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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浦 金萬重과 小說 九雲夢에 대한 力動精神醫學的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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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s J Korean Psychoanalytic Study Group Vol. 8, No. 1, page 3~44, 1 9 9 7

西浦 金萬重과 小說 九雲夢에 대한 力動精神醫學的 考察

*

金 鍾 欣**·趙 斗 英***

A Psychodynamic Study of Seopo Man-jung Kim and His Novel ‘Kuunmong’*

Jong-Heun Kim, M.D.,** Doo-Young Cho M.D.***

緖 論

精神分析을 藝術 분야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초창기부터 應用精神分析의 중요한 과 제로서 출발하였다. 文學作品과 作家는 임상례에 버금가는 정신분석의 대상으로서(이 희 1990b), 정신분석은 작품 속 주인공이 왜 그렇게 행동하였는가를, 그리고 작가가 왜 그런 내용을 창작하였는가를 탐구한다.

Freud(1908)는‘창조적 작가와 백일몽’에서 꿈, 실수, 농담에 이어 네 번째로 幻 想(fantasy)에 대해 정신분석 이론을 적용했다. 藝術이란 리비도적 충동이 상징으로 바뀌는 변용이며, 자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쾌락원칙을 실현하는 방어기제이다. 作家 는 白日夢의 성격을 바꾸거나 가장함으로써 부드럽게 하고 미학적인 前快樂(fore- pleasure)을 제공함으로써 讀者가 자기혐오나 수치심 없이 자신의 백일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즉 그 자체로서 쾌락적인 예술적 技法이 감상자의 억압을 제거하여, 예 술의 목적쾌락인 금지된 所望充足에 이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作家란 일반적인 백

*본 연구는 1994년도 서울대학교병원 지정연구비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

**용인정신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Department of Child and Adolescent Psychiatry, Yong-in Mental Hospital, Kyunggi-do, Korea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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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이 지닌 粗雜함이나 남들의 이목에 거슬리는 異質感을 잘 조절해서, 순수하게 개 인적인 느낌이나 색채를 떨쳐 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에 의해 작가는 백일몽 을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普遍體로 승화시키고, 나아가서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快感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自我心理學(ego psychology)에서는 방어기제에 따른 개인차를 중시하여 文體와 예 술적 技巧에 관심을 가진다. 창작이란 무의식의 내용을 교묘하게 의식화시킨다는 점에 서 꿈과 같지만, 꿈은 주도권을 이드가 잡는 대신에 창작의 주도권은 自我가 갖는다.

그리고 자아의 주도하에 退行을 하는 능력이 큰 사람이 예술가라고 하여(Kris 1952), 이드의 顚覆 작용보다 자아의 統制力을 중시한다. 한편 對象關係論(object relation theory)에서는 自己-對象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작가와 인물, 작가와 이야기, 독자와 인물, 그리고 독자와 이야기, 및 작가와 독자간의 關係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둔다(Berman 1993). 또한 自己心理學(self psychology)에서는 창조성이 유아적인 自己愛的 損傷에 의한 불완전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하여, 유아적 완전감을 回復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復舊하려는 노력과 애도과정으로서 나타난다고 본다. Sandler와 Sandler(1995)는 創造性은 자아기능을 이완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現在無意識 (present unconscious)과 意識(consciousness) 사이의 檢閱을 통제하에서 이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술작품은 백일몽의 파생물일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무의식 적 幻想의 파생물로서, 검열에 의해 의식하지 못하는 현재무의식 속의 환상이라고 하 였다.

한편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도입한 心理主義 文學批評은 작가에 대한 창작심리, 작 품 속 인물들의 내적 심리, 독자의 수용심리 등을 탐구한다(홍문표 1993). Freud (1908)는 현실에 불만족한 사람만이 환상을 가지므로, 작가는 현실의 실패자인 반면 幻想의 成就者라고 하였다. 환상의 원동력은 충족되지 않은 소망이며, 모든 환상은 소 망의 충족인 동시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한 심적 수정작용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神經症 환자는 자신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데 반해서 詩人은 자신의 환상을 支配하 고 있으며, 예술가는 상상의 세계로부터 돌아와서 다시 한번 현실 속에서 확고한 발판 을 획득하는 길을 찾아 낼 줄 안다. 따라서 작가의 심리를 신경증 환자의 심리와 동일 하게 취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Trilling 1950).

우리 나라에서 문학작품과 작가를 力動精神醫學的으로 해석한 연구 중 고전 소설을 분석한 경우는 장화홍련전(이희 1990b), 심청전(류인균과 趙斗英 1992)에 대한 연 구 등이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소멸되지 않고 꾸준히 인구에 회자되며 살아남은 古典 作 品이라면 거기에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深層心理的 要素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 는 전제하에 본 저자들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 고전소설인 九雲夢과 그 작가인 金萬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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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역동정신의학적 硏究對象으로 삼았다. 주지하다시피 구운몽은 고전 국문학의 백미 이며 작가가 알려진 몇 안되는 고전소설 중의 하나이고, 서포 김만중은 17세기의 정 치가이자, 학자면서, 문필가이고 무엇보다도 남다른 효자로 알려져 있다. 저자들은 그 의 삶을 심리전기적으로 조망하고, 소설 구운몽을 작가의 삶과 비교하여 역동정신의학 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작품의 이해를 심화시키고 한 위대한 작가의 심층심리를 파악하 고자 하였다.

硏究對象 및 方法

본 연구에서 저자들은 김만중에 대한 傳記的 資料로서‘西浦年譜’(저자 미상, 김병 국, 최재남, 정운채 역, 1992, 서울대출판부刊)와‘西浦家門行狀’(송백헌 1977, 형성 출판사刊)을 주로 참조하였으며, 김만중의 문학작품 자료로서는‘西浦集・西浦漫筆’

(정규복 편 1971, 통문관刊),‘西浦漫筆’(홍인표 역 1987, 서울, 일지사),‘九雲夢・

謝氏南征記’(글벗사刊) 등을 참조하였다. 그리고 기타 자료로서 서포연보와 유사한 내 용의‘西浦行狀’, 김만중이 지은‘貞敬夫人尹氏行狀’ 및 한글로 된‘윤시행쟝’, 김만 중의 형 김만기의‘瑞石集’,‘肅宗實錄’(국사편찬위원회 역 1982, 조선왕조실록) 등 이 타 문헌에서 인용된 것을 간접 참고하였다.

구운몽 텍스트의 선정 문제에 있어서는 異本들간의 관계나 차이점을 밝히는 작업이 국문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는 역동정신의학의 연구범위 밖에 있다는 양해 하에 이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구운몽의 核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구운몽의 引用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글벗사 刊‘九雲夢’을 근거로 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본도 사용하였다.

