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和順 雲住寺 石塔의 特殊性에 관한 考察*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和順 雲住寺 石塔의 特殊性에 관한 考察*"

Copied!
24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和順 雲住寺 石塔의 特殊性에 관한 考察*

72)

朴 慶 植**

❙국문초록❙

전라남도 화순군 용강면 대초리와 용강리 일원에 건립되어 있는 운주사는 예로부터

千佛千塔

의 사찰로 알 려져 왔다

.

이는 사역내에

101

구의 불상과

30

여기 이상의 석탑이 현존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

󰡔新增東國輿 地勝覽󰡕을 비롯한 다양한 문헌에도 기록되어 왔다

.

이같은 현상은 국내의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기에 일제 강점기 이래 현재에 이르기 까지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

특히

1984

년부터

1989

년에 걸쳐 진행된

4

차례 의 발굴조사는 운주사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다

.

본고에서는 운주사의 석탑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특수성에 대해 배치와 성격

,

양식

,

평면구도

,

장엄조식으로 구분해 고찰했다

.

이 결과 운주사의 석탑은 동아시아의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佛塔群과 일련의 연관 성은 있지만

,

사리를 봉안한 불탑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양상임이 파악되었다

.

뿐만 아니라 양식적인 면 에서도 기왕에 주장되었던 중국 불탑과의 연관성 보다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이룩된 다양한 변화상이 이곳에서도 확인됨을 알 수 있었다

.

아울러 평면구도 역시 평면 방형의 확일성에서 벗어나 방형과 원형

,

십각과 원형의 조합 등 다양한 변화상이 파악되는 바

,

이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다양한 석조물에서 시도된 변화 상이 반영된 결과로 파악했다

.

기왕의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면면은 석탑의 표면에 가해진 장엄조식이 다

.

,

중첩된 보조우주와

X

자문과 마름모 문양은 가장 특이한 현상으로 주목되어 왔다

.

이에 대해 필자는 중 첩된 보조우주는 주로

7

층 석탑에 시문된 점에 주목해 구조적인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공간성을 부여한 조식 으로 파악았다

.

이와 더불어 그간 힌두교 또는 몽골의 영향으로 보았던

X

자문과 마름모 문양 역시 신석기 시대 이래 토기와 기와 등에서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전통적인 문양사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

운주사의 석탑에서 파악되는 다양한 면면은 기왕에 건립되던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격성이 가 장 특이한 점으로 파악된다

.

필자는 이에 대해 호남지역의 불교문화에서 파악되는 다양한 특수성 즉

,

새로운 양식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팔각원당형 승탑의 완성과 발전

,

일반형 석등에서 벗어난 고복형석 등의 건립 등 이 지역 장인들이 지닌 예술적인 감각과 소양이 그대로 묻어난 결과로 보았다

.

결국 호남지역에서 파악되 는 새로운 문화동향과 예술적 능력은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불교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만의 천 불천탑을 탄생시킨 것으로 파악했다

.

[

주제어

]

특수성

,

천불천탑

(

千佛千塔

),

배치

,

양식

,

평면구도

,

장엄조식

,

보조우주

, X

자문

,

마름모 문양

* 이 논문은 2014년 1월 7일에 개최된 화순 운주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 임을 밝힌다.

** 단국대학교 교수 / danhis@hanmail.net

(2)

❙목 차❙

.

머리말

.

특수성

.

맺음말 – 전남지역 문화의 특수성

Ⅰ. 머리말

전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 일원에 건립되어 있는 운주사는 千佛千塔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

가장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석불은 모두

101

개체로 이중

,

형태가 완전한 불상은

62

구가 현존하는 것으로 파 악된 바 있다

.

1) 더불어 석탑은 발굴조사 등으로 인해 파악된 탑재까지 합치면

30

여기 이상이 존재했을 것으 로 추정되지만

,

이중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21

기로 파악되고 있다

.

2) 이처럼 많은 수의 석탑과 석 불의 존재는 한국의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을 지닌 곳임은 분명하다

.

이로 인해 󰡔新增東國 輿地勝覽󰡕을 비롯한 다양한 문헌에서

千佛千塔의 사찰

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

3) 󰡔綾州牧誌󰡕와

󰡔綾州邑誌󰡕를 비롯해 근세의 문헌자료에 이르기 까지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전승되고 있다

.

4) 운주사의 불탑과 불상에 대한 연구는 일제 강점기에 주목된 이래5) 기초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

6) 이후 운주사의 실체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1984

년부터

1989

년에 걸쳐

4

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 다

.

7) 이후 운주사에 연구는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종합적인 조사가 진행되 어 다양한 보고서와 단행본이 출간된 되었고

,

8) 석탑과 석불을 비롯해 천문학은 물론 보존과학적인 연구에

1)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成󰡕, 2009, 75쪽. 2)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앞의 책, 123쪽.

3)雲住寺 在千佛山 寺之左右山背 石佛石塔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向背而坐(󰡔東國輿地勝覽󰡕 卷四十, 綾城縣 佛宇條). 雲住寺 在 千佛山西 寺舊廢 其左右崖壑 石佛石塔 大小甚衆 謂之千佛千塔 又有一石室 其中二石佛 隔壁相背坐 諺傳 新羅時所造 或謂高麗 僧惠明 有徒衆數千 各令造成云(󰡔東國輿地志󰡕, 綾城縣 古蹟條). 雲住寺 在千佛山 今廢.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 室 二石佛相背而坐(󰡔梵宇攷󰡕 全羅道 綾州條). 雲住 在州縣南二十五里千佛山 在石山脊 石佛石塔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相背 而坐(󰡔與地圖書󰡕 下 全羅道 綾州 寺刹 및 古跡條.) 千佛山 南三十里. 開天寺 雲住寺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相背而坐(󰡔大東地志󰡕 卷十四 全羅道 綾州條.)

4) 운주사와 관련된 문헌자료는 주 1의 책, 225~325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5)野村孝文, 「全羅南道 多塔峰の遺跡」, 󰡔朝鮮と建築󰡕 19: 8, 1940, 朝鮮建築會. 關野貞, 󰡔朝鮮の建築と藝術󰡕 pp.562~564, 1941, 巖波書店. 杉山信三, 󰡔朝鮮の石塔󰡕, 章國社, 1944.

6)成春慶, 「雲住寺의 千佛千塔」, 󰡔月刊全海󰡕, 1980; 전남대학교 박물관, 「佛跡調査報告」, 󰡔雲住寺󰡕, 1984, 5~94쪽; 金赫正,

󰡔和順 千佛洞의 石佛과 石塔󰡕, 全南 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84; 朴慶植, 「和順 雲住寺의 石塔에 관한 考察」,

󰡔박물관기요󰡕 5, 단국대 중앙박물관, 1989.

7)崔夢龍·李榮文·朴春圭·趙現鍾, 「發掘調査報告」, 󰡔雲住寺󰡕, 全南大學校 博物館, 1984; 李榮文·朴慶植·黃鎬均, 󰡔雲住寺

Ⅱ󰡕, 全南大學校 博物館·和順郡, 1988; 朴慶植·黃鎬均, 󰡔雲住寺 Ⅲ󰡕, 全南大學校 博物館·和順郡, 1990; 崔仁善, 󰡔雲住寺

Ⅳ󰡕, 全南大學校 博物館·和順郡, 1994.

