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상촌가(象村家)의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상촌가(象村家)의 "

Copied!
20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상촌가(象村家)의 󰡔평산신씨성보(平山申氏姓譜)󰡕

편찬에 대하여

14)

장 유 승*

❙국문초록❙

본고는 신흠과 신익성 2대에 걸쳐 편찬된 󰡔평산신씨성보󰡕를 통해 이 시기 족보 편찬의 양상과 그 배경을 살피고자 하였다. 󰡔평산신씨성보󰡕의 편찬은 전란으로 일실된 족보를 재구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신흠은 춘천 유배를 계기로 가문의 존립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체감하고 족보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 후 신흠이 정치적 입지가 안정되면서 위기의식은 약화되고, 결국 족보의 편찬은 미루어지게 되었다.

신흠 사후, 신익성은 부친이 남긴 유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평산신씨성보󰡕의 초고를 발견하고 증보 작업 에 착수하였으며, 그 목적은 신흠에 의해 다져진 가문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신익성이 완성한 󰡔평 산신씨성보󰡕의 체재는 후대에 계승되어 족보의 일반적인 체재로 자리잡았다.

16~17세기의 족보 편찬은 전란 후 망실된 문헌을 수습, 보완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한편으로 인조반정 전후의 정치적 혼란으로 짙어진 위기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미비한 여건에서 편찬 된 족보는 고증의 미비로 후대에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후대 족보 편찬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주제어] 신흠, 신익성, 평산신씨, 󰡔평산신씨성보󰡕, 족보 편찬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평산신씨성보󰡕의 구성과 내용

Ⅲ. 신흠의 족보 편찬 ‒ 가문 위상 확립의 의지와 위기의식의 발로

Ⅳ. 신익성의 족보 편찬 ‒ 가문 위상의 계승과 친족 관념의 변화

Ⅴ. 󰡔성보󰡕 이후 평산신씨가의 계승과 족보 편찬

Ⅵ. 맺음말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confuci@hanmail.net

(2)

Ⅰ. 들어가며

평산신씨는 신숭겸

(

申崇謙

)

을 시조로 삼는 성관

(

姓貫

)

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 본격적으 로 관계

(

官界

)

에 진출함으로써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

이중 신감

(

申鑑

)

을 파조

(

派祖

)

로 삼는 문희공파

(

文僖公 派

)

는 임란을 전후하여 무반 벌족

(

武班閥族

)

으로 성장하였으며

,

신효

(

申曉

)

를 파조로 삼는 정언공파

(

正言公 派

)

는 비슷한 시기에 대표적인 문반가

(

文班家

)

로 자리잡았다

.

1)

정언공파가

16~17

세기 대표적인 문반가로 자리잡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은 신흠

(

申欽

, 1566~1628)

이다

.

임란 이후의 격변 속에서 구축한 그의 정치적 위상과 문학적 명성은 가문의 위상 제고에 결정적인 역 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이후 신익성

(

申翊聖

, 1588~1644),

신익전

(

申翊全

, 1605~1660),

신최

(

申最

, 1619~

1658),

신정

(

申晸

, 1628~1687)

으로 이어지는 상촌가

(

象村家

)

의 인물들은 신흠의 성취를 계승하여 가문의 위 상을 다졌다

.

다만 조선 후기까지 무반 벌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한 문희공파와 달리

,

정언공파는 신흠의 증손대에 이르 러 급격히 쇠락을 맞이하게 된다

.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상촌가의 인물들이 이룩한 성취는 결코 녹록치 않다

.

특히 상촌은 정치적

,

문학적 성취로 가문의 위상을 제고하는 한편

,

󰡔평산신씨성보󰡕의 편찬을 비롯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가문의식을 확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

본고는 󰡔평산신씨성보󰡕를 통해 상촌가의 인물들이 가문의식을 확립하고 강화하는 과정과 그 배경을 살피고

, 16~17

세기 족보 편찬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

Ⅱ. 󰡔평산신씨성보󰡕의 구성과 내용

󰡔평산신씨성보󰡕

(

이하 󰡔성보󰡕

)

는 신흠과 신익성

2

대에 걸쳐 편찬된 평산신씨의 족보이다

. 1

90

장의 목 판본으로

, 1636

년 간행되었으므로

병자보

(

丙子譜

)’

라고도 한다

.

이 책은 현전하는 평산신씨 족보 가운데 가 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

우리나라의 족보사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에 해당한다

(

사진

1, 2).

󰡔성보󰡕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

권두에 신익성의 서문이 있고

,

이어서 시조

(

始祖

)

신숭겸

(

申崇謙

), 12

대 신군평

(

申君平

), 13

대 신안

(

申晏

), 14

대 신효

(

申曉

), 17

대 신상

(

申鏛

),

신영

(

申瑛

)

6

인의 전기

(

傳記

)

및 묘도문자

(

墓道文字

) 9

편이 있다

. 9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고려사 장절공 본전(高麗史壯節公本傳)」:󰡔고려사(高麗史)󰡕 「홍유열전(洪儒列傳)」을 전재(轉 載)한 것이다. 본디 「홍유열전」에는 홍유(洪儒) 외에도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신지겸

1)장필기, 「朝鮮後期 武班家系의 構成과 閥閱化(2):平山申氏 文僖公派 武班家系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2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2, 140~142.

(3)

<사진 1> 󰡔평산신씨성보󰡕 신익성 서문

<사진 2> 󰡔평산신씨성보󰡕 본문

(申智謙) 등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한 인물들의 전(傳)이 함께 수록되어 있 다. 신숭겸에 관한 서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2) 「장절공 유사(壯節公遺事)」:1479년 손순효(孫舜孝)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시 지은 글이다. 손순효는 1459년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여 신숭겸의 묘소에 치제(致祭)하고, 다시 관찰 사로 부임하여 황폐해진 신숭겸의 묘소를 보고 이 글을 지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익성이 덧붙 인 것으로 보이는 말미의 기록에서는 이 글이 앞뒤가 맞지 않아 전하는 이의 착오가 있는 듯하 다고 하였다.

(3) 「대구 공산 고려태사 장절공 충렬비(大丘公山高麗太師壯節公忠烈碑)」:신숭겸이 전사한 대구에 세운 비석으로, 신흠이 지었다. 󰡔상촌고󰡕 권26에 「고려태사장절공충렬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 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본문에 따르면 이 비석은 신숭겸의 외후손 유영순(柳永詢)이 1607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세운 것이며, 신흠은 유영순의 청으로 이 비문을 썼다고 밝 혔다. 그러나 이 글의 말미에는 비문을 지은 시기를 1606년으로 밝혔으므로 고증이 필요하다. (4) 「태사 개국 장절공 행장(太師開國壯節公行狀)」:신숭겸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저자는 알 수 없다. 1605년 신흠이 이 글을 읽고 지은 발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발문에 따르면 이 글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산일되었다가 신경익(申景翼)에 의해 발굴, 간행되었다. (5) 「어사대부 신군평전(御史大夫申君平傳)」:신군평의 전기로, 󰡔고려사󰡕 「신궁평열전(申君平列傳)

을 전재한 것이다.

