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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전환기 한국 유교의 성찰과 전망 - 우리철학 총서 집필내용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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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김윤경

*

․홍정근

**

․이종란

***

․김현우

****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리(理)의 철학 3. 심(心)의 철학 4. 기(氣)의 철학 5. 실(實)의 철학 6. 나오는 말

<국문초록>

본 논고는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의 총서사업인 “근대전환기 한국철학의 도전과 응전”의 유교분야 중간 연구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유교분야 연구는 ‘리 (理)의 철학’, ‘심(心)의 철학’, ‘기(氣)의 철학’, ‘실(實)의 철학’으로 세분화하여 각각의 이론적 계승과 변용, 실천적 대응을 고찰하였다.

리(理)의 철학은 전통 성리학을 중심으로 선행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후 기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전개와 변용을 심도있게 검토하였다. 호락논변은 인간과 동물의 성(性)에 대한 이견에서 출발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양자의 종합을 지향하 며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학설로 이어졌다. 심(心)의 철학은 조선의 대표적 인 양명학자인 하곡학파의 후기 사상과 실천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후기 하곡 학파의 사상은 개인수양을 넘어 사회비판론을 포함한 일진무가(一眞無假)의 실학

* 제1저자,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 공동저자, 서일대학교 교양학과 강사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 연구원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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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學)으로 확장되어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운동을 주도하였다. 기(氣)의 철 학에서는 양명학과 노장학을 매개로 서학을 수용하여 현실에 접목시킨 홍대용, 이 규경, 최한기 등의 기 철학을 고찰하였다. 이들은 서양의 신(神)관념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음양오행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기 철학을 수립했 다. 실(實)의 철학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실학(實學)’ 개념의 형성과정을 고찰하고, 그 보다 상위 개념으로써 실의 철학을 분석하였다. ‘실학’이란 말은 뺷중용장구(中庸 章句)ㆍ서(序)뺸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현재까지 4가지의 범주로 발전해 왔다. 본 논고에서는 그 중 근대시기 형성된 ‘실학’ 개념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근대이후 형성된 ‘실학’ 개념 속에 있는 맹목적 서구 수용관을 비판하고, 동시에 국가와 민족 을 중시하는 새로운 실의 철학의 등장도 함께 고찰하였다.

본 논고는 근대전환기 전통 유교철학의 논리적 심화와 현실대응을 통섭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으며, 후속 연구를 진행 중이다. 당대 유교지식인들의 철학적 고 민과 대응은 현재 우리들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 전통의 몰락과 극 복, 그리고 재구성의 문제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우리 철학을 세워 나가는데 중요한 선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제어 : 한국철학, 리의 철학, 심의 철학, 기의 철학, 실의 철학, 호락논변, 조선학, 서학, 실학

1. 들어가는 말

본 논고는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의 우리철학총서 연구사업(주제 : 근대전환기 한국철학의 도전과 응전)의 유교분야 연구 성과를 일부 정리한 글이다.1) 우리철학연구소는 2014년 창립 이래 외래철학의 무비판적 수입과

1) 본 논고는 2015년부터 진행된 우리철학총서 연구사업의 집필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 다. 본 연구는 근대전환기 한국의 철학양상을 我, 理, 心, 氣, 實, 敎, 民, 美의 8가지 주제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이 가운데 본 논고에서 다룬 유교분야는 리, 심, 기, 실의 네 부분이다. 본 논고의 서론, 결론과 심의 철학은 김윤경, 리의 철학은 홍정근, 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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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철학의 훈고학적 연구를 지양하고 우리시대 문제를 성찰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통섭하는 ‘우리철학’을 고민해왔다. 본 연구는 이 연장선 상에서 전통과 현대의 가교이며 근래 가장 격동적인 변화를 겪은 근대전환기 전통 철학을 통섭적으로 고찰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삼국은 전통적 국제질서인 중화체제의 붕괴를 경험하고, 만국공법의 미명하에 구 성된 폭력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전통 유교지식인은 이 에 기반한 서구문명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반대로 전통 유교만을 묵수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동서문명의 충돌 속에서 보편 가치와 시대적 대안을 찾고 공동체의 주체적인 활로와 변화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는 유교 분야의 다양한 논리를 리(理), 심(心), 기(氣), 실(實)이라는 네 개 의 주요 학술 개념으로 범주화하여, 분야별 이론적 계승과 변용, 실천적 대 응을 정리하였다. 본 논고는 현재까지의 연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본 논고의 2장 ‘리(理)의 철학’은 전통 성리학계의 논리와 현실대응을 호 락논변(湖洛論辨)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호락논변은 1700년대 초 이후 200여 년 간 지속된 철학논변으로 주요 쟁점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문 제였으며, 아울러 미발심체순선(未發心體純善),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 등의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호락논변에는 한국 성리학의 독창성과 함께 성리학의 도덕 가치론 영역이 타 존재로까지 확장되어가는 양상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전통 성리학의 변화와 근대전환기 우리철학의 도전과 응전의 양상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리의 철학’에서는 호락논변의 핵심 쟁점 사항을 정리하고, 논변 전개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남인계 유 학자들의 학설과 근대 전환기 주요 성리학자들의 호락논변 관련 학설을 검 토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보편성, 주체성, 타자인식, 민족의식 등 근현 대적 가치를 분석ㆍ정리하였다.

3장 ‘심(心)의 철학’은 조선 양명학계의 철학실천을 정리하였다. 이는 ‘마

철학은 이종란, 실의 철학은 김현우가 각각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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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같이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스스로 속일 수 없는 마음’을 실천한 근대전환기 양명학자들을 고찰한 것이다. 선행 연구에서는 이들의 사유에 서 주로 양명학적 특징을 추출하는 데 치중하였으나, 본 논고에서는 반외세 와 자주성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여 본심양지의 발동을 따른 학 문과 실천 활동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들의 이론과 실천의 정점을

‘조선학 운동’에 두고, ‘심의 철학’이 조선학 운동이라는 주체 정신의 실질적 구현으로 꽃피기까지의 과정을 논하였다. 또 이 과정에서 하곡학파의 철학 적 문제의식은 개인의 수양문제에서 사회비판론으로 확장되고 민중감통론 을 강조하였으며, 실천문제를 놓고 당대 불교계 및 성리학계와도 긴밀하게 교섭하였음을 밝혔다.

4장 ‘기(氣)의 철학’은 서학의 수용과 변용, 전통철학의 계승과 극복을 통 해 재구성된 기 철학을 분석하였다. 선행 연구에서는 기 철학이 서양과학을 수용하여 전통철학에 반영시킨 부분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본 논고에서는 근대 전환기 기 철학의 체계 안에서 중세 서양철학이 어떻게 변용․적용되 었고, 결과적으로 당대 기 철학의 현실대응논리는 전통과 어떻게 달라졌는 가를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서양이라는 외래의 학문(과학, 철학 등)이 우리 학문으로 변용ㆍ발전하는 과정을 규명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전통 철학 이 지닌 합리성과 보편성도 추론할 수 있었다. 이는 기 철학과 서양 과학사 상에는 공통적으로 과학성과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 아가 본 논고는 근대 전환기 기 철학을 통해 현재 우리사회에서 문화, 민족, 전통 등에 의한 극단의 대립을 지양하고 보편과 소통을 지향하는 가치로서 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5장 ‘실(實)의 철학’은 근대전환기 관료 및 개혁적 유교지식인들의 현실대 응을 유교의 현실 인식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당시 ‘실의 철학’은 18세기 북학(北學)과 서학(西學)의 수용에서 출발하여 1840년 청나라의 몰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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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등장, 갑신정변, 수차례의 개혁, 근대 매체를 통한 계몽 운동 등 당대 실천적 선택들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구문명 및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등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맹목적인 수용은 을사늑 약, 한일강제합병 등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본 논고에 서는 개혁적 유교지식인들의 문명개화론을 분석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난 주체성의 결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또 일부 문명 개화론자들과 달리 전통 유교의 개신을 주장한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등의 현실 인식도 재검토하였다.

