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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문화적 기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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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제주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문화적 기초* 1)

김 창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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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6A3A01045347)

** 전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국문초록

이 연구는 ‘문화적 접경지대’의 관점에서 재일 제주인 공동체의 사회관 계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주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대규 모로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제주인 사회를 형성하였으며 마을마다 친목회 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 친목회는 일본에서 상호부조와 친목활동을 할뿐 아니라 고향마을의 개발사업에도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 이는 재일 제 주인 사회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친목회 구성원들 사이에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친 목회가 공동체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일 제주인 공동체는 ‘상상된 공동체’이다. 재일 제주인 사회가 공동체로 상상될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 공동체가 출신 마을을 근거로 구성되었 기 때문이다. 거주 기간의 차이, 경제적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일 제주인에게 출신 마을은 일본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적 준거의 하나이다. 밀항자들에게 고향은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 며 오래된 재일교포에게 고향은 일본에서의 성공을 인정 받아야 하는 곳 이다. 이런 면에서 고향은 친목회 구성원들에게 ‘작고 따뜻한 세계’의 이 미지를 주고 있으며 이는 일본에서의 친목회가 공동체라고 인식하게 하 는 근거가 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가 유교적 질서에 근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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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문화적 접경지대, 제주도, 재일 제주인, 상상된 공동체, 유교적 질서, 달밭마을

1. 머리말

디아스포라1)는 민족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같은 민족은 같은 공간 에 거주하여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자의든 타의든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살고 있는 민족 구성원이 있을 때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 라 개념은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 을 지칭할 때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유대인뿐 아니라 국외로 이주 또는 추방된 소수의 집단이나 정치적 난민, 이민자, 소수민족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폭넓 게 사용되게 되고 있다.

1) 디아스포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주 자체를 의미한다. 디아 스포라는 어원적으로 ‘흩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주하는 현상 자체를 말한 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흩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주’는 단순히 살고 있는 터전을 옮기는 개념이라면 디아스포라는 민족 개념을 바탕으로 같 이 살아야 할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흩어진 사람으로서 디아스포라는 이주민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 글에서는 디아스포라를 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자 하며 맥락에 따라 ‘이주’ 그 자체 로 또는 ‘흩어진 사람’의 의미로 읽어주기 바란다.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 하 며,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연장자가 존중받 았다. 이런 유교적 질서가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 은 경제적 조건, 일본에서의 법적 지위 등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차이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요컨대, 재일 제주인 공동체는 문화적 접경지대에 있으며 고향과 유교 적 질서라는 두 가지 상징적 자원을 활용하여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전략 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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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개념은 민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늘 민족 개념과 통합되어 인식된다. 민족의 고유한 거주 공간으로부터 이탈되어 살고 있 지만 이들은 민족문화를 지키고 있으며 민족을 매개로 하나의 공동체라 고 인식된다. 따라서 이주의 원인과 과정은 그리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다. 자발적 이주든, 타의에 의한 추방이든, 국가의 탄압으로부터 도주이 든 상관없이 디아스포라는 본국의 주민과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간 주되는 경향이 있다.

앤더슨(Anderson, B. 1983)에 의하면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상상된 것이다. 즉, 공동체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동질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본질 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이지만 어떤 목적에 의해 이들은 동질적인 사람들 로 간주될 뿐이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 상상된 공동체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민족이다. 민족은 그 구성원이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공동체이다. 앤더슨은 우 리가 공동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인가 거짓된 공동체 인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으로 구성원이 서로를 알고 있고 대면하는 마을조차도 그것을 공동체라고 인식하는 것은 상상의 산물이라 고 하였다. 그는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르는 모든 사회적 구성물은 언제나 수평적인 동료 의식을 상정하지만 구성원들 사이에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상상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공동체는 그 진정성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되는 방식에 의해 구분된다 (Anderson 1983:15). 이런 맥락에서 보면 디아스포라를 공동체로 간 주하더라도 그것은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일 뿐이다.

한국에서 디아스포라 연구는 민족공동체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임영언 2011, 정성호 2008, 윤인진 2006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때로는 ‘동포’로, ‘재외한인’으로 불렸으며, 문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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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질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당위론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경제 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본국 주민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 들에게 민족 개념을 앞세워 자신들과 동일하기를 강요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디아스포라는 이주한 지역에서도 그 곳에 적응하여야 하기 때 문에 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이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들과 문화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 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여야 한다(Park 2016:136). 즉, 디아스포라는 모국 문화와 이주국 문화 어느 것과도 일 치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를 가지게 된다. 이 현상을 로잘도(Rosaldo 2000:67)는 ‘문화적 접경지대(cultural borderlands)’라고 하였다.