(6) 「고려 중정대부 종부령 신공 묘지(高麗中正大夫宗簿令申公墓誌)」:신안의 묘지(墓誌)로 작자는

(4)

1 2 3 4 5 6 7 8 9 10

崇謙 甫藏 弘尙 愈毗 命夫 應時 令材 示啇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仲明 諿 翼之

丁道

丁里

仁壽

仁耈

自準 末平

自繩 自衡

自熙

自行

自繼 世卿

君平 弘緖

承緖 翊聖

翊全

熙緖 光緖

<표 1> 평산신씨 가계도(󰡔평산신씨성보󰡕에 의거함)

알 수 없다. 말미에 1420년 매안(埋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묘지의 실물을 발굴하여 전재 한 것이 아닌가 한다.

(7) 「서호산인 묘표(西湖散人墓表)」:신흠의 5대조 신효의 묘표로, 신흠이 지은 것이다. 󰡔상촌고󰡕

권25에 「오대조 정언 묘표(五代祖正言墓表)」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묘소의 일실을 우려하여 묘표를 세운다고 밝혔다.

(8) 「이조판서 문절 신공 신도비명(吏曹判書文節申公神道碑銘)」:신상의 신도비명으로, 신흠이 지 은 것이다. 󰡔상촌고󰡕 권27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신상이 세상을 떠난 지 99년만에 증손 신경우(申景祐)가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신흠에게 비명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1628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9)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이간공 신도비명(資憲大夫議政府 右參贊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夷簡公神道碑銘)」:신흠의 조부 신영의 신도비명이다. 외손 김계휘(金繼輝)가 지었다. 신영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후손의 부탁으로 지었다고 하 였으니 1575년경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평산신씨성보

라는 대제

(

大題

)

와 함께 신숭겸 이하

22

대의 계보가 실려 있다

.

동성친

(

同姓親

)

중심 의 계보로서 이성친

(

異姓親

)

은 사위에 한정하였다

.

본문은

6

단 구성으로

,

형태는 일반적인 족보와 큰 차이가

(5)

없다

.

각 인물에 대한 주기사항은 극히 간략하다

.

생몰년은 생략되어 있고

,

먼 선대의 경우는 최종 관직만

,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선대는 과거 급제 연도 및 간략한 관력

,

배위

,

그리고 묘소 정도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 다

.

신흠과 직계 선조에 대한 주기사항은 자세한 편이지만

,

신익성의 경우는

동양위

라는 기록 뿐이며 신익 전은 주기사항이 아예 없다

.

더구나 신익성의 손자대는 이름조차 보이지 않는다

.

신자명

(

申自明

)

을 파조로 삼는 예천

(

醴泉

)

의 별파

(

別派

)

는 말미에 따로 기재하였다

.

끝으로 간행에 참여한 감교

(

監校

),

판사

(

判事

),

각수

(

刻手

),

목수

(

木手

),

취반

(

炊飯

)

등의 명단이 있다

.

판 사 이하는 모두 승려인 점으로 미루어 사찰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 ‘

황명 숭정

9

6

월 일 간행

(

皇明崇禎 九年之六月日刊行

)’

이라는 간기가 있다

.

마지막으로 신민일

(

申敏一

)

의 발문이 실려 있는데

,

발문의 말미에

1636

10

월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

간기와 달리 간행시기는

1636

10

월 이후로 보인다

.

Ⅲ. 신흠의 족보 편찬 ‒ 가문 위상 확립의 의지와 위기의식의 발로

󰡔성보󰡕의 편찬경위는 권두에 실려 있는 신익성의 서문에 자세하다

.

우리 신씨(申氏)는 곡성현(谷城縣)에서 나왔는데, 평산부(平山府)에 본적(本籍)을 받은 것은 고려(高 麗)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장절공은 광해주(光海州) 사람 이라고 하였는데, 광해주는 지금의 춘천(春川)이다. 고을 서쪽 비방동(悲方洞)에 장절공의 묘소가 있 다. 장절공은 아마도 한미한 시절에 곡성에서 광해주로 이사한 듯한데, 북관(北關)으로 들어가 고려 태 조를 보좌하였다. 그러므로 순절하자 광해주에 장사지내준 것이다. 역사책에 전하는 바는 이와 같으나 세대가 멀어 고찰할 수가 없다. 씨족이 평산에 본적을 둔 지 8백 년이 되었는데 이름 높고 덕 있는 이 들이 이어져 마침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예전에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병화에 없어졌기에 선군자(先君子, 신흠)께서 유배 중에 세보(世譜) 를 편찬하셨다. 근원을 소급하고 지파를 찾아 내외의 지손까지 모두 수록하였는데, 손수 초록하여 집 에 보관하였으나 여전히 완성하지 못한 책이었다. 내가 부음을 듣고 와서 남기신 책을 정리하다가 세 보를 발견했는데, 책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것은 선군자께서 후손에게 남기신 것이니, 그 책임은 실로 내게 있다.”

그리고는 사방에 흩어져 사는 동성(同姓)들을 찾았는데, 평산에 있는 것이 열네 집, 춘천(春川), 청 주(淸州), 안동(安東), 문경(聞慶), 인동(仁同), 의성(義城), 예안(禮安), 대구(大丘), 영천(榮川), 예천 (醴泉)에도 십수 집이 있었다. 선군자가 편찬하신 내용에 여러 집안의 보첩을 참고하여 성을 얻은 자를 모조리 수록하여 족보를 만들고는 성보(姓譜)라고 하였다. 여자라도 모두 기록하였으니, 이를 통해 찾 아보면 여자의 자손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찾을 수 있다. 사실을 전하는 책이므로 간결을 추구하고 본 말을 밝혔으니, 안에는 후하고 바깥에는 박한 것이 아니다. 예천 일파도 본디 근거가 있으니 아울러 뒤 에 부록하였다.

(6)

아, 옛사람이 족보를 만들어 씨족을 수록한 데는 종법(宗法)의 유의(遺意)가 있어 인심을 거두고 풍 속을 도타이 할 수 있으니, 세도(世道)와 큰 관계가 있다. 내가 부지런히 유촉을 받들어 고증하고 편집 하느라 여덟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간행하게 되었으니 감히 선친의 뜻을 실추시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종장(宗丈)인 병조 판서 평성공(平城公) 경진(景禛)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을 듣고 힘을 내어 비용을 마련하였다. 감히 전말을 써서 후손에게 알린다.

황명 숭정 9년 병자 6월, 20세손 광덕대부 동양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익성이 삼가 서문을 짓 다.2)

이 글은 말행

(

末行

)

의 작성시기 및 관함과 성명을 제외하고 신익성의 문집 󰡔낙전당집

(

樂全堂集

)

󰡕에 그대 로 수록되어 있다

.

이 글로 보건대

,

신흠이 󰡔성보󰡕의 편찬에 착수한 시기는

1617

(

광해군

13) 1

월 춘천에 유배되면서부터이다

.

신흠은

4

년간 춘천에 머물다가

1621

년 방귀전리

(

放歸田里

)

되어 김포

(

金浦

)

로 돌아왔 는데

,

3) 돌아온 뒤에도 편찬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후 인조반정으로 조정에 복귀한 신흠은 결국 󰡔성 보󰡕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1628

년 신흠이 세상을 떠나자 신익성은 곧바로 유고 시문의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 간행하였다

.

신익성은 이 과정에서 미완의 󰡔성보󰡕를 발견하고 교정 증보에 착수하였다고 밝혔다

.

신흠이 남긴 󰡔성보󰡕의 초고는 직계를 중심으로 나열한 소략한 것이었던 듯하다

.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 는 것은 󰡔상촌고󰡕의 권두에 실려 있는 「동양신씨계첩

(

東陽申氏係牒

)

」이다

.