8)운주와 연관된 다양한 연구 중 가장 주목돠는 결과물은 全南大學校 博物館·和順郡, 󰡔雲住寺綜合學術調査󰡕, 1991; ㈜삼진건 축사사무소·雲住寺·和順郡, 󰡔雲住寺 石塔·石佛 精密實測調査報告書󰡕, 2007;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 成󰡕, 2009; 이태호·천득염·황호균, 󰡔운주사󰡕, 대원사, 1994가 있다.

(3)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진행된 바 있다

.

9) 더불어 본고의 주제인 석탑에 대해서는 천득염 선생에 의해 대부분 정리되었다

.

10) 이처럼 일제강점기 이래 운주사의 불탑과 불상에 관한 연구는 지속적이면서도 다각적인 측면 에서 究明되어왔지만

,

이곳 석탑에 구현된 다양한 특수성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진행된 바 없었다

.

운주사 에 현존하는

21

기의 석탑은 한국석탑의 전형적인 양식 즉

,

탑신부로 부터 상륜부를 구비하는 보편적인 양식 을 지니고 있지만

,

11) 대부분의 석탑에서 기단부는 물론 탑신부에 부조된 문양으로부터 배치 양상에 이르기 까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

필자는 이같은 관점에서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 으로 운주사 석탑에 구현된 다양한 특수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

Ⅱ. 특수성

특수성이라는 용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물의 특별히 다른 성질 즉 특이성

을 뜻한다

.

이를 운주사의 석 탑에 대입해 보면 기왕에 건립되는 석탑과의 차별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

이 부분에 대해서 도 이미 천득염 선생에 의해 정리된 바 있다

.

12) 따라서 운주사의 석탑이 지닌 특수한 면면에 대해 기왕의 연구에서 거론하지 않았던 면면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

1. 배치와 성격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운주사에는 형태가 완전한 석불

62

구와 석탑

21

기가 현존하고 있다

.

이처럼 많은 수의 석탑과 불상은 수적인 면에서도 이채롭지만

,

보다 근본적인 것은

21

기의 석탑은 천불산의 좌

·

우 봉우리를 중심으로 각각 능선과 계곡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

사진

1).

뿐만 아니라 어느 하나도 특정 조 형물에 종속적이지 않은 독립적인 객체로 조성되었다

.

이같은 속성은 공간적인 면에서 볼 때 전통적인 가람 배치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

한국의 석탑은 金堂과 조화를 이루며 반드시 그 앞에 건립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

이는 삼국시대 이래 전통적인 가람배치의 한 방식으로 정착되어 왔다

.

그런

9) 이같은 연구 성과물에 대해서는 주 1의 책 연구자료편(531~543쪽)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10) 千得琰, 「雲住寺石塔의 造形的 特性에 대한 考察」, 󰡔雲住寺綜合學術調査󰡕, 全南大學校 博物館·和順郡, 1991; 천득염·이 상준·정주성,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Ⅰ」, 󰡔大韓建築學會論文集󰡕, 7: 6, 1991, 70~75쪽; 천득염· 이상준·정주성,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Ⅱ」, 󰡔大韓建築學會論文集󰡕, 8: 1, 1992, 69~75쪽; 천득염,

󰡔백제계석탑 연구󰡕, 전남대출판부, 2000;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41~185쪽.

11) 운주사 석탑에서 확인되는 양식적인 보편성 즉, 백제계 석탑의 양식의 등장을 비롯해 기단의 구성에 있어 일석과 여러장의 판석으로 조립한 것 등 기왕의 연구에서 논증된 부분은 논외로 했음을 밝힌다. 주 6과 10에 소개한 논문 등이 대표적인 연 구성과이다.

12) 천득염,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72~181쪽.

(4)

데 운주사의 석탑에서는 천불산의 능선과 계곡에 탑이 들어설 만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건립되는 양상을 보이 고 있다

.

더욱이 산비탈의 경사면에 이르기 까지 건립된 탓에 기왕의 가람배치의 방식을 완전히 깨뜨린 파격 성을 보이고 있다

.

이같은 면면은 비록 불탑과 불상의 일정한 군집을 이루며 독립된 예배공간을 이루고 있다 는 견해13)를 적극 수용한다 하더라도 석탑과 조화를 이룰만한 금당을 건립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지 못하 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천득염 선생의 견해처럼

탑의 앞에 금당이 없이 빈 공간 그 대로

,

예를 들면 그 자체가 금당공간이 되는 것

14)이라는 견해는 바로 이 같은 파격성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

이같은 多 塔의 배치 방식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

이 역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

<사진 1> 운주사 전경 <사진 2> 보드가야 사원 <사진 3> 나란다 유적

불교를 신봉하는 아시아 여러나라의 유적중에서 운주사에서처럼 많은 불탑이 밀집해 있는 곳은 인도의 보 드가야 사원

(

사진

2)

과 나란다 유적

(

사진

3),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

중국의 소림사 탑림

(

사진

4),

캄보디 아의 앙코르와트와 유적

(

사진

5~9),

미얀마의 바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

보드가야 유적은 중앙에 건립된 불탑을 중심으로 주변에 配塔

(

奉獻塔

)

이 들어선 형태로

,

메인탑의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 형 태를 보이고 있다

.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드르 사원은

10

층의 구조물로 정상에는 공간이 구성된 불탑을 건립 하고 있다

.

뿐만 아니라 각 층의 테라스에는 많은 수의 탑이 건립되어 있어 이 역시 배탑 또는 봉헌탑으로 생각된다

.

중국의 소림사 역시 경내의 한적한 곳에 수많은 불탑이 빽빽이 건립되어 있는데

,

이들은 불탑이 아닌 승탑으로 건립되어 있다

.

앙코르와트와 바간 유적 역시 다양한 불탑이 건립되어 있지만

,

대부분 중앙의 불탑에는 내부에 공간을 마련하고 神像을 봉안하고 있다

.

따라서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는 거대한 불 교유적의 군락은 탑과 불상이 분리된 객체로 건립된 유적이 아니라 불탑이라는 거대한 구조체에 불상을 포함

13)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成󰡕, 2009, 58~60쪽.

14) 천득염·이상준·정주성,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Ⅰ」, 󰡔大韓建築學會論文集󰡕, 7: 6, 1991, 152쪽; 천 득염, 앞 논문, 176쪽.

(5)

한 여러 신상을 봉안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

뿐만 아니라 이들 유적에서는 순수불교적이라기 보다는 불교와 힌두교가 결합된 형태로 건립되었다는 점 역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15)게다가 건축적인 면에서도 인도 남 부지역에서 확인되는 다각의 평면을 지닌 구조체와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

각국의 독특한 건축구조라기보 다는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남방건축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에 반해 운주사의 석탑에서는 한국 전통 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객체로서 건립되었기에 신앙적인 측면 에서의 역할이 명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더욱이 부분적이지만

,

사리공이 확인되는 점에서 볼 때16)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

뿐만 아니라 운주사 석탑의 성격은 소림사 탑림과 비교해 볼 때 더욱 확연하다

.

물론 수 적인 면에서 운주사의 석탑을 소림사의 탑림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

그렇지만

,

운주사의 것 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의 성격이라면

,

소림사의 그것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라는 점이다

.

