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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토지정책의 정치적 배경과 추진과정
박인성|중국 저장(浙江)대학교 토지관리학과 교수
머리말
1921년 창당 이후 중국공산당(이하‘중공’
)의 토 지정책 변화과정은 크게 4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 다. 첫 번째 시기에는 1921년 중공 1차 전국대표대 회(이하‘1차 대회’로 표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이하‘신중국’) 출범 이전까지 혁명책략으로서 토 지혁명을 추진하였다. 두 번째 시기인 1949년 신중 국 출범 이후 1953년까지는‘신민주주의론’과‘경 자유전(耕者有其田)’을 기치로 내걸고, 지주로부 터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貧農)과 고농(雇農)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한 사유제 토지개혁을 추진하였 다. 세 번째 시기에는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의 기초를 다진 후 토지 소유 및 사용의 공유화 와 집체화를 추진하였다. 네 번째 시기인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는 농촌에서 토지 집체 소유의 틀은 유지하면서 토지사용권(경작권)을 호별 도급생산 제( , 家庭承包制)로 전환하고, 도시 토지는국유제를 유지하면서 사용권을 분리하여 상품화 및 사유화를 강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중국 현지 문헌자료 분석을 바 탕으로, 중공의 토지정책 기조변화의 정치적 배경 과 주요 요인들을 토지소유제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혁명수단으로서의 토지정책
1. 건국 이전의 토지혁명 과정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의 혁명책략이 정식으로 결의된 것은 1923년 중공‘3차 대회’에서다. 이 대 회에서 같은 해 2월에 발생한 2.7 정저우(鄭州) 철 도파업 실패의 교훈을 종합, 정리하고, 농민을 조직 하여 혁명에 참가시키는 것을 당의 중심업무로 하 는‘농민문제결의안(農民問題決議案)’을 채택하 였다.1) 이어서 1927년 8월 7일 후베이성(湖北省)
중심문제다.”“현재 중요한 것은 평민식(平民式) 혁명수단을 이용하여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농민운동의 주요 역량은 빈농이다.”“지주가 농민에게 임대한 토지는 무상 몰수하고, 토지위원 회를 통하여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분배한 다. 단, 소지주(小地主)와 혁명군인이 현재 보유하 고 있는 토지는 몰수하지 않을 수 있다. 혁명군 장 병 중 토지가 없는 자는 혁명전쟁 완성 후에 토지를 수령하고 경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혁명군인은 물론 지주계급 중에서도 대지주와 소지주에 대한 책략을 구분하고 있듯이 중공의 토지혁명 책략은 조직 보호와 광대한 농민 군중의 지지 확보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이 같은 정책은 1927년 5차 대회 이후 마오쩌둥 ( )이 주도하여 제정한「징강산 토지법 ( )」에도 나타난다. 즉, “일체의 토지 를 몰수하여 소비에트 정부로 귀속시킨다”고 규정 했으나, 1929년 4월 장시성(江西省) 남부 싱궈현 (興國縣)의 토지 투쟁경험 평가를 기초로 제정한
「싱궈토지법(興國土地法)」에서는 몰수대상을‘일 체의 공공토지 및 지주계급의 토지’로 수정하였다.
과된 정치결의안과 토지문제결의안에서는 부농(富 農)에 대하여“자신의 소비량 외에 잉여분만 몰수”
한다고 규정하고, ‘공상업자 보호’, ‘토지분할의 원 칙과 방법 규정’, ‘자경농의 토지는 몰수하지 않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공상업 보호에 관한 내용 중 에는 반동(反動) 상인에 대하여“차라리 죽이거나 벌금을 부과하더라도 상점을 몰수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여, 반동 상인에게 정치적으로 타격을 가하 는 것과 상점 몰수 및 폐쇄가 초래할 경제적 부작용 에 대한 대책을 구분하였다.4)
군중의 지지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중공의 토 지혁명 책략은 1930년 6월에 개최된 중공 전방지 휘위원회( )와 푸지엔성(福建省) 서부 특위 연석회의에서 발표한 부농문제(富農問 題)5)에 대한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더욱 노골적으 로 표현되었다.