󰡔상촌고󰡕가 신흠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간행된 사실을 고려하면

,

「동양신씨계첩」은 신흠이 정리한 계보에 바탕한 것으로 보인다

.

여기에는 시조 이하 신흠과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21

세의 간략한 사적이 신흠의 직계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

특 히 신흠의 자손들을 기록한 부분은 족보의 형태와 비슷하게 구현되어 있다

.

계첩

(

係牒

)

또는 가첩

(

家牒

)

이라 는 용어가 직계에 국한된 개인적 기록으로서 본격적인 족보의 단계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

신흠 이 편찬한 󰡔성보󰡕의 초고는 「동양신씨계첩」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사진

3, 4).

2)申翊聖, 󰡔平山申氏姓譜󰡕, 「平山申氏姓譜序」, “惟我申氏, 出於谷城縣, 而受籍於平山府, 自高麗太師壯節公始云. 高麗史以壯節公 爲光海州人, 光海州卽今之春川也, 府西悲方洞, 有壯節公墓. 壯節公微時或自谷城徙居光海州, 轉入北關, 翊戴麗祖, 故其殉義而 死也, 賜葬於光海州. 而史氏之傳如此也, 世代邈遠, 莫可考究, 而氏族之籍於平山者垂八百祀矣, 名德相禪, 遂爲海東大姓. 舊有 譜牒, 淪於兵燹, 先君子乃於謫中, 撰定世譜, 遡源尋派, 竝收內外枝裔, 手自抄錄, 藏于家, 猶爲未成之書也. 翊聖奉諱來, 敍次遺 , 得世譜, 執而泣曰, 此吾先君子所以遺後人者, 其責實在不肖. 遍求同姓之散居四方者, 其在平山者十四家, 在春川·淸州· ·聞慶·仁同·義城·禮安·大丘·榮川·醴泉者亦十數家. 就先君子所撰, 參以諸家之牒, 專收得姓者爲譜, 名之曰姓譜. 得姓者, 雖女子畢錄之, 繇是而求之, 則女子之子孫, 百世而可徵已. 惟是傳信之書, 要之簡潔, 明其本末, 非厚於內而薄於外也. 泉一派, 亦自有據, 幷附于後. , 古人以立譜收族, 猶有宗法遺意, 可以攝人心厚風俗, 其有關於世道丕矣. 翊聖承付屬之勤, 證定 編摩, 八易寒暑, 而始就剞劂, 其敢曰不墜先志哉. 宗丈大司馬平城公景禛甫, 聞有是擧, 出力爲費, 敢書顚末, 俾諗于後. 皇明崇 禎九年歲舍丙子六月日, 二十世孫光德大夫東陽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翊聖謹序

3)신흠이 선영 소재지인 김포를 우거지로 선택한 것도 이 시기에 뚜렷해지는 선조에 대한 계승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권기석, 󰡔족보와 조선사회󰡕, 태학사, 2011, 288.

(7)

<사진 3> 󰡔상촌고󰡕 「동양신씨계첩」 ‘선조’

<사진 4> 󰡔상촌고󰡕 「동양신씨계첩」 ‘자손’

문집의 권두 또는 부록에 저자의 세계

(

世系

)

를 수록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

그러나

17

세기 이전까지는 결 코 흔한 사례가 아니었다

.

현전하는 문집에 수록된 저자 세계의 상당수는 부계 중심의 종법제가 확립된

17

세 기 후반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

「동양신씨계첩」은 직계 중심의 저자 계보가 문집에 수록된 사례 가운데 상당 히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애초에 문집에 수록할 목적으로 후손이 간략히 작성한 세계와 달리

,

「동양신씨계첩」은 본디 신흠이 족보

(8)

편찬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

주지하다시피 조선초기 족보는 혼인관계로 연결되는 이성친도 광범위하게 수 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

그러나

17

세기를 전후하여 종법제의 확산과 더불어 이성친은 점차 배제되고 동성친 위주로 족보가 구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

4) 「동양신씨계첩」이 철저한 직계 위주의 보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

신흠은 동성친 위주의 족보를 편찬할 의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의 의도는 족보 편찬에 대한 그의 평소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사람은 자기 종족(宗族)에 본계(本系)가 있고 외씨(外氏)가 있고 연파(聯派)가 있다. 그런데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본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하지만 외씨와 연파에 대해서는 자세히 할 겨를이 없다. 이 것은 계보에 밝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세히 할 겨를이 없는 것은 일부러 소략하게 하여 그러한 것 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문헌이 부족하고 견문이 좁으니, 자세히 하고자해도 할 수가 없다.5)

이 글은 신흠이 서원이씨

(

西原李氏

)

의 연파보

(

聯派譜

)

에 부친 서문이다

.

신흠은 이성친을 배제한 동성친 중심의 족보가 계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

그러나 이성친을 자세 히 기록하지 않는 것은 문헌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제약에서 비롯된 부득이한 결과라고 하였다

.

이어지는 내용에 따르면 연파보를 편찬한 이는 이명준

(

李命俊

)

으로 당시 서원현감

(

西原縣監

)

이었다고 하 였는데

,

이명준이 서원현감에 임명된 것은

1611

년으로

,

신흠이 󰡔성보󰡕의 편찬에 착수하기 이전에 해당한다

.

신흠은 족보에 이성친을 모두 수록할 수 없다는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

이러한 인식은 󰡔성보󰡕의 편찬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신흠이 동성친 위주의 족보 편찬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

족보 편찬이 춘천 유배기에 시작되었으 니

,

당시의 상황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

이 점에 대해 󰡔성보󰡕의 말미에 수록된 신민일의 발문 은 단서를 제공한다

.

지난 광해조에 사문(斯文)의 상촌(象村) 상국(相國)이 유배되어 春川에 살았는데, 장절공의 묘를 참 배하고는 후손의 번성이 선조의 음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유념하고, 번성한 씨족에 보첩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겨 수집에 전념하고 편찬에 집중하였다.

신민일은 신흠이 춘천 유배기에 신숭겸의 묘소를 참배한 일을 계기로 족보의 편찬에 착수하였다고 하였 다

.

󰡔상촌고󰡕에 실려 있는 「제시조장절공묘문

(

祭始祖壯節公墓文

)

」은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

신흠은 이미 유배 전부터 신숭겸의 추숭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 1603

년 한준겸

(

韓浚謙

)

이 곡성의 신숭겸 사당을 중수하 자 「장절공사우중수기

(

壯節公祠宇重修記

)

」를 지었으며

, 1605

년 신경익

(

申景翼

)

이 신숭겸의 행장을 간행하자

「장절공행장발

(

壯節公行狀跋

)

」을 지었다

. 1607

년에는 유영순

(

柳永詢

)

이 대구에 신숭겸의 충렬비를 건립하자

4) 이 시기 족보 체재가 동성보로 변화하는 양상과 배경에 대해서는 권기석, 앞의 책, 166~183쪽 참조.

5)申欽, 󰡔象村稿󰡕 卷21, 「李西原聯派譜序」, “凡人之於其宗, 有本系焉, 有外氏焉, 有聯派焉. 而世之治譜牒者, 多詳於本系, 不暇詳 外氏聯派, 是不可謂明其系也. 然其不暇詳者, 非故略而然也. 吾東方文獻不足, 聞見謏小, 卽欲詳而不得也.”

(9)

「고려 태사 장절 신공 충렬비

(

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

)

」를 지었다

.

