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7.26.3.051
조선후기 왕릉 부석처(浮石處)의 선정 과정과 부석처 조계동
A Study on the Selection Process of Quarry and the Quarry Jogyedong in Royal Tombs in the Late Joseon Period
이 상 명*
1)
Lee, Sang-Myeong(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 강사, 공학박사)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comprehend the selection process of quarry and the quarry Jogyedong through the Salleung-uigwes in royal tombs constructions in the late Joseon period. Especially, it is to comprehend about the effect by difference of use of stone between Daebuseokso and Sobuseokso. Following conclusions have been reached through the study. First, the quarry of Daebuseokso had been selected very carefully through the quality check process. Second, the quarry of royal tombs around the capital was located at Mt. Bulam in the east and Mt. Bukhan in the west. This is because the nature of the procurement of stone, which is important for transportation, is that it is necessary to prepare the mountains close to the royal tombs. Third, the locations of quarry of between Daebuseokso and Sobuseokso were differently selected. The quarry of Daebuseokso was located at a distance of three times distant from Sobuseokso. Forth, the epigraph related to quarry is located in Sareung construction in the valley of Jogyedong. This is a very important data to confirm the location of royal tombs construction.
주제어 : 조선왕릉, 산릉공역, 부석처, 부석소, 석재 조달, 산릉도감의궤, 조계동
Keywords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Salleung (Royal tombs) constructions, Quarry, Buseokso (Organization for quarrying), Stone procurement, Salleung-dogamuigwes, Jogyedong
1. 서 론
전통건축은 나무·돌·흙 등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 료와 볏짚 등 농사를 짓고 나온 부산물, 기와·전돌 등 흙을 기반으로 한 재료 등 주변에서 취할 수 있는 재료 를 원천으로 구성된다. 그중 목재와 석재는 건축 재료 중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고, 개별 부재의 규격도 큰 편이다. 그만큼 재료를 조달하기 어려웠고, 운반하기도 수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통건축의 재료에 대한 연구는 제한된 범 위 내에서 이루어져 왔다. 전통건축을 구성하는 재료의 조달에 대한 연구는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를 통해 조선후기 관영건축 공사에서 목재 조달을 중심으로 비 교적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1)
그 결과 목재 조달*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김동욱, 朝鮮後期 建築工事에 있어서의 木材供給 體制
-水原城郭工事처와 조달 방식, 운반 경로와 방법 등에 대한 이해를 높 일 수 있었다.
한편, 석재 조달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관영건축 공사에 서의 개괄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가 있고,
2)
석재 부석처 (浮石處)3)
부터 치련 과정, 설치 과정을 철제 연장과 연 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4)
하지만 목재에 비해 석재는를 中心으로-
, 건축, 28권, 2호, 1984; 김왕직, 조선후기 관영건축공사의 건축경제사적 연구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이권영·서 치상·김순일, 조선후기 경강변 영선목재에 관한 연구 , 건축역사연구, 7권, 1호, 1998; 이권영,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재료와 목공사에 관한 연 구 ,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김균태, 화성건설공사에서 자재의 조달방법 연구 , 한국건축시공학회논문집, 9권, 6호, 2009 2) 김왕직, 위의 논문, 1998, 64~66쪽
3) 산릉도감의궤에서 돌을 떠내는 곳을 부석처 또는 채석처(採石處)로 표기하였는데, 부석처로 표기한 예가 많아 본고에서는 부석처로 기술 하고자 한다.
4) 김왕직, 앞의 논문; 이권영, 2. 의궤를 통해 본 공사 과정: 6. 재료와
시공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306~313쪽
세부적인 연구까지는 진척되지 않고 있으며, 소수의 연 구도 영건도감의궤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립문화재연구 소에서 발간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5)
에서 산 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를 사료로 왕릉 조성 과정을 다 루면서 부석처와 석재 조달에 대해 기술하였지만, 개별적 인 왕릉을 다루는 보고서의 특성상 종합적인 연구로는 이어지지 못하였다.조선후기 왕과 왕후의 능소를 마련하기 위한 산릉공역 에서는 봉분 주변의 능상 석재와 정자각, 재실 등 건축물 에 쓰이는 석재(석물
6)
)을 조달하였고, 이러한 공사 과정 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가 다수 남아 있다.No. 능 호 의 궤 명 (편찬 시기) 1 영 릉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1659) 2 숭 릉 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1674) 3 익 릉 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 (1681) 4 휘 릉 莊烈王后徽陵山陵都監儀軌 (1689) 5 사 릉 定順王后思陵封陵都監儀軌 (1699) 6 명 릉 仁顯王后明陵山陵都監儀軌 (1702) 7 의 릉 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1725) 8 온 릉 端敬王后溫陵封陵都監儀軌 (1739) 9 홍 릉 貞聖王后弘陵山陵都監儀軌 (1757) 10 원 릉 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 (1776) 11 건 릉 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 (1800)
12 건 릉 正祖孝懿王后健陵山陵都監儀軌 (1821) 13 인 릉 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 (1835)
14 경 릉 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1843) 15 수 릉 翼宗綏陵山陵都監儀軌 (1846) 16 수 릉 翼宗綏陵遷奉山陵都監儀軌 (1855) 17 인 릉 純祖仁陵遷奉山陵都監儀軌 (1856) 18 예 릉 哲宗睿陵山陵都監儀軌 (1864) 표 1. 연구 대상 산릉도감의궤
본고는 <표 1>의 산릉도감의궤를 통해 전통건축의 주 요 재료 중 석재에 대해 일반 건축용 석재뿐만 아니라 의례를 위한 석재의 주요 조달처인 부석처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부석처를 결정하는 과정을 의궤 기록 을 통해 검토하고, 의궤에 기록된 부석처의 위치를 조선 후기 지형과 지명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1915년에 측량 된 지형도를 통해 도성 주변의 주요 부석처를 파악해 보 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의례용 석재의 부석처로 선호된
5)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Ⅸ, 2009~2015 6) 의궤에서 재료에 대한 표기는 대체적으로 나무는 목물(木物), 돌은 석물(石物), 철은 철물(鐵物)로 기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의궤 번역 에서는 석물로, 본문에서는 석재로 표기하고자 한다.