이 를 보면 운주사의 석탑과 소림사의 탑림은 성격에서 완전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

뿐만 아니라 조형물의 건 립에 있어 재료상으로는 석재와 벽돌이라는 차별성 외에도 운주사의 석탑은

11

세기 초반을 상한으로 건립이 시작되고 있지만

,

17)소림사는 당나라때 건립된 법완선사탑

(791

)

으로부터18)송과 명 그리고 청대를 거치며 장기간에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

사진

10~12).

따라서 운주사와 소림사의 탑림은 비록 탑이라는 큰 틀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탑과 승탑이라는 성격 외에도 재료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운주사에 건립된 석탑과 석불은 바로 인근에서 채석된 석재를 사용해 조성되었다

.

이 같은 점은 운주사의 인근에 위치한 화순지역 고인돌의 부근에서 채석장이 확인되는 것과 같 은 양상이다

.

결국 석탑과 석불의 조성에 사용된 석재의 원산지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주로 벽돌을 사용해 불 탑을 건립한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라 생각된다

.

<사진 4> 소림사 탑림 <사진 5> 앙코르와트

15) 이상의 내용은 천득염 선생의 발표문을 토대로 필자의 견해를 첨가 참고했음을 밝힌다. 천득염,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 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73~174쪽. 이와 더불어 소림사의 탑림 은 승탑만으로 조성되어 다른 유적과는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16) 천득염, 앞 논문, 171쪽.

17) 朴慶植, 「화순운주사의 석탑에 관한 고찰」, 󰡔博物館紀要󰡕 5,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89. 7쪽. 18) 朴慶植, 「隋·唐代의 佛塔硏究(Ⅱ)-亭閣型 塼造塔婆」, 󰡔東洋學󰡕 53,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3.

(6)

<사진 6> 바이욘 유적 <사진 7> 바콩 유적

<사진 8> 프놈바켕 유적 <사진 9> 프레아코 유적

<사진 10> 소림사 법완선사탑 <사진 11> 소림사 보통탑(송대) <사진 12> 소림사 명대탑

(7)

2. 양식

한국의 석탑은 한국 석탑의 기본 형식인 기단부

·

탑신부

·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

.

이같은 구성은 미륵사 지 석탑으로부터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에 이르기 까지 모두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

운주사의 석탑 역시 이같 은 경향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지만

,

여러 석탑에서 기단부가 암반으로 대체되어 건립된 탓에 풍수비보적인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

19)이같은 면은 석탑 건립의 사상적인 면에서 언급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

기단부 가 암반으로 대체된 탓에 대부분의 석탑에서 탑신부가 세장하고

,

고준해 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이에 따 라 다른 지역의 석탑들에 비해 상승감이 부각되고 있는데

,

주로

7

층석탑에서 이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 난다

.

뿐만 아니라 이들 석탑에는 운주사 석탑에서만 보이는 마름모와

X

자문이 조식되고 있어 특수한 일면 도 나타나고 있는데

,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

이와 더불어 운주사에 소재한 석탑의 전체적인 양식을 방형석탑

,

원형석탑

,

모전계열석탑

,

석주형 폐탑으로 구분하고 있다

.

20) 이들 가운데 서 특수한 양상을 지닌 원형석탑과 모전계열 석탑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

운주사의 모전석탑은 옥개석에서 그 특성이 구현되고 있는데

,

현재

2

기가 확인되고 있다

.

이중 가장 완벽 한 양식을 보이는 것은 대웅전 앞에 건립된 석탑이다

(

사진

13). 4

층까지 현존하고 있지만

,

본래는

5

층의 규 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 석탑에서 모전석탑의 양식은 옥개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

매 층 옥개석의 상

·

하단에 각형

3

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

한국 석탑에서 모전석탑은 신라시대에 분황사모전석탑과

(

사 진

14)

의성 탑리오층석탑

(

사진

15)

을 필두로 건립되기 시작하는데

,

이들 석탑은 양식은 물론 석재의 치석등 에서 각각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양 석탑을 모방한 석탑들이 건립되고 있어 각각 분황사계 모전석탑과 탑리계 모전석탑으로 양분되고 있는데

,

운주사의 모전석탑은 탑리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다

.

따라서 의성 탑리 오층석탑에서 시작된 석탑계 모전석탑21)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선산 죽장사 지 오층석탑

,

선산 낙산동삼층석탑

,

경주 남산용장계삼층석탑

,

경주 오야리삼층석탑

,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

,

경주 서악동삼층석탑을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 의성 빙산사지오층석탑

,

안동 하리동삼층석탑 등 주로 경주 와 의성의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

22) 이같은 경향을 볼 때 운주사에 건립된 모전석탑은 탑리 오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 전라남도에까지 파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

아울러 이 같 은 유형의 옥개석은 지닌 석탑은 康津 月南寺址石塔

(

사진

16)

에서 찾을 수 있으나

,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옥 개받침과 혼용되고 있어 이와의 연관성을 찾기 보다는 오히려 신라석탑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 각된다

.

23) 이와 더불어 원형탑

(

사진

17)

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와의 연관성을 언급한 바 있다

.

24) 그렇지 만

,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중국에서 원형탑은 당나라때 부터 조성되기 시작하고 있다

.

,

중국 山西省 長治

19) 운주사 석탑과 풍수지리설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20) 천득염·이상준·정주성,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Ⅱ」, 󰡔大韓建築學會論文集󰡕, 8: 1, 1992. 70~71쪽. 21) 문화재관리국, 󰡔芬皇寺石塔 實測調査報告書󰡕, 1992, 16쪽 <표 3-2> 「전탑 및 모전탑의 분포위치」; 박경식, 「新羅 始原期

石塔에 대한 考察」, 󰡔文化史學󰡕 19, 韓國文化史學會, 2003. 92쪽. 22) 박경식, 앞 논문, 92쪽.

23) 이같은 견해는 천득염 선생도 밝힌 바 있다. 천득염 외, 주 13의 논문, 71쪽.

24) 천득염,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64쪽.

(8)

<사진 13> 모전석탑 <사진 14> 분황사 모전석탑 <사진 15> 탑리오층석탑

<사진 16> 월남사지 석탑 <사진 17> 원형다층석탑 <사진 18> 양두산 석굴 전경

市에 소재한 洋頭山 石窟에서

4

기의 원형석탑이 확인된다

(

사진

18~23).

뿐만 아니라 河南省 運城市에 있는 泛舟禪師塔

(822

,

사진

24)

에서 선례를 확인할 수 있다

.

25) 그렇지만

,

양두산 석굴의 원형석탑은 내부가 있 는 소위 空筒式 석탑26)이고

,

후자는 벽돌로 조성된 전탑이다

.

이에 반해 운주사의 원형탑은 탑신은 십각형이 지만

,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圓形으로 조성되었고

,

통돌

(

一石

)

로 제작되었기에 중국 탑과의 연관성을 찾기에 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결국 운주사의 원형석탑은 중국탑과의 영향하에서 건립된 것이 아니라 기 왕에 확립된 석탑에서 기원을 찾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

한국 석탑에서 원형이 부재가 등장한 예는 석굴암 삼층석탑에서 찾을 수 있다

(

사진

25).

