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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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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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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의 자비(Mercy):

불교적 이해

성 기 서 (서원대)

I. 서론

이 논문의 목적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1596년에서 159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베니스의 상인 에 취급된 자비 의 개념을 초기 불교의 자비(Mettā)사상과 관련지어 고찰하는 것이다. 그 이유 는 샤일록(Shylock)이나 안토니오(Antonio)와 같은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이와 같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동기에 대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이 극의 비극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 이다. 특히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은 “자비심의 부재”에서 오는 분노와 편견 에 기인한다. 자비는 빠알리(Pali)어로서 “자애, 우정, 선의 동료애, 우호, 화합, 비공격적임, 비폭력 등”의 의미를 지니는 불교용어이다(Acharya Buddharakkhita 190). 남녀 간의 사랑이든, 남자 친구간의 우정이든, 죽은 아버지가 딸에게 남편 감을 고르는 방법을 유언으로 남겨 반드시 실천하도록 하는 부정이든, 이 작품 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주제는 넓은 의미에서 자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은 이 작품의 중심주제인 자비와 깊이 관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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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이에 대한 포오셔의 재판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머리 로는 자비심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점에 이 작 품의 비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혜와 자비의 분리현상으로 나타난 다.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은 이 작품을 비애감이 없는 낭만적 희극으로 규정하고 있는데(180), 그것은 극중 대사에서 보이는 인본주의 정신과 노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샤일록의 통찰력에도 불구하고(3.1.52-60, 4.1.89-103) 샤일록 (Shylock)은 ‘고문자와 살인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 불과하지 아쉽게도

‘예언자’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적, 종 교적, 경제적 편견에서 벗어나 샤일록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관찰하면 비애감 (pathos)은 극중의 모든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의 3 가지 플 롯, 계약서 플롯(bond plot), 상자(casket test) 플롯, 그리고 반지(ring) 플롯에 관 련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미움, 금전관계, 인종, 종교 그리고 복수와 재 판으로 얽혀 있다. 계약위반의 대가로 안토니오(Antonio)의 “살 한 파운드”를 베어내고자 법정소송을 제기한 샤일록의 패배와,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변장과 뛰어난 문맥적 해석으로 안토니오를 구해 내는 포오셔(Portia)의 승리, 5막에서 일어나는 버사니오(Bassanio)-포오셔, 그라쉬아노(Gratiano)-네리서(Nerissa), 로 렌조(Lorenzo)-제시커(Jessica)의 결혼 뒤에는 사랑과 자비를 말하면서도 실천에 인색하고 편을 가르는 무자비한 세계가 이 극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삶의 본질은 “덧없는 것이며, 괴로운 것이고, 불변의 실체는 없음”을 강조하여 이에 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주장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안토니 오를 포함한 베니스 사회에 대한 샤일록의 증오심과 안토니오의 재판을 둘러싼 자비의 문제를 자세히 고찰하면, 이 작품이 강한 비극적 요소가 드러난다. 기독 교적 입장에서는 구원의 필요조건인 자비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고, 불교적 입 장에서는 삶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의 필요조건인 자비의 결여뿐 아니라 이에 대한 지혜의 결여이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겉으로는 평화와 안정의 회복으로 보이겠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끝없는 편견과 증오에서 오는 복수의 악순환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적 요소를 문헌상 처음 지적한 사람으로는 니콜라스 로우 (Nicholas Rowe)이다. 그는 자신이 편집한 1709년판 셰익스피어 작품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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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이 희극으로써 받아들여지고 상연되었으며, 탁월한 희극배우가 유태인 역의 일부를 연기한 것을 관람하였지만, 나는 작가가 비극을 쓰려고 의도했다 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이덕수 18 재인용)고 말한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 만, 샤일록이 포오셔에 의해 재산의 반을 빼앗기고, 추방자로 살아가며,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분 명히 비극에 가깝다(Maus 1087). 한 마디로 자비심이 편파적으로 작용하는 사 회에서 사는 것 자체가 종교적, 경제적, 인종적 차별을 받는 샤일록에게도 비 극적이지만, 안토니오와 버사니오를 비롯한 베니스와 벨몬트(Belmont) 사람들 도 보편적이고 참된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편견에 의해 유리된 삶을 산다는 점 에 이 작품의 비극성이 있다.

이 비극성은 지혜와 자비의 분리현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4막의 재판장면 에서 포오셔가 계약을 위반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샤일록에 게 안토니오를 위해 자비를 베풀라는 부탁을 하는 장면은 기독교의 자비를 단 비(gentle rain)의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 표현된 자비의 속성을 면밀히 살 펴보면 이 자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와 같이 무차별적인 속성을 갖지만, 그 배경에는 자비를 베풀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분히 교환가치를 중시하 는 상업주의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재판이 끝날 때 포오셔는 샤일록에게 자 기가 요구했던 것만큼의 자비를 베풀지 않고 오히려 복수에 가까운 무자비한 판결을 내린다.

자비는 그 성질상 강요할 수 없는 것이오.

그것은 하늘로부터 이 지상으로 내리는 단비와 같은 것이오. . . 자비는 이런 왕홀의 위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니,

그것은 군왕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앉아있는 바로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덕성이라고 할 수 있소. . . 정의를 그대로 따르다 보면 우리 중에서 누구도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심사숙고해 보시오. 우리는 자비를 구하여 기도하는데, 바로 그 기도가 자비를 행동으로 옮기도록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주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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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d, It droppeth as the gentle rain from heaven Upon the place beneath: . . .

But mercy is above this secptred sway, It is enthroned in the hearts of kings:

It is an attribute to God himself; . . . That, in the course of justice, none of us Should see salvation: we do pray for mercy;

And that same prayer doth teach us all to render The deeds of mercy.1) (4.1.180-96)

자비의 속성은 하늘에서 대지로 내리는 단비와 같이 대가 없이 무차별적이다.

유태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차별 없이 비를 맞고 그 혜택을 누린다. 또한 이 자 비는 정의를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 구원이 란 기독교인 최고의 신앙적 목표이며, 신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하는 샤일록에게 포오셔가 말하는 기독교적 자비는 구원이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대 가를 예상하는 교환가치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교환가치이기도 하면서, 동시 에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가 있다”는 연기적 상관관계 속에 우리 삶이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샤일록이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하 자, 포오셔는 지혜를 발휘하여 샤일록이 제시한 증서를 문맥적으로 해석함으로 써 샤일록의 의도를 좌절시키며, 오히려 신체적, 경제적, 종교적 사형선고에 가 까운 무자비한 판결을 내린다. 이것은 지혜와 자비가 철저히 분리되었음을 보 여준다.