전통적으로 문화연구자들은 문화가 분명한 경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 였다. 특히 문화를 유형론으로 이해한 학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브란트의 한국 문화 연구(Brandt 1971), 루스 베네딕트의 일 본 문화 연구(Benedict 1974), 오스카 루이스의 멕시코 문화 연구 (Lewis 1988) 등은 각 지역의 문화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으로 이해하였다. 유형론적 문화 이해는 집단 구성원이 특정한 문화를 공 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내적인 동질성을 강조한다. 즉, 이 관 점은 집단 구성원의 다양성, 변화 가능성, 대립과 갈등에는 관심을 보이 지 않는다. 사실 특정한 집단이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집단 구성원이 동질적이라고 생각하는 허구에 근거해 있다. 특히 민족을 동질적인 구성원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 각이다. 민족 구성원은 그 자체로도 이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거주 하는 지역이 다르면 구성원의 사회적 조건이 달라지고 따라서 문화도 달 라질 수밖에 없다. 디아스포라는 모국에 거주하는 구성원과는 달리 문화 적 접경지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국 구성원과의 동질성이 강조 될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접경지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적 독자성 을 가지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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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재일 한인에 대한 연구는 많이 누적되었다. 초기의 연구는 재 일 한인의 형성 과정(강재언 1984, 신행철 1982), 일본에서의 적응과 동 화 과정(김화영 1998), 그리고 정체성 유지(김성우 2013, 최영호 2008) 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래에는 재일 한인을 하나의 ‘자원’으로 인식함으 로써 글로벌 네트워크 관점에서 이해하는 연구(윤인진 2006, 정성호 2008 등)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연구는 공통적으로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재일 한인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민족’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재외한인을 ‘자원’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재외한인을 한국의 입장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 연구는 ‘문화적 접경지대’의 관점에서 재일 한인, 특히 재일 제주인 의 사회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문화적 접경지대’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는 것은 재일 한인을 민족적 동질성에 기초하여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재일 한인을 하나의 독립된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 한인 은 한민족이므로 한국인과 문화적 동질성을 가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 양쪽과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이다. 재일 한인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 거나 일본화 된 한민족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사회에 존재함으로써 자신 들의 문화를 가진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재일 제주인은 이문웅(1998), 유철인(1998), 김창민(2003) 등에 의 해 연구된 바 있다. 이문웅은 오사카의 이쿠노 지역을 현지연구하여 재일 제주인의 문화를 분석하였다. 그는 재일 제주인의 사회관계의 기초로 지 연성과 혈연성을 강조하였고, 일본에서의 삶도 제주인의 전통적인 사회 관계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이문웅 1998). 유철인은 밀항에 초점을 두고 재일 제주인을 이해하였다. 그는 밀항의 과정과 함께 일본에서 밀항자의 존재 양상을 통하여 재일 제주인에게 제주도는 생활 세계의 중요한 요소임을 밝혔다. 김창민은 재일 제주인이 자신의 출신 마 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분석하였다. 마을의 각종 개발사업에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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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제주인이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의사결정에 개입하기도 하는 과정을 보 여줌으로써 그는 재일 제주인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출신 마을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연구들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재 일 제주인을 제주와의 관계 속에서 분석하고 있다. 즉, 기존의 연구들은 제주사회의 일부 또는 연장으로 재일 제주인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을 문화적 접경지대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 연구에서는 재일 제주인 공동체의 하나인 재일본달밭친목회를 분석 의 대상으로 한다2). 재일본달밭친목회는 서귀포시에 속한 달밭마을 사 람들 중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친목회이다. 오사카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이 친목회에는 동경을 비롯하여 관동지방이나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재일본달밭 친목회는 1930년대에 시작하였지만 해방 이후 밀항이 본격화 되면서 회 원이 늘어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찍 일본에 정착한 재일교포와 밀항자들 사이에는 사회적, 경제적 차이가 현격하게 있었지만 달밭마을 이라는 공통의 상징을 근거로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상상되었다. 이 친목 회는 1989년 이후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회의록과 금전출납부가 남아 있어 친목회의 활동과 구성원의 면모, 그리고 재정지출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필자는 재일본달밭친목회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회원들을 면 담하기 위하여 2003년 2월에 오사카를 2주간 방문하였다. 이 방문 기간 동안 재일본달밭친목회의 핵심적인 회원들과 면담을 실시하였으며, 회의 록과 금전출납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자료수집 기간 동안 17년간 일본 에 거주하면서 재일본달밭친목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에 제주 도로 돌아온 마을 주민 한 명과 동행하였다. 그는 재일교포 사회와 재일

