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원론 12강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오후 2:09
발제로 시작하겠습니다.
교) 발제자들 사이좋게 같이 앉은 것 같은데- 뭔가 기획 의도 같은데, 뭔가 말씀하시죠. 토론 거리로 제시한 것도 함께 논의할만한 것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먼저 발제한 순서로 하는 것이 책의 순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시다.
왕성) 제가 이야기했던 부분들- 실재에 관해서,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나- 과연 그것이 정당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설정 하고 가는 것이 정당한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면 같이 나눠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교)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제기된 질문에서 출발하죠.
광우) 언어에 대한 공동체 문제로 보자고 하면- 언어의 파편화. 그런 전제가 없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서로 소통이 되는데, 밑에 깔리는 것이 전제되는데- 공동체끼리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커넥션이 끊어지는 것은 아닌가-
왕성) 공동체의 언어인데- 폐쇄적인 공동체라면, 이 공동체 안에서만 소통되기 때문에, 전혀 다른 형식 속에서는 소통이 안 되겠죠. 하지만 신에 대한 공동적인 이해는 어느 정도 공유되지 만, 특정 공동체의 신 이해는 특정적일 수는 있죠. 다른 공동체를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신앙주의에 빠질 수는 있어요. 성찰의 문제들, 제기되는 것들에 대해 배타적인 방어- 신앙주의의 한계는 있지만, 대화 자체를 차단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광우) 언어 자체보다는, 언어에도 한계가 있다는 건데- 언어도 닫혀있지는 않잖아요. 번역이 되잖아요. 언어 자체도 통하는 면이 있고, 폐쇄적이지 않다는 거죠. 상대성을 인정하자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상대성을 이미 갖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여기는 너무 우리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오히려- 제 생각 같은 경우는, 존재가 언어보다 우월하지는 않지만, 존재가 언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고 봐요. 내용이 없으면 공허하는데, 병으로 말해서 싸잡히는 거고.
상대성- 애들이 말을 배울 때, 이거 뭐야- 비교하는 거죠. 책인가, 컴퓨터인가- 찾아가면서 그렇 게 하지만- 은유작품, 소설 많이 나오잖아요. 호수에 대해서… 무궁무진하게 나올 수 있는 것 자 체가, 상호교통이 아닌가 싶어요. 언어 자체가 있지 않은가 싶어요.
왕성) 예- 뭐- 언어가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실재가 있는 것 자체가 있다 없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규정해주는 것은 언어이고,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적인 동 의 하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서는 특정하게 그런 의미를 부여한 것에 대해 이해하 는 것이, 칸트 이후의 논의에서는 훨씬 정합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실재에 대한 이해한 공동 체에 대해 배제되기 때문에, 언어 공동체와 공동체의 의미들을 이해하는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더 첨가시켜야 포괄적인 논의가 되지 않을까.
#) 궁금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이 언어의 가장자리를 말하는데, 신비주의로 말하잖 아요.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공동체에서 의미 말하는 것도 신앙주의는 아닌가-
왕성) 그래서 신앙주의 위험이 있다고 말했어요.
#) 언어의 중심적인 역할을 비판하면서, 가장자리에서 기독교 언어가 놀 수 있다는- 종교의 고 유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걸 신앙주의로만 말하는지- 자기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만 그런지, 원래 그런지-
왕성) 언어게임에 기반하죠. 종교 언어는 나름의 논리가 있고, 나름의 방식이 있는 것이기 때 문에, 종교 언어가 유지되는 것에 대해 과학은 뭐라고 못하고- 외부에서 언어게임의 발동 방식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절대화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신앙주의라는 말이 나온 거고요. 가장자리는 상징이나 은유 같은 방식- 언어의 중심부는 객관화인데, 종교는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교) 과학 이야기도 언어와 함께하면 더 포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쪽으로 넘어갑시다. 구체적으로. 언어가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고.
왕성) 네 가지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상충, 독립, 대화, 통합. 당연히 저자는 대화와 통합 쪽으 로 가야한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 이전에 서로 간의 인식론적인 지향 안에서 위치설정을 해야 하지 않는가- 밑에 놓으려는 의도에서 대화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진호)
광우) 사실 물음과 의미 물음의 관계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의미 물음에 치중하지만, 과학자들은 팩트를 중시하잖아요. 삶의 어려움에 부딪히면 해결하기 어려운 과학. 하 지만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지만, 환경 상 계속 팩트를 찾아요. 성경에 이런 이야기 나오지 않 나- 팩트와 의미를 혼동해요. 창조과학도 그래요. 이거도 헷갈리고 있거든요. 사실적 언어와 의미 적 언어의 관계 설정- 어떻게 보시는지?
왕성)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 존 힉 이야기 나오면서, 팩트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중시할 거냐, 아니면 영향을 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할 것이냐. 이런 의미… 관계 설정이 이뤄져야 한다 고 보고요.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동의하고-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 때, 제가 이야기 드리고자 했던 부분들은, 종교는 사실을 포함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과학은 그 중에서 아주 사실적인 부분 들만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결국 종교가 우위에 있다-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지 않았나- 그게 아 니라, 영역이 아주 다른- 과학은 관여하는 사실에 대한 탐구 영역이 있고- 각각의 영역들을 대등 한 관계 속에서 놓고 가야, 어떤 진정한 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는가.
광우) 좀 분리된 느낌이에요. 도대체 사실이 뭐냐. 병이 있다고 하지만, 객관적 사실이냐는 다 른 문제거든요.
왕성) 과학과 종교의 사실은 다른 사실이거든요. 영향력을 미쳐서 의미적 사실이지만, 과학에서 는 사실이 아니잖아요. 사실을 바라보는 의미 규정이 다르거든요.
광우) 과학도 패러다임이라든지- 주관과 객관이 얽힌 상태가 소위 사실로 나오고- 종교도 눈에 보이는 사실- 떡이 딱 잘리는 것인지- 교호되는 것을 찾을 수 있는지- 제 입장은 종교를 잡아야 한다면- 종교가 방향을 잡아주고, 과학은 팩트 제시하고, 과학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 종교가 드 러나는…
$) 과학 이야기할 때, 과학이 말하는 것-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 뉴턴 같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을 말하는 것이냐.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나와요. 저자도 이야기하는 것도 양 자이론, 빛의 파동도 추측이지 사실이 아닌거죠. 과학이라는 것 자체도 사실을 목적으로, 근거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사실을 과학, 의미 종교는 의미 없어지는 상황 에서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철학을 통해 해보자. 과정철학. 판넨베르그도 그래서 철학 을 가지고 오고- 그래서 뒤에 발제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정 황을 통해서- 우리가 초월에 집중해봤자 돌고 도는 담론이 될 수밖에 없어서, 삶의 자리로 이동 해서, 이해를 통해 초월의 가치를 되살린다로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광우) 종교와 과학 사이의 철학적인 담론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철학도 떨어져있나요-
$) 굳이 중복될 수 있는 담론의 매개를 찾는다고 하면- 인간을 이해하는 논지, 철학적 담론을 통
진호) 철학을 가지고 오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차라리 공통의 자연이 낫지 않을까요.
