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원론 2강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오후 1:51
지난 첫 시간에. 과목 설명을 좀 했어요. 근데 과목이 종교철학이야. 종교철학은- 그래서 앞부 분은 형식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굳이 할 수 있는데. 그런 분야가 형성되는 과정을 역사의 계보 를 따라 훑었죠. 종교철학은 종교와 철학의 결합인데. 단편적을, 단편적인 것조차도 순서를 배치 하지 않으면 파편이 돼요. 낱개의 지식은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 라도 보배라고. 인터넷에 넘치는 구슬들을 어떻게 뽑아서 좌우로 상하로 배치를 할 것인가. 그래 서 나름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을 유지할 것인가. 방법이 중요합니다. 특히, 대학원 수업이 그 런데, 특히 철학. 철학으로 가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 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부수적이여. 극단적으로는, 내용이 공허할 지라도, 그것을 감수하더라 도 꿰어내는 방법에 관한 생각입니다. Thinking은 비어있는 것이야. 담겨있는 것이 내용이야. 내 용은 전문성의 분야에서 할 것. 그것도 의미는 있지만- 철학 안에서는 철학의 기본 정신을 함께 공유하고 감지해야 할 터인데- 종교철학에서 철학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형식에 더 집중해서 한 말인데요.
다시 한 번 노파심에- 첫째 시간의 이야기를 강조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인 데- 오늘의 필요성에 맞춰서 이야기할게요. 여러분 정리한 걸 다 보면 효과적이겠지만. 안 보더 라도.
종교철학의 분야는 종교와 철학의 결합이고요. 현대에 와서 종교와 철학이 결합되었죠.
뻔한 말장난 같아보여도, 인류 문명사에서 종교와 철학이 언제 어떻게- 연대기적으로만 따져 도, 언제 어떻게 출현했는가 하면 엄청난 시간적- 종교와 철학이 언제 시작했어요? 50만년이 됐 든, 인간이ㅡ 역사=종교의 역사. 그에 반해 철학은- 근본 학문으로서 철학은- 연대기적으로는 비 교도 안 되는 저 뒷이야기라고요. 그 결합이야. 그 거리만큼, 시간적인 거리만큼 굉장히- 구체적 으로 취하고 있는 도구도 그렇고, 방법도 그렇고 꽤 달라보입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얽혀 또.
종교와 철학은 연대기적으로 보면, 이 끝에서 저 끝이야. 종교에서 예술, 신화, 학문. 오늘날은 학문의 시대야. 앞에 것이 지나간 것이 아니지만, 학문의 눈에서 종교 예술 신화를 보는 것. 그 것에 대한 반동이 오늘날 있기는 한데-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그렇게 읽어요. 그런데 포스트는 딱 히 모라고 하지 못하니까 잠정적인 말이야. 그래서 잠시 말하는 건데. 표현을 뒤로 하고. 네이밍 이 붙여질 거여. 잠정적인 이름 속에서 logo centrism에 붙은 것. 학문 시대- 적어도. 종교 예 술 신화 학문. 네 개의 장르를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미선진. 인류 문명의 목표이고 가치. 그런 가치, 그런 목표를 왜? 이미 종교에서도 확인이 되지만- 그 네 장르로는 문화 전반을 아우를 수 있어. 근데 학문은 5만 년 중에 2500년 밖에 안 돼. 이게 학문의 역사야. 근데 지금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Logos의 세례를 받아버렸고요. 그런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학문 출현의 첫 단계로서 철학과 저 앞의 종교와의 관계. 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완제품으로 뚝 떨어 진 것이 아니고요. 잠시 잠간 학문간의 교류의 산물이 아니고요. 지금까지 아우르는 폭이라는 겁 니다. 긍정적인 표현은 뒷면을 보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냐. 그 거리를 어떻게 싸잡을 까 입니다. 그런 노력을 오늘 스미스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한다면, 고대는 고대, 중세는 중세, 근 세는 근세, 현대는 현대. 고중근현. 인류 전체로 생각할 수 있지만, 2500년밖에 안 돼. 5만년으 로 잡아도, 20분의 1이야. 20분의 19가 먼저 있어요. 그런 거야. 우리는 그 안에서. 그런 마당 에, 문명의 그런 계보적인 흐름 속의 맥락에서 의미를 세워야겠다. 기독교라는 것은- 스미스도
그렇지만- 개념으로서의 종교 전에, 종교적인 삶이 먼저 있었고. 여러 동기 때문에 개념화 대상 화 실재화 물상화 또 깨부수려고 하는 것. 그 와중에 기독교도 출현하고. 기독교도 그런 개념과 이러쿵 저러쿵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다보니까~ 왜곡, 축소, 확장 등 온갖 부침을 받았다. 그런 폭을 종교라는 것이, 그 뜻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을 펼치면, 고대중세 이야기 나오죠. 20분의 1이라는 것 잊지 마시고요. 그런데 20분의 1을 또 나눠요. 여기서는 고대, 중세를 굉장히 짧게 나오지만. 이미 중세에서 대리전의 성격을 찐하게 했어요. 종교의 도구로서 신학, 철학과 학문의 도구로서 이성. 신앙과 이성의 관계! 종교 대신에 썼던 신앙. 종교와 철학이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작은 범주로 볼 수도 있지만, 일찌감치, 일종 의 "대리전"이 펼쳐졌어. 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대와 근세는 어떻게? 어쨌든. 오늘 얘기가 그렇습니다.