“당면한 책략의 제1목표는 군중 쟁취다. 생산 발 전이 제1목표가 아니다( , 1988, p75).”이 외에도, 농민의 토지소유 요구와 관련하여, 1931년
2월 8일 중공 소비에트 지구중앙국이 발표한‘토지
문제와 반부농책략( )’제
1) 白希. 2009. . 北京: . p95.
2) ∙ . 1985. . : . p66; ∙ . 2009. . 北京: 科學出
版社. p2∙p36.
3) ∙ . 1985. . : . pp77-78.
4) ∙ . 전게서. pp79-80.
5) 소위‘부농문제’의 핵심은, 1927년‘ ’에서 결정한 바대로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는다면, 부농 소지주가 많은 중국에서 농민의 토지 소유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 전게서. pp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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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통지는 다음과 같은 정세 판단을 밝히고 있다.
“농민은 소사유자(小私有者)로 이들이 열렬히 토 지혁명에 참가한 목적은, 토지의 사용권 취득만이 아니며, 토지소유권까지 요구하고 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국내 형세와
주요 모순이 외세침략문제로 변하였으므로 혁명책 략과 토지정책도 이에 따라 조정한다고 결정하고 중공이 장악한 근거지(根據地)에서 지주에 대한 토지몰수를 중지하고, 토지소유권 보장과‘감조감 식( : 소작료와 이자 감면)’정책을 시행 하였다. 그러나 항일전쟁 승리 후에는 감조감식 정 도로는 토지소유를 원하는 광대한 농민의 절실한 요구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방 구(解放區)에서 토지개혁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 하고, 다시 대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는 전략 으로 선회하였다.6)2. 국민당 토지정책과의 비교
국민당의 토지정책 기조는 1905년 손중산(孫中山) 이 주도한 동맹회선언(同盟會宣言)에 포함된 후 정 식으로 확립, 발전하기 시작한‘평균지권(平均地 權)’사상이다. 평균지권 사상은 손중산이「진보와 빈곤」의 저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y:
1839~1897)의‘토지 단일과세론’등을 기초로 하
고, 중국의 실정과 정전제(井田制) 등 전통 토지사 상과 결합하여 작성하였다. 실천 측면에서 평균지권 의 요점은“지주가 자기 소유의 토지가격을 스스로평가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국가는 이 가격을 기준 으로 세금을 부과하되, 필요시에는 지주가 보고한 그 가격으로 토지를 수매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1924년 1월 31일 광저우(
)에서 개최된 국민당1차 대회에서 평균지권의 실시와 일련의 법률 및 정
책을 제정한다는 결의가 통과된 후 난징(南京) 국민 당 정부는 1927~1946년 기간 중「토지징수법(土 地征收法)」, 「토지법」, ‘지세조례( )’등 일련의 법률, 법규를 공포하였고, 1947년에는 평균 지권 사상을 중화민국 헌법에 포함시켰다.7)이 같은 국민당의 토지정책 기조는 상술한 공산당의 토지정 책에 비해, 현실 토지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보 다 합리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국민당과 비교하면, 공산당의 토지정책 기조는
‘무상몰수’와‘경자유전’, ‘평균분배’등 농민 군중 을 조직화하고 동원하기에 유리한 구호를 내세운 혁명 책략이었다. 중공의 토지‘평균분배’구호는 중국 역사상 왕조 및 정권 교체기에 발생했던 농민 봉기 및 혁명 추진과정에서 내세운 구호와 별 차이 가 없다. 당말(唐末) 농민봉기에서는‘평균(平均)’
요구를 명확하게 내세웠고, 북송(北宋) 농민봉기 에서는‘빈부 균등(均貧富)’구호를, 명말(明末) 농민봉기에서는 토지재산의 균등분배와‘토지분배 와 세금면제(均田免粮)’구호를 내세웠다. 태평천 국(太平天國)이 제정한‘천조전무제도(
)’8)도‘평균지권’과 토지국유화를 핵심사상으 로 하고 있다.
그러나‘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선동성 강한
6) ∙ . 2009. . 北京:科學出版社. pp36-37.
7) ∙ ∙ . 2006∙6. “ ”. 2006年 第3期. pp61-62.