$) 그런 걸 철학의 의미가 아닐까요.
주원) 사실 의미 구분은 별로 좋지 않아요. 그런 식의 주장은 자기 방편을 위한 거고, 종교와 과학은 대상과 방법의 차이 같아요. 인간에 대한 관심을 통해 대화가 가능하다로 하신 것으로 알 아들었거든요. 그들이 추구하는 영역에서 가르는 것은 왜곡이 벌어질 것 같고- 인간에게 어떤 의 미를 갖느냐- 과학이 사실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가 의미만 추구하는 것 아니고-
$) 과학이 철학적 의미를 통해 접근하는 방식… 그래서… 의미적인 차원에서…
#) 전적으로 분리는 아닌 것 같아요.
왕성) 상충- 왜 충돌이 발생하는가. 방법론의 차이가 희미해지면 흡수하려고 하고, 충돌이 일 어난다.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야- 여기 저기 다 객관 주관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충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명확한 경계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광우) 논의를 연장하면- 유전자 실험 같은 거- 여기서는 김주원 학우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을 위한 의미창출이 되면- 이게 어쩌면 당위적이지만, 굉장히 광범위하다고 봐요. 배아복제는 인간 이냐 아니냐- 우리의 논의가 너무 당위적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좀 더 종교에 좀 더 해놓고, 과학이 따라오는 것이 인간을 위해 좋다고 봐요.
왕성) 과학 교수가 요청하더라고요. 외계생명체가 5년 내에 발견될 텐데, 왜 신학이 거기에 대 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없다고만 하느냐. 발견이 되면, 엄청난 혼란이 생길 것 같은데, 카 톨릭은 했는데, 개신교는 안 하니까- 과학과 종교의 관계- 지금 개신교 신앙에서는 없다는 거잖 아요. 그 안에서 과학이 계속 가야 하는데- 종교가 제시하는 부분에서…
광우) 그래서 어깨동무에요. 이게 있어- 새로 제시하면 바뀌는 거죠.
%) 지금 타학문에 대한 방향성을 종교에 제시해줘야 한다는 전통적인 시각일 수 있는데- 그게 다른 학문에 얼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중세에는 그랬지만, 이후에는 와해되었잖아요.
지금에도 성직자가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는지도 회의적이에요. 성경이 인간사에 지침을 줘야한 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공감하지만, 종교가 위에 있다는 강박 때문에 뒤쳐지는 면도 있어요. 그래 서 끊임없이 타학문이나 다른 학문과 겸허하게 소통할 수 있는 전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광우) 항상 방향제시하지만, 폐쇄적인 게 아니라, 열린 방향…
%) 침묵도 방향제시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왕성) 방향제시라고 할 때, 전체적으로 길을 제시한다기보다- 기술의 발전 가운데 과학은 그냥 하지… 사용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요. 그런 것의 윤리적 사용에 대해 방향성을 이야기하시는 것 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 영역이 나뉘어진 부분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광우) 그래서 이번 장을 보면서, 언어로 다 풀어해쳤고, 그게 종교 윤리로 봤어요. 실제적으로 나온 것이 윤리인데- 덕윤리이잖아요.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종교 윤리가 절대적으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데… 신이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냐. 합리적인 근거가 좀 필 요할 것 같은데.
정우) 덕 윤리의 합리적 근거를 말하셨는데, 다른 목적을 위해 추정된 게 아니거든요. 예외 가 능성을 소멸해서 행위자를 중심으로 윤리적 수행을 수월하게 하려고 하는 거죠. 행위자들이 습성 이든 모든 것을 고려해서… 합리적 기준이다 나누는 것보다는 실천을 기준으로 해야 해요. 안 그 러면 공리주의나 의무론으로 돌아가요.
광우) 안 그러면 상황적으로 흘러가요. 엇나가면서 그렇게 되는 거지- 상황에 매몰되는 윤리가 되지 않을까- 보편적인 토대가 있어야 하죠.
정우) 반대로 상황과 괴리된 윤리는 실천될 수가 없어요. 윤리적 자괴감만 나와요. 덕윤리가 비판받는 것도 도덕적 엘리트주의 등 이야기가 나오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고도 볼 수 있죠. 하이아라키처럼 위에 있다면- 윤리의 실천 근거가 더 미약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요. 실천할 수 있으니 맞다고 볼 수 있어요. 말씀하신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실천 가능성 때문에- 너무 높이 놓아두니까 교회에서 할 수 있는게 없거든요.
광우) 물론 그렇죠. 함양되고 나아가고- 목적점이 필요한데-
%) 함몰 개념은 아니고-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의미가 있냐-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 느냐. 그런데 신학의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있어왔어요.
$) 상황 규범 모두 문제가 있으니 메타 윤리를 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리 잡고, 가능하냐.
이 책에서 메타 윤리는 말하지 않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행함을 통해, 거기에 정초해서 살아갔을 때, 실용주의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기 준은 아닌 것 같아요.
태진) 덕윤리 자체도- 정우 학우가 잘 설명했는데- 이 책에서 얇게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머리에 이거 하나 남았거든요. 칸트 이야기도 의무론적 이야기, 규범, 행동 의무 자체로서 완성된 도덕적 인간을 설정하니까 지쳐 떨어져나갔고, 교회도 아직도 그렇다고 보거든요. 저 자신도 훈 련하는 과정이 힘들었고, 되지도 않았고- 상대적 적절성을 가질 수 있는게 좋을 수도 있겠다. 하 지만 교리 자체를 디펜스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신이 원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의무론적 윤리면, 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덕윤리면- 이게 필요하고, 실천적으로 필요하다고 봐요.
정우) 그리스도의 은혜가 중요하죠. 그리스도인에 대해 교회 내에서 말하지 않거든요. 인간으로 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강조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쉽지 않아서… 덕윤리, 의무론 적 윤리, 사마리아인 비유잖아요. 금기를 깨면서 덕윤리 추구했다고 보거든요. 교회 내에서 성경 근거를 말하자면- 사마리아인이 중요해요.