원래 성서적 자비의 개념은 포오셔가 주장하는 단비의 은유를 보다 확장하 며, 자비를 통해 인간 자신의 완성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박애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여기에도 원인에 따른 결과의 필수적 상관관계가 나타나 있다. “자 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2)(마태오 5:7) 자비

1) 작품 인용은 John Russell Brown (ed.), The Arden Shakespeare: The Merchant of Venice (London: Routledge, 1988)에 의하며, 막, 장, 행은 인용문 뒤 괄호에 넣겠음. 인용문의 번 역은 이덕수의 것을 주로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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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베푸는 자는 자신과 남에게도 복을 주는 존재이며, 자비의 범위는 선악의 차 별을 넘어 보편적이어야 하고, 이 박애주의적 사랑은 신과 인간이 그 대상이 된 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이러한 견해의 배경에는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그 의무 로써 창조주와 인간을 사랑해야 하며, 사랑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인식이 자 리 잡고 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완전한 신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 하는 인간은 철저한 사랑을 베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안토니오와 포오셔같은 기독교인들이 보 여주는 샤일록에게 베푸는 불완전하고 잔인한 자비가 이것을 입증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의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든 유태인이든 서 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서로에 대한 미움과 갈등 속에 서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이는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종교는 이들에게 하나 의 편견이요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의 동기에 대하여 논리적 이나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모 두 정신의 활동 영역에서 일어난다. 사랑과 미움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미움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해주지 않는다거나 사랑받 지 못 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정신물리학적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미 움은 나름대로의 인과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 랑 또는 자비는 인간의 평등사상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망각하는 데서 미움과 갈등이 생긴다. 나와 남은 평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남의 고통과 기쁨을 공유 하는 것이 참 사랑이고 자비이다. 안토니오, 샤일록, 포오셔에게는 바로 이러한 인식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II. 불교의 자비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요약한다면,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조화로운 완 성을 강조하는 삶의 방식이다. 기독교의 사랑이 완전한 신의 사랑으로부터 그 2) 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 성서 서울: 대한성서공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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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을 찾는다면, 불교는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는 대신, 인간의 존재조건을 괴 로움(苦, suffering, dukkha)으로 보고 이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통찰에 근거하 여, 자신의 지혜와 자비를 계발함으로써 삶을 완성하려는 독특한 생활체계이 다. 특히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인간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craving, anger, delusion)이라고 불교는 주장한다. 탐욕과 분노를 다스리고 지혜를 기르는 방법 으로 활용되는 「필수 자비경」(The Karaniya Mettā Sutta: Hymn of Universal Love)은 불교의 자비정신을 잘 요약하고 있다.

완전한 평정 상태를 언뜻 맛보고서 더욱 더 향상을 이루고자 애쓰는 사람은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고,

말이 점잖으며, 온유하고,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 . . .

또한 현자의 질책을 살 어떤 행동도 삼가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와 같은 생각을 기를 지니) 모두가 탈 없이 잘 지내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살아있는 생물이면 어떤 것이건

하나 예외 없이,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 길건 크건 아니면 중간치건

또는 짧건, 미세하건 또는 거대하건,

눈에 보이는 것이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건, 또 멀리 살건 가까이 살건,

태어났건, 태어나려하고 있건,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누구도 자기 동반을, 그것이 어디에 있든 간에 속이거나 헐뜯는 일이 없게 하라.

누구도 남들이 잘못되기를 바라지 말라. 원한에서든, 증오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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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하나뿐인 자식을 목숨 바쳐 보호하듯

모든 중생을 향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생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라.

또한 일체의 세계에 대하여, 그 높은 곳, 그 깊은 곳, 그 넓은 곳 끝까지 모두를 감싸는 사랑의 마음을 키워라.

미움도 적의도 넘어선 잔잔한 그 사랑을.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누웠거나 깨어있는 한 이(자비의) 염을 놓치지 않도록 전심전력하라.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거룩한 경지’이다.

그릇된 생각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계행과 궁극의 지견(知見)을 갖추었으며, 모든 감각적 욕망을 이겨냈기에

그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으리. (Buddharakkhita 193-95)

아차리야 붓다락키타(Acharya Buddharakkhita)에 의하면 위의 인용문은 자신에 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기쁨과 평화를 주는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자비의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는 일상적 행위에 서 자비를 철저히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고(3~10행), 두 번째 부분은 탁월 한 명상기법 또는 마음계발법으로서 자비관을 부각시키고 있으며(11~20행), 세 번째 부분은 보편적 사랑의 철학에 전적으로 귀의하여 이를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체에게, 모든 사회에, 전 우주에, 또 자신의 내면적 경험 면에서 확대․심 화하는 데 전심전력할 것을, 다시 말해 모든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활동을 통 해 자비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00).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사랑과 증 오의 벽을 넘어 타인과 자신을 평등한 존재로 보아 행복하고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자비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자비 덕분에 사람은 공격적이기를 거 부하고 여러 가지의 신랄함과 원한과 증오심을 버리게 되며, 그 대신 남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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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우정과 친절미와 인정이 있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참 다운 자비에는 이기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을 또한 마음속에 따뜻한 동 료애와 동정심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그 같은 감정은 수행을 거 듭함에 따라 끝없이 확대되어 모든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 경제적 장 벽을 무너뜨리게 된다. 자비야말로 참으로 보편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일체를 포 용하는 사랑이다(190).

자비는 증오와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 이유는 지혜롭 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자비가 큰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 에 작용하고 있는 인종, 종교, 개인 간의 갈등은 관련된 등장인물이 자신의 견해와 욕망에 집착하여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편견과 욕망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 이다. 여기서는 샤일록, 안토니오, 포오셔를 중심으로 이들의 종교적, 경제적, 법적 역학관계가 포오셔의 기지와 재치에 힘입어 조화로운 해결보다는 미봉책 에 그치는 일시적 해결로 끝맺는 이유를 불교적 자비와 인간이해에 비추어 분 석함으로써, 이 작품이 왜 비극적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I. 편견과 증오, 그리고 분노

이 작품에서 자비의 주제는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관계에서 정점에 달 한다. 갈등의 표면적 원인은 샤일록의 고리대금업에 대한 안토니오의 견해 차 이와 언어적 신체적 폭력행위이다. 자비가 필요한 이유는 자비가 무자비한 행 위나 폭력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빌린 3000 더컷(ducat)을 약정한 기일 안에 갚지 못 할 경우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갖는다는 계약은 “인간관계와 금전관계의 구별을 거부하는 것”

이며 “인간의 살이 금전으로 바뀔 수 있다는 대담한 주장으로 기독교인들로 하 여금 정신과 물질, 살과 돈, 산 것과 죽은 것의 영역에 대한 혼동을 금하는 그 들의 금기를 어기도록 요구하는”(Maus 1085) 샤일록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다. 또한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안토니오의 생명의 가치는 3000 더컷에 불과 하지만, 샤일록의 입장에서는 안토니오가 이제껏 샤일록에게 가해 온 언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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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폭행과 베니스의 기독교도들이 그를 대우한 방식에 대한 대가이다.

금전은 샤일록에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포오셔가 샤 일록의 재산 절반은 국고로 나머지는 안토니오에게 귀속시킨다는 판결을 내렸 을 때, “내가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재산을 빼앗아 간다면 내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소.”(you take my life/ When you do take the means whereby I live. 4.1.372-73)라는 샤일록의 절규는,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행한 언어적, 폭 력적, 금전적 행위가 샤일록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줄 뿐 아니라, 샤일록으로서는 안토니오를 과도하게 미워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샤일록이 안토니오를 증오하는 애초의 동기에는 개인적 모멸감과 금전적 손해 및 종교적, 인종적 편견이 혼합되어 있다.