이상의 글은 모두 󰡔성보󰡕에 실려 있는데

,

신흠이 춘천 유배 이전부터 신숭겸의 추숭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그러나 유배 라는 특수한 경험은 그가 신숭겸으로부터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사실 신흠의 선대는 그다지 현달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 5

대조 효

(

)

는 정언

(

正言

),

고조 자계

(

自繼

)

는 전 생서주부

(

典牲署主簿

),

증조 세경

(

世卿

)

은 사직서령

(

社稷署令

)

에 불과하였다

.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우 참찬

(

右參贊

)

에 오른 조부 영

(

)

에 이르러서였다

.

신흠은 이를 두고

대대로 덕을 쌓아 공에 이르러 가문이 커져 조금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

6)고 하였다

.

조부의 성취로 비로소 가세가 진작되는 듯하였으나 신흠의 부친 승서

(

承緖

)

는 개성부도사

(

開城府都事

)

로 재직 중이던

1572

42

세로 세상을 떠났다

.

신흠의 모친 은진송씨는 이미 이해

4

월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흠 은 불과

7

세에 고아가 되어 외조부 송기수

(

宋麒壽

)

에게 양육되었다

.

따라서 신흠의 성장과정에서 부계

(

父系

)

의 영향은 사실상 미약하였다고 하겠다

.

그러나

1583

년 신흠의 외숙

(

外叔

)

송응개

(

宋應漑

)

가 이이

(

李珥

)

를 탄핵하자 신흠은 이이를 옹호하여 외가 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

7) 이러한 상황은 부계

(

父系

)

에 대한 신흠의 집착을 오히려 강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

게다가 유난히 병약했던 그로서는 자신에게서 가문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

이 후 신흠은 판서에 이르렀으며 아들 신익성은 부마가 되어 가문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

그러나

1613

년 계축옥사가 일어나면서 신흠의 정치적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

신흠은 유교칠신

(

遺敎七臣

)

으 로 지목되어 방귀전리

(

放歸田里

)

처분을 받아 김포

(

金浦

)

에 우거하였다

.

이 당시에 지은 부친 신승서

(

申承緖

)

의 묘표 「선부군묘표

(

先府君墓表

)

」에 그가 선대의 사적을 정리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만한 내용이 보인다

.

계축년(1613) 여름, 선종대왕(宣宗大王)의 유교(遺敎)로 인하여 외척(外戚)에 연루되어 방귀전리 처 분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입신양명한 것은 모두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기신 음덕 덕택이고, 재앙 을 만난 것은 실로 시운(時運)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저 행동을 잘못하지 않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 게 함으로써 온전히 돌아갈 바탕으로 삼고, 어버이를 드러내는 의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갑자기 죽기 전에 묘소에 열행을 게시함으로써 불초한 나의 끝없는 사모의 심정을 담고자 한다. 지극한 감정은 글 로 표현할 수 없고, 지극한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후세의 후손들이 선대의 덕을 살피고자 한다 면 여기서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8)

「연보」에 따르면 신흠이 부친의 묘표를 세운 것은

1613

년 가을의 일이다

.

선조의 음덕으로 성취를 거두었 으나 시운이 따르지 않아 재앙을 만났다고 하며

,

생전에 선조의 사적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고자 한다는

6) 申欽,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 “代有畜德, 及公而大, 少振華問.”

7) 󰡔宣祖修正實錄󰡕 19121.

8)申欽,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 “癸丑夏, 以宣宗大王遺敎, 株連姻媾, 罷歸田里. 自念成立顯揚, 罔非先考妣敷遺之餘慶, 遘値災釁, 良由時命之或舛. 唯以不跲于行, 無媿于中者, 爲全歸之地, 爲顯親之義. 庶幾未及溘先朝露, 庸揭烈于墓道, 以寓不肖 無窮之慕. 至情無文, 至哀無辭, 來世雲仍, 其欲考于世德, 尙有徵于茲.”

(10)

의도를 밝혔다

.

이후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신흠은 사흉

(

四凶

)

으로 지목되어

1617

년 춘천으로 유배되었다

.

「연보」에 따르면 신흠은 춘천에 유배되던 해 여러 차례 병을 앓아 위독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

정치적 생명과 육체적 생명이 모두 위태로왔던 이 시기

,

그는 생전에 선대의 기록을 정리해 둘 필요성을 절실히 느 꼈던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이 족보 편찬이 유배기에 이루어진 이유이다

.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신흠은 조정에 복귀하고

,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

조정의 원로로 활약하면서

󰡔성보󰡕의 완성이 자연히 미루어졌다

.

위기의식이 옅어진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

결국 신흠은

󰡔성보󰡕를 완성하지 못하고 신익성에게 마무리를 당부한 채 세상을 떠났다

.

Ⅳ. 신익성의 족보 편찬 ‒ 가문 위상의 계승과 친족 관념의 변화

신익성은 신흠의 초고를 바탕으로 󰡔성보󰡕의 증보 작업에 착수하였다

.

신익성은 신흠이 남긴 초고를 바탕 으로 전국에 흩어진 동성친을 광범위하게 수소문하였다

.

신익성의 「평산신씨성보서」에 따르면

,

그는 본적지 인 평산을 비롯하여 십여 개 고을에 흩어져 사는 친족을 모두 조사하여 수록하였다고 하였다

.

이 때문에 󰡔성 보󰡕의 간행은 신흠이 세상을 떠난 뒤

8

년이 지난

1636

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

결과적으로 󰡔성보󰡕는 대동보

(

大同譜

)

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데

,

이는 신익성의 공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부친이 남긴 직계 중심의 소략한 보첩을 대동보의 수준으로 증보하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되지만

,

신익성이 증보 과정에 대한 언급을 거의 남기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

다만 신익성이 󰡔성보󰡕

의 편찬과정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전하여

,

증보 과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우리 태사(太史, 신숭겸)의 후예는 동방에서 벼슬한 지 천 년이 되었지만 씨족의 족보가 전하지 않 으니 자손의 수치입니다. 선친께서 유배 중에 대략 편찬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이어서 완성할 책임은 실로 제게 있습니다. 한창 각 파를 수집하여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예를 모방해 성보를 편찬하 고 있습니다. 장차 간행하여 전하면 이를 이어 큰 족보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존장께서는 자신의 계보 및 내외 자손의 이름을 적어 보내주십시오. 대구 의성에도 동성이 많으니, 만약 제 뜻으로 본도의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있는 곳마다 기록하여 보낸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9)

이 편지는 간본 󰡔낙전당집󰡕에는 보이지 않고

,

가전

(

家傳

)

󰡔낙전당고

(

樂全堂稿

)

󰡕에만 수록되어 있다

.

이 편 지의 수신자로 명기된 신헌

(

申獻

)

은 동종

(

同宗

)

으로 보인다

.

신익성은 그의 세계를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한

9) “惟我太師之裔, 冠冕東土垂千禩, 而氏族之譜無傳焉, 則子姓之羞也, 先君謫中, 略爲撰次, 未克完編, 續成之責, 實在翊聖, 方裒 集各派, 倣全義李氏例, 撰成姓譜, 將刊傳, 繼此爲大譜之圖, 願尊亦錄所自出並及內外子孫之名以送, 大丘義城亦多同姓者, 若以 鄙意通文本道列邑, 隨所在錄送, 亦大幸也.”(申翊聖, 「申獻」, 󰡔樂全堂稿󰡕 卷21)

(11)

,

대구 의성에 거주하는 동성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가급적 많은 계보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

신헌이 인근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

신익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종인들의 계보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

주목할 것은 전의의씨의 전례에 따라 󰡔성보󰡕를 편찬하였다는 언급이다

.