조계동에 대해서 구체적인 위치와 암벽에 새겨진 ‘사릉 부석감역필기’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왕과 왕 후의 상장례를 위한 산릉공역에서 최상의 재료를 확보하 기 위해 어떠한 과정으로 부석처를 마련하였고, 의례용과 건축용 석재의 부석처 간에 차이를 두었는지 여부와 부 석처 선정에 중요한 요인 등을 분석하여 조선후기 산릉 공역 과정에 대해 좀 더 실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 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전통건축의 재료 중 석재의 주요 공급처인 부석처에 대해 향후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2. 부석처의 선정 절차
왕과 왕후가 사망하면 당일 또는 다음 날, 장례를 담당 하는 국장도감, 봉분과 정자각 등을 조성하는 산릉도감, 국장을 치르기 전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도감 등 3도감이 조직된다. 산릉도감은 9개 분야별 하위 조직인 소(所)
7)
가 구성되는데, 석재와 관련해서는 대부석소(大浮石所), 소부 석소(小浮石所), 수석소(輸石所)가 운영된다. 대부석소는 능상(陵上)의 봉분과 주변의 석상, 석인, 장명등 등의 석 의(石儀)를 조달하고 치석 및 설치를 담당하며, 소부석소 는 봉분 아래 정자각, 재실 등에 소요되는 각종 건축 석 재를 조달하고, 치석 및 설치한다. 수석소는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석재를 부석처에서 능소로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9개의 소 중 3개의 소가 석재와 관련된 곳으로, 산 릉공역에서 석재 조달의 중요성을 조직 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산릉공역에서는 왕과 왕후 사망 후 1달 내외에 능소 가 정해진다. 이후 석재를 조달해야 하는데, <표 2>와 같이 능소를 옮기는 경우에는 구릉(舊陵)의 석재를 재활 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새로 능소를 마련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부석처를 설치하여 석재를 조달하였다. 건축용재 로 쓰이는 돌은 대부분 화강석이었다. 돌은 중량이 무겁 기 때문에 가능하면 공사장 주변에서 채석하려 하였다.
8)
먼저 대부석소의 부석처를 결정하는 과정을 살펴보자.현종숭릉산릉역(1674)에서 노원(蘆原)을 부석처로 결정
7) 산릉도감에서는 석재와 관련된 대부석소, 소부석소, 수석소 외에 봉분을 조성하는 삼물소(三物所), 건축공사를 담당하는 조성소(造成 所), 건축용 철물과 연장을 제작하는 노야소(盧冶所), 지세를 북돋우고 사초를 심는 보토소(補土所)를 조직한다. 이외에 각종 의례 물품 및 타소의 목제 연장을 제작하는 별공작(別工作), 도배 및 바닥재를 마련 하는 분장흥고(分長興庫), 기와 및 전돌을 제작하는 번와소(燔瓦所)가 설치된다.
8) 김왕직, 앞의 논문, 64쪽
하는데,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에는
산릉을 이미 정한 후, 9월 15일 낭청이 하직 인사를 올 리고, 석수 편수 2명을 인솔하여 노원 채석처로 나아가 살펴본 후 그대로 부석소를 설치하였다.9)
라고 하여 낭청이 석수 편수 2명을 인솔하여 부석처로 이 동하여 부석 여건을 판단한 후 부석소를 결정하였다.
인경왕후익릉산릉역(1680)에서는 고양의 대사기막동을 부석처로 결정하였는데,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에 는 부석처의 결정 과정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 어 있다.
산릉을 이미 정한 후, 11월 17일 낭청과 감조관이 석수 편수 2명을 인솔하여 고양으로 나아가 대사기막동 채석 처를 살펴본 후, 석편을 떠서 총호사 및 당상이 석재의 품질을 살펴본 후, 입계 정탈하여 그대로 부석소를 설치 하였다.10)
라고 하여 낭청과 감조관이 석수 편수 2명을 인솔하여 부석처를 살펴본 후, 석재의 품질을 판단하기 위해 석편 을 떠서 산릉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총호사와 당상이 품 질을 먼저 확인하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여 최종적으로 부석처를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영조 원릉산릉역(1776)까지 이어진다. 이후 산릉도감의궤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동일한 절차를 통 해 부석처를 결정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부석처 결 정이 중간 책임자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 감의 최고 책임자에 의한 실질적인 품질 확인 절차 과 정을 거쳐 왕에게 직접 보고되어 결정되는 것이다. 그만 큼 능상에 배설되는 석재의 품질에 대해 각별하게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봉분 조성 시에도 이와 유사한 절차를 거쳤다. 정성왕 후홍릉산릉역(1757)의 경우 봉분 조성을 위해 8자 4치까 지 천광(穿壙)을 하였는데, 지표에서 2자, 5자, 8자 4치 깊이에 이를 때마다, 각각 소량의 흙을 부대에 담아 왕 에게 직접 보고하여 토질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후 천 광을 마무리하였다.
11)
이와 같이 능상 석재의 품질도 봉9)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山陵旣定之後 九月十五日 郞 廳辭朝 率石手邊首二名 出往蘆原採石處 看審後 仍設浮石所.
10)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山陵旣定之後 十一月十 七日 郞廳 監造官 率石手邊首二名 出往高陽地 大沙器幕洞採石處看審 後 石片浮取 看品于摠護使及堂上後 入啓定奪仍設浮石所.
11)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 계사질 , 정축 5월 초2일조; 정축 5월 초3일조
분 조성 시 토질을 여러 차례 확인하는 과정만큼 신중하 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부석소의 석재 품질이 중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여 러 곳의 부석처를 살핀 후 적합한 부석처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장렬왕후휘릉산릉역(1689)과 정순왕후사릉봉릉역 (1699)이 그러한 예이다. 의궤 기록을 보면,
산릉을 이미 정한 후, 9월 21일 감조관 2원이 석수 편수 2명을 인솔하여 양주, 노원, 우이 등지에 나아가 부석처 를 살펴본 즉 모두 쓸 만한 석물이 없기 때문에 조계동 으로 바꾸어 살펴본 후, 석편을 떠서, 총호사 및 당상이 품질을 살펴보고 그대로 부석소로 정하였다.12)
무인 11월 29일 낭청 1원이 석수편수 2명이 인솔하여 양 주 불암 부석처를 살펴본 즉 쓸 수 있는 석물이 없기 때 문에 전(례)에 따라서 조계동에서 부출할 일을 총리사(도 제조) 및 당상이 품한 후 그대로 부석소로 정하였다.13)
라고 하여 장렬왕후휘릉산릉역에서는 양주, 노원, 우이 등 지를 살펴보았으나 마땅치 않아 결국 조계동을 부석소를 선정하였고, 정순왕후사릉봉릉역에서는 불암 부석처에 쓸 만한 석재가 없어 전례에 따라 조계동으로 부석처를 정하 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석소의 부석처 결정 과정과 달리, 소부석소에서 는 이와 같은 절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당시 산릉공역에서는 건축용 석재에 비해 능상에 배설(排設) 하는 석재의 부석처 선정 과정이 복잡했고,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보면 능상에 배설하는 석 재와 일반 건축용 석재 간 품질면에서 차이를 둔 것으로 여겨진다.