[방백] 저자는 참으로 아첨하는 세리의 상판을 하고 있구나! 저자가 기독교도라는 사실 때문에도 밉지만, 겸손한 척 비열하고 순박한 척 우매하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줘서 여기 베니스에서 우리 대금업자의 금리를 낮추기 때문에 더욱 밉다. 그놈의 덜미만 잡았다 하면 나는 내가 그놈에게 품고 있던 해묵은 원한을 마음껏 풀고야 말테다. 그놈은 신성한 우리 민족을 증오하고, 심지어 대다수의 상인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까지도 나와 나의 상거래, 그리고 애써 모은 내 재산을 고리대금이라고 부르면서 마구 비난을 퍼붓는다. 내가 만일 저런 놈을 용서한다면 내 종족에 저주가 내릴지어다.

[Aside] How like a fawning publican he looks!

I hate him for he is a Christian:

But more for that in low simplicity He lends out money gratis, and brings down The rate of usance here with us in Venice.

If I can catch him once upon the hip, I will feed fat the ancient grudge I bear him.

He hates our sacred nation, and he r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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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there where merchants most do congregate, On me, my bargains and my well-won thrift, Which he calls interest: Cursed be my tribe If I forgive him! (1.3.36-47)

종교적, 금전적, 인종적 차이에서 생긴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은 애초부 터 목숨과 바꿀만한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동기가 인종에 대한 히틀러의 편견에 기인한 것을 이해한다면,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인 샤일록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안토니오를 제거하 려는 의도는, 윤리적 입장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일방적으로 비난받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면 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이다. 반면, 안토니오는 버사니오에게 “가장 귀한 친구이자 가장 절친한 사람이며, 가장 고귀하고 남을 도우는 데 있어서는 지칠 줄 모르는 천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태리 천지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분명하게 옛 로마의 명예심을 체득하고 있는”(3.2.291-95)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이 종족이 다르고, 금전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종교가 다 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샤일록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공공연히 휘두르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샤일록이 안토니오를 증오하 게 만든 원인은 안토니오의 편견과 소위 “의분(righteous anger)”(Easwaran 145) 에 있다. 샤일록의 입장에서 보면, 안토니오는 무자비한 기독교도 폭력배에 지 나지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 안토니오의 샤일록에 대한 비웃음과 폭력행위는 자비와 반대되는 여러 성향을 갖고 있다. ‘억압(pīlana)’은 남을 압박하거나 손 실을 입히려드는 욕망이며, ‘공격적(upaghāta)’이란 남을 다치거나 상처를 주려 는 성향이고, ‘학대(santapa)’는 고통을 주려는 가학적 성향과 동의어로 남을 아 프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괴(pariyādāna)’는 끝장내거나 해치워버리려는 것으로 극단주의자와 성상파괴자들의 특징이고, ‘괴롭힘(vihesam)’은 부담을 지 우거나 난처하게 만들거나 근심과 긴장을 안겨주는 행위를 말한다. 이들 성향 은 모두 반감과 악의에 뿌리박고 있어서 행동양식으로서나 심리상태 혹은 정신 적인 자세 모든 면에서 자비와는 대조를 이룬다(Buddharakkhita 209). 자신이 갖고 있는 견해는 옳고, 남의 종교와 견해는 무조건 그르다는 견해야말로 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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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조화로운 사회를 허물어뜨리는 편견이다. 안토니오는 자신이 샤일록에게 행사한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의로운 분노”에 근거한 행위로 착각하고 있다.

이는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그렇게 부를 것이고, 다시 당신에게 침을 뱉고, 발 길질을 할 것이오. 당신이 이번에 이 돈을 빌려주더라도, 그것을 행여 친구에게 빌려준다고 생각하고 빌려주지는 마시오. 친구가 새끼를 낳지도 못하는 쇠붙이 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은 적이 도대체 언제 또 있었더란 말이오?”(I am as like to call thee so again,/ To spet on thee again, to spurn thee too./ If thou wilt lent this money, lend it not/ As to thy friends, for when did friendship take/ A breed for barren metal of his friend? 1.3.125-29)라는 안토니오의 대사에서 분명 히 드러난다. 이로써, 변화하고 있는 사회 속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 하고 자신의 견해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고정관념, 즉 편 견의 소유자임을 안토니오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설사 “의로운 분노”라 할 지라도 불교에서는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도 의로움을 가장한 하나의 “폭력”으로서 자신의 정신적 건강과 남을 동시에 파괴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 편견은 종교적 우월감이다. 더구나, 그의 편견은 샤일록을 “악마”(The devil 1.3.93), “사악한 인간”(An evil soul 1.3.94), “썩어빠진 사과”(A goodly apple rotten at the heart 1.3.96), “겉모습만은 그럴듯한 허위”(O what a goodly outside falsehood hath! 1.3.97)로 거침없이 묘사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종 교적 우월감은 일종의 오만이다. “오만으로 인한 비웃음이나 업신여기는 말은 몸으로 하는 공격행위와 꼭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부메랑의 카르마 (Boomerang Karma)가 생기고, 비웃음을 당한 사람이 겪는 육체적 괴로움과 같 은 것을 결과적으로 받게 된다”는 서미나라(Cerminara, MM 57)의 지적은 안토 니오에게 들어맞는다. 여기서 카르마란 ‘업(業)’으로서 “의도에 의한 행위 일반”

을 가리킨다. 앙굿따라니까야 (Anguttara Nikaya)에 의하면 카르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의도가 카르마다. 의도함으로써 사람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AN 6.63). “카르마의 법칙에서 원인과 결과는 보편적으로 적용되 며, 결과는 원인의 속성을 갖고 있다.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모든 사건은 반드 시 결과를 가져오며 마음, 행동, 또는 마음과 행동 속에 그 결과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카르마는 마음에 저장된다. 우리가 인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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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는 것은 카르마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한 것의 총합이다”(Easwaran 67-68).

이러한 안토니오의 카르마는 샤일록의 증오와 복수심의 원인이 된다. 상대 의 직업에 대한 미움이든, 상대의 폭력행위에 대한 미움이든, 미움은 샤일록에 게도 안토니오에게도 극복해야 할 성격적 결함이다. 이 미움이 4막의 재판까지 샤일록, 안토니오, 포오셔, 버사니오, 베니스의 공작 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 고,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자비를 빙자한 폭력으로 비극적 희극을 만들어내 는 동력이다. “살 한 파운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설레리오(Salerio)의 물 음에 “복수”라는 말을 사용하여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폭력이 언어적, 신체적 행위만이 아님을 분노에 가득한 어조로 말한다.

고기 낚는 미끼는 될 거요. —달리 아무 것도 먹일 게 없다고 해도 내 복수심만은 배불리 먹여줄 거요. 그자는 나를 모욕했고, 그가 방해를 해 나는 오십만 더컷이나 손해를 봤고, 내 손실을 비웃었고, 내 이득을 조롱했고, 우리 민족을 멸시했고, 내 거래를 방해했고, 친구들을 나와 이간시켰고, 내 적들을 충동질했소. 그런데 그 이유가 뭐요?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오.