2) 재일본달밭친목회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김창민(2003)을 참고할 것. 이 논문은 김창민(2003)과 동일한 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앞의 논문 이 재일본달밭친목회와 달밭마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 반면 이 논문은 재일본달밭친목회가 운영된 문화적 기초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 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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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달밭친목회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필자와 재 일본달밭친목회 회원들의 가교 역할도 담당하였다.

2. 재일본달밭친목회의 형성과 밀항

달밭사람들은 일제시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1922년 제 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키미가요마루(君代丸)’라는 배를 이용한 정기노선 이 개설되면서 제주사람들의 일본행이 본격화되었다(김창민 2003:200).

달밭마을 사람들도 1930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이 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친흥회’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1930 년에는 24명의 친흥회 회원들이 아훼낭목 일대의 토지 1,184평을 사서 마 을에 기증하기도 하였다(김창민 2003:201).

해방을 전후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달밭마을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귀국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위험을 피해 귀국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일본의 경제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에 일본에서 일을 하는 것이 크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친흥회 는 회원이 줄어들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달밭마을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계기는 제주 4ㆍ 3 사건과 한국전쟁이었다. 제주 4ㆍ3 사건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피신을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호황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경제적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에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 과정은 밀항일 수밖에 없었다.

밀항은 재일 제주인의 문화적 표상의 하나이다. 일본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제주에게 밀항은 가장 중요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 밀항은 늘 고난 과 어려움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라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밀항은 말 그대로 불법적인 입국을 의미한다. 제주인에게 밀항은 통상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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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무역선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무역선의 밑창에 숨 어서 일본의 항구로 들어가고 밤에 몰래 배를 빠져 나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상대적으로 성공확률이 높고 안전하였으나 비용이 비쌌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어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국 국적의 어선을 타고 공해 상에 나가서 일본 어선으로 갈아타고 일본의 작은 어항으로 들어가서 몰 래 빠져나가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성공확률도 낮았으나 비용이 쌌다. 어느 방법이나 밀항선을 탈 때는 여러 명이 함께 타고 밀항을 하였다.

밀항에는 한국에서 밀항을 주선하는 알선자와 일본에서 자신을 받아줄 후견인이 있어야 가능하였다. 알선자는 밀항자를 싣고 갈 화물선이나 어 선을 섭외하고 밀항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원이 확실하 지 않은 밀항자를 알선하였다가 오히려 알선자가 경찰에 체포될 경우 알 선자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항을 하는 것도 신 원이 확실하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밀항을 원하는 사람은 화물선이나 어 선이 출발하는 부산이나 여수에서 알선자와 접촉하였으며, 언제 배가 출 발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장기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밀항자는 밀항선을 탈 때까지 알선자에게 자신의 신원을 보증해 주고 머 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줄 사람이 필요하였으며 통상 부산이나 여수 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다.

달밭마을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부산에 거주하던 정씨였다.

그는 부산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어서 사무실에 기사들의 출입이 빈번하 였다. 밀항을 하려는 사람들이 사무실에 드나들어도 주위 사람들이나 경 찰이 새로운 기사라고 생각하여 크게 주목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밀항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정씨 사무실에 늘 달밭사람들이 드나들었으며 이 곳은 밀항의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하면 후견인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의 항구에 도착하면 2 인 1조로 항구를 빠져 나와 사전에 약속된 장소에 집결하였다. 주로 개인 의 가정집이 집결 장소였다. 집결 장소에서 기다리면 일본에 있는 후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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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서 데리고 갔다. 후견인의 입장에서 밀항자가 반가운 사람이 아닐 경우 오랫동안 찾으러 오지 않아 밀항자가 대책 없이 기다리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달밭사람들은 주로 마을 출신 재일교포에게 후견을 부탁하 였다. 밀항하기 전 재일교포에게 후견을 부탁하고 밀항하기 때문에 후견 자는 미리 일자리도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밀항자로서 일본에서 살아가 는데 필요한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밀항자들은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어 야 했기 때문에 공장에서 힘든 일을 주로 하였다.

