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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에서는 교류협력을 지속해왔다는 점은 반목과 대립 및 협력이 반복되었던 남북한 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한 중국과 대만 양측이 오랫동안 공식적인 정부 간 접촉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소위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대화 채널이 상시적 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 역시 남북한 관계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양안관계에서 나타난 교류협력의 양상과 특징 및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평화경제 실현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중국은 1971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회복한 이후에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 시키고자 했다. 결국 1978년 12월 제11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지도부가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함으로써 양안관계는 중대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13)

둘째, 1978년 개혁‧개방 및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중국-대만 관계는 ‘평화적 대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 한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한 이후 대만 문제를 평화통일 추진 방식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1979년 1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명의로 ‘대만 동포 에게 고하는 글(告臺灣同胞書)’을 공포하고, 대만에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양안 간 친지방문과 여행관광‧학술‧문화‧교육‧예술 교류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고14) 1981년 9월 30일에는 예젠잉(葉劍英)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대만과의 ‘3통(通)4류(流)’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15) 1984년 덩샤오핑이 홍콩 기업인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一個國家, 兩種制度)’ 방식으로 홍콩과 대만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구상을 처음 밝혔고, 1984년 5월에 개최된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는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침을 공식 제기함으로써 양안 간 경제‧문화 교류 추진을 강조했다.16)

13) 신종호, 위의 글, pp. 258~259.

14) “中华人民共和国全国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告台湾同胞书,” 󰡔人民日报󰡕, 1979.1.1., 1면.

15) ‘3통(通)’은 중국과 대만 간의 직접 교역(通商), 우편물 교환(通郵), 항공기와 선박의 직항(通航)을, ‘4류(流)’는 경제‧문화‧과학기술‧체육 교류를 지칭한다. “和平九大方针,”

󰡔中国网󰡕, 2008.12.3., <http://guoqing.china.com.cn/zhuanti/2008-12/03/content_

16897114.htm> (검색일: 2020.8.1.).

이와 같은 중국의 대화‧평화 공세에 대해 대만 장징궈(莊經國) 정권은 1979년 소위 ‘3불(不)’, 즉 ‘불접촉, 불담판, 불타협’ 정책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대만 당국은 비정치적 분야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발휘하기 원하는 민간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시작했고,17) 1987년에 결국 ‘계엄령’을 해제하고 이를 「국가안전법(動亂戡亂時期 國家安全法)」으로 대체했다.18)

셋째, 1988년부터 2008년 초까지 중국‧대만 관계는 ‘제한적‧ 점진적 개방’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대만은 계엄령을 해제 했으며 군인 및 공무원을 제외하고 대륙에 친척이 있는 대만인의 대륙 방문을 허용함으로써 양안관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대만과 중국은 1990년 1월과 1991년 12월에 각각 ‘해협교류기금회(海峽交流 基金會)’와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兩岸關係協會)’라는 반관반민 성격 의 협상기구를 설립하여 양안 교류협력의 제도화에 앞장섰다.

대만은 1991년 2월 중국 본토와의 통일방안의 하나로 「국가통일강령 (國家統一綱領)」을 발표했다.19) 또한 해협회와 해기회는 1992년 11월

“양안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상호 동의하되 그 표기는 각자가 구두(口頭)로 한다.”는 소위 ‘92합의(九二共識)’에 합의했다.

16) 鄧小平, 中共中央文獻編輯委員會 編, 󰡔鄧小平文選(第3卷)󰡕(北京: 人民出版社, 1993), pp. 58~59.

17) 1984년 순윈셴(孫運璇) 대만 행정원장은 대만인들이 국제학술‧과학기술‧스포츠문화 영역의 회의와 활동에서 중국 대륙 인사와 접촉할 수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대만 당국이 소위 3통 관련 정책에서의 입장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台湾当局在 「三通」 问题 上的政策演变(2002-10),” 󰡔中國臺灣網󰡕, 2002.10.15., <http://www.taiwan.cn/tsh/

mtxy/hx/200708/t20070801_397461.htm> (검색일: 2020.10.30.).

18) 신종호, “중국과 대만의 교류협력과 양안(兩岸)관계의 변화,” pp. 258~259.