역동정신의학적 학설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역동정신의학적’ 해석이라고 할 때 방법론의 의미가 애매한 상태이나, 본고에서는 불가피하게 고전정신분석학, Klein학파 의 분석이론, 자아심리학, 대상관계론, 자기심리학 등 현금 정신분석의 諸理論을 저자 들의 恣意로 取捨選擇하였다.

本 論

1. 人間 金萬重

작가의 생애와 경력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그 작가의 작품에 대해 주관적이며 편파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런 점에 유념하면서 구운몽의 작가인 김만중의 일생을 살펴보겠다[서포연보, 서포가문행장, 윤씨행장 참조].

文孝公 西浦 金萬重(1637~1692)은 光山金氏의 거족인 沙溪 金長生의 증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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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대가 愼獨齋 金集의 종손이고, 생원 金益兼의 아들이며, 광성부원군 金萬基의 아우요, 숙종비 仁敬王后의 숙부이다. 그의 모친인 貞敬夫人 海平尹氏는 영의정 尹斗 壽의 고손녀이고, 영의정 尹昉의 증손녀이며, 宣祖의 딸 貞惠翁主 駙馬인 海嵩尉 尹新 之의 손녀요, 이조참판 尹土犀와 경기감사 洪命元의 딸이었던 南陽洪씨 사이에서 태어났 다. 그는 이렇듯 친가와 외가가 당대 최고의 학자가문과 명문 관료가문이었으나, 부친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絶死하는 바람에 遺腹子로 태어났고, 모친이 이를 모른 채 강화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다가 배에서 낳았다고 하여 아명을 船生이라 했다.

우선 김만중의 삶을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조 14년(1636) 0세:병자호란 발발, 부친과 조모 자살함.

인조 15년(1637) 1세:김만중 출생함.

인조 18년(1640) 4세:조부 사망함.

인조 22년(1644) 8세:외조부 사망함.

효종 원년(1650) 14세:진사 초시에 합격함.

효종 3년(1652) 16세:진사 복시에 합격함. 판서 이은상의 딸 연안 이씨와 결혼함.

효종 4년(1653) 17세:외조모 사망함. 형 김만기 별시에 급제함(21세).

효종 6년(1655) 19세:득남함(김진화, 뒤에 牧使 벼슬을 함).

효종 7년(1655) 20세:종조부 김집 사망함. 큰아버지 김익희 사망함.

효종 8년(1657) 21세:득녀함. 과거에 낙방함. 김만기 2품직에 오름. 모친 貞夫人 으로 책봉됨.

효종 10년(1659) 23세:효종 사망. 一次禮訟으로 서인이 득세함.

현종 6년(1665) 29세:庭試에 장원급제함. 성균관 典籍을 시작으로 관직에 등용됨.

현종 9년(1668) 32세:許積에 대한 임금의 특별대우에 대해 직언을 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함.

현종 12년(1671) 35세:관직에 복직됨. 경기와 삼남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모친 슬하를 처음 떠남. 질녀(김만기의 딸)가 세자빈으로 간택됨.

현종 14년(1673) 37세:영의정 許積을 탄핵하다가 파직 당함.

현종 15년(1674) 38세:金城으로 유배됨(1~4월). 二次禮訟으로 남인이 득세함.

질녀가 숙종의 왕비(인경왕후)가 됨.

숙종 원년(1675) 39세:유배에서 풀려난 후 동부승지로서 남인의 거두 윤휴와 허 목을 탄핵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金자 姓을 못쓰는 벌을 받음.

숙종 5년(1679) 43세:재등용되어 예조참의를 역임함.

숙종 6년(1680) 44세: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득세함. 대사헌과 부제학을 역임함.

인경왕후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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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7년(1681) 45세:모친과 형의 집에서 분가함. 인현왕후 책봉됨.

숙종 9년(1683) 47세:대제학을 역임함.

숙종 11년(1685) 49세: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함.

숙종 12년(1686) 50세:두 번째로 대제학을 역임함.

숙종 13년(1687) 51세:김만기 사망함. 昭儀 張氏의 모친과 친근한 趙師錫의 출세 가 임금의 女寵에 기인한 것이라고 직언 하다가 宣川으로 유배됨(9월). 구운 몽을 지음.

숙종 14년(1688) 52세:왕자의 탄생 기념으로 유배에서 풀림(11월).

숙종 15년(1689) 53세: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함. 남해로 유배되어 絶島에 圍 籬安置됨(윤3월). 조카들도 유배됨. 송시열 賜死됨. 민비 폐출됨. 모친 사망함.

숙종 16년(1690) 54세:모친 부음을 들음. 윤씨행장을 지음, 세자(후에 경종) 책 봉됨. 장희빈 正妃로 책봉됨.

숙종 18년(1692) 56세:유배지에서 사망함(4월).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1614~1636)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 했을 때 강화도로 왕족을 모시고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金尙容을 좇아 남문루에 서 분신 자살했고 조모도 이튿날 자결하였다. 김익겸은 이런 충절이 평가받아 후에 忠 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김만중의 모친 윤씨(1617~1689)는 그의 사람됨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 람이다. 그녀는 무남독녀로 자라나서 나이 14세 때 결혼하여 17세 때 김만기를 낳고, 20세 때 과부가 되었으며, 21세 때 김만중을 낳았다. 혼자 된 몸으로 두 아들을 데리 고 친정살이를 하면서 생활이 궁색한 중에서도 자식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학식이 뛰 어났다. 아들들이 입신양명하고 손녀가 왕비가 되는 등 영화를 누리다가 말년에는 장 남 김만기가 먼저 사망하고 김만중과 손자 세 명이 귀양가게 되는 등 집안이 몰락하는 고초를 겪었고 그러던 중 73세로 사망하였다. 자녀교육에 있어 맹모삼천지교 못지 않 았고, 부모에게는 효녀요, 남편에게는 열부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역경에서도 동 요치 않으며, 어떤 존귀영광에서도 교만치 않고, 참기 어려움을 능히 참아, 의와 명을 지켜 좌절치 않았다고 한다(김무조 1975).