지난 얘기로 돌아가면, 그렇습니다. 도구가 굉장히 다른데- 아무리 스콜라 학자들이 주물렀어 도. 그걸 스콜라식으로 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논변이 정당해도, 이 시대정신에 비추면 지극히 작은 얘기에요. 스미스는 안 다뤄도, 우리는 종교철학의 눈으로 그걸 볼 수 있어야 해요. 가치와 덕목이 달라. 그래서 스콜라만으로는 할 수 없어. 그래도 종교와 철학이 공유하는 것이 있어. 그 것이 목적이고 가치에요. 참된 종교와 참된 지혜. 고대에서 이미 그 동치 가능성이 깔려있었다.
과정은, 도구는 굉장히 다르고 심지어 대립적이어서, 스콜라의 과제였지만- 그 목적을 공유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멀고도 가까운, 굉장히 입체적인 관계죠. 뚝떨어진 완제품이 아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종교철학은, 종교는 인류와 함께 시작했고, 학문은 저 뒤에 했고- 그러면 종교철 학은 이미 있는 종교와 나중의 학문과 만나는 것은 당연해요. 그래서 학문의 시작과 종교철학은 같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앞의 아르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거야. 아르케. 플라톤이 한 거. 뿌 리에 대한 탐구를 철학으로 말하면, 철학 중에서 제1철학인 형이상학. 메타피지카 입장에서 말하 면 아르케고요, 종교에서 말하면 신이야. 그래서 철학의 시작=종교의 시작. 그러나 이건 오늘날 에서 보면, 고전적인 의미의 종교철학이야. 그러면 오늘날의 의미의 시작은 종교학의 시작과 함 께야. 스미스처럼 헤겔 시작인지는 이의가 있지만, 19세기의 이야기라는 것은 모두 동의해. 종교 학에서는 헤겔보다는 막스 뮬러를 시조로 보지만. 하여간, 19세기에 벌어진 이야기에요. 최근 200년 동안. 근대의 끝자락에서 현대. 종교학과 관련해서, 앞에- 고전적인 종교철학과 현대적인 종교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는 종교에 대한 철학적인 반성. 현대는 학문적 방법론에 대 한 성찰이라고 했어. 그렇다고 고대의 작업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이게 어떤 때에 관한 이야기인 가, 분별할 감각이 필요해. 고전적이라고 해서 지나간 시대라는 뉘앙스를 주면, 오도하는 거고.
종교학과 관련해서 학문 방법론의 성찰로서 진행될 수도 있겠고.
진호의 이야기는 일단 나눈 다음에 수렴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 같고.
제가 지난 시간 이렇게 말한 것 같아요.
그 다음은 뭐했죠?
진호) 수업 이야기…
교) 두 번째도 여기에 관련되겠죠.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어- 그래 그래.
발제가 준비됐군요.
들어가는 마당인데- 제가 그- 보통 이제 수업 진행하는 방식이- 바로 요 순간에, 이런 저런 내용을 하니까, 염두에 두어두고, 미리 기본틀을 갖고 살펴보십시오. 이미 읽었을 것이고, 발제도 할 것이고. 같이 발제를 공유할 때라도, 그런 감각을 가져주십시오 라는 건데요. 그 다음에 발제 토론 하고 제가 보충하는 거죠.