전의이씨의 전례란 신익성이 서문 을 쓴 󰡔전의이씨성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

우리 동방은 세가(世家)를 중시한다. 세가의 족보가 번갈아 나와 함께 전하고 있는데, 자세함에 힘 쓰면 곁으로 이성(異姓)을 모으고, 간략함에 힘쓰면 전적으로 하나의 성씨를 이룬다. 문화유씨(文化柳 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가장 번창하였으며 족보도 가장 자세하고 거질이니, 부지런히 자문하고 기술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숙 도사공(都事公, 李耈俊)이 전의이씨족보 2책을 제게 주면서 그 뒤에 글을 쓰라고 하였다.

우리 이태사(李太師, 李棹)와 권씨, 유씨 두 집안의 시조는 같은 시대에 자취를 열었으며, 후손의 번 창함도 대략 비슷하다. 하지만 보첩이 조금 간략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의 성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근원으로부터 지류로 나아가되 성씨를 얻은 딸에게서 그치고 사위를 부기하였으니 간략하면서도 갖추 어졌다. 시작과 끝을 탐구하는 것이 마치 강(綱)에서 목(目)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아 자세하고 거질인 족보와 비교해도 부족할 것이 없다.

노(魯)나라가 반제(頖祭)를 먼저 지내고 교제(郊祭)를 뒤에 지낸 것은 가까웠기 때문이고, 노나라가 등()나라를 윗자리에 앉히고 설(薛)나라를 아랫자리에 놓은 것은 친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의 예 는 노나라에 남아 있으니, 외숙께서는 이를 따라 결정하였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물이 하수(河水)에서 근원하여 강에 도달하고 바다로 흐르기까지 몇 천 리를 거치는 동안 유파가 나뉘고 지류가 갈라지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반드시 그 종(宗)을 일컫는다. 사람이 조상에게 성을 받아 내 몸에 이르 기까지 그 사이에 몇 세대를 거치겠는가마는, 후손을 비호할 만한 공덕이 있는 자를 반드시 종(宗)이라 고 한다. 이것은 자손이 골라서 종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론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10)

신익성이 외숙 이구준

(

李耈俊

)

의 부탁으로 쓴 󰡔전의이씨성보󰡕의 서문이다

.

선행연구에 따르면

,

이 글은

17

세기에 내외보와 동성보가 공존하면서 점차 후자로 교체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

11)

신익성은 이 글의 대부분을 족보의 수록 범위를 동성친에 한정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할애하였다

.

동성 보의 편찬 과정에서 내외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은

,

동성친 위주의 족보가 여전히 보편적이지 않

10) “吾東重世家, 世家之譜互出騈傳, 務詳則旁聚異姓, 務簡則專成一氏, 若文化之柳, 安東之權, 爲最繁而譜亦最詳而鉅, 盖勤於周 咨述作之不替也. 舅氏都事公以全義李氏譜二筴畀翊聖識其後, 惟我李太師與權柳兩家祖, 並世肇跡, 派裔之繁, 亦略相似, 而譜 牒之稍簡者爲專成也, 源而委之, 止于得姓女子, 係其婿則簡而備也, 原始要終, 如綱之目, 視彼詳而鉅者, 無不足也. 魯祭先頖後 , 近也, 魯賓先滕後薛, 親也, 周之禮在魯, 舅氏其裁乎是矣. 譬之水源于河而達于江而注于海, 歷幾千萬里, 其間分派枝裂者何 , 而必稱其宗人之受姓于祖, 及吾之身, 其間歷幾世而有功德可以庇族裕後者, 亦必稱曰宗, 此非子孫有所選擇而宗之, 公議之在 人心, 不可誣也.”(申翊聖, 「全義李氏姓譜跋」, 󰡔樂全堂稿󰡕 卷13)

11) 권기석, 앞의 책, 170~171.

(12)

았음을 반증한다

.

이 글에 언급된 문화유씨

(

가정보

)

와 안동권씨

(

성화보

)

의 경우와 같이 동성친과 이성친을 모두 수록한 거질의 족보야말로 가문의 번영을 입증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

수록 범위를 동성친에 한정한 󰡔전의이씨성보󰡕는 두 가문의 족보에 비해 소략할 수밖에 없다

.

신익성은 󰡔전의이씨성보󰡕의 위상과 가치를 제고하려는 목적에서

,

역사적 근거를 인용하여 동성보 편찬 방식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

그 러나 동성보에 해당하는 󰡔전의이씨성보󰡕의 서문을 쓴 사람이 이성친에 해당하는 신익성이었다는 사실에서

,

동성 위주의 친족관념이 여전히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

신익성은 󰡔전의이씨성보󰡕의 체제를 모방하여 󰡔성보󰡕의 수록범위를 동성친으로 한정하였다

.

동성친 위주 의 족보 편찬은 부친의 유지를 이은 결과이기도 하다

.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 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족보 편찬의 보편적인 관례였으며

,

평산신씨가의 경우 가문의 위상 제고 를 위한 이성친의 기여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

일례로 시조 신숭겸의 추숭은 본손이 아닌 외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 1589

년 평산신 씨의 실제 본적지인 곡성에 신숭겸 사당을 세운 것은 신옥

(

申沃

)

의 외손 이광

(

李洸

)

이었고

, 1603

년 이를 중 수한 것은 신건

(

申健

)

의 외손인 한준겸

(

韓浚謙

)

이었다

. 1607

년 신숭겸이 순절한 대구에 충렬비를 세운 것도 신효손

(

申孝孫

)

의 외손 유영순

(

柳永詢

)

이다

.

훗날 신흠의 외손 박세채가 신완

(

申琓

)

의 부탁을 받고 󰡔태사장 절공유적󰡕을 편찬

,

간행한 것도

,

평산신씨의 이성친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관여하였음을 나타낸다

.

이러한 상황에서 신익성은 「전의이씨성보서」에서와 마찬가지로

,

󰡔성보󰡕를 동성친 중심으로 구성한 이유를 나름대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신익성은 󰡔성보󰡕에서 이성친을 배제한 이유는 간결을 추구하는 책 이므로 부득이 소략하게 한 것일 뿐

, ‘

안은 후하게 하고 밖은 박하게 한 것이 아니다

[

非厚於內而薄於外也

]’

라 고 해명하였다

.

신익성은 󰡔성보󰡕에서 이성친을 배제한 이유를 간결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

하지만 신익성이 본디 직계 위주로 구성된 부친의 초고를 대동보의 수준으로 증보한 것을 보면

,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이라고 보기 는 어렵다

.

내외보에서 동성보로의 이행은 일견 친족의 범주가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

동성이라면 아무 리 분파가 다르고 촌수가 멀더라도 친족의 범위에 포함하는 대동보의 성격을 감안하면

,

친족의 범주는 오히 려 확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

동성친 전체를 한 가문으로 여기는 이러한 의식은 신익성이 남긴 또다른 족보의 서문 「한산이씨족보서

(

韓山李氏族譜序

)

」에서도 나타난다

.

󰡔성보󰡕를 대동보의 수준으로 증보한 또다른 이유는 󰡔성보󰡕의 권두에 실려 있는 인물 전기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

󰡔성보󰡕의 권두에 별도의 전기가 수록된 인물은 신숭겸

,

신군평

,

신안

,

신효

,

신상

,

신영인데

,

이중 신 군평과 신상은 신흠의 직계가 아니다

.