밀항자들이 일본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같은 마을 출신 밀항자 들을 만났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밀항 자들은 아는 사람을 만나러 나갔으며 이 때 주로 같은 마을 출신 밀항자 를 만나 마을 소식과 직장 정보를 주고받았다. 다니던 공장에서 밀항자가 발각되면 즉각 일자리를 옮겼다. 발각된 밀항자가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밀항자를 발설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새로운 일자리 를 소개하는 일은 같은 마을 출신 밀항자가 주로 하였다. 때로는 밀항자 들이 재일교포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였다. 마을 출신 재일교포는 밀항자 들이 주말에 1박2일 동안 놀 수 있도록 집을 개방하였으며 음식을 제공 하기도 하였다.

밀항자들의 일본 생활에서 마을은 사회관계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밀 항의 과정과 일본에서의 생활은 마을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가 중심이었 다. 이런 인간관계는 마을 단위의 친목회를 통해 구체화되고 강화되었다.

재일본달밭친목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재일본달밭친목회는 달밭마을 출신 재일교포와 밀항자들의 사회관계망이었으며 공동체였다.

그러나 친목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조건의 다양성과 일본에서의 거주 기 간의 차이, 일본 거주 합법성의 차이 등의 관점에서 보면 달밭마을 출신 재일교포와 밀항자들은 동질적 존재가 아니라 이질적 존재였다. 그런 면 에서 재일본달밭친목회는 ‘상상된’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상상 된’ 공동체가 작동하게 된 문화적 기초를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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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목회의 활동

해방과 더불어 일본에 거주하는 달밭마을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면서 친흥회가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밀항으로 일본에 오는 달밭마을 사람들 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1966년 6월 16 명이 재일본달밭친목회(이하 친목회로 표기함)를 결성하게 되었다.

친목회를 결성하기 위한 창립총회에서는 취지문을 설명하고 회칙을 제 정하였으며, 회원들이 기본금을 납부하였다. 친목회의 회의록에는 취지 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은 동향의 유지들이 이국에서 상호간의 친목과 애향심을 높이며 상호 구제와 부조를 도모하고 계속 밀접한 연대성을 유지하여 나가며 항상 이민(里民)들과도 밀접한 연대를 보지(保持)하고 향리의 발전에 기여한다.

우리들은 일본에서 출생한 연고상 아직도 우리 고향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으며 이 후대들을 민족적 의식과 애향심을 육성시키는데 일층 노력하 여 나간다. 서기 1966년 6월”

취지문의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회원들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를 도모하는 일이며 둘째는 달밭마을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고, 셋째는 일본에서 출생한 2세들에게 애향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목표 는 문화적 경계지대에 살고 있는 달밭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 다.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서로 도와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달밭 마을은 떠나 온 마을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으 로서 마을과의 관계는 단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1세대 재일 달밭사람들은 자녀들이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려하였다.

달밭마을 사람과의 교류를 통하여 이들에게도 달밭마을사람이라는 정체 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1세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창립총회에서는 회칙도 제정하였다. 회칙은 다음과 같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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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본회는 재일본달밭친목회라 칭한다.

제2조 본회는 재일본 달밭마을 교포로서 조직한다.

제3조 본회는 회원상호간의 친목을 깊이며 상호 구제를 도모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4조 본회는 매년 정기총회를 정월에, 임시총회를 7월에 개최할 것으로 정한다.

제5조 본회는 다음과 같은 역원을 설치한다. 회장1명, 부회장겸총무 1명, 재정감사 1명

제6조 본회의 역원의 임기는 2년간으로 하고 역원 개선은 정월 정기총회 에서 행한다.

제7조 본회의 역원회는 매년 4회 소집한다.

제8조 본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행한다. 1.신년회, 2.야유회, 3.기타 제9조 본회는 회원에 경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제3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표의를 행한다.

1. 결혼식 회원 일금 5,000엔, 가족 일금 3,000엔 2. 장제(葬祭) 회원 일금 10,000엔 가족 일금 5,000엔

3. 소기(小忌), 대기(大忌) 회원 일금 3,000엔 가족 일금 3,000엔 4. 재난(화재, 사고중상 등) 일금 10,000엔

제10조 이 외의 구제사업은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역원회를 개최하여 상의 결정한다.

제11조 회원 및 비회원이 본국으로 귀환시에는 기념품(시가 2,000엔 정 도)을 기증한다.

제12조 본국에서 방일 빈객이 귀국시에는 기념품(시가 2,000엔 정도)를 기증한다.

