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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구조의 변화

농촌과 농민의 변화 양상

1. 농촌 구조의 변화

18세기 후반 전북지역의 농촌과 농민의 구체적인 변화 양상을 응지농서를 중 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응지농서가 기본적으로 농법(農法), 농정(農政)을 다 루고 있지만 그 세부 내용 속에는 농촌(農村)과 농민(農民)에 대한 문제제기 와 해결방안 모색이 담겨 있었다. 농촌사회 구조의 변화 양상과 농민층의 대응 과 분화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이를 국가적인 지배통제 양상 속에 자리매김 하려는 것이 당시 조선 조정의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정조의 여러 변 통책에 호응하여 응지농서를 작성한 응지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농촌 (農村), 농민 문제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이를 응지농서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 인다.

농촌에서 농민들이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 또한 농촌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로 부세(賦稅), 특히 전세(田稅)라고 할 수 있다.

전세와 관련하여 궁방(宮房)과 아문(衙門)에서 둔전(屯田), 둔답(屯畓)에 부과하 는 조세는 그 수취과정에 도장(導掌)이라고 불리는 중간인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횡령, 착취, 남징 등의 문제가 자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궁방전을 둘러싼 문제가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왔 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궁방전(宮房田) 과 아문둔전(衙門屯田)이 절수(折受)라는 형식을 통하여 확대되었다.165 둔전은 주둔하고 있는 병사(兵士)의 군량을 자급자족하고, 각 관아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진황지를 개척하여 설정한 전답이었다. 그런데 궁방전과

165) 임란 이후 屯田은 官의 권력에 의해 창출된 空閑地를 통해 확대되었다. 『大典會通』에 따 르면 各鎭의 屯田이 액수에 미치지 못할 때 空閑地로 充給할 수 있었다(『大典會通』 卷之二 戶典 諸田).

아문둔전은 진황지를 절수받아 백성을 모아 경작하는 방식을 형식적으로 취하 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백성이 소유하고 있는 민전(民田)의 투탁(投托)을 받 거나 또는 민전을 침탈(侵奪)하는 방식으로 그 면적을 크게 확대시켜 나갔다.

궁방의 절수는 구체적으로 어(漁)・염(鹽)・시장(柴場)・선척(船隻)을 비롯하여 토지(土地)・노전(蘆田)・해택(海澤)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중에서도 어장과 염장은 단기간에 적은 투자로도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절수의 중 요한 대상이 되었다. 궁방의 어장과 염장의 절수는 그 과정에서 어민에 대한 침학과 불법행위뿐만 아니라, 경영의 미숙으로 차인배(差人輩)가 연해민을 침 학하는 계기를 초래하였다.166

각 궁방들의 궁방전 절수는 토지 등의 소유권이나 수세권을 획급(劃給)한다 는 것을 의미하였다. 소유권을 획급한다는 것은 무주지(無主地)를 절수하는 경 우이고, 수세권만을 획급한다는 것은 유주지(有主地)를 절수한다는 것을 의미 하였다. 그런데 무주지의 절수의 경우에도 실질적인 주인이 있으면서 명목상의 소유권이 궁방에 있는 것과 실질적인 소유권이 전적으로 궁방에 있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 절수는 수조권이나 소유권을 영구히 주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일시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궁핍한 궁방 재정을 지원 하기 위해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절수를 허용하였다 하더라도 이것이 점차 광 범하게 전개되고, 또한 궁방에서는 영구히 점유하려고 하였다.

궁방이 수행한 절수(折受)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잔존 혹은 변형형태로서,

왕실·궁방의 과도기적 토지지배의 한 형태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167

166) 박광성, 「궁방전의 연구」, 『인천교육대학논문집』5, 1971 ; 박병선, 「조선후기 궁방염장 연구」,

『교남사학』2, 1986.

167) 박준성, 17·1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소유형태의 변화」, 『한국사론』 11, 서울대 국사학과, 1984 ; 이영훈,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전개과정과 소유구조」, 『조선후기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 도진순, 「19세기 궁장토에서의 중답주와 항조-재령 여물평장토를 중심으로」, 『한국사

방에서 절수하는 토지는 무주진황지(無主陳荒地)나 양안외가경지(量案外加耕 地) 등 국가수세대상에서 제외된 토지를 원칙으로 하였지만, 궁방에서는 국왕 의 권력을 배경으로 주인이 있는 개간지를 양안상무주지(量案上無主地)라는 명목으로 절수하여 궁방전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이 궁방전의 확대는 매득(買得), 각영(各營)과 각아문(各衙門) 소속 둔전(屯田)의 이속(移屬), 무주지(無主地) 절수(折受)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궁방전과 관련된 사회문제는 바로 절수(折受)에서 비롯되었다. 절수는 궁방이 무주지를 조사하여 토지가 소재한 지방의 관으로부터 입안(立案)을 발 급받는 방법과 궁방에서 절수 대상지를 내수사(內需司)에 신고하여 이조(吏曹)・

