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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

수리시설의 특징

2.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

조선왕조 근세사회에서 수리시설은 위치 및 용도에 따라 제언, 천방, 해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제언의 경우 계곡, 계곡물을 이용하는 수리시설이고, 하천 물을 이용하는 것이 천방이며, 바닷물을 막는 시설이 해언이었다. 수원(水源) 에 따라 수리 개발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골짜기를 가로막는 제방(堤防)을 축조하여 계곡물과 빗물 등을 저수하는 경우가 제언이었다. 하천을 가로막아 하천물의 수위를 높이고 이를 따로 개설한 수로(水路), 구거(溝渠)를 통해 논으 로 끌어들이는 것이 천방(川防, 洑)이었다. 또한 바닷가의 간석지를 농지로 개 발하기 위해 해수(海水)가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둑이 해언(海堰)이고 이렇게 개발된 논밭을 언전(堰田)이라 하였다.127

조선 초기부터 중앙정부는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데 주의를 기울 여 수리정책을 펼쳤다.128 우희열, 이은 등 수리에 정통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제언(堤堰)을 축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벽골제, 눌제 등을 개축(改築)

127) 문중양, 『조선후기 水利學과 水利담론』, 集文堂, 2000.

128) 李泰鎭, 「조선 초기의 水利정책과 水利시설」 『李基白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下)』, 一潮閣, 1994; 宮嶋博史, 「李朝後期の農業水利-堤堰(溜池)灌漑を中心に-」 『東洋史硏究』 41-4, 1983.

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수리정책은 제언과 천방의 축조 장 려, 제언 천방의 관리 보수 강화 등의 측면으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조정 의 수리정책의 기조가 문종대 이후 제언(堤堰)에서 천방(川防)으로 크게 변화 하였다.129

조선의 수리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할 주체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였다.

제언사는 때때로 치폐(置廢)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전역의 수리시설 현황을 조 사하고 때때로 관리를 파견하여 제언 등 수리시설의 축조 관리를 독려하였 다.130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비변사 전임당상의 하나로 제언(堤堰)당상을 설치하여 제언에 관련된 시책을 마련하고 시행하게 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시기에서도 조선사회의 농업생산에 활용된 수리 이용은 제언 (堤堰) 천방(川防) 등과 같은 수리시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조정에서 제언 과 천방을 중심으로 펼친 수리정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하나 는 기왕에 축조되어 있는 제언과 천방(보)을 온전하게 유지하여 그 혜택을 제대 로 입을 수 있도록 수리시설을 관리하여 수리시설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향 이었다. 다른 하나는 제언과 천방(보)이 없는 지역에서 입지를 선정하여 새롭게 수리시설을 수축하여 전체적인 수리시설의 총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이었다.

정조는 1798년에 내린 「농서윤음」에서 농사의 요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이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제언 수리의 필요성을 크게 강 조하였다.131 정조는 수리시설의 축조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화성(華城) 성역(城 役)을 추진하던 도중에 축조한 만석거(萬石渠) 축조의 효용성에 대한 인식에서

129) 李泰鎭, 「16세기의 川防(洑) 灌漑의 발달」 『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韓國社會史 硏究 -농업기술의 발달과 사회변동-』, 知識産業社, 1986 재수록)

130) 崔元奎, 「朝鮮後期 水利기구와 經營문제」 『國史館論叢』 39 국사편찬위원회, 1992.