본 논고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근대전환기 범유교계의 다양한 논리와 현 실대응을 고찰하고자 한 연구의 일부이다. 특히 선행연구에서 잘 다루지 않 은 근대유교철학에 주목하고, 성리학 중심의 유교철학연구에서 벗어나 성 리학을 포함한 근대 유교의 다양한 흐름을 통섭적으로 고찰하는데 유의하 였다. 다음 장에서 현재까지 연구 내용을 정리․소개하겠다.

2. 리(理)의 철학

(1) 호락논변의 주요 쟁점

조선후기 호락논변(湖洛論辨)은 기존 학계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이후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논의의 주제들 이 새롭게 재구성되며, 성리학(性理學)의 우리 철학화를 가속화한 대논변이 다. 호락논변은 18세기 초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

1727)의 논변에서 촉발되어 도덕담론 중심의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사람 이외의 타 존재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장시켰다. 호락논변에서는 ‘사람의 본성 과 다른 존재의 본성을 같다고 보아야하는가 다르다고 보아야하는가(人物性 同異)’의 문제가 핵심 주제로 거론되었고, ‘성인(聖人)과 보통사람들의 마음 을 같다고 보아야하는가 다르다고 보아야하는가(聖凡心同異)’와 ‘사람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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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본질적으로 선(善)과 더불어 악이 동시적으로 같이 있다고 보아야하 는가 아닌가(未發心體純善)’의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호락논변은 순수한 학술논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서학의 도입과 외세의 침략 등 시대 문제 를 반영하며,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정의되었다.

인물성동이논쟁은 본연지성에 대한 견해차에서 발생한 것이다. 인물성동 론자들은 사람과 다른 존재가 모두 동일한 본연지성을 가지고 있으며2), 이 러한 본연지성이 참된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인물성이론 자들은 인물동(人物同)의 본연지성은 참된 본연지성이 아니라 공허한 성 이라고 비판하였다. 실사(實事)에서의 본연지성은 사람과 다른 존재가 상 호 다른 인물이(人物異)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하였다.3)본연지성은 성선 (性善)의 성이다. 인물성동론자들과 인물성이론자들의 견해차는 본연지성 을 성선으로 환치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인물성동론자들은 사람과 타 존재 의 성선의 성을 같다고 본 것이고, 인물성이론자들은 사람과 타 존재의 성 선을 다르다고 본 것이다. 성선의 성은 종지(宗旨)다. 인물성동론자들과 인 물성이론자들이 본연지성을 달리 본다는 것은 성선을 달리 본다는 것이며, 이는 곧 종지를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는 의미가 된다. 종지를 달리 해석한 다는 것은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를 이단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단으로 낙인찍히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논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본연지성에 대한 논쟁은 기질 지성에 대한 논쟁을 동반한다. 성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밖에 없는데, 본연 지성을 규정하면 그 본연지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기질지성의 영역으 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본연지성에 대한 규정이 다르다는 것은 기질지성에

2) 뺷巍巖遺稿뺸 卷7, 「答韓德昭別紙」 : 人與物無偏全之殊 是所謂本然之性也.

3) 뺷南塘集뺸 卷7, 「上師門」 : 人與物不同 而人則皆同之性也. ; 뺷經義記聞錄뺸 卷6, 「生 之謂性章」 27면 : 夫所謂本然者 謂其本如此也 鷄司晨 犬司盜 牛耕馬馳 皆其性本 如此 則所謂本然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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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규정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이들은 본연지성뿐만 아니라 기 질지성을 상호 다르게 규정하며 논쟁을 하였다. 예를 들어 인물성동론의 대 표자라고 할 수 있는 이간은 대표적 인물성이론자인 한원진의 인물이(人物 異)의 본연지성에 대해 기질지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4)

성범심(聖凡心)의 동이(同異) 문제는 미발심성 논쟁 과정에서 파생된 문 제라고 할 수 있다. 이간과 같은 낙론자들은 성동의 본연지성을 실사에서의 본질적인 성으로 보았다. 그런데 심성일치의 관점에서 성동의 본연지성과 성이의 본연지성에는 각기 거기에 걸 맞는 심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낙론 자들은 요청된 심을 본연지심(本然之心)이라 하고 이를 기품(氣稟)의 악이 전혀 없는 순선한 심체(心體)로 보았으며, 이에 근거하여 성범심동론(聖凡 心同論)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한원진과 같은 호론자들은 기질을 고려[因氣 質]한 인물이의 본연지성을 실사의 본질적인 성으로 보았다. 호론자들은 인 기질의 본연지성이라고 할 때의 기질을 그대로 심으로 치환하였다. 이 기질의 심은 인인이(人人異)의 청탁미악(淸濁美惡)한 기품과 인인동(人人同)의 담연허명(湛然虛明)한 심체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심이었다.

두 측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심이었기에, 이 심은 기품으로 인해 인인이(人 人異)의 특성을 띄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5)호론의 성범심이론(聖凡心 異論)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한원진과 같은 호론자들은 또한 미발처의 심에 기품과 심체가 동시적으 로 같이 있지만, 미발일 때는 악의 요소가 포함한 기품이 작용하지 않고 잠 잠히 있어서, 미발처의 심이 순선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보았다.6) 이러한 견 해는, 미발일 때는 악의 요소가 있는 기품을 배제하고 순선한 심체만이 심

4) 뺷巍巖遺稿뺸 卷7, 「答韓德昭別紙」 : 以異體言 則天命五常俱可因氣質 而不獨人與 物有偏全 聖與凡之間 又是千階萬級 …… 是所謂氣質之性也.

5) 홍정근, 뺷호락논쟁의 본질과 임성주의 철학사상뺸, 한국연구원, 2007, 74면.

6) 뺷南塘集뺸 卷11, 「附未發氣質辨圖說」 : 右愚說也 心卽氣也 性卽理也 …… 氣雖有 淸濁美惡之不齊 而未發之際 氣不用事 故善惡未形 湛然虛明而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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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간과 같은 낙론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낙론자들은 한원진의 견해에 대해 미발일 때에 악이 있 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라고 비판하였다.