그러나 신군평은 정

3

품 어사대부를 역임하였으며 󰡔고려사󰡕에 수록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초창기 평산신씨가문의 위상을 입증하는 인물이다

.

또한 신상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는 데

,

조선 초기 평산신씨 인물 가운데에는 상당한 지위에 해당한다

.

기묘사림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 역시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에 합당하다

.

신익성이 직계에 한정된 신흠의 󰡔성보󰡕를 증보한 것은 내세울 만한 인물 을 더 확보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

또 신익성이 동성친 전체를 한 가문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

신익성의

6

대조 신효의 집

(13)

터가 행주

(

幸州

)

백석리

(

白石里

)

에 있었는데

,

후손이 대대로 이어받아

5

대손 신홍제

(

申弘濟

)

가 소유하게 되 었다

.

아들이 없던 그는 임종에 이르러

다른 성

(

)

에게는 전할 수 없다

는 이유로 신효의 집터를 신익성에 게 넘겨주었다

.

12)

11

촌 숙부에게서 뜻하지 않게

6

대조의 집터를 물려받은 신익성으로서는

,

동성친 전체가 한 가문이라는 관념이 더욱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아울러 사위를 배제하고 신익성에게 집터를 넘겨준 신홍제의 행위에서

,

가까운 이성친보다 먼 동성친을 일가로 여기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

Ⅴ. 󰡔성보󰡕 이후 평산신씨가의 계승과 족보 편찬

신흠은 정치적

,

학문적 성취로 가문의 위상을 대폭 제고하였으며

,

󰡔성보󰡕의 편찬을 통해 후손에게 가문의 식을 전하고자 하였다

.

이로 인해 신흠의 후손들은 선조에 대해 상당한 자긍심을 드러내었다

.

신익성은 「만 록

(

漫錄

)

」 첫머리에

6

대조 신효의 자세한 행적과

5

대조 신영의 서법

(

書法

)

에 대해 기술하였다

.

신흠의 손자 신정

(

申晸

)

은 신안의 묘표 「팔대조 종부령부군 묘표

(

八代祖宗簿令府君墓表

)

」를 지었으며

,

「선세유사

(

先世遺 事

)

」에 신안

,

신효

,

신영

,

신승서

,

신흠의 일화 수 칙을 소개하였다

.

또 「시제자문

(

示諸子文

)

」에서는 시조 이 하 선조들의 내력을 서술하고 자손들에게 가문의 유지를 당부하였다

.

하지만 그는 이 글에서 가문의 위기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

그러나 나는 몹시 두려운 점이 있다. 서호공(西湖公, 申曉)은 인재(寅齋, 申槩)를 형으로 두었으나 겨우 정언에 임명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주부공(主簿公, 申自繼, 신효의 子)과 사직공(社稷 公, 申世卿, 신효의 孫)은 모두 낮은 관직에 머물렀고 현달한 형제도 없었다. 참찬공(參贊公, 申瑛, 신 효의 증손)이 당세에 현달하였으나 아들들은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선왕부(先王父, 申欽)은 신하로 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한 시대에 명망이 높았으나 종조부(從祖父, 申鑑, 신흠의 弟)는 영락하고 불우 하여 끝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나처럼 불초한 자가 외람되게 성은을 입어 자제와 더불어 모두 요 직에 올라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생각할 때마다 복이 아니라 재앙이다.13)

말미의 언급은 겸사

(

謙辭

)

로 보이지만

,

선조들의 높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간헐적으로 이어진 결과

,

간신히 유지한 가문의 위상이 언제든 실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

신익성 역시 부친 신 흠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존립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신익성과 신익전은 각기

5

남을 두었으며 신익성 계에서는 신최

(

申最

),

신익전 계에서는 신정

(

申晸

)

이 비교

12) “幸州白石里, 卽西湖散人舊業, 子姓世守至申進士弘濟, 無子, 臨卒謂其婿金哲元曰, 此家基不可傳於他姓, 吾死後歸之東陽.”( 翊聖, 「漫錄」, 󰡔樂全堂稿󰡕 卷23)

13) 申晸, 󰡔汾厓遺稿󰡕 卷10, 「示諸子文」, “余則甚懼焉, 西湖公雖以寅齋爲兄, 纔拜正言, 掛冠歸隱. 主簿公及社稷公, 皆沈淪下僚, 且無兄弟顯要者. 參贊公顯掦當世, 而諸子俱未達, 先王父位極人臣, 名高一世, 而從祖父落拓不偶, 終未大顯. 如余不肖者, 濫叨 謬恩, 並與子及弟, 而俱入要津, 爲人所指點, 每一念之, 非福伊災.”

(14)

적 높은 성취를 거두었으나 나머지는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 단명하였다

.

결국 신흠의 증손대에 와서는 위기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특히 신흠의 종손

(

宗孫

)

이자 신최의 장남 신의화

(

申儀華

)

26

세로 요절하면서 상촌가의 침체는 더욱 깊어졌다

.

이러한 점에서 신의화가 임종을 앞두고 종형

(

從兄

)

김석주

(

金錫冑

)

에게 남긴 말은 의미심장하다

.

“지금 제가 죽는 것은 저의 운명이 아닙니다. 하늘이 우리 가문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는 이미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뜻이 있고 재주도 없지 않은데 이제 불행히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행여 하늘이 저를 불쌍히 여겨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여 끝내 펴지 못한 뜻 을 펴게 하지 않을지요.”

또 말하기를,

“상자에 있는 선친의 유고를 모두 형에게 맡깁니다. 저는 양웅(揚雄)에게 부끄럽지만 형이 후파(侯 芭)가 되어주십시오. 제가 지은 것으로 아무아무 편이 있는데 작자의 뜻에 조금 부합합니다. 형이 만약 선친의 유고 뒤에 붙인다면 제가 간직한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세상을 떠났다.14)

신의화가 김석주에게 선친의 유고를 맡긴 이유는 후손이 영락하여 간행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였 기 때문이다

. ‘

하늘이 우리 가문을 버린 지 오래

라는 말에서 가문의 침체를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 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김석주는 신의화의 당부대로 신최의 유고를 󰡔춘소자집

(

春沼子集

)

󰡕으로 간행하면 서 신의화의 시문 몇 편을

사아자유고

(

四雅子遺稿

)’

라 명명하여 부록으로 덧붙였다

.

신흠의

5

대조 신효를 파조

(

派祖

)

로 삼는 정언공파

(

正言公派

)

17

세기 평산신씨의 대표적 문반가

(

文班家

)

였으나 상촌가의 침체와 함께 퇴조를 보인다

.

반면 신효의 형 신개

(

申槩

)

를 파조로 삼는 문희공파

(

文僖公派

)

는 점차 무관직으로 진출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무반가

(

武班家

)

로 자리잡았다

.

15) 이후 족보의 편찬이 문희 공파 후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

󰡔성보󰡕는 간행 이후 평산신씨 문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

신흠의 직계 후손들은 물론

,

방계 후손 들의 기록에서도 󰡔성보󰡕를 열람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보󰡕의 문제점이 지적 되기 시작하였다

.

신익성의 스승이었던 이현영

(

李顯英

)

의 손녀사위 신여식

(

申汝拭

, 1627~1690)

은 󰡔성보󰡕를 간행한 뒤로 후 손이 더욱 번성하여 외방에 사는 자손 가운데 누락된 이가 더러 있다고 하였다

.