131) 『日省錄』 正祖 22年 11月 30日條. 『備邊司謄錄』 88冊 正祖 22年 11月 30日條.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32 1795년 화성에 축조된 만석거는 얼마 뒤 인 1797년(정조 21)과 1798년(정조 22) 연이어 발생한 큰 가뭄 상황을 해소하 는 데 커다란 효험을 발휘하였다. 당시 2년에 걸쳐 가뭄이 들면서 삼남지역 전 부가 커다란 피해를 피할 수 없었는데, 화성지역의 대유둔전(大有屯田)은 만석 거에 힘입어 극심했던 한재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1798년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만석거의 수리상의 효용성을 지적하면서 제언의 신설축조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제언(堤堰, 萬石渠)이 아직 축조되기 이전에는 황전(荒田) 폐답(廢畓)으로 쑥만 울창하게 자라는데 불과하였던 땅이 제언이 축조된 이후에는 물줄기가 호탕하 게 되어 버려진 땅에서 비옥한 전토(田土)로 변해 버렸다. 비록 지금 4・5월의 가 뭄 속에서도 제언 아래에 있는 수백 석의 큰 평야는 한결같이 곡식이 잘 자라고 있어 재해를 재해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133

정조는 이러한 가뭄의 극복 과정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수리시설의 효용성 을 확인하였다. 정조에게 커다란 자신감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계속해 서 화성에 여러 제언이 새로 축조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 다. 정조는 화성의 수리시설 축조 경험을 통하여 농업기술과 농업여건에서 가 장 중요한 문제가 수리에 있음을 절감하였다. 특히 만석거를 통한 수리시설의 실제 효과를 직접 견문하면서 위와 같은 인식을 보다 공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수리의 진흥에 대한 정조의 적극적인 관심은 결국 1798년 「권농정구농

132) 華城을 축조하면서 만석거 등 수리시설을 축조한 사정과 그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다음 책 을 참고할 수 있다. 유봉학, 『꿈의 문화유산 : 화성』, 신구문화사, 2000.

133) 『弘齋全書』 권 170, 日得錄 徐龍輔 戊午錄.

서윤음」에서 ‘흥수공(興水功)’이라는 항목에서 일층 강화되어 표출되었다.

정조는 1798년에 내린 「농서윤음」에서 당시 조선의 수리시설에 대해서 몇 가 지 문제를 지적하였다. 수리시설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조정이 수리 정책적인 차원에서 처해 있는 상황을 간략하게 ‘제정(堤政)의 구포(久抛)’ 즉 “오랫동안 제 언을 비롯한 수리시설을 관리 감독하는 직무를 포기하고 있다”라고 표현하였 다. 이러한 조정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하여 정조는 다음과 같이 당 시 수리시설 현황에 언급하였다.

호남의 벽골, 호서의 합덕, 영남의 공검, 관북의 칠리(七里), 관동의 순지(蓴池), 해서의 남지(南池), 관서의 황지(黃池) 등은 나라 안에 자리한 커다란 제언인데 소착(疏鑿)할 곳을 소착하지 않고 저수(貯水)할 때 저수를 하지 않고 있다.134

정조는 한마디로 표현하여 제언 등 수리시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 다고 진단한 것이었다. 정조가 「농서윤음」을 내리기 직전 호서 지역을 견문하 고 돌아온 부사과 이희순(李羲淳)은 합덕제에 대하여 정조와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135 합덕제언과 같은 대제(大堤), 또는 대지(大池)로 지목되는 대 규모 제언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한 관리 작업은 보통 한 고을의 힘만으로는 어 려웠다. 특히 합덕제와 같은 제언을 관리하고 부분부분 보수하는 작업은 전적 으로 이웃 고을 나아가서는 도내의 여러 군현이 같이 달려들어야 가능한 일이 었다.136

18세기 후반 당시 조선 팔도 전역의 대체적인 수리시설의 현황은 충청도 홍

134) 『日省錄』 正祖 22년 11월 30일 己丑 (27권 99쪽-101쪽) 「下勸農政求農書綸音」.

135) 『承政院日記』 1800책, 正祖 22년 11월 21일 庚辰 (95-460다) 副司果 李羲淳 啓.

136) 『承政院日記』 1800책, 正祖 22년 11월 21일 庚辰 (95-460다) 副司果 李羲淳 啓.