이 석탑은 기단부에서 기왕에 건립된 석탑과는 완전히 다른 양

25) 張馭寰, 󰡔中國佛塔史󰡕, 科學出版社, 2006, 48~54쪽. 26) 張馭寰, 󰡔中國塔󰡕, 山西人民出版社, 2000, 159쪽.

(9)

식을 보이고 있는데

, 2

층으로 구성된 기단부는 팔각형이지만

,

지대석과 상

·

하층 기단의 갑석은 圓形으로 제 작해 새로운 기단 양식을 창출하고 있다

.

27)이같은 양상을 볼 때 운주사 석탑에서 확인되는 모전석탑과 원형 의 평면을 지닌 석탑은 양식적 기원은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 찾을 수 있어 궁극적으로는 한국 석 탑의 발전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파악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와 더불어 운주사 석탑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성은 양식적 파격성이다

.

<사진 19> 양두산 석굴 원형석탑1 <사진 20> 양두산 석굴 원형석탑2 <사진 21> 양두산 석굴 원형석탑3

<사진 22> 양두산 석굴 원형석탑4 <사진 23> 양두산 석굴 원형석탑2의 내부 <사진 24> 범주선사탑

27) 박경식, 󰡔한국의 석탑󰡕, 학연문화사, 2008, 351쪽.

(10)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 곧 미술의 특색을

無技巧의 技巧

,

無計劃의 計劃

,

質朴한 맛

,

鈍厚한 맛

,

純眞한 맛

,

非整齊性

,

無關心性

,

구수한 큰 맛

으로 규정한 바 있다

.

28) 운주사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에서는 다양한 층수의 석탑군

,

기단부를 과감히 생략하고 암반을 그대로 활용한 점

,

너비에 비해 높게 조성된 초층탑신

,

다 양한 양식의 옥개석과 특수한 문양

,

배치 상황 등 여러 곳에서 다른 석탑들과는 특이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

그럼에도 한국 석탑이 지닌 양식은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 우현 선생께서 지적하신 한국 문화의 특색이 그대 로 배어있다고 생각된다

.

특히

無計劃의 計劃

,

質朴한 맛

,

非整齊性

,

無關心性

등의 정의와 부합되는 측면 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같은 특성에 대해 천득염 선생 역시

파격적인 조야함

,

무작위적 조영

,

천진난 만한 개성

,

파격미

,

단순미

,

토속적인 해학미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

29) 필자 역시 선생의 견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바

,

보다 근본적인 것은 파격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

이같은 면면은 일명 동냥아치탑에서 보여 준 옥개석에서 더욱 드러난다

(

사진

26).

석탑에서의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구현한 한 것이기에 낙수면 과 합각선 등 지붕의 요소가 조성된다

.

그러나 이 석탑에서는 판석형의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

때문에 기 존 석탑의 옥개석에서 확인되는 옥개받침은 물론 낙수면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요소가 생략되었다

.

이로 인해 기단부와 탑신에서는 기왕의 석탑에서 이룩된 수법이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옥개석만은 파격적으로 조 성한 탓에 운주사의 석탑 중 가장 볼품없는 양식을 지녔지만

,

파격성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석탑이라 하겠다

.

이와 더불어 폐탑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

석주형 석탑

(

사진

27)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조 형으로 판단된다

.

<사진 25> 석굴암삼층석탑 <사진 26> 동냥아치탑 <사진 27> 석주형 석탑

28) 高裕燮, 「朝鮮古代美術의 特色과 그 傳承問題」, 󰡔韓國 美術史 及 美學論考󰡕, 通文館, 1963, 3~13쪽. 29) 천득염, 앞 논문, 183~184쪽.

(11)

3. 평면구도

한국 석탑에서의 평면구도의 문제는 가장 먼저 건립된 미륵사지 석탑에서부터 방형이 중심을 이루고 있 다

.

이같은 전통은 통일시대에 건립된 특수형 석탑에서 다양한 평면 구도가 확인된다

.

30)그런데 운주사의 석 탑에서도 방형의 평명을 유지하면서도 곳곳에서 다른 평면과의 조합이 이루어지고 있어 이채로움을 배가 시 키고 있다

.

,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원형탑과 난형 석탑은

(

일명 바루탑

.

사진

28)

물론 다양한 평면이 복합된 석탑이 건립되고 있어 주목된다

.

일찍이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 석탑의 평면 구도를

9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

31) 선생께서 구분한 형식가 운데

“3

형식은 원형평면이 重疊된 것이니 이 중에는 圓板이 중첩된 것과 球形이 중첩된 것이 있으니 그 예는 다 능주천불탑에 있다

32)라고 지적하고 있다

.

다분히 원형탑과 난탑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선 생께서는 원형의 중첩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

이들 석탑은 십각과 원형

,

방형과 원형의 평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

기단부와 탑신부의 평면이 서로 다른 구조를 이루고 있다

.

이와 더불어 제시된

7

번째 도면은 반형 과 원형 그리고 방형이 중복된 예를 제시하고 있는데

,

이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76

호로 지정된

7

층석탑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사진

29~31).

이 석탑은 이 석탑은 일석으로 조성된 방형의 기단을 구비했는데

,

바로 이 상면에 원형의

1

단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

따라서 이 석탑의 평면 구성을 보면 방형의 기단부

,

원형의 탑신 받침 그리고 방형의 탑신이 중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이와 더불어 마애불 앞에 건 립되어 있는 석탑은 재조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33)

(

사진

32),

기단부는 방형

,

탑신부는 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

이처럼 운주사의 석탑은 평면 방형의 구도가 중심을 이르고 있지만

,

이 가운데서도 원형과 방 형의 조화를 시도한 몇 기의 석탑에서 특수성의 일면을 찾을 수 있다

.

그러나 우현 고유섭 선생도 지적하셨 듯이 한국 석탑의 발달사에서 다양한 평면이 혼용됨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부터 비롯된 양식이다

.

,

불국사 다보탑에서 보듯이 十字形과 방형의 구도

(

사진

33)

그리고 팔각의 조화

,

석굴암 삼층석탑에서 보듯이 원형과 팔각 그리고 방형의 조화

,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

사진

34)

에서 구현된 팔각과 방형의 구성 등 석탑 에서는 이미

8

세기와

9

세기를 아우르며 나타나는 양식임을 알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진전사지 도의선사승탑

(

사진

35)

에서는 방형과 팔각의 평면구성을 볼 수 있어 다양한 유물에서 전개되는 양상임도 확인된다

.

뿐만 아니라 석등에 있어서도 평면 팔각형이 중심을 이루던 구도는

9

세기에 이르러 고복형 석등이 건립되면서 팔 각과 원형의 평면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

이 같은 추세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다양한 조형물이 건립된 다

.

,

관촉사 석등과 개성 현화사지 석등에서 보듯이 방형과 원형 그리고 방형의 구도

,

무량사 석등에서는 방형과 팔각

,

자혜사 석등에서는 육각형

,

정양사 석등에서는 원형과 육각

,

중원 미륵리사지석등에서는 팔각 과 사각형이 하나의 조형물에서 조화를 이루는 양상이 확인된다

.

34)뿐만 아니라 승탑에 있어서도 정토사 흥

30) 朴慶植, 「新羅 九世紀 石塔의 樣式에 關한 硏究」, 󰡔考古美術󰡕 173, 韓國美術史學會, 1987.