그의 형 文忠公 瑞石 金萬基(1633~1687)는 5세에 부친을 잃고 21세에 문과에 급 제해서 2품 벼슬까지 올랐고, 4남3녀를 두었는데 장녀가 숙종비 인경왕후가 되어 光 城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그는 한 때 관료로도 활약하였으나, 성격은 다소 高踏的 으로 어려서부터 관로에 뜻이 없고 초세적인 생활과 평생 실재 자연을 완상하고자 하 는 자세를 가졌다. 숙종의 명으로 훈련대장이 되어 남인의 역모를 밝혀낸 공으로 후에 보사공신의 호를 받았고, 동생 김만중과 함께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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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위의 연대기를 참고하여 김만중의 개인사를 요약하자면, 그는 부친과 조모가 자결한 직후에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조부와 외조부가 사망하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하였으며, 16세에 결혼하여 1남1녀의 단출한 가정을 이루었다. 비교적 늦게 과거에 합격한 29 세에서 36세까지가 그의 得意의 시기로, 관직에 등용되어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후 37세에서 42세까지는 沈滯期로서, 당쟁과 御前直言의 여파로 수차례 파직과 유배를 당하는 등 굴곡이 있었다. 그러나 43세에 재기하여 50세까지가 그의 黃金期로서 대사 간, 대사헌, 대제학, 도승지, 판서 등 고위 요직을 맡아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51세 때 형 김만기가 사망하고 본인과 조카들이 유배를 당한 이후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였 고, 서인의 失勢와 집안의 몰락, 모친의 사망 등을 겪으면서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 그 는 천하의 효자였고, 형제의 우애가 깊었으며, 청빈한 선비요, 박학다식하며 문학적 재 질이 뛰어난 학자이자 작가였으나, 동시에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비타협적인 강경성 을 가지고 권력쟁취에의 의욕도 보였던 정치인이었다.

한편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西人과 南人의 당쟁이 극심하던 때였다. 1659년 孝 宗이 갑자기 승하하고 顯宗 원년에 효종의 계모인 慈懿大妃 趙氏의 복제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의 朞年說과 남인 윤휴의 三年說이 대립하였고,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이듬해에 남인인 허목, 윤선도 등이 다시 반격하였으나 결국 다시 서인의 득세로 결말 이 났다. 이것이 一次禮訟이다. 그리고 현종 15년(1674)에는 효종비 仁宣王后가 승 하하매 또 자의대비의 복제를 놓고 서인은 大功說을 남인은 朞年說을 주장하였고, 이 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허적이 영의정이 되었다. 이것이 二次禮訟이다. 숙종이 즉위 하자(1675) 당쟁은 더욱 심해져서, 송시열이 삭탈관직되어 유배되면서 서인이 탈락 되었고 남인은 서인 거세의 완급을 놓고 대립하여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숙종 6년(1680)에 역모사건이 발각되어 남인이 몰락한 庚申換局이 발발하였고, 서인 은 이의 처벌문제를 놓고 의견이 대립되어 노론, 소론으로 갈렸다.

한편 궁중에는 김만중의 질녀인 인경왕후 김씨가 딸만 둘을 낳고 승하하였고(1680), 이듬해 숙종7년(1681)에 인현왕후 민씨가 책립되었으나 잉태를 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 후궁 昭儀 張氏가 숙종의 총애를 받던 중 숙종 15년(1689)에 왕자가 탄생하자 이를 원자로 봉하고 장씨를 禧嬪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반대하던 송시열과 김수항 등 이 賜死되는 등 다시 서인이 몰락하였고 질투를 탓하여 인현왕후 민비가 폐위되었으 며 남인이 득세하였다(己巳換局). 숙종 16년(1690)에 장희빈이 정비가 되고 그 아들 을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서인의 민비복위운동으로 숙종 20년(1694)에 민비가 복위 되고 남인은 甲戌獄事로 재기불능이 되어 정계에서 탈락되었다. 따라서 김만중의 파란 만장한 일생은 이와 같이 혼란스러웠던 시대상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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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小說 九雲夢

구운몽은 김만중이 중국을 다녀오다가 모친을 위하여 하룻밤에 지었다느니, 모친의 근심걱정을 풀어 드리고자 유배지(선천이나 남해)에서 지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 해지고 있지만(이가원 1955;김동욱 1983), 최근에 발견된 西浦年譜에 따르면 숙종 13년에 선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저자미상 1992). 이 소설은 幻夢(夢遊)구조의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높은 수준의 문학적 기교를 구사 한 섬세하고 탁월한 짜임새의 작품으로, 국문학계에서는 근대적 표현과 심리묘사의 선 구자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운몽의 줄거리(이가원 1955;김춘택 1993)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때 衡山의 蓮花峯에서 불법을 가르친 六觀大師의 제자인 性眞이 스승의 명 에 의해 남해 水府로 가 용왕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魏夫人의 제자 八仙女와 석교에서 만나 수작을 하게 되는데, 돌아온 성진과 팔선녀는 각기 자신들의 仙佛세계 에 회의를 느끼고 부귀공명을 꿈꾼다. 이에 대사는 크게 노하여 성진과 팔선녀를 지옥 으로 보냈는데, 염라대왕이 동정하여 그들 아홉을 모두 인간 세상에 환생시켰다. 성진 은 淮南의 楊處士와 柳氏의 집에서 楊少遊로 태어났다. 신선이었던 양처사가 금강산으 로 떠나버린 후 모친의 슬하에서 자란 양소유는 장성하여 과거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서 서, 가는 곳마다 화류를 희롱하여 8선녀의 후신들에게 순서대로 인연을 맺었다. 과거 보러 가다가 양류사로 서로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난 華州 어사의 딸 秦彩鳳, 천 진교 주루에서 만나고 후에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洛陽의 기생 桂蟾月, 거문고가 인연이 되어 만나며 후에 황태후의 양녀로 들어가 영양공주가 되는 長安 정사도의 딸 鄭瓊貝, 정경패의 몸종 賈春雲, 황제의 딸 난양공주 李簫和,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하북의 명기 狄驚鴻, 토번과의 싸움에서 적진에서 만 난 자객 沈梟烟, 토번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꿈속에서 만난 洞庭용왕의 딸 白凌 波 등이 그들이다. 양소유는 소년 급제로 입신양명의 길에 올라 河北의 三鎭과 土蕃 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황제가 丞相 魏國公에 봉하고 부마로 삼아 벼슬이 太師에 이 르렀다. 팔부인과 더불어 모친 유씨를 모시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다가 마침내 벼 슬을 버리고 취미궁에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낸다. 만년에 이르러 하루는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 인생의 무상을 탄식하다가 때마침 한 胡僧을 만나 문답을 전개하는 도중 에 양소유는 꿈을 깨어 성진으로 환원하는 동시에 팔부인도 팔선녀의 전신을 찾아 호승의 설법을 듣고 모두 본성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호승이 衣鉢을 성진에게 전하 고 서천으로 향한 뒤 八尼姑는 성진을 師事하여 이들 아홉 사람은 함께 극락세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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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金萬重에 대한 心理傳記的 解析