호락의 핵심 논변들은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한국 주 자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독창적인 것이다. 호락논변은 20세기까지 이어 지며 근대 전환기의 철학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호락논변의 전개 양상

호론자와 낙론자들 사이에서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였으며 전 학계로 퍼져 나갔다. 이 논쟁은 19~20세기 성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서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남인계 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대체로 호락 논쟁의 가장 큰 핵심 주제였던 인물성동이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으며, 미발심이나 심의 본체와 관련된 명덕(明德) 또한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특히 심설논쟁에 참여하였던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이항로(李恒老, 1792

~1868), 이진상(李震相, 1818~1886), 전우(田愚, 1841~1922) 등과 같은 학 자들은 인물성동이문제와 더불어 성(性)과 정(情)에 대한 심의 주재(主宰) 문제를 세밀하게 논의하였다. 심의 주재가 부각된 것은, 서구 문화가 급격히 유입되는 혼란스러운 당시에, 심의 재정의를 통해 주체성과 이에 대응하는 논리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20세기까지 생존한 박문호 (朴文鎬, 1846~1918), 이철영(李喆榮, 1867~1919) 등은 전통 성리학적 관 점에서 호락논변을 철저하게 재검토하고 독자적인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익은 개체의 성은 기질지성만이 있다는 관점에서 인물성이론을 주장 했다.7) 홍대용은 주자학의 음양오행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氣)

7) 뺷星湖全書뺸, 「答洪亮卿」 : 從理在物上說 則只須言氣質之性 …在水爲水之性 在火 爲火之性 牛爲牛性 馬爲馬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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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중심으로 만물의 생성을 말했고, 소이연자(所以然者)인 리의 존재성을 인정했다. 홍대용은 리가 사람과 물(物)에 모두 인의예지의 오상(五常)으 로서 동일하게 자재하여 있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8)그의 인물성동 론적 견해는 인물균론(人物均論)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의 낙론을 논리적 기초로 하여 ‘인물균(人物均)’의 논리를 끌어내고, 여기서 다시 이용(利用) 대상물로서의 물(物)이라는 새로운 물론(物論)에까지 나 아감으로써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을 기하였다.”는 사학계의 견해는9) 여전 히 유효하다.

정약용은 주자학의 리를 비판하고, 천(天)의 자리에 리 대신 인격적 천(天) 인 상제(上帝)를 두었다. 리 개념은 이후 영명(靈明)한 인격적 존재인 천에 흡수되어 그가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천 개념과 함께 동반적으로, 혹은 인격 적 천 개념의 전제하에 독자적으로 언급되었다. 정약용은 사람, 꿩, 사슴, 풀, 나무 등 각각의 존재에는 각각의 기호(嗜好)의 성이 있으며, 각각의 존재 에 있는 성은 본연지성(本然之性) 차원에서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였다.10) 본연지성 차원에서 사람과 타 존재의 성이 다르다는 주장은 주자학에서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주자학들은 대체로 호론과 낙론을 종합 지양하는 양상 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체계 내에서 새로운 동(同)과 이(異) 의 두 측면을 모두 인정하거나, 독자적인 학설을 주장하였다. 기정진(奇正 鎭, 1798~1879)은 리분상함론(理分相涵論)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리분 상함론은 본연지성을 리일의 관점에서도 논할 수 있고, 분수의 관점에서도 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기정진은 본연지성을 리일의 관점에서

8) 뺷湛軒集뺸, 內集 「心性問」 : 草木之理 卽禽獸之理 禽獸之理 卽人之理 人之理 卽天 之理 理也者 仁與義而已矣.

9) 유봉학, 「18~19세기 연암파 북학사상의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3, 88~89면, 참조.

10) 뺷孟子要義뺸 卷6, 「生之謂性」 : 本然之性 原自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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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동이라고 하여도 되고, 분수의 관점에서 인물이(人物異)라고 하여도 틀 리지 않다고 보았다.11)이항로와 이진상 또한 인물성동과 인물성이를 모두 인정하는 이론체계를 구축하였다.12)이항로는 호론의 한원진의 심론을 비판 하면서 독자적인 심론을 수립해나갔고, 이진상 역시 호락논변의 미진한 부 분을 정리하면서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하였다. 홍직필은 한원진이 기질 지성을 본연지성으로 잘못 인식하여 인물성이론과 성범심이론을 주장하였 다고 비판하였다. 홍직필은 낙론의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었다.13)박문 호는 호론과 낙론을 철저히 검토하며 뺷고정인물성고(考亭人物性考)뺸라는 책까지 발간하였다. 그는 낙론을 주자의 초년설로 호론을 만년설로 규정하 며 인물성이론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14)이철영은 종래의 기질지성을 둘 로 구분지어, 성을 본연지성․기지본연지성(氣之本然之性)․기지기질지 성(氣之氣質之性)의 세 측면으로 구분하는 성삼양설(性三樣說)이라는 독 자적인 학설을 주장하였다.15)이철영은 기지기질지성을 성선의 성으로 보는 인물성이론의 입장을 취하였다.16)

호락논변은 순수한 학술논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서학과 근대의 외래 문 물이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대응논리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기정진, 이항로, 홍직필, 전우, 이철영 등을 포함한 주자학자들의 학설에는 외세에 대응하는 논리가 녹아있다. 또한 논의가 첨예화되면서 사람과 개, 소, 말 등 타 존재 들을 어떻게 분류하는 것이 옳으냐는 인물분류법과 이에서 연장되는 타자 인식, 민족의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외세에 대응하는 논리를 구축하는 과

11) 뺷蘆沙集뺸 卷12, 「納凉私議」 : 理者一實萬分 愈異而愈同者也 一而分非實異也 異 而同乃眞同也.

12) 뺷華西集뺸 卷21, 「答陶庵集記疑」 및 뺷寒洲全書뺸 卷5 「理學綜要」 참조.

13) 뺷梅山文集뺸 卷4, 「答韓運聖」 卷3 「答宋文吾」 참조.

14) 뺷壺山集뺸 卷73, 「人物性」 : 洛得朱子之初年 湖得朱子之晩年 蓋朱子少時嘗主一原 之理 及師延平以後 遂主分殊之理.

15) 뺷醒庵集뺸 卷5, 8면 참조.

16) 19세기 및 20세기 성리학자들의 호락론에 대한 학설은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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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는 심의 주재성을 강화하여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도 읽을 수 있 다. 이는 논변의 근대적인 요소들이다.

3. 심(心)의 철학

(1)실심실학(實心實學)과 진가(眞假) 논리의 확장

조선의 유교철학에서 ‘심’을 철학의 제 1원리로 삼고 심의 주체적 실천을 중시한 대표적인 학파로는 하곡학파를 들 수 있다. 선행연구에서는 하곡학 파와 양명학의 연관성, 정제두 후학의 사상적 특성을 주요 주제로 다루어왔 다. 그러나 이제 이런 연구에서 더 나아가 양명학 수용이 가능했던 조선 유 학의 기반과 근대전환기 하곡학파의 심 철학이 독립운동 및 학술운동의 사 상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제 과정을 주체적인 시각에서 검토할 필요 가 있다. 즉 연구의 기준을 ‘양명학’에 놓고 동이점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조선의 심 철학으로 옮기고 시대적 대응에 따른 변모양상을 검토하는 것이 다. ‘심의 철학’은 이런 기조에서 먼저 하곡학파의 사상적 기반과 현실 대응 및 실천 문제를 다루었다.17)

하곡학파의 학문적 특성은 일반적으로 ‘실심실학’이라고 한다.18) 정제두

17) 이하 서술은 필자의 기발표논문인 「정인보와 장병린의 주체론 비교」, 뺷인문학연구뺸 52,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 「정인보 ‘조선얼’의 정체성」, 뺷양명학뺸 45, 한국양명 학회, 2016; 「근대기 현실인식 및 개혁에 관한 불교와 하곡학의 교섭」, 뺷인문학연구뺸 54,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후기 하곡학파의 眞假論과 實學」, 뺷유학연구뺸 42,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8 등의 중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8) 實心實學이라는 표현은 하곡학파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반에서 사용하는 개념 이기 때문에 유의를 요한다. 조선시대의 실심, 실학은 ①뺷中庸章句뺸 序에서 程伊川이