3. 부석처 위치와 선정 요인
산릉도감의궤의 대부석소 와 소부석소 에는 부석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표 2>이다. 현재 수도권에 위치한 왕릉은 여러 왕릉이 모여 군을 형성하 고 있는데, 동구릉과 서오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동일 한 지역에 위치한 왕릉군에서는 동일한 곳을 부석처로 삼아 부석역을 진행하였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부터
12)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山陵旣定之後 九月二十 一日 監造官二員率石手邊首二名 出往楊州盧原牛耳等地浮石處看審 則 皆無可用之石 故轉向漕溪洞看審後 石片浮取看品于摠護使及堂上 仍定 浮石所.
13) 정성왕후사릉봉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戊寅十一月二十九日 郞
廳一員 率石手邊首二名 出往楊州佛巖浮石處看審 則無可用之石 故依前
漕溪洞浮出事稟于摠理使及堂上後 仍定浮石所.
No. 능 호 시기 현 왕릉군 현 능소 소재지 의궤에 기록된 부석처 (구릉 석재 재활용) 능소와 부석처 간 직선거리
대부석소 소부석소 대부석소 소부석소
1 영 릉 1659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漕溪 農原 12.08 6.61
2 숭 릉 1674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蘆原 蘆原(舊寧陵) 6.61 6.61
3 익 릉 1680 서 오 릉 고양시 용두동 高陽 大沙器幕洞 小沙器幕洞 7.68 7.68
4 휘 릉 1689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漕溪洞 佛巖山 12.08 4.48
5 사 릉 1699 - 남양주시 진건읍 漕溪洞 佛巖 18.04 8.81
6 명 릉 1702 서 오 릉 고양시 용두동 高陽 大沙器幕洞 小沙器幕洞 7.69 7.69 7 의 릉 1725 - 성북구 석관동 楊州 蘆原 中契 楊州 蘆原 上契 5.66 7.43
8 온 릉 1739 - 양주시 장흥면 重興洞 楊州 三千洞
8.23 8.64
牛耳洞 8.23
9 홍 릉 1757 서 오 릉 고양시 용두동 楊州 重興洞 北漢西門外 重興洞 4.77 4.77 10 원 릉 1776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蘆原 中契 蘆原 中契 5.37 5.37
11 건 릉 1800 융 건 릉 화성시 안녕동 水原 鸎峯 水原府 如岐山 - -
12 건 릉 1821 융 건 릉 화성시 안녕동 鸎峯 水原府 甑岳山 - -
13 인 릉 1835 - 파주시 탄현면 江華府 煤音島 長湍 白鶴山 - -
14 경 릉 1843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蘆原
蘆原 6.61
釣溪 12.08 6.61
15 수 릉 1846 - 중랑구 면목동 牛耳洞 蘆原 12.42 6.61
16 수 릉 1855 동 구 릉 구리시 인창동 槽溪 (舊陵) 12.08 -
17 인 릉 1856 헌 인 릉 강남구 내곡동 (舊陵) (舊陵) - -
18 예 릉 1864 서 삼 릉 고양시 원당동 (舊靖陵, 舊仁陵) 津寬 三千里洞 - 9.33 직선거리 평균 : 9.39 7.06
※ 능소와 부석처 간 직선거리는 <그림 1>에 표시한 부석처와 능소의 중심 간 직선거리인데, <그림 1>에 표시한 부석처는 정확한 지점을 특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본 표의 산출 거리는 정확한 수치가 아니며 대략적인 거리임.
표 2. 부석처, 능소와 부석처 간 거리
(단위: ㎞)
는 도성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의 왕릉군을 중심으로 어느 곳에 부석처를 설치하였는지 비교해 보고자 한다.
또한, 석재의 용도, 규격, 수량 등에서 차이가 나는 대부 석소와 소부석소 간에 부석처를 동일한 곳에 설치되었는 지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3-1. 동쪽의 불암산, 서쪽의 북한산에 부석처 선정 도성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동구릉(영릉, 숭릉, 휘 릉, 원릉, 수릉), 사릉, 의릉 및 구수릉(1846)의 부석처는 대부석소의 경우 조계(漕溪), 조계동(漕溪洞), 조계(釣溪), 노원(蘆原), 노원 중계(蘆原 中契), 우이동(牛耳洞)으로 기록되어 있고, 소부석소는 농원(農原), 노원(蘆原), 노원 상계(蘆原 上契), 노원 중계(蘆原 中契), 불암산(佛巖山), 불암(佛巖)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 공통적인 부석처로는 노원, 노원 중계가 확인되는데, 나 머지는 차이를 보인다.
부석처별로 설치 횟수를 보면, 대부석소의 경우 조계
동이 5회, 노원 2회, 노원 중계 2회, 우이동 1회로, 조계 동에 가장 많이 설치하였고, 노원 중계를 포함하여 노원 일대가 두 번째에 이른다. 소부석소의 경우 노원 4회, 노 원 상계 1회, 노원 중계 1회, 불암산 2회로 노원 일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림 1>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측량된 지형도(이 하 지형도)로, 조선후기 지형을 이해할 수 있고 조선후 기의 지명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본 지형도상에 부석처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지금부터는 의궤에 기록된 부석처의 위치를 지형도상에서 살펴보고 자 한다.
조계(漕溪)와 조계동(漕溪洞)은 같은 지역을 의미하며, 조계(釣溪)는 음가가 조계(漕溪)와 동일하여 같은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조계동은 북한산의 남동쪽에 위 치하여 현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일대를 일컫는다.
14)
14) 조계동에 대해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림 1. 도성 주변 산릉공역의 부석처 위치와 능소 간 관계
(1915년 측량 지형도, 1 : 15,000尺)
노원과 관련하여 부석처로는 노원(蘆原), 노원 상계 (蘆原 上契), 노원 중계(蘆原 中契) 등 세 곳이 기록되어 있다. 노원 상계와 중계는 현재의 행정구역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형도상에는 상계리(上契理), 중계 리(中契理)로 표기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이 표기된 지점 에 부석처를 표시하였다. 노원은 명칭상 상계, 중계, 하 계를 포함한 지역을 의미하는데, 의궤에서 부석처로 상 계와 중계가 주로 언급된 것을 보면, 노원은 상계와 중 계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형도상에는 상계리와 중계리의 중간 지점을 대략적으로 추정하여 표시하였다. 농원(農原)이라는 부석처도 확인되는데, 서 울지명사전
15)
을 확인한 바 지명으로 나타나지 않아, 아 마도 노원(蘆原)을 오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노원 일대 는 불암산에 속해 있는데, 불암산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 자락에 위치한다.우이동(牛耳洞)은 현재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여 동 일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지형도상에 우이동(牛耳洞)으로
1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2009
표기되어 있어 이 지점을 부석처로 표시하였다.
