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과 명제 vs. 정치적 정체성
냉전 체제의 붕괴 이후 정부의 성과, 그 중에서도 미시적 성과가 정부 신뢰를 결정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Bouckaert et al, 2002; 최지 민·김순은, 2014).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서비스의 질 혹은 공공부문 성 과를 정부 신뢰로 연결시키고 있는 추세이다(Christensen & Lægreid, 2003; Kampen et al., 2006). 이러한 흐름을 “성과 명제(performance
thesis)”로 정리할 수 있다(Bouckaert & Van de Walle, 2003;
Heintzman & Marson, 2005; Van Ryzin, 2007).
성과 명제란 개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공공서비스가 긍정적일 때, 시 민이 정부의 역량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게 되고 따라서 신뢰를 하게 된 다는 논리이다. 이를 ‘성과-신뢰 연결(Performance-Trust Link)’라고도 한다. 성과가 신뢰에 선행한다는 논의는 직관적으로 성과 개선이 국민의 신뢰를 높이고 행정의 책임성을 제고할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뤄 지고 있다(Yang & Holzer, 2006; He & Ma, 2020).
이러한 ‘성과 명제’와 대립하는 정부신뢰 결정 요인은 사회적 연결성 (social bond) 내지 정치적 정체성(political identity)으로 볼 수 있다. 즉, 정부신뢰에 관련된 선행연구는 개인이 인지하는 정부 성과에 따른 정부 신뢰 정도와 사회적 연결성(social bond)에 근거한 정부 신뢰 정도를 강 조하는 연구로 구분해 볼 수 있다. Bouckaert et al.(2002)은 정부신뢰 결 정 요인을 성과와 정체성(identity)으로 구분하며, 전자의 경우 인식에 기 반한 정부신뢰인 반면, 후자의 경우 정서에 기반한 정부신뢰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대인신뢰에서 유대감과 이해관계로 나누어 신뢰를 바 라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Levi, 1996). 이 구분은 합리적 선택 관점 (Kramer, 1999)과 사회관계적 관점(Williamson, 1993)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이러한 구분을 따라 또 다른 이론을 적용한 연구들이 존재한다.
Choudhury(2008)은 행정에 대한 신뢰의 조건을 기관 이론(agency theory)과 스튜어드십이론(stewardship theory)로 구분해볼 수 있다고 하 였다. 전자의 경우 시민들은 기관의 성과에 기반하여 전략적 계산을 통 해 신뢰를 결정하고, 후자의 경우 도덕적 기질이나 윤리적 규범에 기반 하여 신뢰를 결정한다. 이 역시 성과에 근거한 합리적 선택과 정서에 근
거한 사회관계적 관점에 기반한 구분으로 볼 수 있다. De Blok et al.(2020)은 체제이론을 적용하여 투입(input)관점에서 정부신뢰는 유권자 의 이념적 차이가 의회에서 정확히 표현되는지 여부, 과정(process) 관점 에서 정부신뢰는 정치인들의 신뢰도, 부패관행, 스캔들 등이 일어나는지 여부, 산출(output)관점에서 정부신뢰는 정책과 이에 대한 주관적 성과 인식의 차이 여부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투입과 과정 관점은 사회적 연 결성 및 정치적 정체성에 기반한 정부신뢰를, 산출 관점은 성과에 기반 한 정부신뢰를 의미한다.
특별한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정부신뢰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해 묶음 으로 설명한 연구들도 기본적으로는 ‘정부성과 vs. 정치적 정체성’논의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Christensen et al.(2020)는 정부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첫 번째는 도구적이고 성과 중심적인 부분으로서 실제로 정치-행정 시스템 이 어떻게 역할하고 있는지와 관련이 깊다고 주장하였다. 두번째는 정치 적·문화적 부분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인식, 정당 정치에 대한 태도,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참여 등이 포함된다. 세 번째는 각각의 개인 이 갖고 있는 인구통계학적 특성으로서, 성별, 나이, 교육수준 등이 포함 된다.
성과명제의 타당성을 밝히기 위해 사회관계적 관점과 문화적 접근방 법의 한계를 논의하도록 한다. 먼저 사회관계적 관점을 정서에 근거한 신뢰(affect-based trust)로 볼 때 다음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정서에 기반한 정부신뢰에 보다 초점을 두는 학자들은 정부신뢰가 특정 정책성과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시민이 정부를 감정적으로 좋아하는지 여부가 정치적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Gabriel, 1998;
Easton, 1965). 정서에 근거한 신뢰는 문화적 접근방법(cultural
approach)과 사회자본적 접근방법(social capital approach)에 가깝다(김 이수, 2018). 문화적 접근방법은 가족과 교육시스템이 정부를 신뢰하게 만든다는 접근이다. 그러나 해당 접근을 따랐을 경우에는 정부신뢰의 변 동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발생한다. 문화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정서로서 그 사회의 일반적인 행동이 어떻게 취해지는지를 결정하고 단 시간 내에 잘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Hofstede, 1980).