태에 있었고, 토지소유에 대한 중국 농민들의 열망 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중공의 혁명전쟁 승 리의 원동력은, 봉건지주제하에서 극심한 착취에 시달려온 광대한 중국 농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견인해낸 토지혁명 책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민주주의론과 사유제 토지개혁
1. 사유제 토지개혁의 시행배경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세를 굳히고, 사회주의 신 중국 출범 준비작업을 하던 1949년 초에 마오쩌둥 을 비롯한 중공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국가는 응 당 생산자료 공유제와 계획경제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토지 공유제 방안 을 검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유제를 유지하 면서‘경자유전’기치하에 지주소유 토지를 몰수하 여 농민 개체소유 토지로 재분배하는 책략을 채택 하였다.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 정권 출범 직후였던 당시 국내외 상황이 불안정하여 정권에 대한 인민 대중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다져야 할 필요성과‘신 민주주의 이론’이 있었다. 신민주주의 이론의 요지 는 자본주의 공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농업국가 중 국이 사회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過渡)
의 발전을 위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도시와 농 촌에서 개인 자본주의의 적극성을 가능한 한 최대 로 이용해야 한다. 국민경제에 유리한 일체의 자본 주의 성분의 존재와 발전을 허용해야 한다(
, 2008, p64).”신중국 건국 초기 사유제 토지개 혁 방침도 이 같은‘신민주주의’방침하에 결정되 었다고 볼 수 있다.
2. 사유제 토지개혁의 성과
1950년 겨울부터 1952년 겨울까지 집중적으로 추
진된 토지개혁의 핵심 내용은 원래의 지주소유제 를 빈농과 고농 우선의 평균 토지소유제로 전환한 것이다. 그 결과, 수천 년간 이어져온 봉건착취 지 주토지소유제도가 철저하게 폐지되었다. 토지개혁 추진절차와 시행방법은, ① 빈농과 고농을 동원하 여 시범케이스로 대표적인 악질 지주를 가려내어 응징하고( ), ② 지주, 부농, 중농, 빈농, 고농 등으로 계급을 구분하고( ), ③ 몰수, 징수, 분배하고, ④ 재조사( )하는 절차로 진행되었 다( ,1988, pp148-187). 약 2년의 기간 중
소수민족지구를 제외한 전국에서 토지개혁이 기본 적으로 완성된 후 3억 명 이상의 무지(無地) 또는 소지(少地) 농민들이 7억 무(畝)9)의 토지와 기타8) ‘ ’의 기조는“천하의 농토는 천하의 인간이 공동 경작한다(凡天下田, 天下人同耕)”다(王昉, 2005,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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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료를 분배받았고, 매년 지주에게 납부해야 했던 양식소작료 폐지 총량이 350억kg에 달했다.
전체 경지의 90% 이상을 빈농과 중농이 점유하였 고, 토지 개혁 이전에 전체 토지의 70% 이상을 점 유하고 있던 지주와 부농의 토지점유율은 8% 정도 로 줄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농민의 생산 적극성이 대폭 제고되어 1952년 전국 양식 생산량이 1949년 에 비하여 42.8% 증가하였다.10)
중공이 정치적 측면에서 거둔 토지개혁의 성과 는 농민의 지지를 획득하여 당과 정부의 정권 기초 를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는 점과 실천을 통하여
‘정치 민주’, ‘경제 평등’, ‘착취 유죄’등의 사상을 농민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뒤집어서 보면, 이 같은 토지개혁 과정을 통 해서 강화된 중공과 인민정부의 권위와 동원 능력 이 이후 대다수 농민의 의사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추진된 농업합작화와 인민공사화 등 집체화와 토 지공유화 작업 추진의 기초와 동력이 되었다.
