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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2주차 교안 - 위정척사와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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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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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2주차 교안 - 위정척사와 개화

한국 근대사회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는 위정척사에서 개화로의 역사적 전 개는 봉건체제 해체의 필연적인 귀결이지만 그것이 또한 외압(外壓)이란 세계사적 조건과 결 부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국내적 조건과 국제적 조건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점 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조선왕조는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대외관계와 국제질서관을 일관적으로 표방하면서 전 통적 쇄국정책인 해금책(海禁策)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조선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왔고, 중국의 연경 (燕京[北京])을 중심으로 전래 유포된 천주교와 서구인 선교사들이 가져온 서양문물 및 한역 (漢譯) 학술서는 해마다 연경에 파견되는 사절들에 의해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천주교가 국내에 전파됨에 따라 봉건지배층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성리학의 획일적 지배 아래 서학(西學,주로 천주교)을 비롯한 이단(異端) ·이설(異說)을 철저히 배격하는 위정척사론(衛正 斥邪論)을 펴게 되었다.

1860년대와 1870년대 초기에는 구미열강이 중국과 일본을 개항시켜 동아시아에 강력한 거점 을 확보하였거니와, 오랫동안 대외접촉이 막혀 있었던 조선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의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봉건 말기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집정(執政)(1864-1873)이 시 작된 것이다. 이른바 내우외환에 직면한 대원군 정권은 대내적인 국가의 기강 확립 및 천주교 도 탄압과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위정척사(衛正斥邪)[통사수교거부]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1873년 국왕 고종(高宗)의 친정(親政) 선포로 대원군이 실각하게 되었다. 이후 고종은 자강정 책(自强政策)[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1875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 으키고, 이를 계기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선은 이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개항하게 됨으로써, 중화체제라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법적 세계질 서 속으로 편입되게 된다.

개항 직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구미열강에 이 미 종속되어 있던 청(淸) · 일(日)이 조선을 ‘차지하고자 각축을 벌이면서 조선에 직접적인 외 압을 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항 후 민족적 및 민중적 과제는 대내적으로 봉건적인 사회체제 를 변혁하여 자강(自强)과 근대화[‘반봉건 근대화’]를 추진하는 길이었고, 대외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는 것[‘반외세 자주’]이었으며 이 양자는 또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 대원군(大院君)과 위정척사정책(衛正斥邪政策)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執權)

2) 대원군 정권의 위정척사정책에 대한 평가

2. 고종(高宗)의 친정(親政)과 자강정책(自强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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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3년 고종의 친정 2) 고종의 자강정책

3. 개항(開港)과 수교(修交)

1) 개항의 과정

2) 구미 제국과의 수교 3) 개항에 대한 국내의 반향

대원군의 외교정책은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衛正] 이를 위협하는 사악한 세력을 배척하는[斥邪] 정책, 즉 위정척사정책(衛正斥邪政策)이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바른 것이 란 조선의 통치기반인 성리학적 세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란 이러한 질서에 위협이 되는 서양과 이들을 따라하는 일본 세력을 의미한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고도 한다.

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執權) (1864~1873)

1) 성격(性格) : 일종의 세도정치2), 왕권강화, 민본정치 표방 2) 내정(內政) : 비변사 폐지, 경복궁 중건, 서원 정리 등 3) 외교(外交) : 통상 수교 거부, 병인양요, 신미양요

* 대원군 개혁정치의 목표

“오욕인천리위지척(吾欲引千里爲咫尺) 오욕잔태산위평지(吾欲剗泰山爲平地) 오욕고남대문삼층(吾欲高南大門三層)”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이를 풀이하면 “나는 천리를 끌어다가 지척으로 삼고자 하고, 태산을 깍아 평지를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한다”라는 뜻이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천리를 끌어

1) 흔히 대원군의 외교 정책을 쇄국정책(鎖國政策)이라고 불러 왔다. 쇄국이란 말은 나라를 잠근다는 뜻 으로 외국과 일체의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대원군 집권기에 여전히 중국과 적극적 으로 교류하고 있었고, 일본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쇄국이란 말은 엄밀하게 말하여 맞지 않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주교재[저항과 지향] 15~19쪽 참조.