불암산(佛巖山)과 불암(佛巖)은 모두 현재의 불암산 일 대를 지칭한다. 노원 일대도 불암산의 일부이므로 노원 일대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산릉도감의궤에서 소부석소 부석처로, 단의빈묘소역(1718)에서는 양주 불암 동(佛巖洞)으로, 경혜인빈상시봉원역(1755)의 경우 양주 불암사(佛巖寺)로 기록되어 있는 것
16)
을 보면 노원과는 구분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형도상에는 불암 동과 불암사로 표기된 지점을 부석처로 표시하였다.이와 같이 도성 동쪽의 부석처는 조계동, 우이동, 노 원, 불암산 등 4개 지역에 위치하는데, 조계동과 우이동 은 북한산에 속해 있고, 노원은 불암산의 속해 있어 산 지로 보면 불암산과 북한산에 부석처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도성 서쪽에 위치한 서오릉(익릉, 명릉, 홍릉)과 서삼릉 (예릉) 및 온릉의 부석처는 대부석소의 경우 고양 대사기
16) 이상명, 산릉의궤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
술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108쪽
막동(高陽 大沙器幕洞), 중흥동(重興洞)으로 기록되어 있 고, 소부석소는 소사기막동(小沙器幕洞), 양주 삼천동(楊州 三千洞), 진관 삼천리동(津寬 三千里洞), 우이동(牛耳洞), 중흥동(重興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 공통적인 부석처로는 중흥동(重興洞) 한 곳이고, 나머 지는 차이를 보인다.
부석처별로 설치 횟수를 살펴보면, 대부석소의 경우 대사기막동이 2회, 중흥동도 2회 설치되었다. 소부석소 의 경우 소사기막동이 2회, 양주 삼천동, 진관 삼천리동, 우이동 및 중흥동에 각각 1회씩 설치하였다. 중흥동과 대소사기막동이 부석처로 설치된 비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는 도성 서쪽에 설치된 부석처부터 위치를 살 펴보도록 하겠다. 고양 대사기막동과 소사기막동은 인경 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기록을 보면,
분부에 따라 낭청, 감조관이 어제 중흥동에 달려가서 중흥 동에서 대사기막동 5곳의 석품을 직접 살펴본 즉 중흥동 에는 쓸 만한 석재가 전혀 없고, 서원후동도 또한 쓸 만한 석재가 없으며, 묵방은 석품이 좋지 않고 게다가 길이 매 우 좁습니다. 소사기막동의 석품은 석물에 합당하고 도로 또한 평이합니다. 다만 규격이 큰 석물이 겹쳐 쌓인 곳은 한 곳으로 석물을 뜨고 뒤집고 내오는 것이 매우 어렵습 니다. 대사기막동의 석품은 즉 소사기막동과 같은 양상인 데 각처에 산재하기 때문에 부출이 편리한데, 도로는 즉 자못 험합니다. 묵방, 대·소사기막동 3곳의 석편을 살펴보 고자 가지고 왔습니다. 친히 살피신 후 어떤 곳으로 역소 를 정하올지 아뢰옵니다. 총호사 수결 내용: 석품이 좋고 도로가 편리한 곳으로 할 것.17)
이라고 하여 증흥동부터 대사기막동까지 5곳을 간심하였 다. 5곳 중 세 곳은 서원후동, 묵방(동), 소사기막동이다.
서원후동, 묵방은 소재가 확인되지 않지만, 당일 5곳의 부석처를 간심하는 것으로 보면, 중흥동에서 소사기막동 과 대사기막동은 근거리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인현왕후명릉산릉역에서도 묵방동과 중흥 수문동, 소사기막동을 부석처로 살펴본 것을 보면 서로 간 가까운 지역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지형도에서는 북한산 북서측에 사기동(沙器洞)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일대는 중흥동과 멀지 않은 지역이다. 그 일대는 현재도
17)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이문질 , 경신 11월 19일, 대부석소 품목조: 依分付 郞廳·監造官 昨日馳到中興洞 自中興洞至 大沙器幕洞五 處石品 親自看審 則中興洞元無可用之石 書院後洞亦無可用之石 墨坊石 品不好 路且狹窄 小沙器幕洞石品則可合石物 道路亦且平 易 但體大之 石疊積一處 浮石飜出甚難 大沙器幕 洞石品則與小沙器幕洞一樣 而散在 各處 故浮出便易 而道路則稍險矣 墨坊大小沙器幕洞三處石 片看審次持 來爲有置親審後 某處定役爲乎乙喩稟 摠護使手決內 取石品好道路便處 爲之.
사기막골, 사기막계곡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대사 기막동과 소사기막동이 어떤 지역을 특정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지형도상 사기동 일대임을 알 수 있 다. 지형도상에는 대사기막동과 소사기막동을 특정할 수 없어, 사기동으로 표기된 지점에 부석처를 표시하였다.
중흥동은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에 북한산성 서 문 바깥(北漢西門外)으로 기록하고 있어 위치가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된다. 지형도에도 중흥동(重興洞)이라는 지 명이 표기되어, 이 지점을 부석처로 표시하였다.
삼천동(三千洞)은 지형도에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도(東國 輿圖) 북한성도(北漢城圖) 에는 삼천동(三千洞)이 표시 되어 있는데, 비봉(碑峰)과 향로봉(香炉峰)과 연결된 능 선 아래에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그림 2> 고지도상 이 일대는 현재 진관사, 진관사계곡과 삼천사 및 삼천사계 곡 부근이다. 이와 관련하여 철종예릉산릉역(1864)의 소 부석소 부석처는 진관(津寬) 삼천리동(三千里洞)인데, 진 관사 일대를 삼천리동으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삼천 동과 삼천리동은 같은 지역을 의미하는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정황을 보면 현 진관사와 삼천사 일대가 삼천동임을 알 수 있다.
그림 2.