16) 신여식은 󰡔성보󰡕의 증보 작업을 한동안 진행하다가 보학

(

譜學

)

에 밝은 신양

(

申懹

)

에게 책임을 넘겼다

.

신양은 십여 년이 지나서야 증

14) 金錫冑, 󰡔息庵遺稿󰡕 卷23, 「內弟權知承文院副正字申君墓誌銘」, “今吾之死, 非吾命也, 天之廢吾門久矣, 吾已知其不支, 然吾 有志, 且非無才者, 今不幸夭死, 或者天其憐吾, 使復爲人以終展其所未展者耶? 又言曰, ‘先人遺草之在篋者, 悉以付兄, 余愧子 , 兄其爲侯芭矣, 余所著有某某篇, 稍合作者之旨, 兄若附之先人遺草之後, 亦可知余之所存矣.’ 言止而已冥然逝矣.”

15) 조선후기 평산신씨 문희공파의 세력화 과정에 대해서는 장필기, 앞의 글 참조.

16) 申琓, 󰡔絅菴集󰡕 卷8, 「平山申氏族譜序」, “樂全申公追理先相公未成之書, 纂成姓譜行于世, 厥後派流愈遠, 支裔益繁, 子姓之散 居外方者, 或有漏而不錄者.”

(15)

보를 완료하고 신여식의 아들 신완

(

申琓

)

에게 서문을 받아

1702

6

월 개성

(

開城

)

희우당

(

喜雨堂

)

에서 간행 하였다

.

이것이

1702

년 간행된

임오보

(

壬午譜

)’

이다

(

사진

5, 6).

<사진 5> 󰡔평산신씨세보󰡕(임오보) 신완 서문

<사진 6> 임오보 본문

그 뒤를 이어 신완의 아들 신성하

(

申聖夏

)

는 족보에 실려 있는 선조의 사적이 소략하다는 점을 문제삼아 선조들의 시문과 묘도문자를 따로 수집하여 가승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

17) 족보의 개정 작업은 이후로도 계 속되었다

.

현전하는 것으로는

1797

년 간행

5

4

책본 신귀조

(

申龜朝

)

서문의 󰡔평산신씨보

(

平山申氏譜

)

󰡕

(

正 言公派丁巳譜

), 1797

년 간행

13

13

책본 신응선

(

申膺善

)

서문의 󰡔평산신씨세보

(

平山申氏世譜

)

󰡕 등이 있다

.

그런데 평산신씨의 족보가 여러 차례 증보 간행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문제가 있었다

.

바로 대사성공

(

大 司成公

)

신자승

(

申自繩

)

의 아들 장령공

(

掌令公

)

신숙정

(

申叔楨

)

과 군수공

(

郡守公

)

신숙권

(

申叔權

)

의 서차 문 제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1804

년 간행된 󰡔평산신씨세보󰡕의 정범조 서문에 자세하다

.

평산신씨는 세월이 오래되고 업적이 커서 우리나라의 명망있는 집안이다. 태사 장절공으로부터 15 대를 전하여 장령공이 되었는데, 장령공의 부친 대사성공에게는 9남이 있었다. 장령공은 장남이고 군

17) 申暻, 󰡔直菴集󰡕 卷10, 「平山申氏家乘跋」, “我申氏族譜卷首, 雖嘗略載先世之名行事蹟, 顧不免簡而未該, 踈而未備, 儘不能無 遺憾. 故先君子竊深病之, 別爲家乘一書.”

(16)

수공은 사실 차남이니, 가승을 보면 알 수 있다. 불행히 족보가 전란으로 사라졌는데, 뒤에 나와 병자 보를 만든 사람이 장령공을 차남으로, 군수공을 장남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가(四佳) 서거정(徐 居正)이 문희공(文僖公)의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역시 장령공을 아우라고 하였다. 병자보가 여기에 근거하여 증명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문의 서사는 오류가 많다. 문희공의 원배(元配)의 성씨를 기록하지 않았고, 또 장령공의 여섯째 동생을 기록하지 않고 아홉째 동생을 여섯째라고 하였으니, 장령공이 형인데도 아우가 된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것을 증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임오보가 나온 뒤로 장령공의 7세손 판윤공이 종인(宗人)들과 병자보의 오류를 바로잡아 장령공이 장남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같은 족보에 있던 군수공의 자손들은 다른 말이 없었다. 종인들이 중시하 는 우의정 신완, 개성 유수 신양이 서문과 발문을 썼는데, 비문을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 않은 것이다.

요즘 종인 중에 신대흡(申大翕)이라는 자가 족보를 편찬하자는 논의를 꺼내고 그 일을 주도했는데, 또 장령공의 서차를 바꾸고자 하였다. 종인들은 입을 모아 안 된다고 다투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또 그가 만든 족보는 신씨 중에 후사가 없는데 후사가 있다고 된 경우, 관직이 없는데 관직이 있다고 된 경우, 서자가 적자로 된 경우, 지손이 종손이 된 경우로서 예전의 족보에서 배척되어 감히 들어오지 못 했던 이들도 모두 들어오게 허락하였으니, 참으로 족보의 이변이며 사대부의 수치이다. 이에 종인들이 의리상 족보를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겨 각기 족보를 만들어 후손에게 전해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신씨 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서문을 맡겼다.18)

신익성이 편찬한 병자보는 신숙권을 형으로

,

신숙정을 아우로 기재하였다

.

병자보의 신숙권 항 각주에는

다른 족보에는 숙정이 장남으로 되어 있고

,

평천보에는 숙권이 장남으로 되어 있다

.[

他譜以叔楨爲長

,

平川譜 以叔權爲長

]”

라고 하였으니

,

이미 병자보 편찬 당시 전하던 족보에 서차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것이 임오보에서 신숙정이 형으로

,

신숙정이 아우로 수정된 뒤로 평산신씨 일족은 수정된 서차를 따르고 있 었는데

,

느닷없이 신대흡이 병자보의 서차를 따라 새로이 족보를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

신대흡이 편찬했다는 족보는

1797

년 목활자로 간행된

1

책의 󰡔평산신씨소보

(

平山申氏小譜

)

󰡕이다

.

여기에 신대흡의 지문

(

識文

)

이 있는데

,

당시 승지였던 신대현

(

申大顯

)

이 이 족보의 편찬을 후원하였다고 한다

.

신대 현과 신대흡은 모두 신자준

(

申自準

)

의 후손으로

,

신자준의 아우인 신자승

(

申自繩

)

아들 서차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

그러나

9

세 이하 방계의 기록까지 자세히 하겠다는 의도에 신자승의 서차 문제를 건드린 것으 로 보인다

.