제13조 본회에 입회시에는 본회의 기본금으로서 3천엔 내지 5만엔까지 기부한다. 단, 특별한 경우와 경제상 곤란한 입장에는 고려할 수 있다.

제14조 본회의 회비는 연간 3,000엔으로 정하며 2기 분할하여 납부한다.

제15조 본회의 경비는 회비 및 임시기부금으로써 보충한다.

3) 회칙도 친목회의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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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조 본회의 기본금의 이자는 1분5리로 정하고 회장, 부회장, 재무감사의 연대 책임제로 하며, 6개월 단위로써 현금 결산한다.

제17조 본회의 회원은 1개년간 회비를 연체할 때는 회원의 자격을 자연 상실한다.

제18조 본회의 회원이 탈퇴할 때는 기납의 기부금 및 회비는 반환 안한다.

제19조 본 회칙을 개정할 때는 회원 과반수의 찬동이 필요하다.

회칙은 친목회의 기본적인 사항도 담고 있지만 회원간 상호부조의 방 법을 정해 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는 친목회의 활동이 회원 간 친목 도모와 상호부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회칙은 모든 회원이 동등 한 자격으로 회비를 납부하고 상호 부조를 함으로써 친목회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운영과정에서는 이런 공동체가 ‘상상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창립 때 납부한 기본금이 친목회 회원이 동질적이지 않음을 보여 준다. 기본금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3천 엔부터 5만 엔까지 납 부할 수 있었다. 16명의 창립회원 중에서 5만 엔을 기본금으로 납부한 사람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고영택씨 뿐이었다. 그는 회원들 중 가장 연장자였을 뿐 아니라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었고, 16명 중 그 회사에 직원으로 근무하는 사람도 2명 있었다. 고영택씨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 로 보아 친목회원 중 가장 어른 대접을 받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회원들 중에도 5만 엔을 납부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은 있었지만 고영택씨 에게만 5만 엔을 납부할 수 있는 자격이 암묵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창 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된 박동신씨와 동경에 거주하고 있던 조문식 씨 2명은 3만엔 씩 기본금을 납부하였다. 그 외 2만 엔을 납부한 사람이 5명, 1만 엔 납부한 사람이 3명, 5천 엔을 납부한 사람이 3명, 3천 엔을 납부한 사람이 1명, 그리고 미납자가 1명 있었다. 이후 밀항으로 새롭게 가입하는 회원들도 대부분 3,000엔 또는 5,000엔을 납부하여 이들의 어 려운 사정이 감안되었다. 소액인 연회비는 모든 회원이 동등하게 납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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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지만 기본금에서는 나이와 지위 등이 고려되어 차별적으로 납부하였고 이것은 곧 친목회 내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의 표상이 되었다.

이렇게 조성한 기본금은 월 1.5%(연 18%)의 이자를 조건으로 대출 되었다. 처음 조성한 기본금은 25만 엔이어서 매년 45,000엔의 이자를 만들 수 있었다. 이는 15명의 연회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초기 회원 이 16명이었음에 비추어 보면 기본금의 이자는 매년 회원들이 납부하는 회비와 같은 규모였으며 따라서 기본금의 이자는 친목회 운영에 큰 역할 을 하였다.

기본금을 연 18%의 높은 이자로 대출을 받은 사람은 고영택씨였다.

그는 돈이 필요하여 대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자를 부담함으로써 친목 회 운영에 도움을 주고자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친목회원 조남석씨 증 언). 고영택씨는 친목회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기도 하고 달밭마 을 개발사업에 재정적 후원이 필요할 경우에도 큰 돈을 기부하여 재정적 기여를 많이 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고영택씨는 친목회에서 가장 어른 대 접을 받았으며, 중심 인물로 간주되었다.

친목회의 공식적 활동은 정월의 정기총회와 8월의 야유회였다. 정기총 회는 식당에서 하기도 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주로 회장인 고영택씨 자택 에서 모이는 경우도 많았다. 정기총회가 있는 날에는 밀항한 사람들이 모 처럼 만나 환담을 나누다가 고영택씨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야유회는 인근의 유원지나 섬에서 하였다. 당일 일정으로 다녀왔으며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야유회 경비 는 참석자들이 동일한 금액의 회비를 납부하였으며 모자라는 비용은 회 비에서 보조하였다.