‘중용’을 ‘실학’이라고 한 것을 인용한 구절과 ②뺷中庸뺸 25장 주석에서 胡炳文이 ‘誠’을

‘實理’․‘實心’의 두 차원으로 설명한 것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조선 성리학에서 實心 과 實理는 곧 誠을 의미하고 實學은 시대 상황에 따라 경학을 의미하기도 하고 도학, 성리학을 의미하기도 했다. 조선 성리학계에서 말하는 ‘실심실학’은 대개 ‘실심으로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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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齊斗, 1649~1736)의 직전 제자들이 실심(實心)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 만 아니라, 정제두의 학문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도 ‘실(實)’로 모아졌다. 그들 은 정제두가 마음에서 실제 수양하여19)상하가 오직 실 한 글자로 투철한 심학자20)였다고 하였다. 또 진실성인 실리(實理)로 진지(眞知)를 이루고 이 를 그대로 실행(實行)하는 것을 실학이라고 하였으며, 스승의 실심실학만이 당대 유교의 모범이라고 여겼다.21)실제로 정제두는 도덕 실천 조리를 창출 하는 심(心)의 활발한 생리(生理)를 실리라고 하였고22), 이를 그대로 실행하 는 것을 곧 실학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증자가 임종이 가까운 때에도 누운 자리가 격에 맞지 않아 마음이 불편한 나머지 자리를 바꾼 것처럼, 마음 편하 지 못한 상태로는 잠시도 있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고 한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게 편하고 즐거울 것 같은 자리가 본인의 의리에 따라 죽음보다 못할 수 있고 항상 마음의 진실성을 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것이다.23)

학한다’, 즉 ‘진실되게 학문(성리학)한다’는 의미한다. 그러나 하곡학파가 말하는 ‘실심’

과 ‘실학’의 영역은 동격으로서, ‘실심실학’은 곧 ‘실심을 실행하는 실학’을 한다는 의미 이다. 이때 실학의 내용은 실심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여기에 시대 의식이 반영된다. 물론 이런 경우 實心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 후기 하곡학파에서는 이를 一眞無假로 규정했다.

19) 뺷霞谷集뺸 卷11, 「遺事」 : 公早孤零丁, 內無父兄之敎督, 外無師門之傳授, 自少至 老, 罔非心得自修之實也.

20) 뺷霞谷集뺸 卷11, 「祭文 (盧述等)」 : 太學生盧述等祭文略曰 …… 先生之道, 上下昭 徹, 惟一實字, 不可微滅. 實忠實孝, 實致實格, 言無夸嚴, 行無僞飭. 鬼神昭布, 天地 充塞, 何以命之, 是謂心學, 嗟我後人, 庶幾承.

21) 뺷霞谷集뺸 卷11, 「疏」<請設書院儒疏(再疏)> : 昔濂溪周子有言曰, 誠者聖人之本, 蓋誠之爲言, 卽心中實理之名也. 天以此實理賦於人, 人得之以爲心, 以此致知則爲 眞知, 以此力行則爲實行, 以眞知爲實行則斯爲實學. 惟此實學, 得之者蓋寡, 惟我 先正臣鄭齊斗以金精玉潤之質, …… 輝光日新, 則此殆程子所謂實理得之於心自別 者也. …… 惟我先正實心實學, 爲一世儒宗.

22) 뺷霞谷集뺸 卷8, 「存言(上)」 <太極主靜中庸未發說> : 理性者生理耳. 蓋生神爲理爲 性, 而其性之本, 自有眞體焉者, 是其性也理也. 故於生神中辨其有眞有妄, 得主其 眞體焉, 則是爲尊性之學也. 故於凡理之中, 主生理, 生理之中, 擇其眞理, 是乃可以 爲理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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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뒤 후학인 정인보도 이를 그대로 계승하여 ‘실심의 환성(喚醒)’을 위한 학문활동을 전개했다.24)그는 아무도 모르는 자기 마음 속에서 불안한 마음 이 들면 이를 불안하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이런 불안감 즉 도덕적 자각력을 더욱 민감하게 하여 세밀한 불안도 알아채게 하는 것이 치양지학(致良知學)이라고 하였다.25)

하곡학파의 실심실학은 1755년 을해옥사 이후 ‘진가(眞假)’ 개념을 통해 확장되었고 정인보(鄭寅普, 1892~?)에 의해 일진무가(一眞無假)의 실학 으로 종합되었다. 진(眞)은 본래 실심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개인수양 차원 에서 주체성․진실성․완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노론의 교조적인 대의명분론을 비판하는 양득중의 ‘가도의(假道義)’론을 수용하면서 사회비 판논리로 확장되었다.26) 그들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명분론을 비판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남의 학문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이익을 취하 는 위선을 ‘가도학(假道學)’이라고 비판하고 실심으로 도학을 실현하는 ‘진 도학(眞道學)’을 추구하였다. 이런 관점은 하곡학파의 마지막 후예라 할 수 있는 정인보에 까지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인(仁)이 천하의 공물로 개인이 전유할 수

23) 뺷霞谷集뺸 卷18, 「心經集義」 卷2 <經下 格致誠正修身分作四節> : 人苟有朝聞道夕 死可矣之志, 則不肯一日安於所不安也. 何止一日. 須臾不能, 如曾子易簀, 須要如 此乃安. 人不能若此者, 只爲不見實理. 實理者實見得是實見得非, 凡實理得之於心 自別. 若耳聞口道者, 心實不見, 若見得, 必不肯安於所不安. …… 古人有捐 者, 若不實見得則烏能如此. 須是實見得, 生不重於義, 生不安於死也, 故有殺身成 仁, 只是成就一箇是而已.

24)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2, 「陽明學演論」, 116면.

25)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2, 「논설․수필․한시/역사적 膏盲과 吾人의 一大事」, 280면.

26) ‘假道義’론은 양득중(1665~1742)이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표현이다. 그는 윤증의 제자로 정제두와 그 후학인 이진병, 이광신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영조에게 가장 먼저

‘實事求是’의 實學을 제시하였고 ‘明大義辨’을 지어 송시열이 효종에게 제안한 復讐雪 恥론을 비판하였다. 당시 복수설치라는 대의명분이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 허구이며 사심 에서 비롯된 假道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득중의 ‘假道義’론은 중기하곡학파인 이충 익(1744~1816)을 거쳐 후기 하곡학파인 이건방과 이건창, 정인보에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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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아니며, 인한 행위에 명예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자기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남에게서 빌려오는 가를 비판하였다.27)또 당시의 중요한 화두 인 부국강병을 논할 때도 다른 나라의 사례가 좋다고 하여 무턱대고 빌려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실심으로 실정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건승(李建昇, 1858~1924)은 1907년 계명의숙을 세우면서 계명 이라는 이름이 아닌 계명의 실질이 중요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이 모두 실심 에서 나와야 실사(實事), 실효(實效), 실업(實業)이 모두 가능하므로 실심없 이 남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28)이건방(李建芳, 1861~1939)은 국 운 쇠퇴의 원인을 주자학의 교조화, 학문을 구실로 한 정쟁과 살육 등 집권 세력이 오래도록 쌓아온 거짓 대의[假]에서 찾았다.29)그리고 문제는 가(假) 가 오래되어 그것이 가(假)인지도 모르고 진(眞)이라고 착각하면서 당대에 도 여전히 과거의 가도학(假道學)을 계승하려는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그는 공공부분에서 진(眞)은 의도적으로 고상한 척 하는 고준담론이 아니라 당대에 통용될 수 있는 1)일상의 도리이며 2)일반인 의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의리라는 것도 애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는 것이 라서 전대의 의리법칙을 언제나 옳은 것으로 고집하거나 잘못된 가도의를 가인지도 모르고 계승하는 것 역시 가일뿐이다. 정인보는 선배들의 진가론

27) 뺷明美堂集뺸 卷11, 「論」 <原論> : 夫名義者, 天下之公物, 而非一人一家之所得私 也. …… 自古朋黨之, 莫不自謂君子, 而斥人爲小人, 後之尙論者, 猶以是病之. 今則 不然, 謂小人之名, 不足以湛其宗而夷其類也. 故必假名義之說, 悉驅而納之於亂賊, 然後快焉. 其亦可謂不仁之甚.