19) 󰡔평산신씨소보󰡕의 서차를 날조로 간주한 종인들은 별도의 족보를 편찬하였으며

,

정범조는 여

18) 丁範祖, 󰡔海左集󰡕 卷20, 「平山申氏族譜序」, “平山申氏, 世綿而閥鉅, 爲東國望族. 自太師壯節公傳十五世, 而爲掌令公, 掌令公 之父大司成公有九子, 掌令公其長子, 郡守公實第二子, 而在家乘可徵也. 不幸宗譜佚兵燹, 後出而爲丙子譜者, 乃以掌令公爲第 二子, 而郡守公爲長子. 先是徐四佳居正撰文僖公碑文, 亦以掌令公爲弟, 豈丙子譜據此爲證歟. 然碑文叙事多踈謬, 不書文僖公 元配姓氏, 又不錄掌令公第六弟, 而以第九弟, 爲第六弟, 無怪其掌令公之以兄爲弟, 其不足爲證, 可知也. 逮壬午譜出, 掌令公之 七世孫判尹公, 與諸宗人釐正丙譜之誤, 而以掌令公爲長, 其時郡守公子孫之同譜者, 無異辭. 宗人之重如右議政琓留守懹, 爲序 若跋, 盖不以碑文爲可信也. 近者, 宗人有大翕者, 倡議修譜, 而主其事, 又欲變易掌令公序次, 諸宗人合辭爭不可, 而終不聽. 其爲譜, 凡姓申者之無承而冐承者, 無官而冐官者, 庶冐嫡, 支冐宗者, 見斥於前譜而不敢入者, 幷許入焉, 誠譜家之變異, 士大夫 之所羞也, 於是諸宗人謂義不可同譜, 謀各爲譜以傳其子孫, 以範祖之爲申氏外出也, 屬爲序.”

19) 申大翕, 󰡔平山申氏小譜󰡕, 「識」, “九世以下, 並支裔而該錄傍註.”

(17)

기에 서문을 써준 것이다

.

정범조가 서문을 쓴 평산신씨족보는

1804

년 간행된 󰡔평산신씨세보󰡕이다

.

이 책은

1

책의 목활자본으로 상 기한 정범조의 서문이 그대로 실려 있으며

,

서문을 쓴 날짜는

1799

년으로 되어 있다

.

권말에는 간행을 주도 한 신광요

(

申匡堯

)

의 발문이 있는데

,

󰡔평산신씨소보󰡕의 오류 때문에 부득이 간행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

이 책에는

갑자중추충주개간

(

甲子仲秋忠州開刊

)’

이라는 간기가 있다

.

이후로도 평산신씨의 족보는 여러 차례 간 행되었으나

,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

사진

7, 8).

<사진 7> 󰡔평산신씨소보󰡕(1797) 본문

<사진 8> 󰡔평산신씨족보󰡕(1804) 정범조 서문

Ⅵ. 맺음말

본고는 신흠과 신익성

2

대에 걸쳐 편찬된 󰡔평산신씨성보󰡕를 통해 이 시기 족보 편찬의 양상과 그 배경을 살피고자 하였다

.

신익성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평산신씨성보󰡕의 편찬은 전란으로 일실된 족보를 재 구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

족보의 편찬이 본격화된 계기는 신흠의 춘천 유배였다

.

이 시기 정치적 생명 과 육체적 생명이 모두 위태로왔던 신흠은 간신히 구축한 가문의 위상이 자신의 대에서 끊어질 수도 있다는

(18)

위기의식을 절실히 체감하였다

.

이러한 위기의식은 족보 편찬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신흠이 정치적 입지가 안정되면서 위기의식은 약화되고

,

결국 족보의 편찬은 미루어지게 되었다

.

신흠 사후

,

신익성은 부친이 남긴 유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평산신씨성보󰡕의 초고를 발견하고 증보 작 업에 착수하였으며

,

그 목적은 신흠에 의해 다져진 가문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

신익성은 전국에 산재한 동성친을 광범위하게 수소문하여 이들을 모두 족보에 포함시켰다

.

󰡔평산신씨성보󰡕를 위시한 이 시기 일부 족보에서 발견되는 동성친의 폭넓은 수록 양상은

19

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대동보

(

大同譜

)

의 출 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계보를 서술하기에 앞서 주요 선조에 관한 기록을 서두에 수록하는 󰡔평산신 씨성보󰡕의 체재 역시 후대에 계승되어 족보의 일반적인 체재로 자리잡았다

.

결론적으로

,

이 시기 족보의 편찬은 전란 후 망실된 문헌을 수습

,

보완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

한편으로 인조반정 전후의 정치적 혼란으로 짙어진 위기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시기 미비한 여건 에서 편찬된 족보는 고증의 미비로 후대에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

후대 족보 편찬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

<참고문헌>

원전자료

金錫冑

,

󰡔息庵遺稿󰡕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申 暻

,

󰡔直菴集󰡕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申大翕

,

󰡔平山申氏小譜󰡕

,

개인소장

.

申汝拭

,

󰡔平山申氏世譜󰡕

,

개인소장

.

申 琓

,

󰡔絅菴集󰡕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申翊聖

,

󰡔樂全堂集󰡕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申翊聖

,

󰡔樂全堂稿󰡕

,

개인소장

.

申翊聖

,

󰡔平山申氏姓譜󰡕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

申 晸

,

󰡔汾厓遺稿󰡕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申 最

,

󰡔春沼子集󰡕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申 欽

,

󰡔象村稿󰡕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丁範祖

,

󰡔海左集󰡕

,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영인본

.

조선왕조실록

DB(http://sillok.history.go.kr)

고려사

DB(http://db.history.go.kr/KOREA)

(19)

논문 및 저서

권기석

,

󰡔족보와 조선사회󰡕

,

태학사

, 2011.

장필기

,

「朝鮮後期 武班家系의 構成과 閥閱化

(2)

:平山申氏 文僖公派 武班家系를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2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2002.

*

이 논문은

2014

3

27

일에 투고되어

,

2014

4

17

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 2014

5

8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

2014

5

9

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20)

❙Abstract❙

Compilation of Genealogy by Sangchon Family

20)

Jang, Yooseung*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features and background of the genealogy in the 17th century with special reference with “Pyeongsan Shin Family Geneology.” compiled by the two generation of Shin Heum and Shin Ikseong. Shin Heum recognized serious crisis awareness on the existence of his family with his exile to Chuncheon as a momentum and started compilation of “Pyeongsan Shin Family Geneology.” However,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his political status was stabilized, which weakened his crisis awareness and resulted in the postponement of the compilation of the genealogy.

After the death of Shin Heum, Shin Ikseong found the draft of “Pyeongsan Shin Family Geneology” and started the supplement of the genealogy. It aimed to reinforce the family status established by Shin Heum. The system of “Pyeongsan Shin Family Geneology” that Shin Ikseong completed became the general system of the genealogy.

The compilation of genealogy in the 17th century began in order to collect and supplement lost literature after a war. And, it is an output of crisis awareness deepended by the political crisis of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While the compiled genealogy of this period caused disputes in the later generation thanks to the lack of historical research, it became the class of the genealogy compilation in the later generations.

[Key Words] Shin Heum, Shin Ikseong, Pyeongsan Shin Family, Pyeongsan Shin Family Geneology.

Compilation of Genealogy

* Senior Researcher, Academy of Asian Studies, Dankook University

참조

관련 문서

1 John Owen,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John Bolt, trans. Scott Clark, &#34;Do This and Live: Christ's Active Obedience as the

After the palm strike I’ll pick up a cross check on his elbow with my left hand and begin a forehand thrusting line into his abdomen, groin, and inner thigh..?. Here he

The next morning, Hassan runs to Nasreddin’s house again.. with his

Independently of the question of seduction, our patient, while he was a child, found in his sister a n inconvenient com- petitor for the good opinion of

(1) He became the captain of his school and held fund-raising events for people in need.. (2) He started

Jiho likes cooking food for his family

In his remarks, Ambassador Park expressed his deep gratitude to Norwegian Korean War veterans for helping Korea in overcoming the crisis of war as well as achieving the

 William, the Duke of Normandy , invaded England in the autumn of 1066, beginning a campaign of conquest leading to his crowning as the King of England and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