우리 나라 古典文學의 연구에 있어 가장 큰 애로 중의 하나가 作家論의 부진에 있다 (김석회 1988)고 할 정도로 국문학계에서의 작가연구는 작품연구에 비해 적은 수에 불과하다. 1890년 이후 1982년까지의 한국 고소설의 작가 및 작품연구 현황을 보면, 작가가 알려진 고소설에 관해서는 박지원, 허균, 김시습, 김만중의 순위로 몇몇 작가에 국한되어 있다(황패강 등 1983). 그중 金萬重은 17세기 후반에 정치가로 활동한 동 시에 소설, 시, 평론 등 다양한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작가로서, 그의 전기적 사실들은 精神力動的으로 分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역사적인 인물인 김만중에 대한 心理傳記的 硏究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아동 기 발달력 등 자세한 전기적 사실이 감추어진 현재로서는 상당부분 추정에 의존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전해오는 자료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성격의 특성이나 업 적의 공과도 객관적인 전기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이 아니고 대부분 그의 가족에 의해, 간혹은 반대파에 의해 행해진 것이므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偏向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Freud(1910)는 病跡學(pathography)이나 精神分析批評(psychoanalytic criticism) 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의 목적이 빛나는 것을 어둡게 한다거나 고상한 것을 쓰레기 속에 끌어내리려는 것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정신분석이란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치료자와 피치료자의 공동작업인데 반해서, 병적학은 피연구자의 자유연상이 아닌 자료를 찾아내어, 미리 준비해 놓은 이론으로 처음부터 내려져 있는 결론에 맞춰 나가는 학문이라고 비판 받기도 한다(한기수 1987). 그 자신이 수년간 정신분석을 받 은 바 있는 정신분석적 傳記작가겸 문학평론가인 Edel(1959)은 정신분석학적 상투어 들을 무모하게 도입하는 비평가들이나, 임의의 상징들을 무분별하게 적용시키는 전기 작가들에 대해서 비판한 바 있다. 반면 정신분석학자들은 비평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전기기술의 방법론을 모르기 때문에, 진찰실의 분위기를 서가에 끌 어넣으려 한다는 것도 그의 지적이다. 따라서 이런 제한점을 미리 염두에 둘 때 본 연 구가 김만중의 실상을 상당히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기는 하나 본 저자들은 이를 감수하고 논의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선 김만중은 모친에 대한 孝誠이 지극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는 점 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냥한 모습으로 기분을 맞춰 드리는 것이 周나라 효자인 老萊子가 병아 리를 가지고 놀고 어린애처럼 우는 것(弄雛兒啼)과 같았다[서포연보 p.156].

그의 남다른 효성은 그 당시 조정에서까지도 익히 평가해서, 임금으로부터 형벌을 감면 받기도 하였고, 사망후 正祖로부터는 文孝의 시호를 받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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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4년) 김수흥이 말했다.“김만중이 만일 잘못이 있다면 …… 족히 그 죄를 징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에게는 병든 어머니가 집에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효도를 다스림의 근간으로 삼으시니 어찌 어지신 마음으로 구제할 길이 없겠습니까?”[서포연보 p.88].

(숙종 14년)“김만중은 그 죄가 실로 가증스럽지만 편배한지 해를 넘겼고, 모자의 정리가 남다르니 특별히 풀어주라”[서포연보 p.234].

(김만중 사망 4년후) 영상 최석정이 말했다.“ …… 그가 노모를 봉양할 적 에 기쁜 낯빛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함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여서 모두 들 칭송하고 있습니다. …… ” 좌상 서종태가 말했다.“ …… 그는 나이가 이 미 늙어가고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어도 홀어미를 봉양함이 지극해서 낮에는 어머니를 떠나 자기 집에 머물러 있던 때가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실 적에 깊은 사랑이 저절로 드러나니 사람들이 누가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 까? …… ”[서포연보 p.258].

하지만 김만중 자신은 언제나 자신의 효를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不孝子라 고 자책하였다.

“난리 때에 태어났으니 길러주신 은혜가 옛사람보다 백배나 더하지만 어리 석어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어머님 얼굴빛을 순하게 해드리는 데에 어긋남이 많았다. 타고난 분수와 복이 넘쳐나 영화롭게 벼슬은 하였으나 이 모두가 어버 이를 즐겁게 해드리는 일이 되지 못하였음이요, 미혹하야 화를 입어 어머님께 종신토록 근심을 끼치니 불효한 죄악이 위로는 하늘에 통하되 오히려 능히 목 을 찌르며 배를 갈라서 귀신에게 사과하지 못하고 남쪽 섬에 귀양와서도 살기 를 구하니 아 모두가 아픈 일이다”[윤씨행장].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孝를 가장 으뜸가는 덕목으로 강조하여 왔고, 한국인의 심성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효에 대한 정서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力動精神 醫學的으로 볼 때 효행의 원초적인 心理的 動機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며, 특히 이성 의 부모에 대한 효행은 근친상간적인 갈등이 그 일차적 동기가 된다(차준구 1979).

기왕의 연구들은 우리 문화에도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다(이희 1990a).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근친상간의 所望이나 殺父所望은 강하게 억압 되어 있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의식화되지 못한다. 따라서 한국적인 외디푸스 콤플렉스 의 해결방법은 부친살해의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妥協的인 것으로서(이규동 1971)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행동내용으로 變形되어 의식계와 행동에 나타난다(차준구 1979).

양친 중 한쪽이 없는 아동기를 보내는 경우는 현대에 와서는 흔한 일이며, 특히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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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의 출산이 늘고 있는 작금의 실정에서는 날 때부터 부친이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 다. 하지만 遺腹子라는 드문 경우에 처해 偏母膝下에서 자라온 아동 김만중의 심리발 달에는 상당한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모친이 남편을 잃은 哀悼期間의 와중에서 신생아 김만중은 그 육아상태가 원만스럽 지 못해서 초기 아동기에 充分한 母性養育(good enough mothering)을 제공받기 어 려웠을 것이다. 모친의 신생아에 대한 반응에는 부친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즉 남 편의 지지가 아내의 임신에 대한 적응을 돕고, 임산부의 과도한 퇴행을 막을 수 있다 (Tyson과 Tyson 1990). 이런 의미에서 김만중이 이 때 받은 양육은 그 질의 저하 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모친은 자신의 애도를 극복하고 나아가서 자녀가 애도과정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윤부인이 흉한 소식(남편의 사망)을 받고 졸도하였다가 깨어나 말하기를“내 가 죽는 것이 참으로 시원하나 남은 어린것들로 하여금 입신케 하지 못하면 어떻게 군자를 지하에서 보리요.” 하고, 드디어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와서 아픔을 참으며 길러내니, …… [서포연보 p.29].

더구나 윤씨는“남편을 잃은 후에는 종신토록 素服을 하고 아름다운 옷을 몸에 가 까이하지 않았으며,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풍류소리를 듣지 않았다”[윤씨행장]고 할 정도로 남편 잃은 罪人으로서 강한 罪責感과 憂鬱感을 가지고 있었다.