동국여도 북한성도 내 삼천동 일대
(19세기 전반 추정)
3-2. 석재의 규격과 용도에 따른 부석처 선정 석재의 운반 여건을 감안하면 부석처는 능소와 가장 가까운 산지에 설치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 절에서 는 부석처를 선정함에 있어 주요하게 작용했던 요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표 2>에서 능소와 부석처 간 직선거리를 보면, 능소 에서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부석처 간 거리에 차이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평균치를 보면 능소와 대부석소 간
거리는 약 9.39㎞이고, 소부석소까지의 거리는 약 7.06㎞
이다. 지금부터는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는지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표 2>에서 보듯 세 차례(숭릉, 홍릉, 원릉)를 제외하 고는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 부석처를 다르게 설치하였 다. 도성 동쪽의 능소를 보면, 영릉과 경릉의 경우 대부석 소와 소부석소를 각각 조계동과 노원에 두었는데, 능소에 서 부석처 간 직선거리로 보면 대부석소(12.08㎞)가 소부 석소(6.61㎞)의 약 2배 거리에 위치한다. 휘릉의 경우 대 부석소(12.08㎞)가 소부석소(4.48㎞)에 비해 약 3배 거리까 지 멀리 위치한다. 사릉의 경우 대부석소는 약 18km에 떨어진 조계동에 대부석소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사례는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의 부석처를 확연하게 달리 설치 한 경우로, 소부석소보다 대부석소를 훨씬 먼 지역에 설 치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부석소의 부석처로는 특히 조계동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 분 대부석소 소부석소
부석 수량 146개 1,571개
석재 수량최대 및 규격
상석 1개
長 9.9자, 廣 5.9자, 厚 1.78자
정자각 초석 14개 長, 高 3자
무석인 2개 長 6.8자,
廣 上1.9자 下2.6자, 厚 上1.8자 下2.2자
정자각 월대 전면 계석 8개 長 11.25자,
高 1.23자*
※ *의 경우, 의궤에는 총 길이와 석재 수량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통해 규격을 환산한 수치임.
표 3.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된 석재 수량과 규격
여기서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석재 수량과 규격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대부석소의 석재 규격은 시 기적으로 변화가 있지만 정조건릉산릉역 전후 큰 변화 가 없으므로, 정조건릉산릉역을 사례로 삼아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석재 수량과 규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표 3>에서 보듯이 소부석소의 석재 수량은 대부 석소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많다. 소부석소에서는 정자 각에 소요되는 석재의 규격이 비교적 크다. 그중 월대 전면 계석(기단석)이 의궤 기록상 가장 큰 편인데, 길이 는 11자 이상이지만 두께는 1자보다 약간 두껍다. 대부 석소는 상석(혼유석)의 경우 길이 약 10자, 너비 약 6자 의 큰 석재가 필요하고, 무석인의 경우 길이 약 7자, 너 비와 두께가 2자 이상의 석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산 릉공역에서 소부석소는 석재 수량은 많이 필요하지만 몇몇 석재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규격이 작은 반면, 대부
석소는 석재 수량 자체는 적지만 개별 석재의 규격이 상당히 큰 편이다.
앞서 언급한 정순왕후사릉봉릉도감의궤의 기록을 다시 보면,
양주 불암 부석처를 간심한 즉 쓸 만한 석물이 없기 때문 에 전(례)에 따라서 조계동에서 부출할 일18)
이라고 하여 사릉의 경우 불암 부석처에는 대부석소 석재 로는 쓸 만한 석재가 없어 조계동을 부석처로 삼았는데, 소부석소는 불암에 그대로 설치하였다. 석재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큰 석재를 뜨고 운반할 수 있는 장소로는 조계동이 더 적합했기 때문에 조계동에 대부석소의 부 석처를 마련하였을 가능성을 추측게 한다. 또한, 전례 (영릉, 휘릉)에서 대부석소의 부석처를 조계동에 설치하 였기 때문에 전례를 참조하여 부석처를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익릉과 명릉의 경우, 비슷한 지역이지만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부석처를 각각 대사기막동과 소사기막동으로 구분하였다.
앞서 인용한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이문질 , 11월 19일자 기록에서 보듯 소사기막동과 대사기막동의 석재의 품질은 차이가 없는데, 소사기막동은 도로 여건은 좋으나 큰 석재의 부출량이 제한적이고, 대사기막동은 큰 석재는 풍부하나 운반에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결국, 소 요되는 규격의 석재를 얻기 위해서는 도로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대부석소는 대사기막동에 부석처를 두었고, 소 부석소는 큰 석재는 없지만 운반이 용이한 소사기막동을 부석처로 선정한 것이다.
인현왕후명릉산릉역에서도 묵방동과 중흥 수문동에 석 재가 풍부하지만 운반이 어려우므로, 운반이 용이한 소사 기막동을 소부석소의 부석처로 선정하였다.
19)
18) 정순왕후사릉봉릉도감의궤, 대부석소
19) 인현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소부석소 , 신사 9월 초3일조: 본소 부석 석물은 직접 살펴본 즉 당초 들은 바와 본 바가 크게 다릅니다.
묵방동 및 중흥 수문 등은 석재가 넉넉하고 수량 또한 합당하지만 두
곳의 도로는 기울고 치우쳤으며 가파르고 험하온데, 소사기막동의 석품
은 이미 전에 익릉 국휼 시 부석하여 취용함에 따라 지금은 논할 수 없
고 석품은 비록 수문, 묵방 두 곳과 같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또한 부석
하여 취하기 합당하옵고 도로가 평탄하온 바로 부석소는 소사기막동으
로 설치하여 시역하고자 하는 뜻을 품함니다. 총호사 제사 내용: 수본에
따라 소사기막동에서 부석하여 취한다. (本所浮石石品親到看審 則當初所
聞 大異於所見墨枋洞及重興水門洞段石材豐饒品數亦合是乎矣 上項兩處道
路側僻崎嶇是白遣 小沙器幕洞石品曾前 翼陵國恤時 浮石取用 今無可論
而石材段雖不如水門墨枋兩處之豐多而亦合浮取是白遣 道路平坦是白等以
浮石所以小沙器幕洞設所始役之意稟 摠護使題辭內 依手本浮取於小沙器幕
洞爲乎矣)
경종의릉산릉역의 경우 노원에 부석처를 마련하였지만, 대부석소와 소부석소를 각각 중계와 상계로 구획하여 설 치하였다.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에는 이러한 연유가 기 록되어 있다.
본소 초기에 노원 중계에 바야흐로 시역할 즈음 대부석소 가 뒤이어 와서 한 곳에 같이 들어가게 되므로, 일을 함에 있어 많이 불편하기 때문에 본소가 부득이 노원 상계로 이설하는데, 석재는 넉넉하지만 거리가 조금 먼 일로 매우 근심스러우며20)
라고 하여 당초에는 소부석소가 노원 중계에 부석처를 마련하였는데, 대부석소가 동일한 지역에 부석처를 설치 함에 따라 상호 간의 부석의 공역에 간섭이 발생하여 소 부석소를 능소에서 더 멀리 위치한 상계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온릉의 경우 대부석소는 중흥동에, 소부석소는 삼천동 으로, 인근 지역 내 별도로 설치하였다가 소부석소를 다 시 우이동으로 옮겼다.