광우) 의무론을 제가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에요. 사미리아인이 구할 때의 해석- 그 준거틀이 뭔 가.
정우) 상황이지, 준거틀이 먼저는 아니라고 봐요.
광우) 그리스도인이 뭐냐는 거예요.
%) 성경으로 들어가도 난해한 물음이 있어요. 밀 이삭 먹였잖아요. 주일이 왜 있냐고 물어보 고. 그 당시 규범에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준거틀이 종교경전에는 없잖아요. 단순히 성경이라는 텍스트, 도그마에 근거해서 제시할 수 있는 우월한 생각에 대해 말할 수 있나- 상황적인 충분한 고려.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광우)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일제 시대- 독립군이 왔어요. 숨겨준 독립군을 거짓말- 거기서 택할 거냐- 그게 상황에서만 오냐-
정우) 거짓말하는 의무론에 위배돼요. 상황이 아니라-
신의 속성… 왜 종교윤리를 가지고 해야 하냐. 우리가 그냥 못된 건데.
교) 우리 지난번에 신정론 폐기 했잖아ㅎㅎㅎ
%) 다시 돌아가게 돼요.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끊임없이 비판적인 것이, 교회가 못 지키면 서, 그리고 사회와 괴리된 상황- 정직할 필요가 있지 않나.
#) 이 책에서 종교 윤리 다루는 이유는 종교 안의 다양성과 차이- 같은 종교가 아닌데, 기준이
다 다른 거예요. 다 다르니까, 덕윤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존재라는 것, 긍정에서 철학적 시도를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한나 아렌트, 아이히만 재판 -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발제자, 하이데거, 언 어는 존재의 집이다- 비트겐슈타인 강연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는 저자의 죽음을 기반으로 하는 논의인데- 언어 자체가 스스로 그 의미를 말한다는 거죠. 해석하고 명명하기 때문에 언어가 생긴 것이 아니라, 언어가 그 자체로 울부짖는 것이죠. 결국에 가서는 초월에 대해서, 언어에 대 해서 이야기할 때도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석학의 막다른 골목은 미학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월이라는 존재 자체의 가치나 긍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고, 가능한지 않나-
정우) 초월이라고 표현할 때 약속한다고 말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약속된 언어로 계속 이야 기하면,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수준에 올 수 있다고 보지, 존재 자체가 담는다면…
$)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교) 자. 뭐. 한이 없겠지만, 진행을 위해 여기서 전반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세 번째고 마지막 책이고, 오늘 마지막 시간이에요. 한 학기동안 내내 기다리던- 학기 시작부 터 내내 이야기했어요. 첫 번째는 종교철학의 출발지평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스미스의 책을 읽었 고요. 두 번째 책은 이제- 세 번째와 견주어서, 유럽적인 분위기가 강한- 그래서 헤센 책을 가지 고 했고요. 정리하면서 또 말하겠지만- 관통해보는 이야기를 또 하겠습니다만- 앞의 책보다도 특 히 세 번째 책- 결론장까지 읽으면서 느끼겠지만, 한정된 시간동안 다루기에는 벅차요. 많아요.
그래서 고민했죠. 몇 가지를 뽑아서 진하게 할까- 대충 넘어갈까, 아니면 밀도 있게 반만 할까- 그러나 이렇게 안 하면, 이번에 하나 훑었는데- 종교철학이라는 분야가 이런 식으로 이런 주제를 다뤘구나. 앞으로 종교철학이라는 범주로, 텍스트를 옮기면서 구체적인 화두로 가지고 갑시다. 그 런 취지로 다 한번 훑어보자는 겁니다. 독서보고서, 과제만 아니라, 계속 읽어가는 마당에- 10%
20%만 다루고, 나머지는 개별 연구죠. 그런 뜻으로 이 영역이 그런 문제들을 이런 식으로 다룬 다. 문제, 화두들을 어떻게 픽업하고 다루는가. 그런 취지가 있어요. 종교철학을 위한 것이고- 굉 장히 현실적인 문제들이에요. 2주 전에 참석 못하고 열심히 토론하셨지만- 내세 같은 것도 현실 적이잖아요. 학문이든 목회든 신학과 관련된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련돼요. 설교원고를 어떻게 작 성할까 할 때, 그냥 성서와 주석서를 맴도는 것에서 벗어나서, 엑스타라폴을 세우는 것입니다. 상 당히 좋은 통찰과 화두를 얻어낼 수 있는 좋은 것들이, 장 하나에서 설교 몇 편이 나올 수 있겠 구나. 그래서 적어놨어요. 챕터 하나에서- 여러분들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해요. 안 그랬으면 그렇 게 보세요. 세미나를 위해서 진하게 살피는 것을 덮어두고, 양보하고, 이렇게라도 살펴보라는 것 입니다. 첫 번째는 이 분야에서 다루는 의제와 화두.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름대로의 사역, 목회활동. 목회활동에서 바로바로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소재, 재료, 자료이기 때문에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도 아울러 챙겨주시면 좋겠고. 잠시 쉬었다가, 오늘의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 해서, 첫 번째부터 한 학기 전체를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지금(45분) 쉬면 4시에 모이는 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지만, 55분에 모이도록 하겠습니 다. 그래야 5시 전에 한번이라도 끝나죠. 지상세계 가시지 마시고 한번 모이시죠.
(휴식)
자 이제 몇 가지 행정 사안을 정리하겠습니다.
이번 학기 종교철학 과목은 개론이고, 원론이에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름을 입력하는 사무실 직원이 깜빡해서 결국 종교철학이 되었어요. 그 직원은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원론은 시작이고 개론인데- 그래서 그 동안 운영하는 방식과 다르게 독서보고서를 만들고, 기말 보고서가 없어요.
읭? 몰랐어요?
조교는 이런 정보를 잘 취합했어야지ㅎㅎㅎ 그냥 보고서 제출방 만드는 건데ㅎㅎㅎ
전체적인 거보다, 특정한 주제를 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픽업하고 계속 갈고 닦는 과정을 거쳐 서 마지막에 연구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런 방식으로 그동안 했지만, 이번에는 원론이기 때문에, 연구보고서를 요구하지 않아요. 대신 매주 독서보고서를 한 겁니다. 다음부터는? 둘 다 결합해서,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다음 학기는 선불교와 종교철학으로 제목을 붙였어요. 구체적으로 선불교가 말하는 수미아타와 기독교가 말하는 케노시스. 그래서 부제는 수미아타와 케노시스입니 다. 3년 전에 했었는데, 그때 책들의 일부는 그대로 갈 거예요.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책과, 사랑 의 신학- 저의 문하생 1호 김화영 박사가 번역했어요. 그래서 그 책을 쓸 거고- 책을 더 많이, 영어 부담을 줄일 수 있겠죠.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외국 책을 안 쓰려고 해요. 나머지는 방학 중에 다른 자료들을 찾을 겁니다.