31) 高裕燮, 「朝鮮塔婆槪說-朝鮮 美術史 草稿의 第二信」, 󰡔韓國 美術史 及 美學論考󰡕, 通文館, 1963, 119쪽. 32) 高裕燮, 앞 책 120쪽.

33)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成󰡕, 2009, 136쪽. 34) 박경식, 󰡔한국의 석등󰡕, 학연문화사, 2013.

(12)

<사진 28> 난형석탑 <사진 29> 7층석탑 <사진 30> 7층석탑 기단부

<사진 31> 7층석탑 원형받침 <사진 32> 원형석탑 <사진 33> 불국사 다보탑

<사진 34> 도피안사 삼층석탑 <사진 35> 진전사지 도의선사승탑 <사진 36> 정토사 흥법국사실상탑

(복제품)

(13)

석탑명 문양 유형 조식위치 사진

9

층석탑

(

보물제

796

)

보조우주 탑신부

<

사진

37>

사선문 옥개석 하면

<

사진

38>

화문이 시문된 이중마름모 탑신석에 양각

<

사진

39>

7

층석탑

(

도유형문화재 제

276

)

보조우주

2

층탑신

<

사진

40>

법국사실상탑

(

사진

36)

에서 보듯이 팔각과 원형의 평면이 구성된 조형물도 등장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이 다양 한 석탑

,

석등

,

승탑 등 다양한 석조물에서 확인되는 복합적인 평면구도의 운주사의 석탑에서만 확인되는 특 수한 면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이래 건립되는 석조물에서 확인되는 양상이 계승된 결과로 생각된다

.

4. 장엄조식

석탑에는 봉안된 사리를 수호하고 공양하기 위한 다양한 장엄조식이 기단 및 탑신에 부조되는 것이 보편 적인 현상이다

.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근본적인 뜻은 탑내에 봉안된 舍利의 수호 내지는 供養에 있다35)는 관 점에서 볼 때 신라석탑 浮彫像은 불탑 내부에 봉안된 불사리에 대한 外護的 기능에

1

위적 목적을 지니고서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

36) 일반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 확인되는 조식은 비천

,

팔부신중

,

사천왕

,

문비등 주로 불교의 수호신이거나 공간성을 구현하는 조식에 국한되고 있다

.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나 름대로 위계질서를 유지하며 석탑의 각 부에 조식되고 있다

.

그런데 운주사의 석탑에서는 이 같은 면이 모두 무시되고

,

그야말로 그 어느 불교 조형물에서도 볼 수 없는 마름모와

X

자문이 조식되어 기왕에 구축된 불교 문양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고 있다

.

게다가 보조우주와 마름모 등의 문양은 각각 별개 의 석탑에 조식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석탑에 동시에 조성되고 있다는 특성도 파악된다

.

이 같은 면면은 통 일신라시대 이래 석탑의 표면에 다양한 장엄이 조식되던 전통이 계승된 것이지만

,

장엄조식의 성격이라는 측 면에서 운주사의 석탑에서 파악되는 파격성이 돋보이는 측면이라 하겠다

.

이 같은 면면은

운주사 불상에 구 현된 추상성

37)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운주사의 불사를 담당했던 석공들이 지녔던 그들만의 새로운 예술적 감각과 의식이 발현된 결과라 생각된다

.

먼저 석탑에 부조된 장엄과 위치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로 집약된다

.

석탑과 문양의 유형과 조식 위치

35) 秦弘燮, 「塔婆󰡕, 󰡔國寶󰡕 6, 藝耕産業社, 1983, 194쪽.

36) 張忠植, 「統一新羅 石塔浮彫像의 硏究」, 󰡔考古美術󰡕 154·155合輯, 韓國美術史學會, 115쪽. 37) 주수완, 「운주사 불상의 미술사적 의의」,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4)

석탑명 문양 유형 조식위치 사진

7

층석탑

(

도유형문화재 제

277

)

보조우주 기단부 측면

<

사진

41>

X

자문

1

층탑신은 양각

탑신부는 음각

<

사진

42·43>

마름모

2

층탑신

<

사진

43>

과 같음

7

층석탑

(

도유형문화재 제

278

)

보조우주

1·2·3

층 탑신부

<

사진

44>

삼층석탑 마름모 탑신석에 음각

<

사진

45>

7

층석탑

(

도유형문화재 제

279

)

보조우주 기단부

<

사진

46>

X

자문 탑신부에 양각

6

층석탑

(

도문화재자료 제

257

)

보조우주 기단부

<

사진

47>

밀집수직선문 탑신부

<사진 37> 9층석탑 보조우주 <사진 38> 9층석탑 옥개석 받침부 조식

<사진 39> 9층석탑 중첩 마름모 <사진 40> 7층석탑 2층탑신 보조우주

(15)

<사진 41> 7층석탑 중첩 우주 <사진 42> 7층석탑 X자 문양 <사진 43> 7층석탑 탑신부 문양

<사진 44> 7층석탑 탑신부 보조우주 <사진 45> 삼층석탑 탑신부 마름모

<사진 46> 7층석탑 보조우주 및 마름모 <사진 47> 6층석탑 탑신부 보조우주 및 밀집선문

(16)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석탑에서는 기단과 탑신의 가장자리에 부조되는 우주와 이 들 사이에 배치되는 탱주가 배치되는 것이 통식이다

.

그런데 운주사의 석탑에서는 기단과 탑신에서 양 우주 외에 다시 보조 우주가 조출되고 있다

,

이 같은 양상은 대체로

7

층 이상의 규모를 지닌 대형석탑의 기단부와 탑신부에서 확인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

물론 우주는 아니지만

,

탑리 오층석탑의 탑신부에서 상층에 이르 기 까지 양 우주 사이에 탱주를 모각한 예를 볼 수 있다

.

그러나 운주사 석탑의 그것은 탱주가 아니라 우주 로 모각되어 있다

.

뿐만 아니라 조형적으로 볼 때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점점 돌출되는 현상을 보이 고 있어 주목된다

.

따라서 이를 안쪽으로부터 보면 바깥을 향해 벌어지는 현상을

,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을 향해 좁아지는 착시 현상을 느끼기에 충분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

이 같은 조형은 공간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

부언하면

,

운주사의

7

층석탑들은 규모에 비해 기단부의 너비가 좁고 높게 조성되어 언뜻 보기에 왜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

때문에 탑을 바라보는 信者의 입장에서 볼 때 탑에서 느껴지는 공간성과 중후함을 상실하기에 충분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

따라서 當代의 석공들은 이 같은 사각적인 문제를 보완하 기 위한 조치로 양 우주와 보조 우주를 입체감 있게 조성함으로써 석탑에 공간성의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기단과 탑신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38) 이 같은 면면은 탑신에 구현된 마름모꼴에서 도 같은 양상으로 판단된다

.

기왕의 연구에 있어 운주사 석탑에 등장하는 마름모는 인도와 힌두교 사원의 외 벽에 부조된 다이아몬드 모습에 연관성을 두고 있다

.

39) 이처럼 마름모꼴의 원형을 힌두교 사원의 부조에서 찾는다면

,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에서 힌두교의 요인이 검출되어져야 이에 대한 해석의 당위성이 적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힌두적인 요소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이에 반해 마름모꼴 무늬는 원시 사 냥꾼들에게 삶의 원천이나 풍속

,

안녕을 상징하는 표현 그리고 친족관계에 의해 부각되는 성스러운 여성 표 현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개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견해는40)설득력을 더해 준다

.