발달학적으로 볼 때 부친은 아동의 和解接近 葛藤(rapprochement conflict)의 해 소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Tyson과 Tyson 1990), 부친이 없었던 김만중은 모친 에 대한 愛着이 비교적 不安定하고 分離個別化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이는 다음에서 보는 일종의 分離不安을 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중이 윤부인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릴 적부터 늙어서까지 특별한 일이 없 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서포연보 p.156]. 멀리 떨어져 있을 적 에는 그리워하는 생각이 지극해서 옆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측은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서포연보 p.157]. 암행어사로 길을 떠나는 도중에 시를 지어 속 마음을 표현하여 말하기를,“9월 25일은 어머님 생신날, 내가 태어난지 서른 다섯 해, 올해서야 처음으로 슬하 떠났네.”라고 하였다[서포연보 p.69]. 만중 이 처음에 만기와 함께 외가에서 물려준 소옥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았는데 매 우 좁았으나 현달한 뒤에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만기가 재동에 있는 사제로 거 처를 옮기자 45세에 연화방에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서포연보 p.156].

딴 집 살림을 하게 되자 날마다 가서 뵙고 …… 아침에 가서는 통금 때가 되어 서야 비로소 돌아오기를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였다[서포연보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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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사망 4년후) 우상 김창집이 연석에서 아뢰어 말했다.“고 판서 김 만중은 효행이 뛰어나서 나이가 늙어갈수록 더욱 어린아이처럼 그리워하였으 며 …… 분가하고 나서도 일찍이 하루도 모친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니, 반걸음 을 걸을 동안에도 모친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서포연보 p.257-258].

태어나기 전에 부친이 전사하여 과부인 모친과 살고 있는 두살짜리 소년들에서 依 存性, 分離不安, 攻擊性이 더 강하고 자율성은 더 약했다는 이스라엘에서의 연구결과 (Levy-Schiff 1982)가 말하듯 김만중은 뚜렷한 분리불안을 지녔으며 이를 일생 지 니고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의존성과 분리불안은 또한 精神身體疾患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Alexander(1950) 는 대부분의 呼吸器 疾病에서 심리적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母親에 대한 해소되지 않은 과도한 依存心에 의한 갈등이 氣管支 喘息의 핵심적인 정신역동적 요 인이라는 것, 그리고 보호적인 모친과의 분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이 천식 발작의 유발 인자라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남해에 귀양가서 모친과 사별하게 된 김만중이 말년에 앓는 질병에 대해서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모친의 부음을 듣고는 깜짝 놀라 부르짖으며 까무러쳐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였다[서포연보 p.248]. 평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느라 지 나치게 마음 상하여 병이 되었다. 게다가 남녘 땅이 찌는 듯 덥고 습해서 부습 (浮濕)과 해수(咳嗽, 기침)와 혈담(血痰, 피가래) 등 증세가 해가 갈수록 심해 졌다[서포연보 p.253].

모친 사별 이후 그의 질환은 악화되었고, 또한 우울증에 빠진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병이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느끼고 치료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신을 돌보던 아들도 서울에 있는 아내(이부인)에게 간 사이에 김만중은 홀로 사망 하게 된다.

“身上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 겨난 신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 병이 심해져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약을 바치면 물리치며 말했 다.“내 병이 어찌 약을 쓸 병이겠는가? ”[서포연보 p.254].

남해의 유배지에서 쇠잔해 가던 김만중이 끝내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집 착보다도 어머님에게 다 못한 孝에 대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모친이 사망하고 난 후에 김만중이 보인 憂鬱반응에서 16세 때 모친을 잃은 공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喪失한 對 象에 투여된 무의식적 兩價性(Freud 1917;趙斗英 1975)을 볼 수 있다. 공자는“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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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있어서 너무 슬퍼하기만 하다가 병이 생기는 것, 먹지 않고 파리해져 병으로 죽 는데 까지 이르는 것은 군자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趙斗英 1976), 김만중으로서 는 일생을 통한 의존의 대상이 상실할 때 겪는 일종의 依存性 憂鬱(anaclitic depre- ssion)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김만중의 호흡기질환은 모친의 지병에 대한 模倣과 同一視의 측면을 보이고 있다.

부인이 원래 담천(痰喘)병이 있었는데, 장남 사망 이후 연이어 걱정거리를 만나 이 때문에 숙환이 더 중해져서 병이 손 쓸 길이 없어졌다[윤씨행장].

천식 환자의 삶에는 모친의 거부의 역사가 반복적인 특색이며, 모친은 자식을 너무 일찍 독립시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불안정을 증가시켜서 의존적으로 매달리게 만든다 는 Alexander(1950)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만중에게는 모친과의 양가적인 불 안정한 愛着이 질환의 발병과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효자・효녀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孝子란 나약한 자아와 의존적인 성격을 지닌 데다 가 구강기 수준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 특히 양가감정을 갖고 그를 대하는 대상에 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 인간이다(趙斗英 1976). 김만중의 효성도 상당부분이 이런 의존성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한편 모친의 무의식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자살한 남편에 대하여 그리고‘아비를 잡 아먹고’ 태어난 김만중에 향해서 憎惡의 감정이 애정과 함께 공존했을 것이다. 따라서 김만중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에는 加虐的인 면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자식들의 교육 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김만중의 모친은 당시의 여자치고는 학식이 있어서, 小學, 史略, 唐詩 정도는 부인이 친히 가르쳤으며, 이웃에 사는 홍문관 書吏를 통하여 四書 와 詩經諺解를 빌어 손수 베껴서 가르칠 정도였다.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가릴 것이 없었으니, 좌씨전 한 질이 있으되 너무 비싸 아들이 감히 말을 못하고 있자 짜고 있던 베틀 속의 피륙을 잘라서 사들일 정도였다[윤씨행장]. 훗날 김만기가 광주부윤에 부임 하여 모친이 따라 갔었는데 김만중 자신은 서울에 남아 이 때의 일을 장시로 읊어,

“큰애는 낭랑히 시경과 예기를 외고, 작은애는 글 배우는데 아직 젖먹이러라.

왼손엔 미음 그릇 오른손엔 회초리, 가르침으로 사랑 삼음에 어머님 마음 아 파라”[서포연보 p.30].

라고 하였는데 이는 젖먹이 시절 김만중에게 가했던 윤씨의 엄한 교육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의 이런 기억은 일종의 遮蔽記憶(screen memory)으로서의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5세까지의 기억은 유아기억상실(infantile amnesia)로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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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푸스 콤플렉스의 억압과 함께 抑壓되는데,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그 어떤 다른 아동 기 기억이 원래 기억을 가리는 차양 역할을 하면서 성인이 되어서까지 계속 남아 이 기억이 스트레스 시기에 재활성화 된다. Aberbach(1983)는 일곱 명의 작가들의 이 런 아동기 기억을 조사하여 이것이 생애와 작품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차폐기억의 대상들은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移行期 對象(transitional object)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니 김만중에게는 미음 그릇 같은 보통의 이행기 대상 외에도 회초리라는 대상이 몹시 중요한 의미를 띠 며, 이것이 모친과의 이별 상황에서 시의 소재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이런 엄한 훈육은 현실적으로는 예학의 명문가에 태어난 두 아들을 교육시킨다는 견지에서 중요하였고, 한편으로는 과부의 자식이라는 상황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는 측면도 있다.