2) 세도(世道)란 본래 치세(治世)의 대도(大道) 즉 세상을 이끌어가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로, 때로는 세도 지임(世道之任) 즉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의미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세도(世道)의 담당자로서 국왕의 책임이 강조되었으나, 16세기 후반 사림정치(士林政治)가 성립한 후 산림(山林)이 의리주인(義理主人) 으로서 세도실현의 주체로 부각되어 공론(公論)을 업고 국론(國論)을 좌우하게 되면서, 군자(君子)라 불리우는 산림세력에게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귀속시켜야 한다는 세도재상론(世道宰相論)[세도우선론 (世道優先論)]이 정국운영과 사회체제 유지의 최우선의 가치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탕평정국하 에서 정치적 권한이 위축된 산림은 외척과의 결합을 통하여 경화벌열(京華閥閱)을 형성하였고, 이들이 정조(正祖) 사후(死後) 유주(幼主)의 즉위를 계기로 선왕(先王)의 세도(世道) 부탁과 외척과 산림을 한 가문에서 배출한 명문가문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세도지임(世道之任)’을 자처하고, 자기가문 이외의

‘세도지임(世道之任)’을 자처하는 세력은 모두 견제․비판하는 정치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이전 시기의 정치와 구분하여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박광용, <정치운영론>, <<조선 정치사>>(상․하), 청년사, 1990, pp.688-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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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지척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은 왕실 종친을 우대한다는 뜻으로, 왕실의 힘을 강화하겠다 는 것이다.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은 그동안 세도정치로 태산과 같은 권력을 누렸던 노론(老論)의 힘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말은 그동안 세도정치 아래에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남인(南人)과 같은 세력들도 고루 등용하 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대원군 정권의 위정척사정책에 대한 평가

1) 세계 대세에 눈이 어두운 고루하고 완고한, 시대 역행적인 정책이었다는 견해 2) 대외적인 민족적 위기에 즈음하여 과단성 있게 대응한 정책

어쨌든 대원군의 위정척사정책[쇄국정책]은 전통적 외교정책과는 다른 외세 침공에 대한 새 로운 대응방식으로서, 광범한 민중들의 반침략적 지향과도 부합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체제외적 과제인 ‘반외세 자주’라는 시대적 과제에 충실한 측면이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뒷받침 아래 쇄국양이정책을 계속적으로 강행한 것은 그 대내적인 봉건체제 강화책과 더불어 객관적으로 역사발전의 방향에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구미 제국과의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개항의 기회를 스스로 봉쇄 차단하는 것이 되 었다. 즉 체제내적 과제인 ‘반봉건 근대화’에는 역행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1. 1873년 고종의 친정

고종은 흔히 대원군 집정기라고 알려져 왔던 1864년에서 1873년 사이에도 국왕으로서 나름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고종이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자신의 권 위를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종의 강력한 친정의지는 반대원 군세력을 결집시키고 결국 대원군을 하야하게 한다. 이는 대원군의 위정척사정책이 갖는 한계 를 인식한 고종이 조선의 자주 자강을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2. 고종의 자강정책 3)

친정 이후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고종의 노력은 친군(親軍) 육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왕권강화 움직임에 신권(臣權) 세력들이 대응하게 된다. 이에 고종은 대 원군이 쌓아놓은 정치적 기반을 허물고 자신의 친정기반(親政基盤)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정 책 대안이 필요했다. 그 정책 대안으로서 고종은 ‘자강정책(自强政策)’을 추진하게 된다. 그 구체적 내용이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강병(强兵) 육성을 위한 ‘무비자강책(武備自强策)’

2) 대서양개방(對西洋開放)과 수교통상(修好通商)을 통한 ‘균세정책(均勢政策)’4)

3) 고종의 자강정책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려 한 측면에서 개화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선을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부강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 서 현재 학자들에 따라 자강정책, 개화정책, 부강정책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 은 주교재 45~6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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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정책구상을 실현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된 다. 그것이 바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었다. 이를 통해 고종은 막강한 조직과 군권 (軍權) 및 인사권을 장악하고 국정운영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자 하였다. 또한 자신의 왕권 강화책을 뒷받침할 친위세력을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어 외교정책의 전환이 있게 되었 다.