친목회의 비공식적인 활동은 회원 자녀의 결혼식에 축하금을 전달하는 것과 부모의 장례나 소상 또는 대상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결혼식보다는 장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결혼식은 일본식으로 하여 참석자가 많 지 않았으며 축하금만 전달하였다. 그러나 장례와 소상 또는 대상은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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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일로 간주되어 회원들이 참여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이 원칙이었 다. 1976년 정기총회 때 총무는 회원 부인의 대상이 있는 날에 출장을 다녀오게 된 관계로 대상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식적인 사 과를 하였다.

친목회의 공식적, 비공식적 활동으로 친목회는 ‘작고 따뜻한’ 이미지를 가진 공동체로 인식되었다. 비록 일본에 거주한 연한, 나이, 경제적 지위, 일본에 체류할 수 있는 법적인 자격 등에서 구성원들은 매우 이질적이었 지만 친목회 안에서 모든 회원은 동질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사 회에서의 생활은 불법체류자, 비공식 영역의 육체노동자, 일터에서 위계 상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 등의 사회적 약자였지만 친목회 안에서는 대화가 통하고, 위ㆍ아래가 없으며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다.

재일본달밭친목회는 특정한 문화적 원리에 의해 이런 ‘상상된’ 공동체로 작동할 수 있었다.

4. ‘상상된’ 공동체의 문화적 기초

재일본달밭친목회는 달밭마을이라는 같은 마을 출신자들이 일본에서 만든 친목회였다. 재일한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특히 밀항자의 경 우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 들에게 재일본달밭친목회는 ‘작고 따뜻한’ 공동체로서 마음의 위안을 얻 을 수 있는 곳이었다. 친목회는 일본 생활에서 필요한 도움을 서로 주고 받는 곳이었으며, 밀항자들에게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고, 제주도에 있는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 생활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설움도 친목회를 통해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목회는 그 구성원이 경제적, 법적 지위에서 이질적이었으며 일본을 떠나 제주도로 돌아오는 순간 일본에서의 모든 관계가 단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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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에서 ‘상상된’ 공동체였다. 밀항자들은 친목회 이외에는 사회관계를 가지기 어려웠지만 정착한 재일한인들은 친목회 이외에도 무수한 사회적 관계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사 회적 관계망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밀항 자들의 후견인 역할도 감당하였다. 보호하는 사람과 보호받는 사람이라 는 이 비대칭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친목회는 공동체로 인식되었다.

재일본달밭친목회가 공동체로 상상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의 문화적 기초 때문이다. 하나는 달밭마을이라는 지연적(地緣的) 근거이다. 친목계 회원들에게 달밭마을은 가치 판단의 중요한 준거였다. 친목회의 구성 자체 가 달밭마을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달밭마을이라는 지역적 연고를 매개로 함께 모이고 상부상조하였다4). 그러나 친목회 회원들에게 달밭마 을은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밀항자에게 달밭 마을은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며 돈을 벌어 송금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즉, 밀항하여 일본에서 고생하는 이유가 달밭마을에 살고 있는 가족 때문 이었으며 가족이 아니라면 일본에서의 생활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었 다. 대부분의 밀항자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왔다. 그리고 달밭마을은 일본에 밀항한 목적이 달성되면 돌아가야 할 곳 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밀항자들에게 달밭마을은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준거였다. 친목회는 달밭마을에 살고 있는 가족의 소식과 형편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서 달밭마을과 소통하는 창구 역할도 하였다.

또한 밀항자들에게 달밭마을은 일본 생활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었 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달밭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할 수 있었으며, 어 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구할 곳도 달밭마을 사람들밖에 없었다. 심지어