호조(戶曹)를 통하여 절급(折給)받는 방법이 이용되었다.168 그런데 문제는 궁방 이 절급받기 위해 신고한 토지 가운데 무주지(無主地)가 아닌 유주지(有主地) 특히 양인, 천인의 토지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궁방의 토지 절수는 민전침탈과 국가수세지의 감소를 유발하였고, 이에 인 민들이 소유권분쟁 등의 사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히 소유권을 둘러싼 분 쟁이 발생하였다. 궁방은 절수받는 방법 이외에 사여(賜與), 민전 유인・투탁 등 의 방법으로 궁방전의 규모를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현종초에 이르면 한 궁가 (宮家)가 보유한 궁방전이 1,400여결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고, 지역적으로 삼 남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며 특히 황해도 지역에 궁방전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 들 궁방전은 모두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免稅)의 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궁방전의 확대는 국가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그리 기분좋은 상황은 아 니었다. 물론 이 경우 국가와 왕실은 분명히 구분되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 13, 서울대 국사학과, 1985.

168) 李榮薰, 『朝鮮後期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궁방이 자신이 이름으로 설정한 궁방전(宮房田) 내부에 민전(民田) 소유자의 투탁을 받은 전토를 섞어두고, 또한 백성 소유의 토지를 침탈한 것은 엮어 놓 고 있었던 사정은 겉으로 보아 불법적인 것이었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충분한 파악이다. 이러한 구차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었고, 또한 그러한 방식 의 궁방전 확대가 실제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 역사적 의의 를 지닌다. 즉 당시 궁방전에 토지를 투탁한 민인의 생각은 이러한 투탁이 과거 수조권(收租權)이 설정되어 있었던 수조지(收租地)와 다름 없을 것으로 파악하 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자신들이 보유한 소유권 마저 궁방에게 넘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투탁(投託)이라는 말조차 감히 입 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궁방과 실질적인 소유자 사이에 토지소유 의 이중적 구조를 형성하게 하는 절수(折受)-면세제(免稅制)는 수조권적 토지 지배가 폐지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로 재편되어 가고 있던 토지 소 유관계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 수조권(收租 權)이 폐기된 가운데에서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국왕이라는 최고권력을 매개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왕실・궁방의 과도기적 수조권적 토지지배 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과도기적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성격을 가진 절수라는 형식은 1695년(숙종 21년) 을해정식(乙亥定式)에 의해서 급가매득제(給價買得制)와 민결면세제((民 結免稅制)가 시행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궁방의 토지획득과정의 대종이 이전의 절수(折受)와 같은 경제외적 방법에 의존하던 것에서 급가매득이라고 하는 경제적 방법으로 전환한 데에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급가매득의 시행은 토지의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던 17세기 중후반 이후의 상 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 궁방전은 매득지(買得地)・절수지(折受地)・민결면세지(民結 免稅地)의 세 종류로 구성되었다. 매득지는 궁방이 지주가 되어 작인(전호)을

거느리는 농업경영을 수행하는 토지였다. 즉 궁방(宮房)이 지주경영을 해나가 는 것이 일반 민전(民田)에서의 지주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절수지 의 경우 궁방의 명목적 소유권과 경작자의 사실상의 소유권이 중첩되는 이중 적인 소유관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점은 지대 수취액에 그 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매득지처럼 병작반수의 형태가 아니라, 1결(結)당 조(租) 200두(斗)를 수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궁방이 실제 개간의 주체였을 경 우는, 공사 참여자 사이에 토지의 분할・도장권(導掌權) 부여・경작권의 부여 등 권리의 분할이 여러 가지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중답주(中畓主)가 존재하 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궁방전은 유토(有土)・무토(無土)로 분화되어가면서 더욱 복잡한 소유관계를 맺고 있었다.169 18세기 말엽에는 궁방전의 면적이 4만 결 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전국 경지면적의 3% 내외를 차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토에는 궁방(지주)-작인(전호)의 소유구조 외에 궁방(수조자- 지주)-기주・중답주・도장(지주)-작인(전호)의 이중구조가 존재하였다. 후자는 인 민들의 소유권 성장의 결과이며, 궁방의 사적・공적 지주로서의 특성에서 기인 하였다. 아울러 궁방은 경제외적 방법에 의하여 이 지역 궁방전의 소유주가 되 었으나, 중답주는 경제적인 연유로 성립된 소유자로서의 지주적 성격이 짙으 며, 부농들은 중답주로도 존재하였으나 대부분은 이들의 토지를 소작 또는 자 소작(自小作)하는 실작인(實作人)들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중답주의 성장은 직 접생산자의 권한증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궁방전과 아문둔전이 확대되는 추세 속에서 궁방전・아문둔전

169) 有土에는 1종과 2종이 있는데 1종은 토지소유권이 궁방에 있는 땅이고 2종은 민유지이지만 조세를 궁방에 납부하는 땅인 것 같다. 無土는 민유지이면서 조세를 궁방에 납부하고, 3~4 년(정조 이후에는 10년)마다 윤회하여 정하는 곳이다. 2종 유토와 무토의 차이점은 전자는 토지를 고정시키는 데 반하여, 후자는 토지를 윤회시킨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