19) 리덩후이 총통 집권 초기인 1991년 2월에 대만당국이 제시한 「국가통일강령」은 소위

‘일국양구(一國兩區, 한 국가, 두 개 지역)’ 개념을 통해 대만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3단계(교류와 호혜 단계-상호 신뢰구축과 협력 단계-통일협상 단계) 통일방식을 제시했다. J. Bruce Jacobs and I-hao Ben Liu, “Lee Teng-hui and the Idea of ‘Taiwan’,” The China Quarterly, vol. 190 (2007), pp. 375~393;

Lowell Dittmer, “Taiwan and the Issue of National Identity,” Asian Survey, vol. 44, no. 4 (2004), pp. 475~483.

1996년 6월 대만 총통 선거 직전에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해협 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을 실시했으며,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미국 방문(1996.6.)을 강행해 ‘양국론(兩國論)’ 발언(1999.7.)을 했다.

2000년에 집권한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은 대만 독립노선을 추구했고, 이에 대응하여 중국 정부는 「반국가분열법(反國家分裂法)」

(2005.3.) 을 제정하는 등 양안관계는 긴장과 갈등을 반복했다.

넷째, 대만 마잉주(馬英九) 총통 집권 시기인 2008년 이후부터 2016년까지는 중국‧대만 간 ‘경제통합 촉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1월 경제발전과 양안관계 개선을 공약으로 제시한 마잉주 총통의 당선 이후 양안관계는 교류협력과 평화‧안정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기류가 바뀌었다. 2008년 마잉주 총통은 ‘신(新)3불’ - 즉,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不統), 독립도 추구하지 않으며(不獨),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不武).’ - 정책20)을 대륙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정하고 ‘삼민주의’에 의거한 통일 방안을 재확인했다. 이는 정치적 으로 민감한 문제는 ‘92합의’ 수준에서 관리하되, 경제, 사회‧문화 차원의 양안 교류를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중국도 대만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대만 경제를 중국에 편입시키거나 단일한 양안 경제권 형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교류협력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중국과 대만은 2008년 11월

‘대(大)3통(통상‧통항‧통우)’에 합의21)했으며, 2008년 이후 2015년 까지 11차례의 고위급 회담의 개최를 통해 23개 합의서를 체결해 양안

20) 마잉주 총통의 ‘신3불’ 정책은 다음을 참조. “《兩岸政策/三不 vs. 新三不》 「蔣」 捍衛 中華民國 「馬」包裝傾中滅台,” 󰡔自由時報󰡕, 2009.4.13., <https://news.ltn.com.tw/

news/focus/paper/295118> (검색일: 2020.10.10.).

21) 2008년 6월 해협회와 해기회 간 양안회담에서 대륙 5개 도시와 대만 8개 도시 간 36편의 항공편 운항을 결정했으며, 2009년 4월 3차 회담에서 270편의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海协会海基会就两岸周末包机及赴台旅游签署协议,” 󰡔中国政府网󰡕, 2008.6.13.,

<http://www.gov.cn/jrzg/2008-06/13/content_1015347.htm> (검색일: 2020.11.1.);

“海协会与海基会签署 《海峡两岸空运补充协议》,” 󰡔中国政府网󰡕, 2009.4.28., <http://www.

gov.cn/test/2009-04/28/content_1297850.htm> (검색일: 2020.11.1.).

간 대화와 경제협력의 심화‧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2010년 양안 경제 협력기본협정(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ECFA)을 체결한 이후 양안 교역이 급증했으며, 대만 기업의 대륙 진출이 확대되는 등 양안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2012년 1월 마잉주 총통이 재선에 성공하고, 2013년 3월 시진핑 (習近平) 체제의 등장으로 양안관계는 경제 분야를 넘어 사회‧문화 등 비(非)정치적 분야로 양안 간 교류협력 범위가 확장되었다.22) 2014년 2월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왕위치(王郁琦) 주임이 중국을 방문했고, 2014년 6월에는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장즈쥔(張 志軍) 주임이 대만을 방문하여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과 회담 하는 등23) 1993년 최초의 민간회담(汪辜會談) 이후 21년 만에 양안 당국의 장관급 직접 대화가 성사되었다.