비록 자애로움이 매우 남달랐으나 읽기를 부과함이 지극히 엄하였다. 늘 말 하기를,“너희들은 다른 사람에게 견줄 게 아니니 반드시 다른 날에 재주와 학 문이 남보다 한 등급은 뛰어나야 겨우 남과 나란히 설 수 있나니라”[서포연보 p.29].“사람들이 행실 없는 이를 꾸짖을 적에 반드시‘과부의 자식’이라 하 는지라, 이 말을 너희들은 마땅히 뼈에 새길지어다”[서포연보 pp.29~30]. 불 초 형제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몸소 회초리로 때리며 울며 말씀하시되,“네 부 친이 네 형제로서 나에게 의탁하고 죽었으니 네 이제 이런지라, 내 무슨 면목 으로 지하에 가 네 부친을 보리요. 글 못하고 살기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지라”

[윤씨행장].

하지만 어린 김만중의 눈에 회초리를 든 모친의 존재는 위협적이었을 것이며 김만 중은 이런 去勢母(castrating mother)에 대해 좌절과 적개심을 느꼈을 것이다. 자위 행위를 금지시키고 부친이 거세할 것이라는 위협을 직접 남아에게 알리는 사람이 주 로 모친이기 때문에 실제로 부친의 존재 여부는 남아의 거세공포에 크게 중요하지는 않으며(趙斗英 1975), 거세불안의 정도는 모친에 대한 성적 원망의 강도에 비례한다 (Malan 1979). 그리고 특히 편모슬하에서는 강요적인 모자관계로 인해 모친이 거세 적이기 쉽다(Shill 1981). 따라서 김만중의 경우 그가 지녔던 모친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에 대해 윤씨는 이를 좌절시켰을 것이며, 김만중은 역시 적개심을 느낄 수밖에 없 었을 것이다.

효자효녀전의 주인공의 효대상에게 대한 攻擊性의 가장 보편적인 이유가 되는 것은 기율을 세워주려는 의도에서 아동기 발달과정에서 있었던 부모의 응징행위, 그리고 부 모의 사망으로 생기는 유기 당했다는 심정이다. 장차 효자로 판정 받을 아동은 사랑을 받으려는 구강기의 욕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는 대상을 함입하고, 그가 받는 냉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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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을 리비도화하며, 효대상의 가학성을 반영함으로써 핍박자와의 동일시의 방어기 제가 작동한다(趙斗英 1976). 고로 효란 그에 향한 양가감정을 가진 효대상에게서 오 는 가학성과 그의 이드에서 오는 공격성에 대항하는 자아의 방어기제이며, 이런 기제 들로서 억압, 부정, 함입, 동일시, 반동형성, 초자아형성, 리비도화, 승화 등이 작동되고 있다(趙斗英 1976). 따라서 모친에 대한 김만중의 피학적인 효도의 심층에도 앞서 언 급한 의존심에 못지 않게 挫折感과 敵愾心이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도 지나친 승화와 반동형성의 과정을 밟은 것이라 하겠다.

김만중은 유일한 양육자인 윤씨와 정서적으로 밀착될 수밖에 없었으며, 초기 발달에 서 우울한 모친으로부터 과도한 좌절을 받은 상태에서 부친이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解消가 남보다 힘들었을 것이다(Neubauer 1960). 왜냐하면 외 디푸스기가 잘 해결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흔히들 첫째, 전외디푸스기의 갈등을 충 분히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중 어느 한 쪽이 없는 경우이며, 셋째로 부모가 심한 정신병리를 가져 합리적이고 굳건한 초자아를 형성할 수 없는 경우를 들 기 때문이다(이정균 1988).

하지만 부친이 없는 상태에서도 母親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아동의 정신성적 발 달이 달라진다. 아동기에 부친을 잃었다 해도 모친이 자기수용적이고 자아 강도가 높 고 대인관계가 성숙하다면 아동에 대한 부친 결손의 부정적 영향이 적다(Wolman 1977). 따라서 모친 尹氏의 성격적 특성이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우선 그녀는“집안 살림이 어렵고 자손들이 화를 입는 와중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뒷날 존귀한 몸 이 되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천품이 탁월한 데다가 박학다식하여 당시 부녀자의 사 표가 되었다”[윤씨행장]라고 기술되어 있듯이 대인관계 측면에서는 안정적인 성격구 조의 소유자라고 생각된다.

尹氏는 명문대가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숙성해서 조모인 정혜옹주가 애지중지하여 친히 길러 소학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옹주는 늘 그가 여아임을 한탄하였고 조부도 이를 탄복하였다.

“매양 내 손녀로 더불어 말하매 마음이 문득 시원하니 만일 남자로 태어났 다면 어찌 우리 집 한 대제학이 아니리요”[윤씨행장].

과부가 된 후에 친정살이를 하며, 안으로는 홍부인을 도와 가사를 보살피며 밖으로 는 참판공을 받들어 옛 효자같이 섬겼다. 이복 남동생에 대해서도 우애가 깊었던 것으 로 보인다.

김만중의 외조부가 늦게야 첩 아들 하나를 두었었는데, 부친이 사망한 후 재 산을 나눌 때, 전답의 천박한 것과 노비의 늙고 가난한 자를 스스로 취했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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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행장].