To bait fish withal, —if it will feed nothing else, it will feed my revenge; he hath disgrac’d me, and hind’red me half a million, laugh’d at my losses, mock’d at my gains, scorned my nation, thwarted my bargains, cooled my friends, heated mine

enemies; and what’s his reason?—I am a Jew. (3.1.47-52)

인격적 모욕과 경제적 손실,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손상시킨 안토니오에 대 하여 샤일록은 복수의 대가로 그의 “살 한 파운드,” 즉 목숨을 요구하는 것이 다. 버사니오가 낭비벽이 없는 귀족 청년으로서 포오셔에게 구혼하러 갈 때,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리지 않고 혈혈단신으로만 갔어 도, 안토니오가 평소 샤일록에게 인격적, 인종적 모욕과 경제적 손실을 입히지 만 않았어도, 샤일록이 위약의 대가로 “살 한 파운드”를 요구했으리라고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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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기는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제시커가 기독교인 청년 로렌조와 샤일록의 돈 과 보석을 훔쳐 달아난 사건은 샤일록의 안토니오에 대한 복수심의 강도를 충 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더구나, 다음에 인용되는 샤일록의 절규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보편적 현 상에 기초한 인간의 평등사상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불교의 자비사상과 동일한 입장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결론은 자비와 전혀 다른 폭력적 복수심으 로 귀결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여기서 샤일록은 이미 지혜와 자비행의 분리 를 보여주며, 이는 안토니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하고 그의 “살 한 파운 드”를 베어 내려는 재판장면에서 그 극한적 양상을 보여준다.

유태인은 눈도 없소? 유태인은 손도, 오장육부도, 사지오체도, 감각도, 욕정도, 감정도 없소?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상처입고, 같은 질병에 걸리고, 같은 약으로 치료되고, 같은 겨울 여름이 되어도 더위나 추위를 느끼지 않는단 말이오, 기독교도 처럼?—우리는 당신네들이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 줄로 아시오? 당신들이 간지럽혀도 웃지 않는 줄로? 당신네들이 독약을 먹여도 죽지 않는 줄로? 당신네들이 모욕해도 복수하지 않는 줄로 아느냐 말이오?—그 외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당신들과 같다면 그 점에서도 당신들과 마찬가지일 거요.

유태인이 기독교도를 모욕한다면 기독교도가 베풀 자비가 대체 뭐겠소? 복수요! 기독교도가 유태인을 모욕한다면 대체 그는

어떤 관용을 베풀어야겠소, 기독교도들을 본받아서 말이오?—역시 복수요! 당신들이 내게 가르쳐준 악행을 나는 실행할 테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배운 것 이상으로 훌륭히 해내고 말겠소.

Hath not a Jew eyes? hath not a Jew hands, organs, dimensions, senses, affections, passions? fed with the same food, hurt with the same weapons, subject to the same diseases, healed by the same means, warmed and cooled by the same winter and summer, as a Christian is? If you prick us, do we not bleed?

if you tickle us, do we not laugh? if you poison us, do we not die? and if you wrong us, shall we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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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nge? If we are like you in the rest, we will resemble you in that. If a Jew wrong a Christian, what is his humility? Revenge. If a Christian wrong a Jew, what should his sufferance be by Christian example? Why, revenge. The villainy you teach me, I will execute, and it shall go hard but I will better the instruction. (3.1.52-66)

버사니오가 포오셔에게 구혼하러 가는 데 필요한 돈을 빌리기 위해 샤일록에게 갔을 때, 샤일록은 그에게 유태인들의 정체성을 “인내”(suff’rance is the badge of all our tribe. 1.3.105)로 정의했다. 내가 고통을 느끼면, 타인들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노력하는 선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와 유태교의 공통점임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정반 대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파괴하는 복수를 선택하는 샤일록에게서 미움(증 오)의 강력한 파괴력을 셰익스피어는 보여주고 있다. 베니스의 기독교도들에게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면서도 인내할 수밖에 없는 샤일록의 처지는, 버사니오와 안토니오의 궁지를 이용하여 법적 효력이 있는 증서(bond)를 받아냄으로써, 안 토니오에게 앙갚음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로 바뀐다. 법이라는 제도적 폭력에 의지해 자신의 한풀이를 하겠다는 것이 샤일록의 의도이다. 샤일록의 정체성이 라 할 수 있는 “인내”의 징표는 합법의 명분아래 “복수”의 징표로 변한 것이 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평등한 인간 조건에 대한 샤일록의 웅변은 일견 만인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이 인간성은 “복수에 의해 타락 한 인간성”이며 “보다 순수하거나 고상한 인간의 속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 는”(Halio 46) 것일지는 모르지만, “왜 자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가 매우 설득력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추측컨대, 이것은 그의 인생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오직 고리대금업을 통해 많은 돈은 벌지만 검소한 생활로 살아가는 그에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행복이나 평화 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 샤일록은 적어도 복수를 눈감아주거나 허용하지 않는 유태교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에 일부러 눈 감는 것일까? 첫째 이유는 극중 베니스의 기독교도들 이 유태인들에게 보여준 복수 중심의 삶의 태도이다. 작중 기독교도들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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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66)는 샤일록에게 가장 원시적인 정의실현의 형태인 ‘동해형법’(Lex Talionis: ‘눈에는 눈,’ ‘eye for an eye’) 원칙의 본보기가 되었다. 둘째로, 이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샤일록의 마음속에 자리한 미움 또는 악의이다. 이로써 4막 의 재판장면에서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유가 부분적으 로 설명된다. 고통이라는 차원의 동질성은 이해하면서도, 인종과 종교의 차이에 근거한 이질성을 강조하고, 이는 기독교인들의 본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써, 샤일록은 자신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동해형법이 안고 있는 더욱 심 각한 문제는 “이러한 보복의 악순환이 과연 미움과 갈등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 못하는 데 있으며, 오히려 이 부분은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하향적 평등”의 한 본보기로 서 당대 기독교도들의 종교적 위선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샤일록이 언급하는 고통은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서 생기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폭력은 죄(sin)나 악(evil)의 개념에서 중심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선악에 따른 행위를 관찰하고 재판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만, 불교 에서는 선악에 따른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인과의 법칙(law of causality)을 주장한다. 따라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윤리적 근거를 불 교는 고통과 죽음을 싫어하는 인간의 기본적 속성에서 찾는다(Easwaran 106).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한다. 그대와 같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러니, 죽이지도 죽이게 하지도 마라. 누구나 폭력을 두려워한다. 그대와 같이, 누구든 생명을 사랑한다. 그러니 죽이거나 죽이게 하지 말라” (Dhammapada 129-30).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또한 행복하기를 바라는 남을 괴롭히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행복하기를 바라면 서, 또한 행복하기를 바라는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 도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Dhammapada 131-32)

여기에는 기독교 성경의 “뿌린 대로 거둔다.”는 자업자득의 원리와 함께 원인 에 따른 결과의 법칙(law of cause and effect)이 강조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고통과 남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자비심의 근원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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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전편에 흐르는 샤일 록의 입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법구경 에 서 미움을 없애는 방법은 미움이 없는 마음, 즉 자비심을 갖는 것이다.

그는 나를 욕했고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고 그는 내 것을 앗아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움으로부터 길이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나를 욕했고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고 그는 내 것을 앗아갔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저 미움으로부터 벗어난다.

미움은 미움으로 정복되지 않나니

미움은 오로지 미워하지 않음(absence of enmity)으로써만 정복되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Dhammapada 3-5)

사랑으로 분노를 다스려라. 선으로 악을 다스려라. 베풂으로 인색을 다스려라.