4) 친목계 회원들 상호간의 관계도 다양하였다. 재일교포와 밀항자가 달밭마을에 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도 있지만 재일교포들이 비교적 일찍 일본으로 이주 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에 밀항자와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도 있었다.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 역시 실제적인 사회관계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회관계가 있는 것으로 상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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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송금하기 위해서도 달밭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밀항자들은 재일본달밭마을친목회를 통하여 달밭마을사람들과의 관계 를 유지하고 강화하였다. 1년에 한 차례씩 만나는 정기총회와 임시총회 는 밀항자들에게 일본 생활의 근거를 다지는 일이었다. 친목회 활동을 열 심히 할수록 일본 생활의 근거가 더 단단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밀 항자들은 친목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목회는 밀항자 들에게 ‘작고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도 움을 주는 곳, 위기 상황에서 피난처가 되어주는 곳으로 재일본달밭친목 회는 상상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재일 한인들에게 달밭마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이며 조상들의 산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 이 낮기는 하였으나 죽은 뒤 자신이 묻히길 희망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토지가 있다는 사실도 달밭마을과의 관계를 유지하 게 하였다. 또한 이들이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달 밭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졌다. 대부분의 재일 한인들도 제주도에서의 삶이 어려워서 일본으로 왔다. 달밭마을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기억하는 달밭마을사람들이 자신이 일본에서 성공하였다 는 것을 인정할 때 자신의 일본 생활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달밭마을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성공을 인정받기 위하여 달밭마을 출신 재일 한인들이 선택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을개발사업 등 마을에서 재정적 필요가 있을 때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이었다(김창민 2003 참고). 전기가설, 창고건설, 마을안길 확장 등 다양한 달밭마을 개 발사업에 이들은 적극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하였다. 그리고 달밭마을에 서는 사업이 끝나면 후원자의 이름과 금액을 적은 공덕비를 세워 이들의 공헌을 인정하였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인정받는 두 번째 방법은 밀항자들의 후견인이 되 는 것이었다. 존립 근거가 취약한 밀항자들을 후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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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편지 연락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안정 적인 주소지가 있어야 했으며, 밀항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는 자영업자여야 했다. 또한 밀항자들이 어려움이 처하였을 때 도움을 주 기 위해서도 자신의 기반이 든든하여야 했다. 밀항자들이 달밭마을의 가 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을 도와주는 후견인 이야기를 쓰는 것은 후견 인의 성공을 마을에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밀항자를 후견하는 일은 달 밭마을에 자신의 성공을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밀항자에게나 재일 제주인에게 달밭마을은 생활의 준거였다. 달밭마을 을 매개로 조직된 재일본달밭친목회는 밀항자와 재일 제주인 모두에게 중요한 결사체였다. 따라서 친목회를 유지하고 ‘작고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일은 양자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친목회가 공동체로 상상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친목회가 달밭마을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재일본달밭친목회가 공동체로 상상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문화적 기초 는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유교적 질서5)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 선 친목회는 달밭마을이라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개인이 헌신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밀항자들조 차 마을개발사업에는 적극적으로 기부하였으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 람들은 모범적으로 기부를 하였다. 친목계에서는 개인의 이해보다 공동 체의 이해를 앞세우는 가치관이 요구되었으며 이 가치관으로 친목계가 공동체로 인식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재일본달밭친목회는 조상숭배 의례를 중요시하였다. 장례식이나 소상

5) 유교적 질서를 규명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유교는 다양한 경전을 가지고 있고 유학자들의 주장도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유교는 국 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 삼강오륜(三綱五倫),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라는 덕목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엄밀한 학문적 논의로서의 유교 이념 또는 유교적 질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유교적 질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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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대상은 매우 중요한 가정의례가 되었으며, 친목계원들도 타인의 조상 숭배의례를 기억하고 참가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전통의 계승 노력으로 이어졌다. 친목회 회원들은 밀항자의 증가로 회원 의 수가 증가하면서 자기 자녀들도 친목회에 가입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1세대 재일 제주인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밀항자들 은 나이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자기 자녀 세대들과 연배가 비슷하였다. 1 세대 재일 제주인들은 자기 자녀들과 밀항자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자녀 세대에도 친목계를 통하여 달밭마을을 기억하고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 였다6). 그러나 1세대 재일 제주인이나 밀항자들과 달리 재일 2세들은 이 미 일본 사회에 적응하여 밀항자들과 교류하기를 회피하였고, 결국 이 노 력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한편 친목계 안에서는 연장자가 연소자에 비해 존중받았다. 연장자는 연소자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연소자는 연장자를 어른으로 존 중하였다. 모임에서 자리를 잡을 때도 연장자는 상석에 앉게 하였으며, 연소자들은 달밭마을에 대한 후원이나 친목회 내부의 행사에서연장자의 제안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즉, 친목회 내부에서는 경제적 지위의 차이, 일본 사회에서 법적 지위의 차이 등에 의해 인간관계의 규칙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연령에 의해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해짐으로써 마치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재일본달밭친목회에서는 달밭마을과 조상을 위한 일에는 성의를 다하 여야 한다는 공유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장유유서라는 유 교적 가치관에 의해 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런 유교 이념에 근거한 가치관 과 인간관계는 재일본달밭친목회가 갈등이나 분쟁이 없는 공동체로 인식 하도록 한 문화적 기초로 작용하였다.