사회주의 개조와 토지소유 공유화 추진과정
1. 농업합작화의 배경과 추진과정
농업합작화의 목적은 농업생산 규모를 확대하고, 정부의 농산물 수매 등 정부와 농민 간의 거래 비용 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사유제 토지개혁이 기본적
으로 완성된 후, 중국 농촌에는 소토지 사유제를 기 초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이 결합된 농민 개체경 제체제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생산경영 규모가 소 규모 개체경제로 분산되어 있어서, 생산도구와 기 타 생산자료가 빈약하였고, 정부와 농민 간의 거래 비용이 컸다. 이 같은 자급자족형 소규모 개별 농가 가 생산한 농부산품 구입을 위한 거래비용도 증가 하였다. 또한 토지개혁 후 농민들 간의 빈부 분화, 토지매매, 소작 등의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 였고, 낙후한 소규모 개체경제로는 수리관개시설 과 자연재해 등에 대처하기도 어려웠다. 국가 공업 화 추진을 위한 자금도 농업생산을 통해서 조달해 야 했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합작화 추진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1953년 6월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신민주주의가 자본주의로 향하 고 있다”고 비판하고,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과도 시기 총노선’11)을 제기하여 상당 기간 동안 자본주 의 요소를 허용하기로 했던 신민주주의 단계가 과 도시기 총노선 단계로 대체되었다. 농업합작화는 과도시기 총노선에 따라, 상호협조조( ), 초 급농업합작사, 고급농업합작사 등 3개 단계로 진행 되었고, 고급농업합작사 단계에서 토지에 대한 사 유제가 집체소유제로 바뀌었으며, 집체경영이 더 욱 강화되었다.
9) 1무(畝)는 약 666.7m2=200평.
10) ∙ . 전게서. p4; . 2007. . 北京: . p57.
11) 당시 마오쩌둥의 발언 중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건국 이후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할 때까지는 일종의 과도시기 ( )다. 과도시기 당의 총 노선과 총 임무는 10년이나 15년, 또는 보다 긴 시간 안에 국가 공업화와 농업 및 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 현재의 혁명투쟁 임무가 과거의 무장혁명투쟁 당시보다 더 막중하다.”( , 2008, pp95-96)
있는 통일경영의 사회주의 대기업을 건립하여 사 회주의 건설 속도를 가속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 나 인민공사는 당시 수공(手工) 노동 위주의 소생 산기술을 기초로 하던 중국 농업의 특성과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였다. 객관적인 경제기술 조 건을 고려하지 않고, 소생산 기초 위에서 인위적인 합병과 간단한 협동작업을 통하여 소규모 토지 분 산경영을 대규모 통일경영으로 변혁시키려고 한 좌경(左傾) 모험주의적 시도였다.
공사 설립 초기에 고급합작사 소유의 토지와 생 산자료, 사원(社員)의 사유 생산자료가 모두 인민 공사 소유로 귀속되었고, 일률적으로 (공사에 의하 여) 통일적으로 계획, 경영, 정산(核算), 분배되었 다. 그러나 과다규모로 인한 효율성 저하 문제가 제 기됨에 따라서 공사, 생산대대, 생산소대 기본 소유 의 3단계를 거치면서 집체경영의 규모와 공유성 정 도가 점진적으로 축소 조정되어, 최종적으로
20~30호로 구성된 생산소대를 기본 정산 및 생산
경영 단위로 하는 규모가 되었다. 동시에 전국적으 로‘공산풍(共産風)’과‘첫째, 평등, 둘째, 조정 ( )’바람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당시 중국 농촌의 수용능력을 심각하게 넘어본 정산(核算) 단위로 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농 업60조는 토지의 점용과 사용에 관해서“생산범위 의 농지는 모두 생산대 소유이고 생산대가 책임지 고 경영, 관리, 지배한다. 사원의 자류지(自留地) 는 사료지(飼料地)와 개간지(開墾地)를 합하여 생 산대 경지의 5~10%까지, 최대 15%까지 허용한 다”고 규정하였다. 단, 곧이어 시작된 10년 동란 (문화대혁명) 시기에 극좌적 정치풍랑 속에 기본 정산단위를 생산대에서 생산대대로 다시 바꾸는 등 곡절을 겪었고, 결국 개혁개방 이후 1983년에 이르러 인민공사는 해체되었다( ∙ ,
2009, p43).