그 자료 중에는 한글이 부득불 확보 안 되는 경우, 한글 아닌 다른 글을 쓸 겁니다.
기왕에 다음 학기 이야기하니까, 다음 학기 엠디비에서 신학개론을 엽니다. 순번으로 돌아가니 까, 1번 과목이 여기서는 철학적 신학인데- 거기서는 좀 변형할거야. 신학성찰- 대중적으로 쓴 책이지만, 수업으로 끌고 가자면, 책 이상으로 가지고 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료를 쓰겠고- 방 법론을 재구성해서 다루는 것을 신학개론을 하고 있어요. 전공생 쪽에서 그런 식으로 기초과목을 한번 하고 싶다- 참고해도 좋아요. 다른 과목 출신 중에서는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가 이드라인으로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종합시험 시즌이 되다 보니- 박사과정은 엊그제 치렀고, 석사는 7월 1일. 그러니 6월 며칠 까지 내달라- 석사 박사 관련 방식은 이렇습니다. 시험 보는 분들이- 전공의 경우는 제가 개설한 과목 중에서 옛날부터 다 거슬러 가면, 순환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같이 돌아가는 과목, 없어진 과목-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고요. 그러나 미스할 수 없도록, 본인이 들은 거 중에 두 과목을 받았어요. 10개의 과목이다- 근데 난 1번 7번- 누구는 2번 5번- 그러면 빠지는 것이 있 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과목에 대한 관심, 문제를 만들라고 했어요. 그러면 제출된 문제 중에서 취합하고 정리해서 개인적으로 질문이 적절히 잘 만들어졌을 때는 그렇게 해라. 그리고 코멘트해 서 가이드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시험을 치르는 입장에서의 배려에요. 과목도 여러분이 택하고, 문제도 여러분이 택하고. 그러면서도 족보 식으로 정착됐어. 과목은 뻔해요. 시험은 정말 통과의 례야. 최소한 정리해보라는 거야. 저는 오픈북이 되어야 해요. 하지만 오픈북이 아니야. 전공생 여러 학생들이 모여서 하는데, 조직전공생만 책 펴놓고 하니, 감독이 어렵다는 거야. 다른 전공생 은 하기 힘들다- 그래서 행정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체제대로 못 하고, 달달 외우는 쪽으로 가요. 그래서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그래서 최소한 나름대로 문제를 만들고, 정리해서 그냥 눈 감고 일필휘지 하는 통과의례다. 그 절차에요. 그런 정도의 비 중이야. 그런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제가 박사 종합시험 볼 때- 한 학기 내내 봐요. 한번 시험 시작하면- 각 담당교수, 5개 분야를 봐야하거든요. 자기 소속 전공학 과에서 두 분야, 부전공 두 개, 종교학부 완전히 벗어나서 하나. 신과대 밖으로 가야해. 그렇게 5 개의 시험이고요. 한 과목이 하루 종일해요. 9시에 답안지 받아서 5시에 제출해요. 하루 종일 써 요. 그렇게 하기를 한 학기 시작해서 9월 1일- 석 달 사이 내가 정해. 하루 종일 8시간 동안 하 는 거예요. 뭘 보고 베끼든지- 그러니까 개개인마다 문제가 다 달라. 완전히 맞춤형이야. 그리고 문제를 교수 학생이 컨설트해. 나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시험이 무슨 필터링도 아니고, 커트라 인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취지야. 그런데 그게 여기서는 십분적용되지 못하고 있어. 그런 가운 데 여러분에게 과목을 택하고, 문제까지도 구체화하시오- 그런 선택의 폭을 제공하기 위해, 시험
보는 이들에게 과목을 택하고 문제를 제출하라- 이것도 해를 거듭하면서, 약간 형식적이 된 부분 이 있고, 그러다보니, 그것을 하지 않아서 시험을 치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더군요. 나는 여러분 의 편의를 위해서 그런 거지, 어떤 법적인 절차가 아닌데, 그걸 그렇게 해야 한다는 왜곡된 폐단 들이 있어서, 앞으로는 모든 과목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아주 드라이하게 할 것이고- 한 과 목 선택합니다. 타 전공생이 시험보겠다고 할 때는, 조직신학에서 선택할 때, 자기 이름을 밝히 고, 교수 이름을 쓰세요. 누구에게 시험을 봅니다- 전공생을 두 과목을 하고. 그러니까 저는 앞 으로 개설하는 과목 중에 오래된 과목들을 제외하고, 최근 5-6년 사이 시험 문제들을 낼 테니 준비하면 됩니다. 문제는 뻔하니까 그냥 하면 되고요. 불필요한 공부 외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 없어요. 자기 논문, 연구를 위한 것 외의 부담을 갖지 말고 그냥 보시면 돼요. 이렇게 하시면 됩 니다. 아주 편안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 제가 교수님 수업을 1년 반 동안 두 과목을 들었는데, 두 과목에 대한 공부를 하면, 거기서 관련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교) 선택은 그렇겠네요. 타 전공생이 내 과목을 택할 때, 과목 이름만 나한테 알려주면 좋겠어 요.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그거만 취합해서, 그 과목 해당되는 것만 내면 되죠. 안 그러면 리스트 업 하면, 과목이… 10개가 넘어갈 테니, 24문제가 되고, 달랑 한 문제 쓸 건데 문제가 3-4페이 지가 되겠죠. 전공생들은 편하게 하세요.
그리고 종합시험을 보기 위해서, 코스워크를 열심히 들었는데 청강해야 한다- 해야 한다 전혀 없어요. 부담 갖지 마세요. 코스워크 마쳤지만 더 듣고 싶다- 그거 좋아요. 시험 때문에 전략적 인 차원- 그거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과목에서 보고 싶다고 하면 하는 거야. 선택을 막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없습니다. 질문 없죠?
그러면 마지막 수업에 대한 예의로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이건 미안해서 그래요. 복도에 마주 쳐도 이름을 잘 몰라. 여러분의 존함을 존칭을 생략하고 부르겠습니다.