6) 1978년 정기총회에서는 재일 2세들을 친목회에 가입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청년회 결성을 의결하였다. 그리고 청년회 조직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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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민족 개념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면 모국과의 관 계성이 강조된다. 이런 인식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수단으로만 고려될 우려가 있다. 즉,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모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 익을 위해 활용되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문화적 접 경지대’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문화적 접경지대’는 모국과 안 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적 자원을 활용하는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존재로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는 모국 문화를 활용하지만 때로 는 거주국의 문화를 활용하기도 하며, 1세대는 모국과의 관계성을 강조하 지만 2세대는 거주지에서의 적응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의 형성 과정과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특성에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부터 지리적 근접성과 제주 사회 내부의 모순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 로 갔으며, 해방 이후에도 제주 4ㆍ3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일본 으로 건너가는 제주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농업사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서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마을 단위로 제주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의 밀항은 제주 디아스포라 공동체 활성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주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상상된’ 공동체였다. 경제적 조건뿐 아니라 일본 거주의 합법성, 거주 연한 등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조건은 서로 달 랐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은 공동체를 ‘작고 포근한’ 공동체로 인식하였다.

밀항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을 후견하는 역할을 공동체의 구성 원들은 흔쾌히 감당하였으며, 1년에 두 차례 모이는 공식적 모임에도 모든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상부상조하는 일과 자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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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출신 마을의 개발사업에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제주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두 가지 문화적 기초 때문에 ‘상상된’ 공동 체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출신 마을이 같다는 지연성이었다.

비록 공동체 구성원이 출신 마을과 맺고 있는 관계는 서로 달랐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출신 마을은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이었다. 출신 마을은 일본에 서의 생활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근거였다.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일, 마 을 개발 사업에 기부하는 일, 새롭게 일본으로 밀항 온 사람들을 후견하 는 일 등은 모두 출신 마을을 준거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같은 마을 사람 들로 구성된 재일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공동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기초는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를 규정한 유교적 질서이 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 하며,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연장자가 존중받았다. 이런 유교적 질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경제적 조건, 일본에서의 법적 지위 등 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간주하였다.

연구에서 다루어진 재일본달밭친목회는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고 그 이후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제주도의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였고, 재일 2세, 3세들은 친목 회에 가입하지 않아 회원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1차적 원인이었다. 1979 년 정기총회에서 회비를 납부한 사람이 23명이었으나 1983년에는 8명으 로, 1991년에는 4명으로 줄어들었다. 재일본달밭친목회의 퇴조는 디아스 포라 공동체가 민족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제주 디아스포 라 공동체는 민족 개념을 바탕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달밭마을 출신 재일 2세, 3세들을 추가 연구함으로써 보완될 필요가 있다. 제주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문화적 접경지대로 이해한다면 이들의 문화적 정체성 유지와 일본에서의 적응방안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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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Cultural Foundations of Jeju Diaspora Community in Japan

Kim, Chang-min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social relation of Jeju community in Japan in the viewpoint of ‘cultural boundary’.

Jeju people had immigrated to Japan sinc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had formed Jeju social groups in Japan. These social groups not only have functions to do mutual aid and socialize with confidence in Japan but give financial support to home village’s village development projects in Jeju. In this perspective, Jeju immigrant’s social groups in Japan can be considered as a community.

In spite of the diversity in social or economic conditions of members, these social groups recognized as community. In this meaning, Jeju immigrant’s social groups in Japan are

‘imagined community’. There are two reasons in the fact that Jeju immigrant’s social groups in Japan imagined as a community. One is the fact that these social groups has been organized based on home village in Jeju. In spite of the social or economic difference, Jeju immigrants regard home village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social reference in Japan.

Because home village gives image of ‘little cozy world’ to the Jeju immigrants, these social groups based on home village conceived as a community.

The other reason is the fact that social relationship in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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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igrant’s group is based on Confucian order. Jeju immigrant’s social groups put priority on common wealth rater than private interest and put emphasis on ancestor worship.

Further more, senior members are held in honor by junior members. In spite of the differences on economic and social conditions of the members, Confucian order makes these differences meaningless.

In conclusion, Jeju immigrant’s social groups are cultural boundary and accommodate to Japan society by using symbolic resources such as home village and Confucian order.

Key Word: cultural boundary, Jeju island, Jeju immigrant in Japan, imagined community, Confucian order, Dalbat-village

논문투고일자: 2020. 11. 15.

논문심사일자: 2020. 11. 23.–12. 20.

게재확정일자: 2020. 12. 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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