28)뺷韓國學報뺸3권 1호, 1997. 권두사진영인본. (김수중, 조남호, 천병돈 공편, 「강화학 파연구문헌해제」, 뺷인천학 연구총서뺸 5, 2007, 198~199면 수록.)

29) 뺷蘭谷存稿뺸, 「續原論」 : 我韓中葉有一巨儒者, 出其始也聰明, 文章頗足動人, 而時 値國家無事, 崇獎儒術, 而學者承靜退牛栗諸先生之後, 專尙程朱, 而屛其異者. 自 念藉程朱爲重, 則可以服一世, 而取大名於是, 動引程朱以爲的. …… 而位日以高則 厚, 結附於己者以値黨, 而排去其不附者, 苟其言有絲髮異者, 必引朱子以緣飾其言 而討之, 以背朱子之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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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허(虛), 가(假)의 단계로 세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실학과 거리가 멀고, 성현의 말씀과 외재적인 규범을 교조적․맹 목적으로 따르는 허학에서부터 조선후기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 았다. 그리고 학문은 대중에게 흠모의 대상인지라 학자로서 자기 학문의 착 수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기 마음과 관계없는 허학을 하다보면 빌려 와서라도 말하게 되고, 결국 학문이 이기심(自私念)을 보호하고 합리화시키 는 도구로 전락한다고 하였다.30)즉 ‘허(虛)’는 ‘가(假)’를 불러오고 이는 다 시 ‘위(僞)’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인보는 우리가 추구할 것은 “일 진무가(一眞無假)”의 본마음일 뿐이고, 남은 모르고 나 혼자 아는 이 한 곳 에서 깨우치는 바가 있으면 진생활이 비롯된다고 하였다.31)

진가론은 하곡학파의 특징적인 비판논리이지만, 반드시 하곡학파 내부에 서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충익(李忠翊, 1744~1816)처럼 정치 공 세에 가까이 노출된 경우는 적극적이고 양성적인 비판과 주장이 불가능했 지만, 근대전환기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는 지식인들이 학파를 불문하고 상 호교섭하는 과정에서 진가론이 공유되었다. 이는 매체에 나타난 지식인 사 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고32)유학 내 학문론 및 문장론이 나 불교개혁 운동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건승, 이건방과 교유하고 이건창을 흠모했던 조긍섭(曺兢燮, 1873

~1933)은 이들의 진가론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문장론을 전개하였다. 당시 는 전통 질서의 해체와 함께 전통 도학과 문장이 함께 몰락하고 있었다. 조긍 섭은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통적 문장과 경학의 수호를 선택했고 이건창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도덕을 입으로 떠들면서 밖에서 빌려와 포장 한 거짓 문장을 부정하고 진도(眞道)에 기초한 진문장(眞文章)을 추구하였다.

30)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2, 「陽明學演論」, 113~114면.

31)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2, 「陽明學演論」, 132면.

32) 「責假志士文」, ≪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21일 論說 및 「各學校試驗」, 뺷皇城 新聞뺸 1909년 04월 09일 論說 등에서 假志士, 假人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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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잡지발행과 경전간행, 교육, 문학활동 등 다방면에서 불교개혁을 추 구했던 불교지식인인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은33) 이건방, 정인보를 포함해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박한영, 이건방, 정인 보는 모두 근대 신학문을 접하고 인정하면서도 전통 사상을 토대로 현실비 판과 개혁방안을 모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한영의 현실 비판, 불교계 비판 논리는 하곡학파의 진가론과 동일하다. 그도 ‘허(虛)’, ‘위(僞)’, ‘가(假)’

를 부정하고, 이를 제거하여 ‘진(眞)’을 찾아 불교의 병폐를 고쳐나갈 것을 주장했다. 본래 불교에서 ‘가’개념은 존재가 독립적 실체가 아닌 인연화합 물[假和合]이며 ‘임시’적 존재임을 표현하는데 주로 쓰이며 이때 선악의 의 미는 없다. 그러나 박한영은 불교개혁을 논할 때 “빙허(騁虛) 부분을 크게 변화시켜서 실학을 실천”34)하고 “포교의 허명(虛名)을 개량”하며, “구세가 허명이라는 비난을 풀어낼 것, “가계정혜(假戒定慧)를 없애서 진계정혜(眞 戒定慧)를 날마다 수증(修證)할 것”35) 등 ‘허’, ‘위’, ‘가’를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썼다. 또 “무실(無實)”이 우리 사회의 악습이라고 지적하면서 불교 에서도 중생에 속하는 이 한 몸과 생불(生佛)이 불성(佛性)의 관점에서는 무차별하다는 사상만 있고 이에 대한 행이 없는 것을 위지위행(僞知僞行) 이라고 비판하였다.36)또 당시 정혜만을 중시하고 지계를 소홀하게 여기며 승려의 취처와 육식을 허용하자는 논리, 무애행(無碍行)을 가능하게 하는 석가나 조사의 깨달음보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따라하고 지계를 무시 하면서 사욕을 합리화하는 행태를 가계정혜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류와 상 관없이 계를 수호하면서 정혜를 함께 닦는 진계정혜만이 성불의 방도라고 하였다. 박한영의 불교개혁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생의 복리추구로 이 어졌다. 그는 진리의 각성이 깨달음의 장소인 자기 조국의 문화와 역사, 선

33) 이병주 외, 뺷석전 박한영의 생애와 시문학뺸, 백파사상연구소 2012.

34) 「將何以布敎利生乎아」, ≪海東佛報≫ 제2호, 海東佛報社, 1913.

35) 「佛敎와 歲新의 想華」, ≪海東佛報≫ 제2호, 海東佛報社, 1914.

36) 「知行合一의 實學」, ≪朝鮮佛敎月報≫ 제18호,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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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고 불교전적을 연구했다. 이는 하 곡학파에서 진을 회복한 실심실행이 곧 민중에 대한 감통(感通)과 정신적 인 복리(福利)의 추구로 직결되는 것과 동일한 논리이다.37)박한영과 이건 방, 정인보의 사상교유는 조선학 운동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2) ‘얼’의 감통과 조선학 운동

양명학에서 양지는 법칙성과 감응성이라는 고유한 속성을 지닌다고 한 다. 하곡학파의 기본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양지자체가 진성측달(眞誠 惻怛)의 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곡학파에서 진가논리를 통해 실심의 주체성, 진실성, 완정성을 추구한 것은 실심, 혹은 양지의 법칙성과 감응성 을 긍정하는 기반 위에 주체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정인보는 타고난 자 연명각(自然明覺)이자 감응주체인 본밑마음38)이 온전하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 민중의 실상에 감응하는 것이 당연하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민 중에 대한 감통(感通)’이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감응하지 못하는 것은 민중 에 대한 괴리와 ‘간격(間隔)’이 생기는 것인데, 이는 곧 본밑마음․실심의 죽음을 의미한다. 정인보는 국권 침탈과 민중 수탈의 현실에서 민중의 고통 에 감통하지 못하고 고정적인 이치만 쫓는 것은 실심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곡학파가 줄곧 비판해 온 가도의를 계승하면서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우 도불우국(憂道不憂國)’만을 주장하는 유교지식인을 비판하였다.39)

37) 물론 정인보가 조선 불교정신을 논하면서 지나치게 호국정신을 강조한 것은 불교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인보가 불교정신을 조선 얼에 맞추어 ‘救難’에 서만 찾으려고 하자, 그것은 석가를 끌어다 유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당대 민족주 의 또는 군민주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朝鮮佛敎의 精神問題」,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우회, 1935; 김윤경, 「근대기 현실인식 및 개혁에 관한 불교와 하곡학의 교섭」, 뺷인문학연구뺸 제54집,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참조.