아이구, 시간이 이렇게 갔네.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한이 없을 겁니다. 세 번째 책을 놓고 어떻게 볼 건가- 시작하자 마자 그림을 그렸어요. 논증의 전개방법. 계속 반론의 연속적인 제시. 그리고 또 다른 입장을 B 로 전개하고, 반론을 계속 잇는 방식. 어떻게 살피냐. 이 책의 방식은 단순한 직선적인 전개를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딱딱 떨어지는 방식입니다. 다만 병렬의 관계를 본문이 친절하게 다루지 않다. 그래서 병렬의 관계를 읽어가는 두 번째 작업. 각 단순 선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야. 그 다 음은 지그재그의 관계죠. 자세하게 들어가려면 그 작업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여러분의 다 음 과제로 넘겼어요.
그리고 원론에서 뭘 해야 하냐―
이미 익숙한 분들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좋겠어요. 앞에 지난 시간의 것, 그리고 전에도 다 적용되는데- 거기만 추려볼게요. 언어 과학 윤리 얘기- 굉장히 중요한 것 중에 건너 뛴 것이 있 어요. 종교와 종교의 관계. 건너 뛴 것은 별도로 하는 과목이 있어요. 종교 신학. 거기서 다룰 것 이고, 한 학기 집중적으로 해야 해요. 여기서 지나가고 말 일이 아니라- 개론과 원론 선에서 여 기는 머물겠다는 취지에요.
언어 과학 윤리 있었는데- 뭘 택해도 좋습니다. 언어, 여러 이야기 나와요. 크게 봅시다. 유비 검증 반증 상징 축자. 그리고 몇 가닥의 작은 이야기도 있어. 하지만 4개 정도의 항목도 있지만, 그것도 뒤로 가고- 크게 보자는 거예요. 그 이유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우리에게 지식으로 남 지 말아야 할 것이로되, 통찰을 위해 의미 있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크게 보는 게 좋아요. 크게
본다- 유비로부터 상징으로의 전환을 읽는 것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축자? 상징과 정면으 로 맞부딪혀요. 유비에서 상징으로 전환, 그리고 축자는 상징과 충돌. 단지 작은 충돌로 말하자면 축자파가 커지니까- 근데 상징 이야기하고 축자를 말했어요. 그리고 축자의 가능성까지 했어. 그 런데- 주목하십시오 라고 하고 싶은 것은 유비 상징이에요. 같은 패턴으로 가봅시다. 첫 패턴은 충돌이야. 상충인데, 독립에서 대화, 통합까지 가. 네 개의 단계라고 할까요, 패러다임의 전환구 조를 말해. 네 개 말할 것도 없어. 크게 보자면- 대립에서 통합으로 에요. 시작에서 끝이에요. 종 교 윤리로 가게 되면- 복잡다단한 거 다 덮으면- 절의 제목을 다 따라가봐요. 그걸 읽어야 해.
근원 권위, 살짝 바꿔서 획득을 이야기하더니 의미로 갈 것이야- 봐 의미가 나오잖아. 흐름이 있 어요. 이걸 읽어야 해. 심심해서 쪼개는 게 아니에요.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략이야. 논리 적인 흐름이죠. 1~4절이- 헤센 책도 여기 책도- 근데 여기 유독 그래. 어떤 전환이냐. 근거로서 신 이야기서 시작했는데- 종교의 근거해서 종교의 윤리적 진리가 아니라, 윤리에서 진리로. 그리 고 의미까지 갔는데- 뒤에서 크게 보자면- 종교 윤리로 부터, 전통적인 종교 윤리에서 덕 윤리로 - 그리고 여기 논의를 그대로 가자면 뭡니까. 규범 윤리로부터 의무 윤리로부터, 덕 윤리로. 규 범에서 상황으로, 의무로부터 규범이다. 칸트의 윤리적인 정언적 기초. 칸트의 등록상표인데- 의 무윤리의 가닥에서 덕 윤리. 덕 윤리라고 일컬어진, 세속 윤리, 상황 윤리. 규범에서 상황으로 이 름을 붙일까요? 또는 의무에서 덕으로라고, 여기 표현을 따라가는 것도 가능하죠. 또는 한 발짝- 규범에서 상황 윤리로- 오늘 세 가지도, 대립에서 통합, 의무에서 덕, 유비에서 상징- 이 일련의 전환들을 이미 익숙하고 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전환입니다. 그런데 이 전환은 어떤 전환일 까. 시작에서 끝이라고 추려도 좋을 일인데요. 단적인- 세 개 항목을 놓고- 언어 과학 윤리- 마 지막 시간까지 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면 5시에 못 끝나. 그래도 알아서 그려서 용세는 올리 기 바라고- 그렇다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보내지 말고.
A지평과 B지평의 근본적인 차이가 뭐냐- 유비와 상징 사이의 차이? 유비는 실재, 상징은 관계 의 언어에요.
유비. 유비를 말하기 위해, 중세 스콜라가 유비 신학인데- 그것에 대한 수정적인 대안으로 현 대에 나오는 것이 관계 유비에요. 존재 유비. 그게 중세 스콜라의 논리적인 뼈대죠. 인간이 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근거에요. 그거를 아주 첨예하게 잘 갈고 닦은 것이 토마스에요. 한창 열심 히 읽을 때는 줄줄 외웠는데- 한 두 군데서 말해요. 유비하면 토마스 나오고, 두 개의 유비가 나 와요.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하나는 뭐… 어… 무슨 유비지? 하여튼 그게 있어. 비례의 유 비하고, 비례성의 유비. 하여간, 그건 중요하지 않고. 실체라는 토대 위에 전개된 방식이야. 그러 면? 유비의 토대가 실체라는 것은 뭐에요. 인간사에 적용되는 주술 구조의 언어를 그 영역 바깥 에 있는 무한자에 적용시킬 때, 유한자와 무한자, 절대자와 상대자-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어.
하지만 유비는 비유사성과 유사성을 묶는 거야. 어떤 방식으로 엮는가에 따라 유비가 되기도 하 고 상징이 되기도 해요. 그러면 유비는, 상징은, 상징의 특수형태인 은유는 어떻게? 디테일한 설 명은 여기서 하지는 못하고- 크게는 실체 대 관계라고 했는데- 어찌되었든 간에 유비는- 인간 영역 안에서 A와B 사이의 관계가 C와D의 관계를 끌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관계가 유비적이라는 거지, A와 C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야 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지켜져. 그 런데 어떤 방식으로 지켜져? 여기서 결정적인 힌트는 실체야. 그래야 비유사성이 지켜지는 거야.