그리고 진실을 통해서 거짓을 다스려라. (Dhammapada 223)

물론 샤일록은 불교인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삶을 완성하려는 구도자도 아니다. 그러나 “타고난 악인은 없다”는 뜻에서 안토니오를 미워하는 그의 마음은 불교의 인간관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이 공통적 으로 기초하고 있는 인간관은 “영원불변의 자아(self)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을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 라 인간의 몸도 마음도 변하며 그 속에 영속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미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성스러운 유태인종”의 일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고리대금업을 통해 삶을 유지해야 하는 샤일록에게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당시 베니스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뿌리 뽑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삶의 속성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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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에—인격적 모욕이든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방해하든 종교적 견해가 다르든—이 모든 것은 샤일록에게 안토니오를 제거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즉 미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안토니오 또한 샤일록에 대한 미 움을—그것이 종교적 경제적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 다는 점에서는 샤일록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인간관계 면에서 보면, 안토니 오는 분명히 샤일록의 미움을 초래한 원인제공자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에 서 보면, 위약시 살 한 파운드를 요구하는 증서는 안토니오의 샤일록에 대한 비도덕적 행위가 그 반작용으로서 부메랑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러한 부메랑 효과는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애원하는 장면과 재판장면에 서 포오셔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시도”

(direct, or indirect attempts to seek the life of any citizen, 4.1.346-47)로 샤일 록을 기소하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샤일록 또한 자신의 악한 의도에 대한 부메 랑 효과를 받는데, 포오셔에 의한 기소와 그 판결은 이것을 증명한다. 샤일록 이 자비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미움을 실행하려는 인물이라는 점은 4막 3장에서 안토니오가 무엇인가 애원하고자 하는 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여보게 간수, 그자를 잘 감시하게, —내게 자비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고,—그자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바보일세.”(Gaoler, look to him,—tell not me of mercy,—/ This is the fool that lent out money gratis. 3.3.1-2)라는 샤일록의 대사가 이를 뒷받침하며, 이는 안토니오도 잘 알고 있다.

그자는 내 목숨을 노리는 거요.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소. 저자의 위약금 요구에 못 이겨

파산하게 된 사람이 종종 나에게 호소해 오면

그들을 여러 번 구했소. 그래서 저자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He seeks my life, his reason well I know;

I oft deliver’d from his forfeitures

Many that have at times made moan to me, Therefore he hates me. (3.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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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의 위약금 요구를 어긴 사람들을 여럿 구해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 업적 질투심에서 샤일록이 자신을 미워하고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안토니 오의 생각은 샤일록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단견이다. 샤일록에게 욕설을 한다 거나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한 것과 같은 인격적 모독은(1.3.36-47 3.1.48-52) 안토 니오에게 샤일록이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하는 동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특히 솔라니오(Solanio)에게 “제발 버사니오가 돌아와 서 내가 그의 빚을 갚는 모습만 보아준다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네.”(pray God Bassanio come/ To see me pay his debt. 필자의 강조 3.3.35-36)라고 말하는 안 토니오의 대사에는 자신이 샤일록을 비웃거나 폭행한 데 대한 도덕적 책임이나 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가 샤일록에게 의미하는 것 은 샤일록에 대한 안토니오의 도덕적․금전적 빚과 버사니오의 금전적 빚, 어쩌 면 샤일록이 베니스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받은 모든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대 우에 대한 그의 불만의 총합인 것이다. 교환가치만을 중시하는 무역 상인이 갖 기 쉬운 인간에 대한 경제적 이해가 가져온 편견은 샤일록과 자신의 관계에 대 한 진실을 가리는 데 기여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샤일록을 “나의 잔인한 빚쟁 이”(my bloody creditor 3.4.34)라는 단순히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로만 인식하 는 심각한 도덕적 불감증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살 한 파운드”를 떼어냄으로써, 안토니오로부터 언어적․육체적․경제적으로 입은 피해를 고리대금업자의 방식 으로 샤일록은 제도적이고 법적 폭력인 베니스의 법에 의지해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안토니오도 “공작님께서도 법의 정당한 시행을 거부할 수는 없 을 것일세. 이 베니스에서 우리와 대등하게 외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상업권을 부정하게 되면, 이 나라의 국법정의는 크게 비난받게 될 것일세.”(3.4.26-29)라고 말하며 시인하고 있다.

분노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의 원동력이다. 이 때문에 삶은 고통이 되 고 자비를 통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이를 불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깨달음을 얻은 지7일이 지나 삼매에서 나와 그(붓다)는 깨달은 이의 눈 으로 세상을 관찰하였다. 관찰하여 보니 세상의 중생들이 많은 열병과 탐

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생긴 불에 불타고 있음을 보았다. (Udana 3.10,

자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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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불타고 있다. 형상 이 불타고 있다. 눈의 의식이 불타고 있다. 눈의 접촉이 불타고 있다. 눈 의 접촉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경험이거나,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탐욕

의 불로, 분노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 태어나고 늙고 죽

음으로, 슬픔으로, 탄식으로, 아픔으로, 절망으로, 좌절로 불타고 있다. (SN 35.28 필자의 강조)

탐욕의 불이 감각적 욕망으로 들뜨고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불타고 있다. 분노의 불이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서 불타며 목숨을 빼앗는다.

어리석음의 불이 고귀한 진리를 모르는 미혹한 사람에게서 불타고 있다. (Itivuttaka 93)

강력한 불길은 모든 것을 불태우듯, 분노는 생명을 파괴한다. 샤일록도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이해하는 데서는 불교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괴로움으 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방식은 비폭력이나 지혜가 아닌 속임수와 법이 다. 샤일록이 보상금 대신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요구하는 행위는 사법 적 정의와 결합된 개인적 정의(private justice, revenge)를 실현하기위한 조치이 다. 베니스의 공작조차 샤일록을 “유태인”(the Jew, 4.1.14), “목석같이 완고하 고, 비정한 냉혈한, 동정심도 베풀 줄 모르고, 자비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인간”(A stony adversary, an inhuman wretch,/ Uncapable of pity, void, and empty/ From any dram of mercy. 4.1.4-6)으로 묘사하는 데서 무자비 한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을 한 샤일록도 읽어낼 수 있지만, 샤일록의 입장에서 는 그가 안토니오에 대하여 얼마나 대단한 증오심을 품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의 베니스에서 사회적․종교적 약자이면서 피압박자인 샤 일록으로서는 자신의 인권과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법에 의한 자신의 권리확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 오락, 삶의 목적과 태도 등이 자신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에서 사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Barton 251). 안토니오는 샤일록의 분노 때문에 자신이 용서받기 어렵다는 점 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는 인내로서 그자의 분노에 대항할 터이오니,/ 미친 듯이 날뛰는 그자의 무도한 격분을 이제 조용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감당할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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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 되어있습니다.”(4.1.10-13) 샤일록이 달고 다닌 “인내의 표지”(1.3.105)를 이제는 안토니오가 달고,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를 담담히 수용한다. 그러나 아 직도 자신이 그 원인제공자라는 윤리적 깨달음은 안토니오에게 결여되어 있다.

샤일록 또한 법정에서 3000 더컷이라는 돈을 받기보다는 안토니오의 살 한 파 운드를 취하고자하는 이유를 “자신의 기질”(my humour 4.1.43)때문이며, 안토 니오를 향한 사무치는 증오심이라고 공언한다.