인민공사 시기에는 집체구성원인 농민의 집체 소유 토지에 대한 사용권, 수익권, 양도권을 부정하 고, 일체의 농업생산자료를 공유화하며, 농촌 노동 력은 인민공사 또는 생산대가 통일적으로 지휘, 배 분, 사용하였다. 농민의 사유재산은 물론 노동력까 지 집체에 귀속되었고, 노동성과는 공사와 생산대 (생산대대 또는 생산소대)가 국가 통일규정에 근거 하여 정산한 후 분배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의 노 동 적극성이 하락하여 시간 때우기, 무임승차 같은 기회주의적 노동행태와 태업, 절도 등의 행위가 빈
12) 당시 인민공사 소속의 농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다음과 같은 말들이 그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열심히 일해서 노동점수 몇 천 점 따봐야 닭장 안 암탉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달걀 하나 얻는 것만 못하다.”, “첫 번째 (작업 개시) 호각소리는 못 들은 척하고, 두 번째 호각소리에 두리번거리 고, 세 번째 호각소리에 천천히 걸어가서 논두렁 앞에 다다른 후에 깜박 잊고 쟁기를 안 갖고 왔다고 하고 다시 집에 간다.”, “논둑 밑에 숨어서 카드놀이 하다가 작업종료 호각 불면 서둘러 집에 와서 개인 텃밭을 가꾼다(彭森∙ , 2008,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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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하였다.12) 이 같은 상황 속에 노동감독 및 조직관 리비용이 증가하였고, 생산량이 급속하게 감소하 여 수많은 지방이‘춥고 배고픈(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였다.13) 또한, ‘대약진’과 반우경(反 右傾) 투쟁이 전개되면서 목표와 실적 부풀리기, 허위 과장보고 등의 영향으로 농민의 부담이 가중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참 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14)이 같은 상황에서 수많 은 빈곤지구에서 호별도급생산( ), 가정도 급제(家庭承包制) 등 자본주의의 꼬리로 비판 받 던 호별 개체경작방식이 일종의 농민구제방법으로 시행되었다(彭森∙ , 2008, p22).
토지 집체소유제 문제도 인민공사 시기에 가장 심각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토지 집체소유권 의 주체인 농민의‘집체성원권( )’이 모 호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농촌의 집체소유 토지는 집체공유(公有)이지, 집체구성원인 농민공유(共 有)가 아니었다(胡景北, 1998, p25). 둘째, 토지매 매와 유통을 금지하고, 처분과 양도( ) 권리가 제한되어 농업노동생산율이 계속 하락하였다. 셋 째, 국가가 경작물의 종류까지 규정하여 생산대가 결정할 여지가 매우 적었다. 넷째, 토지 산출수익 분배 전에 필히 국가의 수매( ), 계약구매 ( ) 임무를 완성해야 하고, 국가가 저가로 대부 분의 산출 수익을 가져갔다. 따라서 농민집체는 공 유토지의 수익권마저 침식당한 셈이 되었다.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사고 전환과 토지사용제도 개혁
개혁개방 이후 중공의 토지정책 기조는, 농촌 토지 는 집체소유를 유지하는 틀 속에 경작권을 개체화 하는 호별 도급생산제 실시, 도시 토지는 국유제 (全民所有制)를 유지하면서 사용권을 분리하여 상 품화하며 토지사용권시장을 육성하는 틀을 유지하 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사회주의의 본 질’에 대한 중공 지도층의 인식 변화가 있다. 즉,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개혁개방 이전의
‘생산자료 공유제+계획경제’에서 개혁개방 이후 에는‘생산력 발전’으로 전환되었다.
개혁개방 이전, 중공 1세대 지도자들의 사회주 의의 본질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자본주의 소유제 와 개인소유제를 개변(改變)하고, 전민소유제와 집체소유제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 2009,
p78). 이는 스탈린이 소련과학원 경제연구소에 지
시하여 편찬한「정치경제학교과서」의 내용을 근거 로 하며,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의 1세대 지도자 모두가 이 소련 교과서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러 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레닌이 만년에 작성한「신경 제사상」15)을 강조하고 있다.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 변 화는 덩샤오핑( )이 1992년 1월에서 2월 중 우한(武漢), 선전( ), 상하이(上海) 등 남방지 역을 시찰하면서, 당시 논란이 되던‘성(姓)이 사
13) 중국의 종합요소생산율(총 투입 대비 총 산출)은 1956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업합작화, 집체화 추진시기와 완전하게 일치한다 ( , 2007: 76).
14) 대약진 운동 기간(1958~1962년) 동안 굶어죽거나 우파분자로 몰려 맞아죽은‘비정상적 사망’농민의 수가 전국적으로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 , 2008, p282; 박인성, 2009, pp75-78).