2015년 10월 7일 싱가포르에서 시진핑-마잉주 간 양안 정상회담이 성사되었으며, 이는 1945년 마오쩌둥(毛澤東)-장제스 간 담판 이후 70년 만으로 양안 정상은 ‘92합의’에 기반을 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으며, 양안 간 장관급 핫라인 설치에 합의했다.24) ‘시진핑 -마잉주 간 양안 정상회담(習馬會)’은 그 자체로 양안관계 발전에 긍정적인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정상회담의 정례화나 양안 적대상태 해소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2) 마잉주 총통은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양안관계는 기존의 경제를 우선으로 하고 정치는 추후 논의하는 점진적인 발전을 추진할 것”을 천명했고, “경제가 우선이고 정치는 다음(先經後政), 쉬운 일이 우선이고 어려운 일은 나중(先易後難)”이라는 기존 대(對) 중국 정책 기조를 재확인했다. “马英九谈台当局两岸政策三大重点,” 󰡔新华网󰡕, 2012.11.3.,

<http://www.xinhuanet.com/politics/2012-11/03/c_113596997.htm> (검색일: 2020.10.10.).

23) “国台办主任张志军与王郁琦举行首次正式会面,” 󰡔人民网󰡕, 2014.2.11., <http://tw.people.

com.cn/n/2014/0211/c14657-24326376.html> (검색일: 2020.10.10.); “国台办主任 张志军与台湾方面陆委会主委王郁琦举行第二次正式会面,” 󰡔中国政府网󰡕, 2014.6.25., <http://www.

gov.cn/govweb/xinwen/2014-06/25/content_2708110.htm> (검색일: 2020.10.10.).

24) “习近平同马英九会面,” 󰡔新华网󰡕, 2015.11.7., <http://www.xinhuanet.com//politics/

2015-11/07/c_1117071846.htm> (검색일: 2020.10.10.).

다섯째, 2016년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정권 출범 이후 현재까지 중국‧대만 관계는 ‘정체’ 혹은 ‘현상유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이후 양안관계가 이전보다 더 경색된 중요한 계기는 차이잉원 정권 이 출범한 이후 ‘92합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시진핑 지도부의 대만정책이 조금 더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 섰다고 할 수 있다. 2020년 9월 통일연구원 주최로 온라인으로 진행된

‘2020 KINU 한국-대만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대만 학자들 역시 국민당 마잉주 시기(2008.5.~2016.5.)에 비해 민진당 차이잉원 시기(2016.5.~현재)의 양안관계가 조금 더 악화된 원인 으로 크게 3가지 - ‘92합의’ 관련 민진당의 입장 변화, 시진핑 지도부 의 대만에 대한 강경정책,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관계 변화 등 - 를 제시했다.25)

2016년 출범한 대만 차이잉원 정권은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줄이고 양안 간 대화와 소통을 통한 ‘현상유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26) 하지만 그동안 양안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초로 인식되어 온 소위 ‘92합의’에 대해서는 일절 수용하지 않고 있다.

즉, 차이잉원은 총통 선거 과정은 물론 당선 직후에도 ‘92합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고, 2016년 5월 취임 연설에서도 “1992년에

‘양안회담’이 열렸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언급하였다.27) 2020년 연임에 성공한 차이잉원 총통은 그동안 유지해왔던 ‘현상유지’ 입장을 견지하면서, 중국의 일국양제를 거부할 것을 천명함과 동시에 중화 민국의 헌법과 ‘대만지구와 대륙지구 인민관계조례(臺灣地區與大陸 地區人民關係條例)’에 의거하여 양안관계 업무를 추진할 것이라는

25) 통일연구원, 󰡔평화로 보는 양안관계와 한반도󰡕(통일연구원 주최 2020 KINU 한국- 대만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20.9.3.).

26) 신종호, “대만 총통 선거 이후 양안관계 변화와 동북아 정세 전망,” (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CO 16-04, 2016.7.28.), pp. 1~5, <https://www.kinu.or.kr/pyxis-api/

1/digital-files/0b598e53-236a-4336-a98e-5fa474b1bd6b> (검색일: 2020.11.20.).

27) “中華民國第14任總統蔡英文女士就職演說,” 中華民國總統府, 2016.5.20., <https://

www.president.gov.tw/NEWS/20444> (검색일: 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