우이동의 석품이 비록 좋지 않으나 방천 개석 및 기타 여 러 곳에 쓰이는 계체(석)으로는 족히 취용할 수 있고, 능소 근처여서 편리하온 바로 이미 완전히 정하였습니다.21)
우이동의 석품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건축용 석재 중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계체석을 쓸 만한 정도의 품질을 갖추고 있고, 삼천동에 비해 능소 근처여서 운반상의 유 리한 점 등을 이유로 삼천동에서 우이동으로 부석처를 변경하였다.
숭릉, 홍릉, 원릉은 기록상 동일한 지역에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부석처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앞서 의릉의 예에서 보듯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에 일정 거리를 두 고 부석처를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부석처 선정 과정을 살펴보았다. 대부석와 소부석소 간 부석처 위치를 달리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부석처 선정 절차를 보면 능상 의례용 석재의 품질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능상에 배설하는 석재에 최고 품질의 석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소부석소보다 먼 지역
20)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 소부석소·수본질 , 갑진 9월24일조: 本所 初頭 蘆原中契方爲始役之際 大浮石所追後來到同入一處事多不便 故本所 不得已移設於蘆原上契 石材則豐饒而程道稍遠事甚可憫是乎旀.
21) 단경왕후온릉봉릉도감의궤, 소부석소·수본질 , 기미 4월 18일조:
本所 新設牛耳洞石品 雖云不好是乎乃 防川蓋石 及其他諸處地排階砌等石 足可取用 而便近於陵所是乎等以 旣已完定爲有置.
에 부석처를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실제적인 요인 은 석재의 규격과 수량을 만족할 수 있는 부석처가 필요 했기 때문이다. 능상 석재는 수량은 적지만 매우 큰 석재 가 필요했다. 건축 석재는 일정 크기도 확보해야 했지만, 다량의 석재를 뜰 수 있는 부석처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요건에 맞는 부석처를 구한 것이다. 운반의 난이도도 중 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석재의 운반은 건축 공사에 가장 어려운 공정에 해당한다. 그만큼 부석처가 능소에 가까울 수록 유리하였다. 따라서 소부석소는 가능하면 능소와 가 까운 지역을 선호하였다. 마지막으로 대부석소와 소부석 소의 업무가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 부석처를 마련 할 경우 좋은 석재를 확보하기 위해 각소 간에 불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므로 이를 제어할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건을 종합해서 보면, 대부석소의 부석처는 품질이 우수하고 소요 규격에 만족해야 하므로,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능소에서 먼 거리에 부석처를 마련한 것이다. 반면, 소부석소는 능소에서 가능하면 가까운 지 역에 다량의 석재를 부출하면서도, 운반이 편리한 지역에 부석처를 마련한 것이다.
지금까지 산릉공역의 부석처 위치와 부석처의 선정 과정을 살펴보았다. 부석처의 위치는 의궤 기록의 한계 상 지형도상에서 대략적인 위치를 찾아내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대부석소의 부석처 로 자주 선정되었던 조계동 부석처의 위치 및 부석의 여 건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4. 부석처 조계동
4-1. 대부석소 부석처로서의 부석 여건
조선후기 산릉공역에서 조계동은 대부석소의 부석처로 다섯 차례 설치되었는데, 도성 동쪽 능소에서의 부석처로 서는 높은 빈도수(50%)로 그만큼 매우 선호된 지역이었 다. 하지만, 건축용 석재를 다루는 소부석소의 부석처로 는 선정된 사례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 지만 능소에서 소부석소에 비해 2~3배에 해당하는 거리 로 운반의 어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와 같이 조계 동이 대부석소의 부석처로서 선정되었지만 가용 석재가 그렇게 넉넉했던 것도, 부석처에서 평지로 끌어내리는 것 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 궤 기록을 보면,
조계 부석처는 크고 작은 쓸 만한 석재가 모두 산 정상에 있어 끌어내리는 길이 좁고 기울었으며 험악하여 반드시
길을 크게 정비하여야만 무사히 옮겨 내릴 수 있으므로 경기에 이문해서 (길을) 정비하며, 부석처 동구는 소나무 가 빽빽하게 들어서 장차 마땅히 베어내고 이를 헤아려 끌어내릴 길을 열되22)
라고 하여 필요한 규격의 석재가 평지와 가깝게 위치한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위치하고, 산 밑으로 내릴 길도 좁고 험하여 운반로 정비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정순 왕후산릉봉릉역(1699)에서는 앞선 여러 차례 석역으로 수 목을 벨 필요는 없지만, 몇 년 전 장마로 운반로 정비가 더욱 요구되는 등
23)
부석의 여건이 나빠졌다.이후 150여 년이 지난 효현왕후경릉산릉역(1843)에서는 노원에 부석처를 마련하였으나 석재가 없어서 조계동으 로 부석처를 옮기는데, 의궤 기록을 보면
본소가 조계로 전향한 연유를 이미 아뢰옵거니와 9월 25 일 조계에 도착하여 석재를 부출한 즉 석품이 노원석에 비해 자못 떨어지는 것 같은 근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조심하고 삼갈 길이 있어 스스로 처리할지 못하여 감히 면품하였습니다. 26일 도청 및 삼물소 낭청, 별간역이 내 려와 함께 보고 살펴본 즉 석품은 표면이 비록 미세하게 노랗지만 속은 점점 섬세하고 광택이 나옵고, 여러 석수가 말한 내용은 겉면의 석품이 속면과 같아 사용하기에 합당 합니다. 다른 고려할 점이 없고, 노원과 비교한 바 이미 우열이 없습니다. 이에 들여서 쓰는 것을 한 입으로 같이 추천하온 바24)
라고 하여 석재의 품질에 대해 노원의 것과 비교하여 갑 론을박이 있었지만, 품질이 적정한 것으로 결론이 나기도 하였다. 10년 뒤 익종수릉천봉산릉역에서도 조계동에서 대부석소를 운영하였는데, 쓸 만한 석재가 높고 험한 산 위에 있거나 계곡 중에 있어
25)
부석의 역이 쉽지 않았음22)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漕溪浮石處 大小可用之石 皆在山頂 曳下之路陜隘傾險 必須大段修治 可以無事運下是去乎 移文京畿 使之趁期修治爲旀 浮石處洞口段置 松木森立 勢將 量宜斫伐 以開曳下之 路是乎矣.