주 유학 신재형(申在亨)이 올린 응지농서의 내용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 신 재형은 제보언(堤洑堰)이라는 세 가지 수리시설이 조선에서 사용하는 수리시설 의 대종임을 전제하고 세 가지 수리시설의 특성을 소개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 르면 산(山)에 가까운 곳에서는 저수(貯水)로 이용하는 제(堤)가 있고, 야(野)에 가까운 곳에는 인수(引水)로 이용하는 보(洑)가 있으며, 해(海)에 가까운 곳에 는 방수(防水)하기 위한 언(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137 제보언 세 가지 는 모두 수리를 일으켜서 가뭄을 대비하는 수리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138 이러 한 설명에 이어서 당대 수리시설의 현황에 대해 신재형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 였다.

아국(我國)은 산야(山野)의 군현이 비단의 무늬처럼 늘어서 있고, 호해(湖海)의 군현이 바둑돌처럼 벌려 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축조한 제언보(堤堰洑)가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계곡의 하천에서 흘러내리는 모래가 제(堤)를 막히게 만 들고, 하천의 흐름에 굴러 내리는 돌이 보(洑)를 부딪혀 깨뜨린다. 그리고 해수 (海水)가 몰고 오는 조수(潮水)가 언(堰)을 무너뜨린다.139

조선의 전역에 제언, 천방, 해언을 축조할 만한 곳에는 모두 축조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인식은 특별히 신재형만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었다. 수리시설에 대 해서 언급한 몇몇 응지인의 견해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전역에 걸쳐 축조될 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는 제보언은 각각 그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

137) 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16일 乙巳 (95-540다) 洪州 幼學 申在亨 上疏.

138) 卜台鎭도 수리시설의 大宗을 堰洑堤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었다(『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20일 己酉 (95-560나) 副護軍 卜台鎭 上疏).

139) 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16일 乙巳 (95-540다) 洪州 幼學 申在亨 上疏: 『承政院 日記』 1802 책, 正祖 22년 12월 22일 辛亥 (95-575다) 備邊司 洪州 幼學 申在亨 上疏 覆啓.

할 수 없는 그러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이 상당히 분포되어 있었다. 바로 위의 인용문에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석(沙石)・조수(潮水) 등이 계속 제보언의 기 능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재형 이외에 응지농서를 올린 다른 응지인도 마찬가지로 제언이 막혀있고, 모경(冒耕)이 성행하고 있다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었다. 응지인 윤홍심(尹弘心) 은 전반적인 대소 제언의 상황을 소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모경이 이 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설명하고, 그 결과 관개가 축소되어 옛날의 제언 아래 몽리 혜택을 받던 전답이 척박한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 많다고 주장하였다.140

18세기 후반 전북 지역 수리시설 현황에 대해서 응지농서를 올린 응지인들 은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먼저 천방을 잘 관리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긴밀하게 부여하고 있었다. 남원 유학 허호(許顥)는 자신의 응지농서에서 비옥 한 토지(沃壤)가 천변(川邊)에 있다고 설명하면서 미리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 다. 허호는 무엇을 수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지에 대해 『일성록』의 축약내용 에서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허호의 응지농서에 대하여 비변사 가 “천변 전답을 위해 제방(防)하는 것이 급무(急務)이니, 영읍(營邑)에 엄히 신칙하여 자체적으로 일체 수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141라고 보고하고 있다 는 점에서, 허호가 언급한 것도 천변(川邊)의 제방 즉 천방(川防)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세기 중반 이후 재지 사족들의 농업경영에 늘상 뒤따르는 수리시설이 바 로 천방이었다. 천방의 보급에 관심을 가지고 열의를 보여준 사람들이 이른바

140) 『承政院日記』 1802책, 正祖 22년 12월 25일 甲寅 (95-592나) 前 郡守 尹弘心 上疏; 蓋因近來 無論大小堤 堰 疏鑿之專沒誠實 冒耕相續 知而不禁 貯水之道 從此淺微 灌引漸縮 則古之堤下 美壤 變爲今之薄土者 多矣.

141) 『日省錄』 正祖 23년 1월 8일 丁卯 (영인본 27권 292쪽-293쪽) 備局 以南原幼學 許顥 疏 陳農務 諸條 回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