왜냐하면 이 문양은 우리나 라에서도 빗살무늬 토기에서 찾아볼 수 있고

,

41) 삼국시대의 토기는 물론 고려시대의 기와에 이르기까지 다 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

42)따라서 이 문양의 기원을 외래적 요인에서 찾기 보다는 전통적인 문 양사 가운데서 확인되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뿐만 아니라 이 문양의 의미에 대해서는

운주사의 마름모 꼴 문양은 삶의 원천인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

또 다른 의미로서 땅의 상징은 풍요를 가 져다주고 가난으로부터 평안과 안녕을 가져다주기를 염원하는 중생들의 소박한 기도의 표상으로도 볼 수 있 다

43)는 견해가 있지만

,

보다 근본적인 것은 기단과 탑신에 내재된 공간성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

더욱이 마

38) 이같은 현상은 양 우주 안쪽에 다시 2주의 보조우주를 조출함으로써 전체 5간 규모의 건물을 연상시키는 구조를 지니고 있 는 것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마름모와 X자 문양은 모두 중심으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공간성의 확대를 의미학도 있다. 결국 다른 석탑들에 비해 상승감이 강조된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들에 이같은 도형을 조식함으로써 양식이 지닌 문제 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도가 내재된 것으로 생각된다.

39)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成󰡕, 2009, 52쪽.

40) 선미라, 「문화기호학으로 풀어보는 운주사의 문양들」, 󰡔담론󰡕 201, 한국사회역사학회, 2006, 113쪽.

41) 강우방, 「우리 미술의 영원한 원형, 빗살무늬토기」,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월간미술, 2001, 44~46쪽. 42) 林永周, 󰡔韓國紋樣史󰡕, 미진사, 1983 참조.

43) 선미라, 앞 논문, 114쪽. 이와 더불어 X를 별개의 문양으로 인식해 “이 지역과 민중을 ‘수호’하자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7층 석탑에서 자주 보이는 볼록한 엑스(X)자 문양, 볼록한 엑스 엑스(XX)자 문양, 엑스 엑스(××)자 문양 등 은 ‘이중성’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중성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천불 천 탑을 건설하여, 이런

(17)

름모꼴을 층단을 이루며 중복 부조한 것은 우주와 보조 우주의 표현과 같은 수법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

이와 더불어

X

자 문양은 마름모 문양의 연속선상으로 보고 있지만44)

몽골전통 가옥인 천막집 게르

(Ger)

의 뼈대 에서 차용된 문양

이라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

.

45)이에 대해 전퉁적인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게르의 뼈대가 유독 운주사의 석탑에서만 확인되는 데에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

이와 더불어 운주사의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통해 원나라 불교의 영향을 논증하고 있지만

,

46) 이는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을 외래적인 영향을 본 결과에서 비롯된 인식으로 생각된다

.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 중 몽고군에 의해 건립된 것은 한 기도 없고

,

원나라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 등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

.

뿐만 아니라

불상의 조성에 있어서도 라마불상 양식의 수용은 고려시대 불상 양식의 태두리 안에서 부분적 으로 나타날 뿐 기본적인 조형에 변형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견해47)는 운주사의 불탑과 불상에 대한 외래설 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대목으로 생각된다

.

국내의 어느 유적에서도 완전한 형식의 원나라 양 식의 석탑이나 불상이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가장 남쪽 지역에 그들의 양식을 지닌 불탑과 불상 을 조성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48) 오히려 백제를 침공했던 소정방이 그의 기공 문을 정림사지오층석탑 초층탑신에 새겼음을 상기할 때 더욱 그러하다

.

더욱이 몽고군에 의한 건탑과 불상의 조성이 이루어 졌다면 비단 문양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에서 드러나야 하기때문이다

.

이와 더 불어 운주사에서처럼 대규모의 유적이 조성되었다면

,

다른 지역에서도 건립되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 이다

.

이같은 정황을 모두 고려해 볼 때 운주사 석탑에 구현된 문양을 몽고나 원나라와의 영향에서 찾는 것 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결국 석탑에 구현된 문양은 외래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운 주사의 석탑 불사에 참여했던 집단의 조영의사가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

.

이에 대해 문양적 특성을

흔히 말하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양자의 유사성을 통해 하나가 다른 것을 대체하는 의미로만 간주되는 것이 아니 라

,

이들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

또한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 나는 어떤 맥락이나 기반이 고려됨으로써

,

은유는 새로운 의미의 생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

49)는 견해는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문양의 공간성에 많은 시사를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

결국 우주와 보조우주

,

마름모와

X

자 문양의 상호 연관성은 역동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석탑이 목조건축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측면을 강조 하는 요인으로 이해된다

.

따라서 운주사의 석탑에 구현된 마름모와

X

자형의 문양들은 상승감이 강조된 석탑 에 공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안정감를 부여하고자 했던 당시 석공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

험난한 삶의 역경과 연약한 민중들을 부처님으로부터 보살펴주고 지켜주기를 아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심층구조에서의

‘강한 표현’으로 보인다.”라는 견해를 표방하고 있다. 같은 논문, 112쪽. 44) 주 39와 같음.

45) 소재구,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 동원학술대회, 2001.

46) 황호균, 「운주사와 천불천탑의 역사적 배경론」,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79쪽. 47) 秦弘燮, 「高麗後期 金銅佛像에 나타나는 라마佛像樣式」, 󰡔考古美術󰡕 166·167집, 韓國美術史學會, 1985, 17쪽. 48) 이에 대해 “조형적 유사성을 간과하고 굳이 멀리 몽고나 돌궐의 석인상과 직접 연관지우는 것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조형성이 고대로부터 이어진 북방적 문화기류의 흔적일 수는 있지만, 고려시대 불상들에 나타나 는 이러한 양상은 몽고의 영향이 없이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견해는 매우 주목된다. 주수완, 「운주 사 불상의 미술사적 의의」,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99쪽.

49) 송효섭, 「운주사에 대한 기호학적 담론」, 󰡔한국문학이론비평󰡕 1, 한국문화와 이론비평학회, 1997, 213쪽.

(18)

Ⅲ. 맺음말 - 전남지역 문화의 특수성

운주사에 건립된 석탑은 그간의 다양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지 못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건탑이라는 점에서는 이 방면 연구자들의 대부분이 공감하는 문제이지만

,

조성주체와 배경은 물론 건탑의 시기에 있어서도 서로 이견이 상존하고 있다

.

50) 이럼에도 불구하고 발굴조사의 성과를 바탕으로 볼 때 대부분의 석탑과 석불은 운주사가 창건되는

11

세기 초반으로부터 조영되기 시작해 대부분의 건물이 건립되는

3

차 중창기 즉

, 12

세기 말에서

13

세기기 초반 사이에는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51) 이와 더불어 운주사에 이룩된 모든 불사의 창건의 주체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찰의 건립에 지방호족 내지는 순수한 지방민의 참여가 활발했던 경향으로 미루어52) 운주사 역시 이 지방에 뿌리 를 둔 호족세력의 발원에 의한 건립으로 추정된 바 있다

.