23) 정성왕후사릉봉릉도감의궤, 대부석소 : 조계 부석처는 크고 작은 석물을 옮겨 내리는 길이 비탈지고 울퉁불퉁하고 좁으며, 이미 전에 여 러 차례 석역을 하였습니다. 금번은 별도로 수목을 작벌할 곳이 없습니 다. 몇 년 전에 장마로 가파른 벼랑이 무너져, 도로를 정비하고 결함 있 는 곳을 보충할 때 마땅히 소나무를 베어 쓴 것 같은 줄로 반드시 미리 보수해야만 옮겨 내리는 데 폐단이 없어 (漕溪浮石處 多少石物運下之路 崎嶇陜隘 而曾前累經石役 今番段別無樹木斫伐之處是乎矣 年前霖雨 崖岸 傾頹治道補缺之際 似當斫取松木是乎等以 必須預爲修治是良沙可以無弊運 下是如乎)
24)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품목 , 계묘 10월 초9일조:
本所轉向釣溪之由 前已仰稟是在果 去月二十五日 來到釣溪 浮出石材 則 石品 與蘆原石 似有稍劣之慮 故其在審愼之道 不敢自下擅斷有所面稟矣 二十六日 都廳及三物所郞廳 別看役 下來眼同看審 則石品表雖微黃裏漸細 潤是乯遣 諸石手言內 皮剖之石品 如此裏面之 合用 似無他慮 較諸蘆原 旣無優劣 以此入用是如 同口齊贊是乎所)
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석재의 품질면에서 노원과 비교해서 절대 적으로 우수하다고 평할 수도 없었고, 평지 근처에 풍부 한 석재가 없었으며, 산길이 험했음에도 조계동을 부석 처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능상에 필요한 큰 규 격을 만족할 만한 석재가 비교적 조계동에 많았던 것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각종 석물의 세밀한 조각의 용이성과 조각한 뒤의 발색 등의 품질 등도 고려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2. 조계동의 위치와 ‘사릉부석감역필기’
지금까지는 조계동의 석재 부출 여건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조계동의 위치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자 한다.
조계동은 동국여도 북한성도 에 조계동(曺溪洞)이라 고 표기되어 있는데, 북측에는 우이동이 표기되어 있고, 조계동 위측 능선에는 북한산성의 동대문이 위치한다.
그림 3. 동국여도 북한성도 조계동 일대
(19세기 전반 추정)
효현왕후경릉산릉역의 대부석소 부석처는 조계(釣溪)인 데, 가오리(加五里)26)
라 칭하기도 하였다. 1915년 지형도 에는 조계 또는 조계동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데, 우 이동의 남측에 가오리(加五里)27)
가 표기되어 있다. 가오25) 익종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품목 , 을묘 3월 25일조: 금 번 부석은 비록 전에 비해 석재를 줄였다 하더라도, 높고 험한 산 위에 있거나 계곡 중에 있어, 공역의 힘이 극히 매우 과다하여 (今番浮石 雖 云比前稍減石材 或在嶒崚之上 或在谽谺之中 工役之力極甚夥多) 26)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 대부석소·품목 , 계묘 9월 23일조:
금일 본소 낭청이 패장 원역을 인솔하여 노원부석소에 왕도하여 석처를 살펴본 즉 석물이 없어서 석수에 물으니 편수 임원철이 보고한 내용에 가오리의 땅에 부출할 것이 있으니 (今日 本所 郞廳率 牌將 員役 等來到 蘆原浮石所 看審石處 則石材乏盡 問于石手 則邊首 林元哲所告內 加五里 之地 有可浮處是乎乃)
27) 강북구 수유동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도성을 쌓고 성
리 동측에 북한산성의 대동문(동대문)이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지형도상 가오리에서 대동문에 이르는 일대가 조 계동임을 알 수 있다.
그림 4. 조계동(가오리) 일대
(1915년 측량 지형도, 1 : 15,000尺)
그림 5. 현 조계동 일대
(네이버지도 편집)
지형도상에 가오리로 표기된 지점은 현 국립재활원 일 대에 해당한다. 가오리에서 대동문에 이르는 능선은 동 국여도 북한성도 의 조계동 위에 묘사된 능선과 같은 능선으로 보인다. 이 능선의 북측 골짜기 초입인 통일교 육원에서 대동문에 이르는 산길 중간 지점에는 구천폭포 가 위치하는데, 폭포 인근 암벽에는 정순왕후사릉봉릉역 (1699)의 부석 관련 기록이 음각
28)
되어 있다. 현재 지명밖 십리까지를 한성의 구역으로 정하였는데, 이곳은 지형이 다른 곳과 다르므로 여기서부터 5리를 더하여 우이동까지를 서울 지역으로 삼았으 므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미아리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5리를 더 가라고 하여 가 오리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앞의 경우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우이초등학교와 국립재활원 등이 있는 마을이다. (출처: 서울특 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2009)
28) 사릉 부석과 관련된 암벽 글씨는 필자가 최초로 확인한 것은 아니 다. 따라서 이에 대해 알게 된 경위를 밝히고자 한다. 부석처인 조계동 의 위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신문인 OhmyNews의 2016년 12월 9일자 기사인 인평대군과 조계동 구천은폭 에서 구천은폭 주변에 바위 글씨로 사릉부석감역필기(思陵浮石監役畢記)가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 었다. 이후 기사를 토대로 필자가 현장답사를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음
인 구천폭포에는 ‘구천은폭(九天銀瀑)’
29)
이라는 글씨가 큼 지막하게 새겨져 있는데, 구천은폭의 좌측 암벽에는 ‘사 릉부석감역필기(思陵浮石監役畢記)’30)
가 새겨져 있다. <그 림 7, 8>그림 6. 구천은폭(九天銀瀑)이 새겨진 암벽
그림 7. 구천은폭과 사릉부석감역필기 간 위치
암벽 글씨는 <그림 8, 9>와 같이 7줄로 새겨져 있다.
먼저 우측 네 줄인 ‘司評李焌 奉事趙正誼 書吏朴興柱 石 手趙金’은 사릉의 부석과 관련된 명단이다. 정순왕후사 릉봉릉도감의궤 대부석소 권두에는 부석소 관원 명단 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평(司評) 이준(李焌)은 낭청으로 장례원 소속이고, 봉사(奉事) 조정의(趙正誼)는 감조관으 로 평시서 소속이며, 서리(書吏) 박흥주(朴興柱)는 소속 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장인질 에는 석수(石手) 조금
각된 각자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29) 구천은폭 오른쪽 하단에는 이신(李伸)라 새겨져 있어, 각자를 쓴 이 를 밝히고 있다. 송계별업(松溪別業), 창벽(蒼壁), 한담(寒潭) 등의 글씨 를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구천은폭 네 글자만 남아 있다. 송계별업은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이 조계동에 지은 별서인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 다. (출처: 이종헌, 인평대군과 조계동 구천은폭 , OhmyNews, 2016.
12.09.)
30) ‘사릉부석감역필기(思陵浮石監役畢記)’는 OhmyNews에서 석문(石
文) 전체를 칭한 명칭인데, 본고에서도 이 명칭이 타당하여 이를 따르
고자 한다.