저도 이렇게 안토니오를 상대로 손해 보는 소송을 일으키는 것은 그에 대해서 제가 품고 있는 가슴에 사무친 일종의 증오심,

그리고 확고부동한 혐오감 때문일 뿐,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도 없고, 말씀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납득이 되십니까?

So I can give no reason, nor I will not, More than a lodg’d hate, and a certain loathing I bear Antonio, that I follow thus

A losing suit against him!—are you answered? (4.1.59-62)

증오심과 혐오감에서 살인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버사니오의 질문에 샤일록 은 서슴지 않고 “미운 것은 죽여 없애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소?”(Hates any man the thing he would not kill? 4.1.67)라고 대답하며, 안토니오를 독사에 비유한다(What! wouldst thou have a serpent sting thee twice? 4.1.69). 제시커 가 자기가 사는 집을 “지옥”(Our house is hell. 2.3.2)이라고 묘사했듯이 안토니 오와 함께 지내야 하는 베니스 사회는 샤일록에게 독사가 있는 지옥과 같다.

샤일록이 보여주는 복수에 대한 집착은 “증서”(bond)라는 단어의 의미의 상대 성보다는 단일성에 집착하는 편집성을 보여주는 비극적 인물들의 특성을 강하 게 보이는데, 이는 안토니오도 예외가 아니다(박우수 81-82).

안토니오의 샤일록에 대한 증오도 또한 샤일록의 증오에 못지않다. 샤일록 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놈(the Jew)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샤일록의 개인적 정체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일록과 논쟁하는 것은 바닷물, 늑대, 그리고 소나무에게 그들의 본성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 한 일이라”(I pray you think you question with the Jew,—/ . . . the bea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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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lf. . . the mountain pines. . . / His Jewish heart! 4.1.70-80)는 말로 버사 니오가 샤일록과 논쟁하는 것이 절대로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이면에는 샤일록 이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자연이나 동물보다 더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비 하한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이미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그래 서 차라리 재판을 받고, 자신의 살 한 파운드를 샤일록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돈을 주고 산 노예처럼, 비싸게 구입 한 한 파운드의 살이니 그것을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4.1.89-103)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원수이며 “살 한 파운드”에 지나지 않는 고깃덩이이고,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잡는 개”(cut-throat dog, 1.3.106) 로서 서로에게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샤일록 에게 돈을 빌려 부유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은 버사니오의 아내 포오셔의 등 장에 의해 이러한 상호간의 증오에 의한 극한의 갈등이 해결된다. 포오셔의 지 략과 지혜에 의해 샤일록의 복수는 실패하고, 오히려 그는 안토니오에게 돈도 종교도 잃는다. 증오의 카르마는 자비심의 결여로 다시 샤일록에게 부메랑의 카르마가 된다.

IV. 지혜로부터 분리된 자비

재판의 초반 포오셔가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권하는 장면에서는 지 혜와 자비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샤일록에 대한 최종판결에서는 포오셔의 지혜가 철저히 자비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겪는다. 샤일록은 극의 초반부터 지혜와 자비를 분리시킨 인물이지만, 포오셔와 안토니오는 지혜를 악용하여, 진 정한 자비를 필요로 하는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즉, 이들의 자비는 이름뿐인 자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심층적 이유는 이들이 샤일록에게 대하여 갖고 있는 종교적, 인종적 편견과 금전에 대한 탐욕이라고 할 수 있다. 샤일록 에게서 빌린 3000 더컷을 갚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재산의 절반을 빼앗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의 최상위에 있는 베니스의 공작조차도 증서와 법에 대한 축자적 해석으로 인해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한 궁지를 포오 셔는 축자적 해석 대신 “문자와 정신, 컨텍스트와 텍스트가 동시적으로 작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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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해석방법”(박우수 81)을 활용하여 해결한다. 문자와 정신, 컨텍스트와 텍스 트를 오가며 상황에 알맞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혜다. 앞서 제 기된 “해석방법”은 결국 지혜의 기능을 말한다. 이 지혜는 “상자 고르기”, “재 판”, “반지”의 주제를 관통하는 중요 모티프이다. 지혜는 사물을 포괄적 입장에 서 볼 수 있을 때 생긴다. 포오셔가 복장전도(transvestism)를 이용해 법학박사 밸서자(Balthazar)로 변장해 재판관 역할을 맡는 것은, 남편의 친구를 구한다는 입장에서는 설명될 수 있지만, 윤리적 입장에서는 악덕(vice)에 속한다. 포오셔 의 미덕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제한적 의미의 미덕 이며, 가짜 법학박사로 변장하는 행위는 법의 기본정신을 파괴하는 부도덕한 행위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가 포오셔를 재판장면에 등장시킨 이 유는 샤일록의 함정, 즉 친절을 가장한 금전대여행위(“This kindness will I show,/ Go with me to a notary, seal me there/ Your single bond, and, in a merry sport, . . . 1.3.139-41)에 대한 대항마적 기능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극의 초반에 버사니오가 “놀라운 재덕을 갖춘”(of wondrous virtues, 1.1.163) 아 가씨라는 표현은 부분적인 진실을 말해줄 뿐이다. 이 재덕은 재능뿐 아니라 도 덕적 자질도 포함하는 것이기에 포오셔가 샤일록에게 내리는 무자비한 판결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재판과정에서 샤일록의 축자적 해석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포오셔는 “살 한 파운드”의 의미를 “3000 더컷의 빚을 갚지 못한 채 무자”에서 “기독교도․베니스 시민의 생명”이라는 의미의 전환을 이루어 내고, 샤일록을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한다. “살 한 파운드” 속의 피를 통해 상업적 교 환가치를 인간 본연의 윤리적 존재가치로 환원시킨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복수에 대한 편집광적 분노 때문에, 샤일록은 복수를 포기 하는 대신, 자비를 베풂으로써 베니스 사회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해소하고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공적인 기회를 두 번 놓친다. 첫째는 공작이 중재를 시도했을(4.1.17-34) 때이고, 두 번째는 포오셔가 등장하는 재판 장면이 다. 만일 샤일록이 1막 3장에서 기회만 잡으면 자기를 괴롭힌 안토니오에게 혼 을 내주겠다는 방백(How like a fawning publican he looks! . . . 36-47)과 3막 1장에서 설레리오와 솔라니오에게 자신이 왜 안토니오를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대사(To bait fish withal. . . 47-66)를 포오셔가 등 장한 이후의 재판장면에서 말했다면, 재판의 국면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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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경우, “사형집행인의 도끼도 샤일록의 가혹한 악의에 비하면 그 날카로 움이 절반도 되지 않는”(but no metal can,—/ No, not the hangman’s axe—bear half the keenness/ Of thy sharp envy, 4.1.124-26) 샤일록의 증오심(악의)은 개 인적, 사회적 입장에서 어느 정도 정당화되면서, 샤일록이 악명 높은 고리대금 업자임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에게 앙갚음할 만한 이유가 제시되었을 때, 보 다 합리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자기편이고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라는 확신에 대한 집착(If you deny it, let the danger light/ Upon your charter and your city’s freedom! 4.1.38-39) 때문에 샤일록은 증오의 불을 끌 수 있는 단비와 같은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한 다. 아무리 왕권보다 막강하고 신성한 것이라 해도 베니스의 공작이 4막 1장의 초반부에 권했던 무조건적인 기독교의 자비(4.1.17-34)와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포오셔가 권하는 자비는 종교적 구원을 배경으로 하는 조건적 자비이다. “샤일 록, 그 금액의 세 곱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이 있었소.”(Shylock there’s thrice thy money off’red thee. 4.1.223)라든지 “자비를 베풀어, 그 돈의 세 곱을 받고, 이 증서는 찢어버리도록 합시다.”(be merciful,/ Take thrice thy money, bid me tear the bond. 4.1.229-30)라는 조건을 달아 포오셔는 샤일록의 자비를 구한다. 이것 은 “동정심에서 정의를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정의—형평법 법원(courts of equity)이 집행하는 것으로 주장되는—를 위해 (관습)법의 적용을 완화시키 는”(Cohen 44) 자비이다. 이때, 포오셔가 샤일록에게 증서를 작성하게 된 원인 과 배경을 다시 한 번 묻고, 안토니오에게도 3막 3장에서 샤일록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Hear me yet good Shylock. I pray thee hear me speak. 4, 11행)을 말 하게 한 후, 자비를 베풀도록 권유했다면 재판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관습법적 차원의 축자적 정의에 집착한 탓에, 무조건적 자비를 베 풂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인간을 신성을 가진 거룩한 존재로 만드는 자비행을 샤일록은 거부한다(“제 행위의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제가 간청하 는 것은/ 법률에 따라 제 증서에 명시된 담보물을 받아내는 것입니다”)(My deeds upon my head! I crave the law,/ The penalty and forfeit of my bond.

