경영은 기본적으로 개별적 소유라는 토지소유관계 의 전개 속에서 소규모 개별적 생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211 17세기 이후에는 이전부터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소농경영과 지주제 생산방식의 공존 상황은 위 기상황에 직면하였다. 양자 간의 균형이 깨지면서 지주제는 더욱 강화되면서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17세기 후반을 경계로 소농경영의 안정적인 전개가 어 려워지고 지주제가 보다 강화되었다. 물론 조선정부의 소농(小農) 안정을 위한 농정책은 계속 실행되었고, 흉년이 들었을 때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책도 시행되었지만, 농업생산의 주된 흐름이 지주제로 모아졌다. 반면 지주가 아닌 부농(富農)이 크게 증대하였다. 지주와 부농 중심의 농업생산이란 변화는 신분 제의 변동과 맞물린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특징적인 존재였던 소농경영 은 점차 농촌사회의 양극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어갔다.

조선후기 소농 경영의 규모는 대체로 50부(負) 이하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결부법(結負法)에서 1결의 실제 면적은 대략 3,000평에서 12,000평 정도였다. 이렇게 커다란 범위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이

210) 이영호, 「18, 19세기 지대형태 변화와 농업경영의 변동」, 『한국사론』 1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4.

211) 金泰永, 「조선전기 소농민경영의 추이」, 『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