(趙金)이 기록되어 있는데, 석수의 우두머리인 편수에 해 당한다.
다음으로는 ‘勢己卯正月日 思陵浮石監役 畢焌書記’가 새 겨져 있는데, 사릉 부석 감역을 완료한 연월일을 기록하였 고, 마지막으로 낭청 이준이 글을 썼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림 8. 암벽에 새겨진 사릉부석감역필기
그림 9. 사릉부석감역필기
(포토샵에서 글자를 선명하게 표시한 것으로, 서체는 차이가 있음)
그림 10. 사릉부석감역필기 인근의 석재 부석 흔적
정성왕후사릉봉릉역의 대부석소는 조계(동)에 부석처
를 설치하고 석재를 조달하였는데, 부석을 마치며 이와 같은 ‘사릉부석감역필기’를 암벽에 새긴 것이다.
‘사릉부석감역필기’ 인근에는 <그림 10>과 같이 석재 를 부석하기 위해 정으로 가공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 흔적을 경계로 계획했던 석재의 크기는 길이 4m, 두께 35~55㎝로 능상에 배설되는 큰 석재의 규격임 을 알 수 있다.
‘사릉부석감역필기’에는 대부석소를 총괄운영하는 낭청 과 낭청을 보조하는 감조관, 행정 보조를 담당하는 서리 와 실제 부석공역을 담당한 석수 편수 등 주요 직책의 명단을 간단하게 기록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 다. 이는 실제 산릉공역의 부석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례로 매우 귀중한 석문(石文)이라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이 석문에 대한 보호 조치 및 관리가 요구되 며, 향후 산릉도감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주변의 정밀한 지표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5. 결 론
지금까지 산릉도감의궤를 통해 조선후기 산릉공역에 서 석재의 쓰임이 다른 대부석소와 소부석소의 부석처 위치와 선정 과정 및 요인, 그리고 대부석소 부석처로 선호된 조계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 면 다음과 같다.
첫째, 능상에 배설되는 대부석소 석재의 부석처는 체계 적인 품질 확인 과정을 거친 후 선정되었다. 석재 시료를 채취하여 산릉도감의 최고 책임자가 확인하고, 최종적으 로 왕에게 보고하여 부석처를 결정하였다. 이는 봉분을 천광하면서 토질을 왕에게 보고하는 것과 동일한 절차라 할 수 있다. 반면, 건축용 석재를 조달했던 소부석소는 이와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봉분 주변 의례용 석재의 품질에 대해서 산릉도감에서 매우 신중하 게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도성 주변의 능소의 부석처는 동쪽에는 불암산, 서쪽에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하였다. 이는 운반 여건이 중요한 석재 조달의 특성상 능소와 가까운 산지를 부석 처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암산에는 서쪽 자락에 노원 중계와 상계, 동쪽에는 불암동이 주요 부석처였다.
북한산의 경우, 동쪽 자락의 조계동과 우이동, 서쪽의 사 기동, 중흥동 및 삼천동 등이 주요 부석처였다.
셋째,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간 부석소의 위치를 달리 하여 선정하였다. 대부석소의 부석처는 소부석소보다 멀 게는 3배 거리에 위치하였다. 이는 대부석소와 소부석소
에 소요되는 석재의 규격과 수량 및 운반 여건의 영향 때문이었다. 대부석소의 부석처는 품질이 우수하고 큰 규격에 만족해야 하므로,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능소에서 먼 거리에 부석처를 마련하였다. 반면, 소부석 소는 능소에서 가능하면 가까운 지역에 다량의 석재를 부출하면서도, 운반이 편리한 지역에 부석처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부석소 상호 간 간섭을 피하기 위해 부석 처를 달리하기도 하였다.
넷째, 대부석소의 부석처로는 조계동이 선호되었다. 조 계동은 석재가 넉넉하지도 않았고, 품질면에서 노원 일대 와 차이가 없었으며, 운반이 용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큰 석재를 부석할 수 있어 여타의 좋지 않은 여건 속에 서도 대부석소의 부석처로 여러 차례 선정된 것으로 보 이며, 세부적인 품질 면에서 세밀한 조각에 필요한 요건 을 충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조계동 일대 골 짜기에서 암벽에 새겨진 ‘사릉부석감역필기(思陵浮石監役 畢記)’를 소개하였다. 정성왕후사릉봉릉역(1699) 당시 조 계동 일대에 부석을 마치고 새긴 것으로, 부석 관련 주요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릉 부석처의 실 제적인 위치를 최초로 확인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 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호 조치와 관리가 요구되며, 이 지역에 대한 정밀지표조사 실시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에서 밝힌 조선후기 왕릉 부석처의 위치와 선정 과정 및 요인은 산릉공역에서 비중이 높았던 석공사와 관련하여 석재 조달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 에서 의의가 있다. 조계동이 대부석소의 부석처로서 선 호된 이유에 대해서 석재의 품질 중 중요한 조각의 용 이성과 조각한 뒤의 발색 등,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하였다. 이는 문헌을 중심으로 한 본 연구의 한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부석처 석재의 시료 조사 연구를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산릉공역 석재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박석에 대한 부석처는 다루지 못하여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 산릉공역에서 석재의 운반 및 설치 과정과 공역에 참여 한 관원 및 장인 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된다 면, 산릉공역에서 석공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에서 소개한 ‘사릉부석감역필기’와 같이 다른 산릉공역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부석처 주 변에 새겨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후 이를 염두에 두 고 실제 부석처 위치에 대한 현장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 2009 2.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Ⅱ, 2011 3.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Ⅲ, 2012 4.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Ⅳ, 2013 5.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Ⅴ, 2013 6.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Ⅵ, 2014 7.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Ⅶ, 2014 8.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Ⅷ, 2015 9.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Ⅸ, 2015 10. 김균태, 화성건설공사에서 자재의 조달방법 연구 , 한
국건축시공학회논문집, 9권, 6호, 2009
11. 김동욱, 朝鮮後期 建築工事에 있어서의 木材供給 體制 -水原城郭工事를 中心으로- , 건축, 28권, 2호, 1984 12. 김왕직, 조선후기 관영건축공사의 건축경제사적 연구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2009 14.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
축, 동녘, 2010
15. 이권영,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재료와 목공사에 관한 연구 ,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0
16. 이권영·서치상·김순일, 조선후기 경강변 영선목재에 관 한 연구 , 건축역사연구, 7권, 1호, 1998
17. 이상명, 산릉의궤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 축의 시공기술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18. 이종헌, 인평대군과 조계동 구천은폭 , OhmyNews,
2016.12.09.
접수(2017. 4. 14) 게재확정(2017.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