53)뿐만 아니라 석탑과 석불에서 드러나는 독창적이 면서도 다른 지역의 조형물과 차별화되는 현상은 이 방면 연구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

54) 필자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호남지역에서 滿開되었던 불교문화의 동향 가운데서 찾아보고자 한다

.

호남지역은 경상도지역에 이어 다음으로 불교조형물의 많이 건립된 지역이다

.

이같은 현상은 통일신라시 대 후기에 이르러 극대화 되고 있다

.

55) 그런데 이 시기 불교문화의 동향 가운데서 보면 타 지역에서 먼저 건립된 조형물은 호남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예술적인 면에서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승화된다는 사실이다

.

이같 은 현상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로는 승탑의 건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

한국의 승탑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

56)이후

844

년에 건립된 염거화상탑에서 팔 각원당형으로 대표되는 신라승탑의 양식을 완성하게 되는데

,

호남지역에 이르러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조륜청 정탑

(

사진

48),

인근에 있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사진

49),

구례 연곡사의 동부도

(

사진

50),

보림사 보조 선사창성탑

(

사진

51)

등에서 보듯이 기왕의 양식에서 진일보한 새로운 수법과 더불어 화려한 양식을 완성하 고 있다

.

57) 이같은 승탑의 발달은 자연스레 탑비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

연곡사동부도비에서는 귀갑 상면에 새의 날개를 두껍게 조각하고 있어 귀부 자체도 단순한 거북의 표현에서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음을 볼 수

50) 이 방면 연구는 앞서 언급했던 주 5, 6, 7, 8, 10의 연구성과에서 모두 언급되어 있다.

51) 전남대학교 박물관·화순군, 󰡔雲住寺 資料集成󰡕, 2009, 173쪽 <표-6> 운주사 건물지 시기별 건물지 변천 현황 참조. 52) 鄭永鎬, 「高麗時代石塔의 特性에 관한 硏究」, 󰡔檀國大論文集󰡕 11, 1977, 92쪽.

53) 운주사의 佛事를 주도한 후원세력은 나주지역을 기반으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호족세력이었으며, 바로 이곳의 석탑에서 백제계석탑의 양식이 검출됨은 全南地方에 고조된 百濟文化意識의 所産으로 추론 된 바 있다. 朴慶植, 「화순운주사의 석탑 에 관한 고찰」, 󰡔博物館紀要󰡕 5,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89.

54) 이에 대해 천득염 선생은 “다양성과 무정제성”, “무계획적이고 거친 무작위의 기법, 민예적이고 토속적인 모습에서 석불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전형적인 탑과는 어긋나 파격적인 조야함을 느끼게 한다. 미학적 전형에 속박되어 있지 않고 불탑건립 자체에만 의미를 둔, 무작위적 조영에 의미를 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천득염,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산 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2013, 183쪽.

55) 박경식,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 학연문화사, 1994.

56) 박경식, 「9세기 신라 지역미술의 연구(1)-설악산의 석조 조형물을 중심으로」, 󰡔사학지󰡕 28, 단국사학회, 1995.

57) 이들 부도에 등장하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는 鄭永鎬, 󰡔新羅石造浮屠硏究󰡕, 檀國大學院博士學位論文, 1974; 박경식, 󰡔통일 신라 석조미술 연구󰡕, 학연문화사, 1994; 엄기표, 󰡔신라와 고려시대의 석조부도󰡕, 학연문화사, 2003에서 상세한 고찰이 진 행된 바 있다.

(19)

있다

(

사진

52).

뿐만 아니라 석탑에서도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서 보듯이 불상의 대좌에서 등장하기 시작 한 사자상이 탑신을 받치는 부재로 변화하고 있다

(

사진

53).

게다가 석등에 있어도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사진

54),

개선사지 석등

(

사진

55)

에서 보듯이 고복형석등이라는 특수한 장르로 발전시키고 있다

.

뿐만 아 니라 중흥산성쌍사지 석등

(

사진

56)

에서 보듯이 기왕의 양식을 완전히 뒤바꾼 쌍사자 계열의 석등도 건립되 고 있는 지역이다

.

이렇듯 호남지역의 불교문화는 기왕에 완성된 양식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양 식에서 진일보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던 지역이었다

.

<사진 48> 태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사진 49> 쌍봉사 철감선사탑 <사진 50> 연곡사 동부도

<사진 51>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사진 52> 연곡사 동부도비 귀부 및 이수 <사진 53>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20)

<사진 54>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사진 55> 개선사지 석등 <사진 56>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문화는 어느 곳에서 전개되던 간에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측면이 공존한다

.

이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현상은 특수성에 있다

.

이에는 그러한 문화를 창출하고 발전을 가능케 했던 문화적인 소양과 능력은 물론 이 를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

이같은 면에서 운주사의 석탑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특성들은 바로 호남지역의 불교문화에서 파악되는 다양한 특수성이 계 승된 것으로

,

이 지역 장인들이 지닌 예술적인 감각과 소양이 그대로 묻어난 결과로 판단된다

.

이러한 측면 에서 볼 때 호남지역의 문화동향과 예술적 능력은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불교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만의 천불천탑을 탄생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

<참고문헌>

1. 문헌

󰡔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志󰡕

󰡔梵宇攷󰡕

󰡔與地圖書󰡕

󰡔大東地志󰡕

2. 저서

高裕燮

,

󰡔韓國 美術史 及 美學論考󰡕

,

通文館

, 1963.

(21)

林永周

,

󰡔韓國紋樣史󰡕

,

미진사

, 1983.

秦弘燮

,

󰡔國寶

6

-塔婆󰡕

,

藝耕産業社

, 1983.

박경식

,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

,

학연문화사

, 1994.

이태호

·

천득염

·

황호균

,

󰡔운주사󰡕

,

대원사

, 1994.

천득염

,

󰡔백제계석탑 연구󰡕

,

전남대출판부

, 2000.

엄기표

,

󰡔신라와 고려시대의 석조부도󰡕

,

학연문화사

, 2003.

박경식

,

󰡔한국의 석탑󰡕

,

학연문화사

, 2008.

_____,

󰡔한국의 석등󰡕

,

학연문화사

, 2013.

關野貞

,

󰡔朝鮮の建築と藝術󰡕

,

巖波書店

, 1941.

杉山信三

,

󰡔朝鮮の石塔󰡕

,

章國社

, 1944.

張馭寰

,

󰡔中國佛塔史󰡕

,

科學出版社

, 2006.

張馭寰

,

󰡔中國塔󰡕

,

山西人民出版社

, 2000.

3. 논문

野村孝文

,

「全羅南道 多塔峰の遺跡」

,

󰡔朝鮮と建築󰡕

19: 8, 1940,

朝鮮建築會

.

鄭永鎬

,

󰡔新羅石造浮屠硏究󰡕

,

檀國大學院博士學位論文

, 1974.

_____,

「高麗時代石塔의 特性에 관한 硏究」

,

󰡔檀國大論文集󰡕

11, 1977.

成春慶

,

「雲住寺의 千佛千塔」

,

󰡔月刊全海󰡕

, 1980.

張忠植

,

「統一新羅 石塔浮彫像의 硏究」

,

󰡔考古美術󰡕

154·55

合輯

,

韓國美術史學會

, 1982.

金赫正

,

󰡔和順 千佛洞의 石佛과 石塔󰡕

,

全南 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 1984.