38) 정인보가 사용하는 실심, 본밑 마음, 양지는 모두 동일한 의미이다.

39) 뺷薝園鄭寅普全集뺸卷2, 「陽明學演論」, 176면~177면 참조. 斥邪衛正派 중에는 국가 보다 유교를 강조한 유학자들도 있었는데, 이항로(1792~1868)가 대표적이다. 이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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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는 실심이 지니는 주체성을 강조하고 확장하여 다시 ‘얼’이라고 표 현하였다. 물론 그의 얼사상이 지니는 구도는 실심론과 동일하지만, 실심을 논할 때는 개체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얼을 논할 때는 개체를 넘어 민족 공 동체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40)정인보는 우리 민족의 주체성인 ‘얼’을 고 대 역사와 문헌으로부터 추론하여 그 특성을 1) ‘자기 자신에게 의존함[依 自]’과 2) ‘남을 널리 이롭게 함[弘益]’의 정신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개인의 얼, 실심의 본질적인 속성을 주체성, 감응성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정인 보는 음악과 가무, 동이의 명칭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민중을 구원한 역사적 실례와 위무정신 등을 예로 들어 조선의 얼을 설명하고 또 교육을 통해 앞 으로도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다.41)

또 몰주체적인 가(假)로부터 얼을 되살리고 조선 학문의 허를 실로 돌리려 는 이러한 작업은 조선의 실학의 선양으로 이어졌다. 그의 스승은 이건방은 몽테스키외의 뺷법의 정신뺸이나 루소의 뺷사회계약설뺸이 서구유럽의 부국강 병을 이끌었던 것 이상으로 정약용의 글이 완전하며 이것이 정사에 시행된다 면, 겨우 한 나라가 아니라, 천하 후세의 법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42)정인보 는 ‘일상에서 늘 쓰는 도리’로서 ‘민중의 복리(民衆의 福利)’를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실학이라는 기준에 입각해서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 성호 이익(李瀷, 1579~1624) →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으로 이어

국가관에 대한 비판은 ≪대한매일신보≫에 잘 나타나 있다. 「今日宗敎家에 要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8일.

40)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3, 「朝鮮史硏究」, <序>, 3~31면.

41) 김윤경, 「정인보 ‘조선얼’의 정체성」, 뺷양명학뺸 제45호, 한국양명학회, 2016, 참조.

42) 뺷蘭谷存稿뺸卷3, 「文錄(序)」 <邦禮草本序> : 嘗聞夫西洋之士, 有著萬法精理者, 曰 孟德斯鳩, 有著民約論者曰盧梭爲其政府者, 莫不汲汲焉, 求而布之, 施而行之學說, 一出風行雷動, 使世人之瞻領, 聳然一新, 而又從而究之益深, 講之益精. 今歐洲諸國 之日臻富强, 皆學術之功也. 今以先生之書較之, 孟盧諸人固未易軒輊於其間, 但彼 皆顯言直斥無所忌諱, 故能悉發其胸中之奇. …… 視孟盧諸人道行言施功茂一世而 光垂百代者果何如也. 此余所以重悲先生之不愚而深恨於東西之不相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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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조선 실학의 계보를 수립하였다.43)그리고 이는 안재홍(安在鴻, 1891~

1965), 문일평(文一平, 1888~1936)과 함께 한 ‘조선학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44) 정인보의 조선학연구는 당대 일본이나 중국의 국학 열풍과 무관하지 않 지만 전적으로 시대 조류에 부응한 결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의자불의타 (依自不依他)’론을 토대로 1910년대 ‘국수보전운동’을 현창하고 국학 교육 을 주도했던 장병린(章炳麟, 1868~1936)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인 보의 주체사상은 유교적 실존주의에 입각한 것이고 장병린의 주체사상은 불교적 무아론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를 영향관계로 설명할 수는 없 다.45) 일본 국학의 국수주의나 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46) 그의 조선학 연구는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사상문화 속에서 보편성과 특수성 을 동시에 찾아내려했던 전통 지식인으로서 고뇌가 반영된 것이다. 또 정인 보가 계승한 하곡학파 내부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조선의 전통, 풍습에 관한

43) 여기서 ‘복리’는 정신적인 복리를 말한다. 정인보는 주체의식 없이 과학기술이나 서구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인 복리를 추구하는 것도 반대했다. 정신적인 복리를 중시하는 경향은 정인보의 스승인 이건방의 가계에서 이미 전수된 것이었다. 김윤경, 「후기 하곡 학파의 眞假論과 實學」, 뺷유학연구뺸 제42집,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8, 참조.

44) 1930년대 조선학 연구는 순수 학문적 차원의 광범위한 조선 문화 연구를 주장한 진단 학회와 민족의식에 의존하지 않는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조선학 연구를 주장한 일부 사 회주의 진영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가장 선두적인 작업은 1934년 다산 서세 99주년 뺷여유당전서뺸 간행과 이듬해 10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를 주도한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은 전통 철학과 역사 속에서 ‘조선의 얼’, ‘조선의 정기’, ‘조선심’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원동력을 발견하고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조선학 운동’은 역사현상으로서 식민주의적 일제 관학에 저항한 문화 운동이면서 동시에 선대 국학파 와 전통 철학의 기반 위에 성립된 일종의 사상문화운동이었다.

45) 김윤경, 「정인보와 장병린의 주체론 비교」, 뺷인문학연구뺸 제52집, 조선대학교 인문학연 구원, 2016, 참조.

46) ‘조선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최남선이었다. 그는 역사, 정치, 예술 등 문화 전반에서 ‘조선적인 것’의 우월성을 발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조선학’으로 규 정했다. 이는 일본 국학이 자국 사상문화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과 동일하 다. 이에 비해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은 ‘조선적인 것’을 체계화하는 기준을 다른 문화에 대한 우월성보다는 주체성의 발휘에 두었다. ‘조선학’의미규정과 그 함의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20)

연구를 진행해왔다. 정제두부터도 정음을 연구하고 의론한 적이 있었다. 정 음연구는 이광려, 정동유에게 이어졌고 이광사는 서법 뿐 아니라 역사를 연 구하여 이긍익에게 전하였다. 정인보도 이러한 일련의 연구를 의식하고 조 선 연구의 역사적 맥락을 간략히 정리하기도 하였다.47) 이에 관해서는 향 후 연구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4. 기(氣)의 철학

48)

(1) 서학의 전파와 학문태도의 변화

근대전환기 기 철학은 서학의 영향으로 변모하였다. 기의 철학에 대한 전체 집필 내용은 우리철학49)으로 변모하는 구체적 내용과 양상 및 특징을 다루었 다. 이 시기 기 철학은 17세기 이후 예수회선교사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파된 서양의 과학과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기의 취산

47) 뺷薝園鄭寅普全集뺸 卷2, 「조선고서해제」 : 近世 朝鮮學의 派系 대략 三派ㅣ 있으니 星湖를 導師로 하고 農圃의 傳緖까지 아우른 一系 있고 李疎齋 頤明, 金西浦 萬重으 로부터 流衍된 一系(湛軒이 이系에 속함)있고, 霞谷의 學을 承受한 一系있다. 이 三 系로 말하면 或 明迹도 있고 或 潛㾿도 있으나 諸家의 學說을 會通하여 볼 때 自然 그 좇아난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三系 趨向이 야릇하게도 얼없이 합하여 거 의 一先生의 指授인 것 같음은 다른 緣由가 아니라 당시 朝鮮人의 切至한 苦悶으로 좇아 생기는 진정한 省悟ㅣ 彼此 서로 다를 리 없는 까닭이다.