즉 김만중의 모친은 大母(great mother)의 풍모를 가진 여장부였고, 다재다능하고 통솔력이 있는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전통사회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재질이 뛰어나고 지성적인 부 친의 애정과 기대를 받았을 경우엔 부녀관계가 모녀관계보다 필요 이상으로 밀착되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가 힘들 수 있다(이규동 1985). 윤씨의 경우 아마도 이상화 된 부친상을 강하게 초자아에 섭취하여, 지식과 부성을 동일시하면서 남성화를 지향하 였을 것이다. 그녀의 학문과 자식에 대한 교육에의 집착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씨는 무남독녀로서 부모에 보다 의존적이었을 것이며, 이는 친정살이 를 하면서 아들 노릇을 대신하게 됨으로서 충족되었을 것이다. 이런 長女콤플렉스가 기존사회에서 조화롭게 극복되었을 경우엔 대모와 같은 모권적 여성이 될 수 있는데 (이규동 1985), 윤씨의 풍모에서 이런 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듯 모친이 자신의 부모 대상과의 근친상간적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이 를 아기 表象(baby representation)에 전이하기 쉽다. 따라서 아기가 모친에게 근친 상간적 의미를 띠게 되고, 그녀가 소망하는 남근의 표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 공적인 외디푸스적 三角化(triangulation)가 이루어 질 수 없고 아동은 前외디푸스期 의 부분-대상 관계로 退行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男根的 母親(phallic mother)은 자식을 통해 스스로의 자기애적 요구를 채우려 하고, 자식은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하 다는 自己愛的 幻想을 갖게 된다(Kirshner 1992). 모친이 이렇듯 부친 대신 아기를 자신의 자기애적 확장물로 간주하거나 리비도적 보상물로 보는 경우 향후 아동의 性 發達은 歪曲된다(McDougall 1989). 즉 아들은 자신의 유아적 성성과 아이의 남근을 가지고서도 자신이 모친의 완벽한 동반자라고 믿게 되며, 이런 아동의 自我理想은 여 전히 전외디푸스기적 모델에 매달려 있게 된다(Kirshner 1992). 특히 부친이 없는 남아는 상상 속의 남근공격적(phallic aggressive) 모친과의 兩者관계로부터 탈출이 힘들다(Greenspan 1982).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망, 욕망, 행동을 逆(counter)외디푸스 콤플렉스(Lauius 콤 플렉스), 혹은 補完的(complementary) 외디푸스 콤플렉스라 한다. 즉 부모의 병리가 자식에게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일으키거나 유도할 수 있으며, 그 형태마저 결정한다 (Simon 1991). 남편이 없는 모친은 쏟을 애정을 아들에게 돌려, 급기야는 아들을 집 에 있는“작은 남편”으로 만들어 결국 아들을 참담하게 만들어 버리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관능적 요소를 지닌 처벌을 아들에게 가해 마침내는 자식을 배척할 수도 있다(Breger 1974).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스스로가 자신의 부친과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남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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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하고 친정살이를 하던 윤씨로서는 남근적 모친으로서 아들에 대해 역외디푸스 콤 플렉스의 갈등을 보였을 것이며, 아들에 대해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근친상간적 욕망 을 투입하는 동시에 그를 양가감정적으로 배척했을 것이다. 부친이 없는 김만중으로서 는 이에 대응하여 모친과의 전외디푸스적인 결합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외디푸스 콤플 렉스의 해소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自己心理學의 관점에서 볼 때 모친은 김만중에게는 自己對象(selfobject)의 역 할을 하였을 것이다. 아동이 존경하는 성인에게서 심한 상처와 실망을 얻는다면 이때 그에게는 理想化된 父母像(idealized parental imago)이 변화되지 못한다. 이는 장차 성인이 된 그의 인격 속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원초적인 상태로 남아 자기애적인 균형 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기대상으로서 남게 된다(Kohut 1971;이만홍 1988). 남 편과의 사별로 인한 애도과정에 있을 당시 태어난 김만중에 대해 모친은 거울反應 (mirroring)을 보이지 못하여 김만중에게 共感하지 못하였고, 김만중은 자기의식이 분쇄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인정받기 위하여 완벽추구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한편 근친상간적 애정 대상으로서의 모친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욕은 효도의 형태에 서만 아니라 婚姻問題에 대한 김만중의 비타협적인 立場 개진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29세때 수절기생 逸仙의 절개 있는 행실을 기리는 장편 오언고시인 端川節婦詩 를 지어 비록 기생의 신분이나 한 남자에게 순정을 바친 한 여인을 예찬한 반면, 지난 날의 절부가 절개를 저버리고 창기처럼 되어버린 데서 인심의 덧없음을 비감해 하였 다. 51세때 그는 조사석이 장희빈의 어머니와 통정한 것에 대해 분개하여 항간의 소문 을 어전에서 흘려 舌禍를 입고 선천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또한 謝氏南征記를 써서 장 희빈을 총애하여 인현왕후를 축출한 숙종의 태도를 풍자하기도 하였다. 이런 태도는 禮學을 존중하는 가문 출신으로 권력투쟁을 벌이는 西人의 입장에서 일면 이해할 수 있 으나, 그에게는 이것 말고도 모친의 守節에 대한 강한 감정이 실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모친에 대한 효성은 형인 金萬基도 김만중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 10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받고도 모친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이를 면하려고 대사간 에게 청탁을 할 정도였고[서석집], 현종 6년에는 모친봉양을 위하여 고을의 수령이 되 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으로부터 쌀을 하사 받아, 김만중이 대신 다음과 같 은 賜米謝箋을 지어 올린 일도 있었다[서포행장].

해마다 어머니 생신날이면

형제 서로 마주하며 춤추며 즐겨했네.

내가 지금 사명 받들어 어머님의 곁을 떠나니

생신날 어머님 마음 즐겁지 못하실까 두렵네[서포문집 卷6].

김만기는 자신의 외디푸스기였던 5세에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부친과 의 외디푸스적 경쟁에서 승리를 일찌감치 맛보았고, 그 이후 장남으로서 집안에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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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의 역할을 합법적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신역동이 동생인 김만중과 는 달랐을 것이며, 따라서 孝道의 동기도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이 많았을 것이다.

형제의 효성은 모친의 애정을 두고 벌인 競爭의 의미가 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김 만기 死後에 모친을 두고 선천으로 귀양을 가게 된 김만중의 착잡한 심중을 알 수 있다.

부군이 이미 귀양지에 이르러 윤부인의 생신을 맞이했다. 시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죽어 이별이요, 하나는 생이별이로다”[서포연보 p.227].

한편 김만기와 김만중 형제는 모친에 대한 효성에서뿐 아니라 서로간의 友愛도 남 달리 두터웠다고 한다.

숙종 13년(1687년) 3월에 서석공을 哭하다. 송시열이 편지를 보내어 말했 다.“형님이 계실 적엔 공사간 모든 일을 공께서는 형님에게 미루어 맡기고 겸 손하게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누구에게 미루어 맡기겠습니까? 다시 바라노니 든든한 대들보가 되어 스스로 짊어지십시오”[서포연보 p.198].

出生順位는 이후 삶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결정요소이다(Freud 1917). 김만중 은 어릴 적부터 형을 따라 공부를 하였으며 형에게서 詩짓기를 익힐 정도로 형은 그에 게 스승역할을 하였다. 부친을 보지도 못했던 그에게는 이렇듯 兄弟 同一視(fraternal identification)가 중요하였다. 형은 동일시와 모방의 모델이면서 반면에 강력하고 뛰 어 넘을 수 없는 경쟁자이다(Mussen 등 1990). 兄이 21세에 등과하고 25세에 2품 벼슬을 한 덕택에 모친이 정부인으로 책봉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반면, 金 萬重은 21세에 낙방하였고 한 때 과거에 뜻을 잃었다가 29세에 비로소 등과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당시 김만중은 형과 자신을 비교하여 劣等感에 시달렸을 것이다.