그런데 상징으로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본문에서 확인해도 좋아요. 여러 군데서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걸 다 픽업할 수는 없겠고. 342쪽, 제일 윗부분 여러분이 참고하면 좋겠고요, 상징 으로 가면, 360페이지 인용구… 고전적 유비이론이라고 되어있는 곳 있죠? 그 절이 있어. 두 번 째 절이네. 그 다음 페이지야. 제일 윗문단에서 살피고-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찾아요. 그 다음
에, 몇 절 넘어가면 상징 이야기가 있죠. 상징으로서의 종교. 절 제목- 그 페이지부터 4페이지 가면 인용구 나오죠. 바로 그 밑에 있는 것. 그 부분 둘을 비교하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텐데- 앞에서 유사성과 비유사성, 이질성 같은 말 했고요- 상징은… 틸리히도 나오지만- 실재의 로 시 작하는 한 문단… 그 부분을 살피면,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 양쪽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시 각적으로 대비해서 연관하는 방식입니다.
요 차이를 한 번 더 주목할 수 있는 것- 언어 이야기하다가 존재의 집까지 나왔지만- 이런 거 죠, 말하자면. 스콜라주의 시대 때- 유비를 가장 즐겨하던- 그때의 유비 논리를 가능케 하던 진 리관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입니다. 직역하면 그렇죠. 그랬을 때, 지성과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이 루어지는가- 사물이 이미 있어요. 그러면 지성의 역할은 사물을- 그죠? 인간에게 끌고 들어와서 관계시키는, 가장 탁월하고 올바른 기능이고 방법이야. 그게 intellectus야. 그래서 스콜라 스테 시스인데. 그런 언어관. 사물에 대하여 지성이 목적과 수단의 관계. 지성이 도구적 위치, 즉, 언 어가 도구에요. 근세에도 이게 이어져요. 이성론이든 경험론이든, 어떻게 알 것이냐? 앎이 어떤 식으로든 엮어지고 형성될 때, 결국 언어잖아. 그러면 언어는 뭐냐- 개념이 전개되는 틀이야. 철 저히 통로에요. 칸트에게도 여전히 마찬가지야. 쯥. 그러다가. 현대로 넘어오면서, 아까 존재의 집까지 나왔지만- 현대 언어관의 결정적인… 가장 많이 회자되고 집약적인 표현으로 간주되는 것 이죠.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이데거의 표현인데요. 존재의 집이다 라는 말 은- 사실은 존재가 그 안에 들어있다는 1차적인 뜻 이상으로, 존재를 만들고 구성한다는 거죠.
만든다는 것은 창조나 제작이 아니라 구성한다는 거예요. 구성은 무슨 말이냐면요- 형이상학- 고 전 형이상학이든 근데 형이상학이든- 현대가 구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말이 구성이거든요.
없는 것을 만드는 것- 어디서 많이 들었지? 종교에서는 창조고 형이상학에서는 있음이고… 이게 형이상학의 영역이라면, 없음에서 있음은 구성이 아니죠. 창조고, 백번 양보해도 제작이죠. 근데 저기 있는 것을 여기 이렇게 있게 만드는 것- 그게 구성이에요. 저기 그렇게는 모를 뿐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있는 거야. 그것을 여기 이렇게 있는 것으로- 언어 는 그걸 여기로 이미 끌고 나오는 작업이야. 그 전에 언어는 도구였습니다. 그 진리관- 스콜라 주의적인 진리관도 그렇고, 그때는 도구였어요. 언어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말아야 해. 그래 야 진리관의 방식이 잘 벌어져. 그런데- 급전환이 일어나. 현대적인 전환이 일어나. 무슨 일? 다 잘 아시잖아요. 그 다음에 언어는 그냥 도구가 아니잖아. 여기 이렇게 있도록 하는 짓을 한 거 야. 헤겔과 마악스 사이에 주고 받은 명제-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
언어를 놓고 헤겔에 대해 막스가 공격한 거지- 그… 비판철학. 프랑크푸르트 학파 라인도 그렇 지. 그 논쟁을 계속 끌고가는 부류거든요. 존재와 의식은 전통적이야. 하지만 언어와 의식은 근세 의 끝자락에서 부상된- 그래서 근세와 현대를 분리해요. 그런데 순서가 어떻게 맞아요? 종래는 의식이 언어를 지배해. 하지만 요즘은 언어가 의식을 지배해. 그래서 그런 의미로 존재의 집이에 요. 무념무상, 무색무취의 도구, 텅 빈 통로가 아니야.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말- 엘과 갓은 비슷 하지만 같지는 않아. 모든 말이 다 그렇지. 다 비슷하죠. 그런 관계가 거기만 통할까? 나의 하나 님과 경찬이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비슷하지만 다를꺼야.
얘기가 길어졌네요. 뒷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저 앞에, 유비에서 상징으로 할 때, 실체에서 관 계, 도구에서 구성으로에요. 텅 빈 도구에서 주물러대는 구성이야. 텅 빈 도구에서 주물러대는 구 성이에요. 텅 빈 것과 주무르는 것은 하늘과 땅이지. 그러니 언어가 의식을 지배하는 게 현격하 게 부각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언어- 하늘님에서 하나님으로 바꾼다고 해서, 이름 바꾼다고 해 서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 다 적용할 수 있겠죠. 자. 그런 얘기를 언어에 한다면-
과학에서는 통합, 윤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죠.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현대에서. 무
슨 일이 벌어져서 그런가- 익숙한 분들도 있겠지만, 함께 추려봅시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언 어가 도구에서 구성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앎에서 삶으로의 확장이고 심화입니다. 전환 이라고 하면 오도될 수 있어. 앎을 제끼고 삶으로 가는 것 같을 수 있어. 그래서 확장과 심화에 요. 앎을 포함하겠지. 하지만 삶에는 앎에 담길 수 없는 것들이 엄청 많이 있어요. 앎의 바깥에 그렇게 많이 깔린 많은 물음들이 삶을 그렇게 많이 이루고 있어. 왜냐면 삶은 죽음과 불가분리하 게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죽음은 저 끝이 아니라, 삶 가운데 늘 가능성의 형태로 깔려있는 거 야. 사실 가능성은 너무 부족해. 가능성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들이 늘 죽 으면서 살고 있어.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이야. 건강하게 죽어져야 건강하게 몸이 유지돼. 우리 가 잘 죽어야 잘 살어. 이건 시적 언어가 아니라 과학이에요. 시어는 옛날에 했고, 종교적 통찰 은 옛날부터 그랬고, 드디어 하나님은 급기야 과학까지 들어서 그래. 그런데 이래도 아멘을 안 하고 창조과학 가서 아멘 하니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거야. 내 창조가 겨우 그거냐. 하여간. 어 디까지 했더라. 아. 죽음과 삶. 그래서 앎에서 삶은 전환이 적절하지 않고요.
하여간.