秦弘燮

,

「高麗後期 金銅佛像에 나타나는 라마佛像樣式」

,

󰡔考古美術󰡕

166·167

,

韓國美術史學會

, 1985.

朴慶植

,

「新羅 九世紀 石塔의 樣式에 關한 硏究」

,

󰡔考古美術󰡕

173,

韓國美術史學會

, 1987.

朴慶植

,

「和順 雲住寺의 石塔에 관한 考察」

,

󰡔博物館紀要󰡕

5,

단국대 중앙박물관

, 1989.

千得琰

,

「雲住寺石塔의 造形的 特性에 대한 考察」

,

󰡔雲住寺綜合學術調査󰡕

,

全南大學校 博物館

·

和順郡

, 1991.

천득염

·

이상준

·

정주성

,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Ⅰ」

,

󰡔大韓建築學會論文集󰡕

, 7: 6, 1991.

천득염

·

이상준

·

정주성

,

「운주사 다탑봉 석탑의 조형특성에 관한 연구 Ⅱ」

,

󰡔大韓建築學會論文集󰡕

, 8: 1, 1992.

박경식

,

9

세기 신라 지역미술의 연구

(1)

-설악산의 석조 조형물을 중심으로」

,

󰡔사학지󰡕

28,

단국사학회

, 1995.

송효섭

,

「운주사에 대한 기호학적 담론」

,

󰡔한국문학이론비평󰡕

1,

한국문화와 이론비평학회

, 1997.

강우방

,

「우리 미술의 영원한 원형

,

빗살무늬토기」

,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

월간미술

, 2001.

(22)

소재구

,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

,

동원학술대회

, 2001.

박경식

,

「新羅 始原期 石塔에 대한 考察」

,

󰡔文化史學󰡕

19,

韓國文化史學會

, 2003.

선미라

,

「문화기호학으로 풀어보는 운주사의 문양들」

,

󰡔담론󰡕

201,

한국사회역사학회

, 2006.

천득염

,

「운주사 불탑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

,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 집󰡕

, 2013.

황호균

,

「운주사와 천불천탑의 역사적 배경론」

,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 2013.

朴慶植

,

「隋

·

唐代의 佛塔硏究

(

)

-亭閣型 塼造塔婆」

,

󰡔東洋學󰡕

53,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2013.

주수완

,

「운주사 불상의 미술사적 의의」

,

󰡔운주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세미나 발표 논문집󰡕

, 2013.

4. 보고서

전남대학교 박물관

,

「佛跡調査報告」

,

󰡔雲住寺󰡕

, 1984.

崔夢龍

·

李榮文

·

朴春圭

·

趙現鍾

,

󰡔雲住寺󰡕

,

全南大學校 博物館

, 1984.

李榮文

·

朴慶植

·

黃鎬均

,

󰡔雲住寺 Ⅱ󰡕

,

全南大學校 博物館

·

和順郡

, 1988.

朴慶植

·

黃鎬均

,

󰡔雲住寺 Ⅲ󰡕

,

全南大學校 博物館

·

和順郡

, 1990.

全南大學校 博物館

·

和順郡

,

󰡔雲住寺綜合學術調査󰡕

, 1991.

문화재관리국

,

󰡔芬皇寺石塔 實測調査報告書󰡕

, 1992.

崔仁善

,

󰡔雲住寺 Ⅳ󰡕

,

全南大學校 博物館

·

和順郡

, 1994.

㈜삼진건축사사무소

·

雲住寺

·

和順郡

,

󰡔雲住寺 石塔

·

石佛 精密實測調査報告書󰡕

, 2007.

전남대학교 박물관

·

화순군

,

󰡔雲住寺 資料集成󰡕

, 2009.

*

이 논문은

2014

7

25

일에 투고되어

,

2014

8

13

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 2014

8

29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

2014

9

3

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23)

❙Abstract❙

On the Study of the Peculiarity of Stone Pagoda of the Unjusa Temple at Hwasun

58)

Park, Kyoungshik*

In this research, many peculiarity found in the stone pagoda of Unjusa Temple were studied through its placement, characteristics, stylization, plane structure, and surface sculpture. As a result, it was discovered that even though the pagoda of Unjusa temple has a series of associableness with other pagodas found in East Asia, has a totally different aspect for it is a pagoda preserving sarira. Also, its stylization is close to a developed form of that of the Three Kingdoms and United Shilla rather than stylization of Chinese pagodas. The plane structure is also far from uniformity of flat-structure and many variations that combine squares and rounds, crosses and rounds are found, and this too looks like a characteristics of stone structures built during the period of United Shilla. The surface sculptures of Unjusa Pagoda had been studied in pre-existing researches. Piled up side pillars, X-shaped and diamond-shaped patterns especially received much attention. I, as the researcher, have concluded that the piled up pillars were created to secure spatiality that solves structural instability since this stylization is found mostly in seven-story pagodas. For the X-shaped and diamond-shaped patterns, even though they were conceived to be Hinduism or Mongolian influence, an attempt to trace its origins from traditional patterns of Korea must be made for these patterns can also be found in earthenwares and tiles since Neolithic age.

The most distinctive characteristic found in Unjusa pagoda is the exceptionality that has not been seen in other pagodas built before it. This aspect must be understood as an extension of many distinctiveness found in buddhist civilization of Honam region that had constructed Four-Lion-Supported Three-Story Stone Stupa of Hwaeomsa Temple, which shows a new stylization, or Gobokhyeong(shape resembling double-headed drum) stone lanterns diverged from standard stone lanterns. As the researcher I believe that the motivation behind this distinctiveness is derived from artistic sense and skills of artisans in the region. To conclude, the new artistic movement and skills dawned in Honam region created the unique buddhist pagoda of Unjusa Temple

Temple of the thousand statues and pagodas

that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 Professor, Dankook University

(24)

buddhist civilizations worldwide.

[Key Words] the peculiarity, the thousand statues and pagodas, placement, stylization, plane structure, surface sculpture, the piled up pillars, X-shaped patterns, diamond-shaped patterns

참조

관련 문서

따라서, 이들 곁말을 考察함에 있어서는 全즙 同즙語에 의한 語 歡와 部分 同흡語에 의한 語敵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한다.. 異本間의 수용 관계는 35 張本과

The construction of Electric motor propulsion system are presumed arrangement of boat and compared The engine fuel of cost with battery charge of cost .The Model

“운영관리”에 관한 하부속성의 평가 항목 중 “항만접근성” 측면에서 다음의 네 개 항만 중에서 어느 항만이 얼마나 유리한지 귀하의 견해를 표명해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은 서구의 문물과 동아시아의 고유한 정 신적 가치가 일본의 ‘ 脫亞入歐’ 로서 서구적 근대화와 강하게 부딪치던

이에 대한 선행연구는 학습자를 주체로 한 수용미학 관련 연구와 고전시가 교수 법에 관한 연구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학습자를 주체로 한 수용미학 이론에

Days to emergence and heading, duration of growth, leaf traits and stem diameter of sweet sorghum as affected by soils. Soil type Days

국제체제는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외교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서는 형성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외교란. 교의 목적 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뺵부모가 사랑하던 것을 사랑하고 부모가 恭敬하던 것을 恭敬 해야 한다. 돌아가신 후 에도 孝子는 부모의 신령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祭祀를 잘 모셔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