1. 개항의 과정

1) 운요호 사건(1875) : 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 근시켜 조선측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내의 반한감정을 고취시키고, 대규모의 군대파견을 준비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2)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1876) 체결

: 일본의 통상요구에 조선정부는 12개조에 달하는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를 ‘병자수호조약’

(丙子修護條約) 혹은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근대적인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 은 당시의 국제법인 ‘만국공법(萬國公法)’ 하에서 체결됨으로써 조선이 비로소 중국 중심의 세 계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 국제질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를 한국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2. 구미 제국과의 수교

: 세계 정세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형성되면서 수교의 필요성을 인식함.

1) 미국과의 수교 통상 조약(1882, 고종 19년) 2)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3) 기타 서양 제국과의 수교 : 영국(1882), 독일(1882),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등

3. 개항에 대한 국내의 반향

당시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계층의 상반된 두 가지 양태의 대응 : 위정척사론과 개항론 개항 당시의 위정척사론과 개항론이 비록 그 입각점은 달랐으나 모두 주관적으로는 우리 민족 이 당면한 시련을 극복하려는 애국적인 입장에서 주장한 것으로 양자 각기 한계성을 지닌 것 으로 파악된다. 위정척사론은 일본을 포함한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적 본질과 그 해독을 날카 롭게 간파하고 있으나 전향적인 진보와 발전의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세계사적 견지에서 볼 때 당시 쇄국이 계속 유지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었고, 개항 그 자체 가 또한 바로 식민지화를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회 그 자 체 속에 근대화의 내재적인 동인과 특히 자주적인 개항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대 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일본측의 포함(砲艦)외교와 외교적 술책에 유도되어 불평등조약 4) 현재 국제정치학적 용어로 하면 ‘세력균형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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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전제로 한 굴종적인 조건의 개항을, 당시의 집권층이 그 불평등성과 침략적 성격을 충 분히 간파하지 못한 채, 타율적으로 받아들인 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번 시간에는 근대의 시작이 되는 개항의 시점을 중심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개항 이전 대원 군의 위정척사정채[쇄국정책]과 이 정책이 포기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원군의 집권 시 기 내정은 개혁적 측면이 있었으나 외교에 있어서는 위정척사론을 바탕으로 배타적 외교정책 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발전된 서구의 문물을 거부함으로써 근대화에 뒤처지게 하는 것이었 기에 1873년 국왕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과는 다른 자강정책[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특히 이후 추진되는 '무비자강책'과 '균세정책'은 이후 역사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 치게 됩니다. 이러한 고종의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 중에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계 기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됩니다. 이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국과 맺 은 최초의 근대법적인 국제 조약입니다. 이후 조선은 중국 중심의 세계체제에서 새로운 국제 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강화도 조약으로 인한 개항을 근대사의 시작 으로 보는 것입니다. 개항은 일본의 강요라는 타율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이미 고종의 친정 이 후 조선은 개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자율적인 측면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개항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들을 어떤 세력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위정척사세력의 재집권 시도 로 볼 수 있는 임오군변과 개화세력의 집권 기도인 갑신정변을 공부하겠습니다.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③>>, 풀빛.

한국사연구회, <<제2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한 국 역 사 >>, 역사비평사.

이종범 · 최원규 편, <<자료 한국근현대사입문>>, 혜안.

이현종, <<한국개항장연구>>, 일조각.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개항전후 한국사회의 변동>>, 태학사.

국사편찬위원회 http://kuksa.nhcc.go.kr 서울대학교 규장각 http://kyujangga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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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회 http://www.hongik.ac.kr/~yoksa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history.or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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