첫 번째 책은 뭐에요- 종교라는 말, 이만 저만 이런 대안이 필요하다. 신앙과 축적적 전통이 야. 그때 그런 이야기 했는지 희미하지만- 이 대목에서, 끝나는 마당에- 신앙과 축적적 전통- 마 구잡이 선택이 아닌데. 종교란 한 단어를 대체하는데, 왜 그렇게 복잡한, 번거롭게 들리는 표현을 했을까. 우리가 공유하건 말건 간에, 그 추리가 무엇일까. 그리 봤을 때, 잘 생각해봐요. 그 앞선 장에서 신과 역사를 얘기했어요. 그죠? 그 말로 넘어가기 위한 가교의 징검다리의 항목들을 깔아 놨다고. 역사로부터, 역사가 종교 안에 담기는 방식이겠지. 그러면 뭐야. 신앙은 공시적인 축이 될 꺼고, 축적적인 전통은 통시적이 될 꺼야. 가로와 세로, 전략적인 합성이에요. 그러면 종교라 는 개념- 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제도화 과정에서 내몰린 물상화- 그 안에서 어떠한- 물건이 되어버렸어. 물건의 모양새- 역사가 없는 거야. 입체적인 그림을 그 안에서 끌어낼 수 없어. 그 러면 종교주의가 되어버려. 내가 속한 종교가 하나님과 동일화하고, 종교를 절대화해. 하나님은 당연히 절대적이지만, 그건 상징이거든요. 절대라는 말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인간이 경험할 수가 없어요. 개념화할 수 없어요. 개념은 잡아내고, 상징은 가리키는 거야. 상징의 지시체가 실제로 (reality) 드러나도록 해야 해. 그게 틸리히가 말하는 상징이에요. 상징은 자기 붕괴해야해. 안 그 러면 실체화되는 거예요. 상징이 그런 건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그래서 대조하고, 추려내는 작업이 필요해요. 5시 전까지 끝내려다보니… 갈 길이… 시계 보다 잊어먹었어.
종교가 물상화되면서, 우리 앞에 종교와 관계하는 내가- 내가 그 종교의 장본인이고- 표현이야 그렇게 안 하지. 그런 의식도 없지.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지. 나로부터 종교의 역사가 시작하는 것인가. 그걸 고발하는 거예요. 내가 역사의 시작이야. 내가 역사의 주인이야. 물론, 민중신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라고 하는데-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역사의 시점이라는 양- 시점으로 무의식적으로 간주하는 행태, 현상의 좋은 증거는 굽이굽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엮어져 왔는지에 대한 성찰의 무게가 전혀 없는 거지. 없는 방식의 신앙인 거지. 그래서 종교로 물상화, 납작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것을 깨고, 유구한 흐름 가운데- 축적적 전통- 왜 축적적을 썼어? On going process라는 거야. 그거에 빠지지 말라는 거야. 칼뱅주의- 예수는 어디 가고, 칼뱅만 남아? 대한민국 조직신학회 가면 많이 볼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안 가. 그래서 종교에 밀 집되어 둔갑되었잖아. 고대만 해도? 경건의 뜻을 갖고, 중세는 신앙이 지배적이어서 수면 아래로 갔다가, 근대는? 바로 제도를 지칭하고 제도화 개념화 물상화의 과정이 되어버렸다. 그게 스미스.
어~ 스미스. 그 이야기를 통해 보자면- 원래 시작이 종교적인 삶이었다. 형용사가 지칭하는 것 은 삶이거든요. 원래 삶이 시작이야. 하지만 나중에 후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인 과정
때문에 물상화되기까지 했다는 분석이잖아요. 스미스의 이야기를 이 맥락에- 유비로부터 상징, 대립에서 통합으로- 이런 맥락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성과 신앙의 관계도 그렇잖아. 비판적 합리주의로 가고, A에서 B는 근세까지 아우르는 예부터 현대로 가는 거잖아. 시대적인 말은 안 하지만, 다 그런 전환이라고. 과학은 과학, 언어는 언어, 내세 이성 이야기 다 그래요. 결국 시대 적인 전환이에요. 그러면 결정적인 전환은 앎에서 삶으로 확장이자 심화에요. 그걸 스미스와 연 결하면, 어떤 더 큰 그림이 그려지느냐? 우리가 철학사라고 하면 신화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에 요. BC 500년이에요. 근데 그때 원초적인 동기가 있었을 텐데, 그리고 거기서 발현 되었을 텐데 - 그런데 제1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실재를 존재로 이야기하든 무로 이야기하든, 이미 있음으 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철학사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있음에서 시작해서 성찰적으로 알도록, 그래 서 삶으로 가도록 철학사를 읽지만! 종교의 눈으로 가게 되면? 그 이전으로 가야지. 스미스가 말 하는 종교적 삶- 삶이 현대의 언어가 아니라, 시원적인, 원초적인 지평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 기를 스미스가 아주, 입체적이고 체계적인 통찰의 과정으로 그 첫 번째 책의 의미를 새길 수 있 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납작해져서 사물화 되어버린 것을 애써 시각적으로 현시하기 위해 신앙과 축적적 전통으로 그려냈어. 그렇게 면이 되어 삶을 회복해요. 얽히면 두 개의 선이 아니라 면이 에요. 두 개의 가로는 지그재그에요. 하지만 스미스는 가로 세로에요. 그리고 그 면이 표상하는 것은 삶이고, 원래의 것이었다. 그 과정을 있음과 삶인데 죽음 때문에 영원히 살아있는 있음을 잡으려니 없음을 배제하고… 그래서 다시 회귀하는 거야. 첫 있음이 있음이 아니고, 신화 이전의 것으로 거슬러서 보니까, 긴긴 유구한 그림이 신화 이전까지. 이성으로부터 시작한 있음 앎 삶이 라는 과정이 인간과 종교의 그림을 읽는데 얼마나 지엽적이고 협소한 스팩트럼인가 를 스미스를 통해 읽어야 하는 것이고. 현대에 와서, 그것의 원초성, 시원적 원초성, 삶의 원초성을 회복하려 는 시도들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난다는 거고, 그걸 읽어야 해요. 그게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유 행이 아니라, 원래의 것이에요. 그 눈으로 첫 책을 읽으면, 지금의 대립들은 원초성 회복이야. 그 래서 스미스 책이 의미를 지니는 거야. 삶의 원초성- 종교에 대하여 절실하게 요구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스미스의 의미로 추려야 마땅하겠다.