4.1.202-204). 샤일록은 상업적․정서적 가치를 도덕적․윤리적․종교적 가치보 다 우위에 놓는 인물이기에, 포오셔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왕보다 높은 사람 이며 신의 덕성을 가진 사람”(It is enthroned in the hearts of kings,/ It is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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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ribute to God himself, 4.1.190-91)이라고 샤일록을 아무리 정치적․윤리적․

종교적으로 치켜세우더라도 소용이 없다. 샤일록이 원하는 정의는 안토니오에 게 복수하고자 하는 증오심과 베니스의 “헌법과 자유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는 명분”(your charter and your city’s freedom, 4.1.39) 확보에 기초해 있다. 샤 일록이 요구하는 정의의 문제는 욕망—비록 그것이 증오심을 충족시키는 복수 심이라 할지라도—의 자유를 증서에 의거해 축자적 의미로 보장하는 것과 이것 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윤리적 가치의 문제와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둘러 싸고 샤일록이 판결, 법, 증서에 집착하 는 반면(I stand for judgment, 4.1.103; I crave the law,/ The penalty and forfeit of my bond. 4.1.202-203), 포오셔는 정의와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고집하는 배경에는 안토니오가 죽음으로써 샤일록이 챙길 수 있는 엄청난 개인적 금전적 이익이 숨어있기도 하고(3.1.47-52), 안토니오에게 받은 수모를 한꺼번에 합법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신에서, 샤일록은 원금 의 세 곱을 주겠다는 포오셔의 제안도 거부하는 것이다. 안토니오가 피를 많이 흘려 죽지 않도록 의사를 데려왔느냐는 포오셔의 질문에 대하여 그런 조항이 증서에는 없다(4.1.253-58)고 대답하는 샤일록에게, 포오셔는 샤일록의 거부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살 한 파운드”가 갖는 윤리적 의미를 확대해석함으로써, 샤일록의 요구를 뒤집는다.

잠깐만 멈춰라, 아직 더 할 말이 있다. 여기 이 증서에 의하면 단 한 방울의 피도 그대에게 주도록 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는“살 한 파운드”라고 분명히 씌어져 있다.

그러니 그대의 증서대로 시행하라, 그대의 소유인 살 한 파운드는 떼어가되, 그 살을 자를 때 만일 기독교도의 피를 그대가 단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그대의 토지와

재산은 베니스의 국법에 따라 이 베니스 정부에 몰수당하게 될 것이다.

Tarry a little, there is something else,— This bond doth give thee here no jot of blood, The words expressly are “a pound of fl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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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then thy bond, take thou thy pound of flesh, But in the cutting of it, if thou dost shed One drop of Christian blood, thy lands and goods Are by the laws of Venice confiscate

Unto the state of Venice. (4.1.300-308)

증서의 “축자적 의미가 갖는 한계”(박우수 81)의 허점을 절묘하게 짚어낸 포오 셔의 지혜로운 통찰력은 증서가 갖는 문맥적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증서의 축자 적 의미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의미를 도출해 낸다. “기독교도의 피 한 방울”은 “채무자 불이행자의 피”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피”로 해석되어 샤일록 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려는 “살인미수혐의자”의 입장에 처한다. 이 “피 한 방울”은 안토니오의 “고통”이나 “죽음”의 상징이며, 역설적으로 샤일록이 그토 록 벗어나고자 했던 베니스의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에게 가해온 “고통”의 기독 교적 등가물이다. 남장을 한 가짜 판사라는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포오셔가 내리는 이러한 판결은 그것이 인간 본연의 최고 가치인 생 명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똑같이 “고통”이 라는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결과가 전혀 다른 것은 그 동기(motivation)에 있다.

샤일록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을 남의 고통을 통해 해결하려는, 다시 말해 폭력 으로써 폭력을 제어하려는 비윤리적 특성을 갖는다. 반면, 포오셔는 “고통”을 덜어주려는 선의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샤일록의 “살 한 파운드”에 포함된 피의 윤리적 함축성에 근거하여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 = 악”이라는 공식을 이 끌어낸다. 앞서, 왕자의 미덕(enthroned in the hearts of kings, 4.1.190)이나 신의 속성(an attribute to God himself, 4.1.191)으로 묘사된 매우 추상적인 자비의 근 원이 샤일록에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반면, “피 한 방울”이라는 지극히 현실 적인 자비의 근거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음을 포오 셔의 판결이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포오셔의 자비는 고통의 보편성에 입각 한 불교적 자비의 윤리와 궤를 같이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자비, 즉 비폭력 정신은 생명윤리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 윤리의 근간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고 있고, 또한 사랑하지 않으 면 안 된다는 도리 속에 도덕이 성립한다는 기본적 인식”이다(中村 原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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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도 그렇고, 그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그렇다. 자신 과 비교하여 그들을 죽여서도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Sutta-Nipāta 75)

“그대의 마음을 챙겨 온 세상을 둘러보라. 어디에도 그대 자신보다 소중 한 사람은 찾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남들도 자신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 이다. 그러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해쳐서는 아니 된다”

(Udana 5.1)

여기 제시된 비폭력 정신의 밑바닥에는 “고통과 죽음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

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함께 “누구나 자기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 래 가치는 절대평등하다”는 견해가 자리하고 있다. 남의 고통에 비추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 필요조건임을 불교는 주장한다. 이러 한 인간적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일반을 악이라 정의한다면, 샤일록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 하고, 법이라는 제도적 폭력을 이용하여 생명을 해치는 악행을 하 면서도 그것이 악행인지를 모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폭력의 대표적인 예가,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갖는 것”, “거짓말하고 남을 중상모략하거 나 헐뜯는 것” 등이다. 법의 기본 정신이 인간의 윤리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샤일록이 요구하는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는 죽이는 행위에 해당한다. 내 면적으로는 남편 버사니오의 친구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한다는 기본적 의도를 감추고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적어도 이러한 윤리적 근거에서 포오셔가 샤일록 을 “기독교인 살인미수죄”로 샤일록을 기소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샤 일록도 뒤늦게나마 자신의 판단착오를 깨닫고, 포오셔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증서의 세의 금액 세 곱을 받고 안토니오를 풀어주겠다”는 그의 제안 도 “원금만 받을 테니, 돌려보내 달라”는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로 증오를 해결하려 한 재판을 통해 샤일록은 재산과 신앙을 모두 잃는다.