생산력 발전에 유리(有利)한가,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 국력증강에 유리한가, 인민생활수준 제고에 유리한가 여부여야 한다.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 는 아니다.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다.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도 아니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수단일 뿐이다. 사회주의 의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이고 생산력의 발전이며,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제거하고, 최종적으 로 공동부유(共 同 富 裕)에 도달하는 것이다 ( , 1993, pp372-373).”사회주 의의 본질이‘생산자료 국유화+계획경제’가 아니 고, ‘생산력 해방’이라는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발언은 당시 중국 사회와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 고, 이어서 발표된‘사회주의 초급단계’, ‘중국 특 색의 시장경제’등의 개념과 이론 확립의 기초가 되었다.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정책의 기조도 바 로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중공의 토지정책 경험에서 드러난 주요 쟁점과 함 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수단 공유화와 합작화, 집체화 추진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즉, 규칙을 준수하 는 사원들이 퇴사함으로써 무임승차하는 사원들에 게 경고와 위협을 줄 수 없게 된 결과라고 보았다 (林毅夫, 1994, p749). 이 외에도 외부 조직과 경 쟁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인민공사의 규모가 과도 하게 컸다는 지적도 있으나 린이푸의 지적이 핵심 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의 본질이 (‘생산 자료 국유화’가 아니고) ‘생산력 해방’이라는 중공 의 사고전환과 건국 초기‘신민주주의 단계’전략 과의 관계규명 문제다. 이에 대하여 중공과 중앙정 부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중국 내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중공은 개혁개방 이전의 생산자료 국유제와 계획경제 운용실패 경 험을 바탕으로, 건국 초기 신민주주의 단계의 부활 이라고 볼 수 있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또는 중국 특 색의 사회주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 구상 시 설 정한 과도(過渡) 기간보다 훨씬 길게 잡고 있다.
덩샤오핑도 1992년 남방 시찰 시“개혁개방정책은 최소한 50~100년간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향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토지정책 기조는 비록 사유제로의 전면적 전환은 아닐지라도, 토지사용권을 대상으로 사유제 성격
15) 레닌은 만년에 작성한「신경제사상」에서 생산력 발전을 중심으로, 다종소유제 구조의 존재와 자유무역을 허용하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경제의 공동발전을 장려하여 사회주의를 건립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물질기초를 창조하자고 주장하였다( , 2009, p77; , 2009,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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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폭을 넓히고 강화해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 이라고 전망할 수 있다.
셋째, 농촌 집체토지소유권에 관한 문제다. 중국 의 현행 농촌토지제도의 문제는, 현 제도가 본래 인 민공사 해체 후 제도적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임시 방편으로 대체된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중국 은 이미 개인의 자본과 노동(인력자본) 소유까지 승인하고 있는데, 유독 농촌토지에 대해서만 소유 를 허용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거래를 통하여 가치 를 증가시킬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하고 있다 ( , 2008, p805). 또한, 정부가 농촌집체로부 터 저가로 토지를 징수하고, 다시 개발상(開發商) 등에게 고가로 팔아서 거대한 토지 처분이익을 가 로채고 있다. 대지주(大地主)인 국가가 지대수익 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농민 개체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통제가 불가피할 것이다(王昉,
2005, p260). 토지소유권에 대한 통제가 사회주의
의 본질인 생산자료 공유화 때문이 아니고, 국가의 지대수익 추구 때문이라면, 이 점에서는 중국의 현 통치계급인 중공이 역대 중국 봉건사회의 통치계 급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넷째, 과연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통제하는 상황 을 유지하면서 사용권 안배를 조정하는 방법만으 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만일, 토 지소유권과 사용권이 분리된 상황에서 사용권에 대한 충분한 존중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명의상 의 소유권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송대(宋代) 의 영구소작권( ) 제도는 농민토지에 대한 장기사용권을 보호해줌으로써 농민을 안정시키고 토지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촉진시켰다(王昉,
2005, p268). 또는 현재 중국의 도시토지사용권제
도도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상술한 중국의 경험과 문제점들이 북한에 주는 함의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 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고전환은 고사하고, 지령성 계획경제체제와 권력세습체제를 고수하며 경제를 파탄시키고, 인민들의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 하고 있다. 이 같은 북한의 토지제도와 정책의 맥락 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또한 통일 후 북한지역 에 시행할 토지정책을 올바로 구상하기 위해서 중 공의 토지정책 경험은 매우 유용한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박인성. 2009. 중국의 도시화와 발전축. 서울 : 한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