48) 이 글은 우리철학총서 ‘기의 철학’ 집필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그 선행연구인 이종란,

「기독교철학에 대한 최한기의 비판적 수용」, 뺷인문학연구뺸 제52집, 조선대학교 인문학연 구원, 2016; 이종란, 뺷의산문답뺸, 한설연, 2017; 이종란, 뺷기란 무엇인가뺸, 새문사, 2017.

등에서 밝힌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49) 우리철학에 대한 정의와 방법론은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의 규정을 바탕으로 이 종란, 「뺷전경뺸의 사상분석으로 살펴본 ‘우리철학’의 방법론」, 뺷대순사상논총뺸 30, 대순 사상학술원, 2018에서 그 기준과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여기서 제시한 우리 철학의 방법론은 한국인의 삶에 기초한 시대인식과 문제의식, 전통사상의 발전적 계승, 전통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한국적 특성화, 외래사상의 비판적 수용, 외래사상에 대한 대응 또는 한국적 특성화의 5개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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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불생불멸, 기 운동의 자율성 등의 전통 기 철학의 주요 개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서학을 새롭게 변용하였다.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 비록 최한기 (崔漢綺, 1803~1877)를 제외하고 온전히 기 철학자라고 할 만한 인물은 드 물지만, 그래도 그들 사유의 일부 영역에서 그러한 변모를 읽어낼 수 있다.

이들은 이전부터 이단이나 외도로 취급했던 학문을 매개로 서학을 수용했 다. 가령 홍대용과 최한기는 양명학은 물론이요50) 장자 사상도 이용했고, 홍대용은 심지어 묵자사상까지도 받아들였다.51)또 이규경(李圭景 : 1788~

1856)은 서학적 요소가 원래 중국에 있었다는 설52)로서 서학수용의 논리를 펼쳤다. 이들은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제각기 시의(時宜)․시세(時勢)․운 화(運化)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주류 유학과 달리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방 적․포용적 방식을 적용한 한층 발전된 대안이었으며, 그럼으로써 현실문제 해결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2) 기 철학의 변모와 유학

서학이 전파된 후 기 철학적 견해로 연결되어 철학에 반영된 양상은 홍 대용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전통의 천원지방 과 음양오행설을 폐기하고, 지원설을 믿었으며 지구중심의 지전설53)을 주 장하였고, 사원소를 기 철학적 관점에서 재배치하였다. 곧 태허를 우주로 보고 공기를 전통의 원초적인 기로 보아, 기가 불(태양)과 물(지구, 달)과

50) 홍대용은 물론이요, 최한기도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양명학의 존재론 방면으로 눈을 돌리면 분명히 기 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시마다 겐지, 뺷주자학과 양명학뺸, 까치, 1991, 176면; 이종란, 뺷기란 무엇인가뺸, 새문사, 2017, 182~184면, 참조.

51) 이종란, 뺷의산문답뺸, 한설연, 2017, 60~64면; 같은 책, 324~332면, 참조.

52) 뺷五洲衍文長箋散稿뺸, 「西洋通中國辨證說」, 참조. 이것을 西學中國原流說이라 부 르기도 한다.

53) 홍대용은 태양, 달과 항성천의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나 오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티코브라헤의 수정천동설에서 더 나아가 지구의 자전을 인정하나 지구의 공전 을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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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지구)을 생성했다고 주장했다.54)이것은 곧 기가 음양오행을 거쳐 만물 을 생성한다는 종래의 학설과 다르며 서학을 기 철학적 체계로 변용시켜 발전시킨 부분이다. 홍대용은 「심성문」에서 형체가 없고 공간을 갖지 않으 며 주재성이 없는 그런 리의 실재성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55)물론 모든 구체적 사물들은 공통된 리이자 성품으로서 인의(仁義) 또는 인(仁)을 갖 추고 있다고56)보아, 여전히 윤리적 가치를 자연 속에서 찾는 유학의 기본 이념을 고수한 점도 있지만, 기존 주자성리학에서는 상당부분 벗어나 있다.

또 뺷의산문답뺸을 보면 종래의 성인 중심의 상고적 역사관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홍대용은 성인도 시의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예법을 만든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욕망은 근원적으로 막을 수 없 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 곧 인간의 욕망이 분출하기 이 전의 유토피아적인 기화(氣化)의 세계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종래 고대 성 인의 치세를 이상화하는 역사관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신학적 역사관에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57) 그리고 더 나아가 주자를 풍수지리의 미신을 조장한 인물로 그려서 그 권위의 약화시켰고, 화이일야(華夷一也) 를 말하고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주장하여 중국 중심의 문명관을 비판하

54) 뺷湛軒書뺸 內集 卷4, 뺷醫山問答뺸 : 夫火者日也, 水土者地也. 若木金者, 日地之所生 成, 不當與三者竝立爲行也. 且天者, 淸虛之氣彌滿無際, 其可以蕞爾地界之噓吸, 擬議於至淸至虛之中乎. 是知天者, 氣而已, 日者, 火而已, 地者, 水土而已. 萬物者, 氣之粕糟, 火之陶鎔, 地之疣贅. 三者闕其一, 不成造化, 復何疑乎.

55) 뺷湛軒書뺸 內集 卷1, 「心性問」 : 且所謂理者, …旣爲善之本, 又爲惡之本, 是因物遷 變, 全沒主宰. 從古聖賢何故而極口說一理字.

56) 뺷湛軒書뺸 內集 卷1, 「心性問」 : 理也者, 一而已矣, 毫釐之微, 只此仁義也, 天地之大, 只此仁義也. 大而不加, 小而不减, 至矣乎. 草木之理, 卽禽獸之理, 禽獸之理, 卽人 之理, 人之理, 卽天之理, 理也者, 仁與義而已矣.

57) 홍대용은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다. 후대 이규경도 그것을 증언한다(뺷五洲衍文長箋散 稿뺸, 「斥邪敎辨證說」, 참조). 氣化와 形化는 程頤나 朱熹도 이론적 필연성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홍대용의 그것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자세히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의 유토피아적 세계로 상정하여, 기존 역사관에 도전하고 기독교 창세신화에 대응 하는 성격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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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모든 문명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견해는 서학의 지전설과 지리적 지 식과 함께 유학을 포함한 학문이 우리의 문제로 전환해야 함을 주장하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규경은 백과전서적인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자체적 이론의 천착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동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 을 표출하였다. 그는 서양과학 이론을 기론으로 이해하면서 전통적 기 철학에 입각하여, 어떤 외적인 주재자나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기에 의하 여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일에 ‘달리 거짓된 솜씨가 없다(無他繆巧).’고 한 말은 분명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58)

이런 태도는 서학이 과학[質測]에 강점이 있으나 철학[通幾]에는 미비하 다는 방이지(方以智)의 관점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명물도수의 학이 갖는 한계인지 모르겠으나, 이규경은 홍대용이나 최한기에 비해 서학에서 철학 적 원리를 비판적으로 추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양과 오행 을 폐기하지 않았으며 서양의 사원소와 절충해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것 이 사원소는 몸체가 되고 오행은 작용이 된다59)는 주장이다. 그것이 가능 했던 논리는 바로 서양과학의 중국원류설 때문이기도 하고, 19세기 전반 당 시의 세도정권의 천주교 박해 등 전대보다 폐쇄적이었던 시대 상황 때문이 기도 하다. 이규경은 리에 대해서도 청의 이광지(李光地)와 모기령(毛奇 齡)의 말을 인용하여 조리(條理)라고 여겼다.60)그러나 이 조리를 사물의 물리로 말하면서도 사람에게 있어서는 본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리 개 념에는 자연적 물리와 인간의 본성으로서 가치개념이 여전히 혼재되어 있 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세와 서양과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주류 유학 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58) 이규경은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창조신화를 알고 있었다(뺷五洲衍文長箋 散稿뺸, 「斥邪敎辨證說」, 참조).