그러면 두 번째, 헤센의 책은? 그림을 다시 떠올리면- 앞의 첫 책, 세 번째 책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건 현상 경험 행위 라는 축을 썼죠. 두 개, 세 개의 카테고리로 여러 분석을 하고, 기본 축 을 놓고 쫙 깔았습니다. 그 책을 분석할 때 그가 전개한 그림이고- 이 맥락에서 두 번째 책의 의 미는 무엇인가? 헤센은 경험에서 시작했어요. 경험은- 어떤 경험이에요? 근세 인식론자들, 경험 론자들의 경험이 아니고, sense inspiration이 아니고,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이후 읊어지는 체험 으로서의 경험이에요. Erlebnis이에요. 삶이 겪는 거거든. 그런 의미에서 체험- 그거를 자기의 출발점으로 선택하기 위해 그가 택한 장르가 현상학이었어요. 여기서 현상은 칸트의 현상도 플라 톤의 현상도 아닙니다. 플라톤은 그림자, 칸트는 물자체와 분리된 현상이야. 하지만 훗설의 현상 은- 현상학적 환원의 기교들을 상당히 뒤로 물리고, Lebensweld로 가요. 거기서 유명한 Sitz im Leben이 나와요. 삶이야, 삶. 삶과 현상을 한꺼번에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체험- 체험에서 시 작해요. 쫙 분석하고 쭉 가지를 펼치잖아. 펼쳐네죠. 그것은 무엇을 뜻해- 체험에서 주와 객 사 이의 관계. 1 2 3 4에서 3에서 해당해. 체험이. 객과 주의 구별에서 주에 속해. 그래서 주의 체 험에서 시작했어. 1장에서 체험이야기하고 2장에서 행위 이야기하고, 그 다음 2장 가지고 현상 다뤘잖아요. 첫 출발을 세 번째에 놓고, 4로 가고, 1과 2로 가는 것- 그런 방식의 전개. 같은 종 교철학이라고 해도, 근세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고, 고전인은 말할 필요도 없죠. 내용을 자세히 되 뇌지 않더라도, 그런 축을 놓고도 출발점을 어디에 기준을 놓고, 그 방법. 그리고 내용적 함의-
앞에 스미스가 말하는 원초적인 차원에서 종교적 삶이라고 하는 것, 체험으로서 종교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 맥락에서 아주 다중다양한 이슈를 가지고 여전히 그런 전환. 대립에서 통합으로 하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버전을 다양하게 가지고 가지만, 총 관통하는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펴 읽고 추려내야 하지 않겠느냐. 결국 세 권의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고요.
그냥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창조과학이 잠시 나왔는데ㅎㅎ 그… 현금의 교회 현실에서 예 찬되고 있는 창조과학에 대하여, 그… 아까 여러분들이 그런 논의를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생 각하고 안 다뤘는지- 아규먼트든지… 여기서는 간단히 넘어갔어요. 거기에 대해 더 검토할 가치 가 있지 않나 싶어요. 발제서도 나왔는데. 종교환원주의가 고전이라면, 과학주의- 나도 이뻐해주 오. 그러는 거 아닌가. 과학 종교 대화가 그런 분위기가 적지 않죠. 과학은 관심도 없는데, 종교 쪽에서 자꾸 가서- 그렇다면 더 설득력 있게- 창조과학은 그들의 숭고한 목적에도 불고하고- 숭 고하지. 갸륵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신앙을 과학의 법정에 가서 승인 받으려고 하는- 불쌍 한 영혼일 수밖에 없어. 결국 과학을 믿겠다는 거 아냐. 과학자들은 결코 안 그런데. 아까 과학 교수 이야기 나오는데- 생물학자들은 진화를 단 한 번도 진리라고 말한 적이 없대. 사실적 진리 라고 말한 적이 없대. 단지 가설이야. 반증 입증 자료가 있어. 다만 오해되는 진화론- 종간 진화 론은 아예 없대요. 그런데 창조과학을 포함한 종교 쪽에서, 진화론에 대해 과도한 알레르기를 보 이는 사람들이 굉장히 곡해한다는 거야. 진화론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거야. 생물학과 교수가 거품을 품더라고. 자기 교회에 창조과학자가 와서 강의하는데- 지구의 역 사. 젊은 지구 말하는데- 47억년… 젊은 지구론은 만년 내지 7천년… 그런데 그랜드 캐년 딱 보 는 거지. 보라는 거지. 미국의 교포들 보면, 대부흥 성회한다고. 거기서. 눈 앞의 혁혁한 증거하 면서- 그런데 자기네 교회 와서 젊은 지구론 말한데. 그리고 왜 늙은 지구 나왔냐- 지구가 고생 해서 그랬대. 명색이 과학자인 사람이- 어떻게 얘기하나 들어주려다 도저히 못 듣겠어서 나갔다 고- 버전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하지만 여러 버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대립에서는 창조와 진화가 대립하겠지. 하지만 독립 대화 통합… 창세기 창조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진화는 뭐냐- 없는 것에서도 있게 하셨는데, 둔갑, 변이. 왜 못 써? 자 연현상 안에서 그가 선택하시면 다 선택하는 거지. 왜 하필 머리가 위에 있는지- 그의 선택이야.
무수한 가능한 것 중에 한 가닥으로 진화 따위가, 천칭에 딱 올려서 창조와 무게가 같은 것인 냥 왜 그 짓을 하냐고. 진화 나부랭이는 창조하고 비교도 안 돼. 거대한 창조 말고는 말이 안 돼.
이건 상징도 안 돼- 그런 창조에 진화와 맞붙이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창조에 대한 모독이야. 진 짜 창조를 믿는다면, 진화의 수 억 배의 이야기가 나와도- 왜 없지 않고 있어요? 데카르트처럼 다 없애봐. 나만 빼고- 책상, 포유류 동물, 지구 없애고- 중력 간의 균형 깨져서 우주 없애고, 공 간까지 없애버려! 무한한 허공까지! 그러면 왜 하필 없지 않고 있냐고. 그게 창조인데. 그 안에서 - 우주가 축소하던… 하찮은 진화 따위가 저울질을 하고… 그게 신성모독이에요. 그래서 난 창조 과학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런 통찰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 닌가. 시간관계상 혼자 북치고 장구 치는 것은 그만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5시 반을 넘기지 말아야겠고. 그러면 저는 여기서 멈추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지막에는 잘잘한 이슈로 하는 것보다 전체적인 소회- 제안을 하는 것처럼, 나는 이렇게 느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작은 이야기로… 미시 담론으로 마쳤네요. 거대 이 야기로 나가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 좋겠지만- 그래서 다음부터는 마지막 두 주는 아예 책 없이 소회만 나누도록 하면 좋겠어요. 교수 생활 22년 만에 깨달았네요.
그러면 침묵의 뜻을 깊이 새기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