사회자본적 접근방법은 선행연구에서 논의한 Putnam et al.(1984)의 논의와 맥락을 같이하며, 성과-신뢰 연결에 대해 역의 인과관계를 취한 다는 한계가 있다. 이 접근방법은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가 거시적 신뢰 혹은 사회 신뢰로서 발생한 이후 중범위적 신뢰인 제도 신뢰로 이 전한다는 접근이다. 즉, ‘사회적 신뢰→정부 신뢰→정부성과’라는, 성과 명제와 반대의 인과관계로 정부신뢰와 정부 성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 를 들면, Pierce et al.(2002)는 정부신뢰를 포함시킨 신뢰를 사회적 자본 으로 측정하고 정부 성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본 결과, 유의미한 영향 력을 보임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역의 인과관계의 가능성은 정부신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신뢰의 선순환’을 논의하며 정부신뢰가 포괄적인 관 점에서 대의민주정체의 정부 내지 사회 효율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요인 이라고 일컫는 데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류태건·차재권, 2020).
비록 정치적 엘리트들이 정책을 생산하고, 정책에 만족하는 시민으로부 터 신뢰를, 실망하는 시민으로부터 냉소를 받는 메커니즘이 행정학·정치 학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이지만(Citrin, 1974), 신뢰 에 대해서 정서적 접근을 한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김이수, 2018).
성과가 신뢰에 선행하는지 여부와 관련된 논쟁은 ‘신뢰의 선순환’이라 는 사회적 표어에 대해 연구자들이 진지하게 대응해온 것과 관련이 깊
다. 이는 순환논리의 오류를 유발할 수 있는 문제이기 떄문이다. 그러한 연구 중 하나는 Vigoda-Gadot and Yuval(2003a; 2003b)로서, 소비자로 서의 시민과 참여자로서의 시민에 대한 깊은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시민이 소비자로서 역할할 때에는 성과에 대한 태도 표 출로서 신뢰를 결정하지만, 참여자로서 역할할 때에는 신뢰에 기반한 행 위로서 성과를 평가하게 된다. 그들은 1960년대 이후 객관적으로 좋아지 고 있는 거시성과지표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정부신 뢰가 과연 정치적인 실망때문인지, 아니면 보다 미시적인 성과에 집중하 게 된 시민의 태도 때문인지에 대해서 규명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시민은 참여자라기보다 소비자로서 행태를 보이고 있었고, 정부 의 성과가 정부신뢰에 선행함을 거듭 확인하였다. 그러나 두 연구 모두 대응성과 만족이 정부신뢰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 모델 2보다 정부성과가 대응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만족도와 정부신뢰로 이어지는 모델 3의 설명력이 더 높다는 특징이 있었다. 두 연구는 ‘정부성과-정부신뢰’의 관 계를 민주주의-관료주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bureaucracy and democracy)로 치환하여 이론적·방법론적으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성과 명제의 한계는 무엇일까? 정부신뢰에 대한 합리적 선 택 관점은 합리적 효용에 근거한 선택적 신뢰로서 인식에 기반한 신뢰 (cognition-based trust)와 맥락을 같이 한다(McAllister, 1995). 정부신뢰 가 정부성과에 대한 평가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접근에 따 르면, 시민들은 정책 결과에 대해 처벌과 보상의 원리(mechanism of punishment and reward)를 적용하여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신뢰를 제공 하거나 보류한다(Huseby, 2000; Kumlin & Haugsgjerd, 2017). 평가적 접근은 중범위적 제도신뢰로서 정부신뢰에 접근하는 방법 중 제도 성과
적 접근 방법(institutional performance approach)과 정치성과적 접근방 법(political performance approach)에 가깝다(김이수, 2018). 행정학에서 정부의 성과와 신뢰의 관계를 볼 때는 주로 제도성과적 접근 방법을 취 하며, 다만 성과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신뢰가 장기적으로 하락하 는 현상에 대한 설명력이 떨어지는 점을 극복해야 한다.
2) 성과-신뢰 연결에 대한 대안 가설
‘성과-신뢰 연결’에 대한 다양한 대안 가설이 존재한다. 시민이 정부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신뢰를 결정함에 있어 서 성과가 중요 변수가 아니거나, 실제 성과와 주관적 성과 간에 괴리가 너무 크거나, 주관적 성과를 인식할 때 다른 요인들이 실제 성과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Van de Walle and Bouckaert(2003)은 ‘성과-신뢰 연결’에 대하여 대 안적인 다섯 가지 모델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단선(disconnection) 모델 로서, 시민들이 공공서비스 성과를 높게 인식하더라도 각 공공서비스를 공급하는 기관을 정부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모델 은 지배적 효과(dominant effect) 모델로서, 시민들이 특정 기관의 성과 만을 정부의 성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 기관의 스캔들 등으로 인해 성과가 낮게 인식될 때, 시민들은 정부 전체의 성과를 낮다 고 인식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다층적 효과(multiple influence)모델은 정부에 대한 신뢰가 기관들의 성과 말고도 정체성과 같은 다른 인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모델은 역의 인과관계(reversed causality)로서, 정부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는 시민들이 성과 에 대한 평가도 좋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완화된 역의 인 과관계(moderated reversed causality)모델은 정부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