59) 뺷五洲衍文長箋散稿뺸, 「五行四行辨證說」, 참조.

60) 뺷五洲衍文長箋散稿뺸, 「心性理氣道學字原辨證說」,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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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의 경우는 서양 중세기와 르네상스기의 과학과 철학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근대과학의 성과를 접했기 때문에 홍대용이나 이규경의 철학보 다 더 진전되었다고 본다. 그는 음양오행설만이 아니라 사원소설의 불합리함 을 알아서 폐기하고, 지구의 자전․공전과 다양한 원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를 기로서 일원화 하였는데, 기의 존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공기를 실증적 모델로 삼아 공기총․온도계․습도계․압축 펌프․증기기관 등을 활용하였다.61)그의 기 개념은 과학의 대상으로서 물질 적 존재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현상까지 아우른다. 또 그는 활동운화(活動 運化)와 한열건습(寒熱乾濕)이라는 개념을 기의 성정(性情)으로 규정하여 그것만으로 주재자 없이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였는데, 기의 정으로 규정한 한열건습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지상만물의 변화를 사원소의 메커니즘만 가지고 설명한 것과 성격이 유사하다.62)이런 점에서 최한기 역시 서양과학을 받아들였지만, 그 논리에 함몰 되지 않고, 되레 그것 을 변용하여 자신의 기 철학에 발전적으로 적용시켰음을 알 수 있다.

최한기에 이르러 비로소 사물의 자연적 법칙과 인간의 관념이 분화되어 등장한다. 그것이 각각 유행지리(流行之理)와 추측지리(推測之理)이다. 이 것은 사물의 분류에서 실체[自立者, substantia]와 속성[依賴者, accidents]

으로 구분하는 서학의 영향이 크며,63)자연적 사실과 윤리적 당위의 구분도 명의 여곤(呂坤) 같은 기 철학자의 이론에 힘입은 바 크다.64)그래서 최한기 는 주자성리학에서 윤리의 근거가 되는 태극이나 리를 인간의 사유가 추론한 관념으로 여겨 그 지위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인의예지가 추론한 뒤에 있게

61) 최한기 저ㆍ이종란 옮김, 뺷운화측험뺸, 한길사, 2014, 121~139면, 참조.

62) 알폰소 바뇨니 저ㆍ이종란 옮김, 뺷공제격치뺸, 한길사, 2012, 92~94면, 참조.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와 달리 자연의 내재적 원리를 결국 신학적 목적론에 따라 신의 섭리로 귀결시킨다.

63) 이종란, 「기독교철학에 대한 최한기의 비판적 수용」, 뺷인문학연구뺸 52, 조선대학교 인 문학연구원, 2016, 186~189면, 참조.

64) 이종란, 뺷기란 무엇인가뺸, 새문사, 2017, 186~188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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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65)는 마테오 리치 주장과 그것이 표덕(表德)이라는 양명학의 영향 때문 이다. 그렇다고 인의예지라는 인간의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인간 생물적 본성의 정당한 실현을 위하여 사회적으로 체화된 것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명학과 여곤(呂坤), 대진(戴震)의 철학을 거쳐서 이해해야 하는 긴 여정이 필요하다.66)이런 점에서는 최한기가 유교적 가치 를 완전히 버렸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토미즘에 반영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의 영향으로 신기 의 순담(純澹) 이른바 영혼의 백지[비단, 竹簡]설67)을 근거로 경험(經驗) 과 추측(推測)을 강조하였지만, 인식의 최종 목표는 그와 달랐다. 곧 최한 기가 인식하고자 한 것은 사물의 법칙이지, 사물의 질료와 독립된 형이상의 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미즘에서 말하지 않은 증험(曾驗)과 변통(變通)을 인식이론에 첨가시켰다. 결국 최한기는 주자성리학의 격물의 방법으로서 궁리(窮理)를 버리고 경험[감각]-추측[사유]-증험[검증]-변통 [실천]의 방법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분명 전통의 논리를 극복하고 서학을 변용하여 나온 이론이다.

뿐만 아니라 최한기는 종래의 유학과 확연히 다르게 성선설도 따르지 않았 다. 고자의 설과 같이 자연적 본성은 선악으로 결정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서학의 영향이 크다.68)아무튼 선악이란 인간주체가 판단할 몫이다. 그렇게 되면 선악판단이 주관성과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결국은 보편적인 것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논리가 인간의 자율 적인 운화(運化)의 승순(承順)이다. 여기서 운화의 승순은 기독교에서 말하

65) 利瑪竇, 뺷天主實義뺸 下卷, 「第七篇」 : 仁義禮智, 在推理之後也.

66) 자세한 내용은 이종란, 뺷기란 무엇인가뺸, 2017, 182~190면, 참조.

67) 利瑪竇, 뺷天主實義뺸 下卷, 「第七篇」 : 故謂人心者始生, 如素簡無所書也.

68) 畢方濟, 뺷靈言蠡勺뺸 下卷, 「論行相似」 : 自然之行者, 順其本性行之, 如火燥水潤鳥 飛魚躍, 人之視聽啖嗅等, 皆行乎自然, 無善無惡無功罪者也. 介然之行者, 係矣人 意. 故或善或惡或功或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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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유의지에 따른 신에 대한 순종에 대비되는데, 보편적 가치의 기준이 인간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둘은 상통하겠으나 세계관이 다르다. 서학의 영향 으로 전통의 고자설을 참고하고 자연의 도를 따르는 도가의 논리에 닿아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전환기 기 철학은 당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거기서 조선 최초 서양철학의 기 철학적 변용과 전통철학의 극복 및 발전적 계승 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18~19세기형 우리철학이라 규정할 수 있다. 특 히 최한기의 경우 학문의 근거와 기준이 운화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학문 이든 그의 기 철학적 관점에 부합되고 합리적이라면 다 수용될 수 있었다.

유술(儒術)69)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유학은 다만 당시 타 학문보 다 정치․사회적으로 현실적이고 유용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 에서 여전히 주류로 고려했을 뿐이다.

5. 실(實)의 철학

(1) 실의 철학과 實學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실학’은 1920~30년대 정립된 개념이다.

우리나라 철학사에서 보면, 실학이란 개념은 네 가지의 다른 범주로 등장한 다. ①‘실학’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뺷중용장구(中庸章句)ㆍ서(序)뺸 에서이다. 여기서 주희는 뺷중용뺸의 정신을 실학’이라고 한 정이(程頤)의 언급 을 인용하였다. 이때 실학이란 불교의 허학(虛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현실 지향의 실증적 학문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성명, 의리, 이기(理氣) 등을 궁구한다는 의미의 성리학(性理學, 性命義理之學의 준말)과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때 실학이란 성리학의 이칭이라고도 볼 수 있다. ②둘째는 정제 두(鄭齊斗) 등이 제기한 실심실학(實心實學)이다. 실심실학이란 가치판단

69) 뺷人政뺸 卷11, 「儒術」, 참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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