포오셔의 자비, 확대해석하면 베니스 사회의 기독교적 자비가 갖는 한계는 이론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실천윤리의 문 제로 제기된다. 이는 자비의 개념이 아예 없는 샤일록이나 자비를 공공연히 권 장하는 베니스 사회가 “정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지 만, 자비의 실천에는 서로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포오셔 의 판결에 따라, 즉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야 하고, 재산의 반은 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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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의 관리 아래 두었다가 로렌조에게 주고 나머지 반도 사후에는 제시커와 로렌조에게 남겨주는 조건부로, 샤일록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4.1.365-86). 불교 적 입장에서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능동적 입장”으로부터,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입장”으로 변한 샤일록은 “자신이 판 언어의 함정에 빠져 몰락하는 인 물”(박우수 81)로서 악의(ill will)가 가져오는 자업자득과 부머랭 카르마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샤일록이 그토록 집착하던 증서(bond)는 자신이 재산권과 종 교적 자유를 빼앗는 양도증서(a deed of gift 4.1.390)로 바뀐 것이다.

이 판결의 윤리적 함의는 역설적이다. 기준인 자비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포오셔의 이러한 판결은 더욱 자가당착적이 고 자기 모순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입으로는 자비와 정의를 외치면서, 실제로 는 복수에 가까운 판결을 내리는 포오셔의 이중적 태도는 “자비를 실천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며, 이에는 적극적인 실천의지가 필요한 것”임을 반증한다.

즉, 이 작품에 언급된 자비는 편협한 자비요 잔인한 자비이며, “자비”로 사탕발 림한 폭력행위이다(김종환 169). 자비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포오셔가 확신했다면, 샤일록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공작에게 간청했을 것이고, 재산의 몰수도 취소하고, 안토니오가 보증한 3000더컷도 돌려주라고 판결했어야 옳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산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샤일록을 법의 이름으로 괴 롭히는 것이 정의로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자비의 입장에서는 더욱 무자비한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포오셔의 판결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할 줄 모르 는 이해심의 부재, 샤일록의 재산에 대한 금전적 탐욕, 그리고 그에 대한 종교 적 편견과 미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자비관에 입각하여 이 판결을 해석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불교의 자비는 “삶의 모든 현상의 괴로움”이라는 통찰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을 여러 생명에게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커다란 나무처럼 풍성하게 해주고, 명상으로서 자비는 정신적 개화와 함께 만인에게 기쁨을 주는 원천이 되며, 궁 극적으로는 모든 생명체(필자의 강조)를 포용하는 정신적 사랑을 하게 되어 사 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은 저 높은 초월적 깨 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Acharya Buddharakkhita 201).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비폭력의 실천이 요구된다. 샤일록에게 취한 조치를 보면, 안토니오도 포오셔도 이와 같은 불교적 자비의 세 측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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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추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샤일록의 재산 절반을 빼앗은 셈이며, 종교적으 로는 강요된 개종이라는 정신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비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그들 스스로 무효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결과 조치가 자신들에게 도 샤일록에게도 정신적 변화를 가져다주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이들이 진정한 자비를 통해 하나 됨을 실현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이중의 축복”(4.1.183)이라는 포오셔의 주장은 상자 고르 기에서 “해골바가지”(2.7.63)가 들어있는 황금상자의 상징과 같이 무의미하게 된다. 특히 포오셔가 “참으로” 현명한 재판관이라면,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갈 등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셰익스피어의 후기극 폭풍우 (Tempest) 의 프로스페로(Prospero)처럼, 그것을 해소하는 슬기로운 조치를 취해 둘의 화해를 끌어냈어야 했다. 더욱이, 자신의 언어적․신체적 폭력의 결과로 극도의 심신 적 고통을 경험한 안토니오에게는 축복이지만, 샤일록에게는 재정적․정신적 저주가 되는 포오셔의 판결이 자비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욱 큰 문제 는 포오셔가 주장하던 자비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발성과 무조건성의 원칙을 스스로 버리고, 오히려 강제적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자비의 근본 목적 인 평화와 화해, 그리고 하나 됨의 길을 스스로 짓밟은 것이다. 이것은 자비의 명분아래 저지른 복수로서, 샤일록이 3막 1장에서 언급한 “기독교도의 본보기

—역시 복수”(Christian example?—why revenge! 3.1.64)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 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혜와 자비를 분리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탐 욕과 미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IV. 결론

앞서 고찰한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에 따른 쌍방의 분노와 포오셔의 재 판 과정과 결과를 불교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의 갈등은 마음이 만 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만 든다. 그릇된 생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고통이 뒤따른다. 수레바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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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발굽을 뒤따르듯.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만 든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기쁨이 뒤따른다. 영원히 따 르는 그림자처럼” (Dhammapada 1-2. 필자의 번역)

이 구절이 시사하는 바는 이 작품에서 언급된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라는 직업, 유태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유태인들에게 비우호적이고 배타적인 베니스 사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낸다는 정신물리학적 법칙이 이 안에 들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마음먹기이다. 깨끗한 마음은 기쁨을, 그릇된 마음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것이 삶에 대한 불교적 견해이다. 샤일록이나 안토니오나 그릇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했기에 모두 괴로움을 겪은 것이다. 이것이 부메 랑 카르마라는 인과의 법칙이다. 자비심은 바로 깨끗한 마음에 이르기 위한 수 단인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서론의 “필수 자비경”(The Karaniya Mettā Sutta: Hymn of Universal Love)에서 “완전한 평정상태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이겨내어 완전한 지혜와 자비를 자신 속에서 이루는 것”임을 지 적한 바 있다. 이 둘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동등하게 발전시켜야 할 인간의 성품이다. 자비만을 강조하면 “착한 바보”가 되고, 지혜만을 강조하면 “무자비 한 지성인”이 된다(Rahula 46). 안토니오는 지혜롭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았 기에 샤일록의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샤일록도 증오에 사로잡혀 지혜롭게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포오셔는 비교적 지혜롭지만 샤일 록에게는 무자비하다. 이 작품의 주요인물인 세 사람의 상호작용은 지혜와 자 비가 부족한 세계는 미움과 복수가 악순환하는 곳임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 마 음의 인과법칙에는 무지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을 발전시키면 지혜가 높아지고, 지혜가 높아지면 자비심 또한 깊어진다는 사실에도 이들은 무지하 다. 그래서 샤일록이 제거해야 할 진정한 적은 “미움, 증오, 악의, 탐욕”이며, 안토니오의 경우 “오만, 의분, 행위의 인과관계에 대한 무지”가 그 적이며, 포 오셔의 경우 “실천이 함께 하지 않는 냉혹한 지혜”가 그 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샤일록은 법정에서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 대신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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