初期 父母喪失이 兒童發達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상실의 기간, 원인, 아동의 나이 및 성별, 모친의 반응, 모자간의 상호관계, 가족의 사회경제적 상태, 대리부의 유무 등 의 요인들에 따라서 다르다(Wolman 1977). 특히 5세 이전의 父親不在와 5세 이후 의 부친부재는 그 영향력이 다르다. 동성의 형제라고 해도 연령의 차이가 4세 이상이 나면 둘의 행동은 크게 차이가 난다(Mussen 등 1990). 김만중은 4살 위의 형과 모 친의 애정을 놓고 다투는 강한 同氣間 競爭(sibling rivalry)의 심정이 있었을 뿐 아니 라 그 형을 또한 代理父(father surrogate)로서 외디푸스적 경쟁상대 및 동일시의 대 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임금의 장인으로서 현실 정치엔 다소 거리를 두고 고답적 인 삶을 영위했던 형과는 달리 金萬重은 집안의 대표주자로서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인 논객이었던 것도 이에 연유한 강한 경쟁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또한 그의 학문과 정 치에서 보이는 傲慢과 傍若無人性은 경쟁자에 대한 열등감의 자기방어의 결과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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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말년에 형이 사망하자 김만중은 승리감과 함께 罪責感에 사로잡히며, 이 죄책감 이 반년 후에 조사석의 건으로 어전직언을 하여 流配를 자초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되 었던 것이다. 성인의 형제관계는 동기간 유대(sibling solidarity), 강렬한 동기간 우애 (fervent sibling loyalty), 및 경쟁의 지속(persistence of rivalry) 등 세 가지 유형 을 보이는데(Bank와 Kahn 1982), 김만중은 이렇듯 의식상에서는 형과의 紐帶感을 유지하였으나, 무의식에서는 競爭관계로 평생을 지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모친으로서는 명문가의 宗孫인 김만기를 더욱 존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만기가 모친에 앞서 사망하자, 그때 부인의 나이 71세였었다. 자손들이 부녀자들은 삼년상에만 상복을 입는다고 하면서 기년복을 입기를 권하자 부인 은 장남의 상에 어찌 기년복을 입으리요 하며 상복을 입었다[윤씨행장].

이런 長男選好의 환경에서 김만중의 형에 대한 선망과 모친에 대한 갈망은 더욱 심 화되었을 것이다. 김만중 형제와 모친의 三角構圖는 일종의 共生的 關係를 형성하여 서 로 떨어질 수 없었을 것이며, 1687년 김만기가 먼저 사망하여 이 관계가 깨어지자 모 친은 2년 후인 1689년, 김만중은 그 3년 후인 1692년 잇달아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형 김만기와 후손들의 평가와 스스로 쓴 글에 따르면 김만중은 淸廉하고 安貧 樂道의 생활태도를 견지하였던 것 같다.

많은 서적을 가지고 옛 학문을 탐독하는데 낙을 삼고, 세속 일을 즐겨하지 않으며, 고요히 雅懷를 품고 閒居함을 좋아하고, 형제가 절차탁마하며 세상일 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古訓을 궁리하여 道義를 탐구하고, 儒學을 닦으며 영 리를 생각지 않고, 疏食도 배부르게 여기고 베옷도 따뜻하게 여기며 詩를 읊는 다[서석집]. 食, 色, 財, 名, 宦이 士人五慾이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탐하게 될 때는 절제를 잃고, 몸을 망쳐 도리를 잃게 된다. 특히 宦慾은 오욕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서포만필]. 경제적인 면에 관심이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았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서포행장].

또한 상소에서 당대 선비들의 淫風과 이로 인한 풍속사건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고 비난하고 이를 방지하고 금할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서포집 卷8] 禁慾的인 면이 강했었던 것 같다.

실제 가정생활을 보면 김만중은 형 김만기가 4남3녀를 두고 後孫이 번성한 것과는 달리 자식이 1남1녀 뿐이었다. 16세에 결혼하여 19세에 득남하였고, 21세에 득녀한 이후에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초기 성인기 이후에는 性生活이 활발치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그의 아내인 이씨부인에 대한 언급은 현존 자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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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며, 주로 모친 윤씨를 봉양하는 며느리로서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문학 창작의 면에서 보면 그의 작품집인 서포집에는 美人과 남녀간의 愛情 을 제재로 한 것이 가장 많고, 이가원(1955)은 이를 토대로 김만중을 好色家라고 하 였다. 또한 후술할 구운몽에서도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암시적인 성적 상징 및 동성애 적 장면이 많이 나오고, 주인공은 돈환(Don Juan)을 연상할 만큼 女性遍歷을 자랑하 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실생활에서는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던 반면에 정력적인 정치 생활과 에로틱한 문학창작으로 왕성한 리비도를 보였던 것이다.

부친이 없는 남아는 적절한 역할 모델과 동일시의 대상이 없어서 性役割 正體性을 발달시키는데 곤란을 겪으며 여성 동일시 경향과 여성적인 행동을 초래할 수 있다. 남 근기에서 男性感(sense of masculinity)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母親과의 성공적인 脫同一視(disidentification)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때 동일시의 대상으로 작용하여 이를 촉진시키는 父親이 존재하지 않으면 남성 주체성이 확립되기 힘들다(Tyson과 Tyson 1990). 또한 모친과의 兩者(dyadic)關係에서 三者(triadic)關係로 발전하지 못하여 對象關係의 발달이 미흡해진다. 김만중이 異性愛的 대상관계에서 抑壓을 보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여색과 함께 음주도 멀리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모친에 대한 口腔性 依存心의 충족과 더불어 이의 강한 抑壓이 함께 했다는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藝術이란 유년기시절을 통하여 형성된 고유한 정신내적 갈등을 지니고 있는 예술가 가 의미 있는 외부현실을 체험할 때 이 외부현실을 특수한 유형의 정신내적 가공과정 을 통하여, 자신의 葛藤을 解決하는 방향으로 變形시키는 수단이며 그 해결의 결과가 예술작품의 내용으로 나타난다(김경승 등 1992). 따라서 김만중의 文學的 才能은 부 친상실에 대한 心的 外傷과 모친에 대한 억압된 性的 慾望이 현실생활에서의 挫折 및 欲求不滿과 함께 작용하여 창작열로서 昇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친이 사 망함으로써 리비도가 투여되었던 대상이 상실되자 우울에 빠짐과 함께 그의 창조성도 枯渴되어 모친 사망 이후 貞敬夫人行狀을 지은 것 외에는 문학적 저술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김만중이 활약한 17세기 후반은 黨爭이 극심했던 때인지라, 자기편이냐 상대편이냐 에 따라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相反된 評價가 있다. 우선 肯定的 評價를 보면,

인격이 깨끗하고 온화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깊고 두터웠다. 조정에 서서는 시사를 논하는 말이 강직하였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는 더욱 굳었다. 벼슬이 정 2품에 이르렀으나 청빈하기가 선비와 다름이 없었고, 왕비의 가까운 친척 이면서도 더욱 겸손하여 권세를 멀리하였으며, 대제학의 자리도 굳이 사양함 에 만인이 존경하였다(숙종실록 卷24 張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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