그런데 실험적으로 안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형식을 미리 주고, 내 용을 줄 수 있어서. 형식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추려야 할 것인가에 주목하는 작업을 스스로 연 마하자는 거야. 뭘 알려고 하지 말고, thinking 하자. 어떻게 추릴 것인가. 특히 그런 실험,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제가 대학원에 개설한 수업 중에- 물론 이 책은 해당하 지는 않지만, 다음이나 그 다음 책의 경우는, 소위 primary source. 1차, 2차 자료로 구분을 하 자면, 2차 자료적인 성격이 상당한 책들이에요. 개론서이기 때문에. 스미스 책은 꼭 그렇지는 않 지만. 제가 전에 철학적인 신학으로 할 때는 개론적인 책들, 그래서 2차 자료를 가지고 했고, 그 외는 모두 1차 자료야. 물론, 저는 라틴어 독일어 쓰지 않고, 한글을 쓰지만- 영혼의 학문을 해 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혼의 소리는 어디서 들리냐고요? 김현희. 마현희. 철저하게 일본인 행 세했어요. 처음 잡혔을 때. 그때 안기부였는지 정보부였는지. 몇 달 동안 같이 다녀요. 왜냐면 자 해할까봐. 그래서- 어느날, 며칠이 지났는지, 목욕탕에서 물을 탁 트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니- 갑자기- 아 뜨거! 그래서 딱 잡은 거야. 너지! 그때 나오는 게 영혼의 소리야 이게. 의식해서 나 오는 게 아니고요. 2차적인 반성을 걸러서 나오는게 아니라. DNA에서 나오는 것. 인문학은 당연 히 이걸로 해야 해.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과학은 기호로 치환돼. 근데 인문학은 삶의 언 어, 혼의 언어야. 박사논문을 영어로 써야한다고 하는데- 어불성설의 규정이 있다만- 꼭 외국어 로 써야겠다- 적절한 이유가 있으면 써. 그렇지 않으면…
어쨌든. 1차와 2차 문헌의 사이쯤에. 헤센 책은 2차 문헌으로 사야해요. 그 다음 책도. 원전이 라기보다는 해석인데요. 덜 부담스럽게 볼 수 있는 것. 어떻게 추릴 것인가. 보시기 바라겠습니 다. 그러면, 일단 발제로 들어가고, 들어가면서 그 다음에 보도록 할 텐데. 재밌네- 역자는 열심 히 의미와 목적을 했는데, 의미와 종말- 정말 의미와 도발인지, 그냥 대충한 건지. 그냥 자기 자 리에서 발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발제)
종교의 의미와… 목적…
교) 왜케 갑자기 꼬리를 내려?ㅋㅋㅋㅋ
Q: 원초적 종교성은?
A: … 고대인들 당시에는 초월성 경험이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이 되었어요. 근데 현대인들은 원초적 종교성 경험이 예전처럼 다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과학도 발전되 고, 자연에 대해 설명 가능해졌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성에 미치는 영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 미에서 이렇게 했어요.
Q: 그러면 물상화나 탈물상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A2: 너무 어렵게 가는 거 같아서- 제반조건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는 거죠. 한 세 가지 정도 로 생각해봤는데.
송호근 교수님이 한국사회 이대로 가도 되는가 같은 맥락으로 썼는데. 우리 나라 사회가 굉장 히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고 했어요. 다양한 이해관계가 계속 상충되는 견해로 가고 있고. 과거는 정부, 개인, 조직이 통치할 수 있는 여건이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근데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하나의 단일체제만으로 리딩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삶의 기반을, 토대를 둘 것이냐, 굉장히 복잡해질 것 같아요. 그러면 인간의 종교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게 많다고 봅니다.
인간제어 불가능한 과학의 발전. 거대한 과학문명, 인간이 소외되고,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서 또 다른 초월자를 찾는 듯, 그런 면에서 종교성이 필요한대로.
Q2) 저대로 해석하자면, 굳이 현대가 아니어도, 원초적 종교성도 변화하면서 왔다면, 현대라고 해서 굳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원초적 종교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Q: 저도 이 질문이 안 되서 그런 건데. 24페이지. 변화들 속에서. 종교성 변화보다는 종교 개 념의 변화를 말하는데. 원초적 종교성의 변화를 말하니까 물어본 거죠.
A: 모호하다는 생각을 우리도 생각했는데- 이미 저자가 그걸 갖고 들어가잖아요. 원초적인 종 교성에 대한 것에 대해서- 하나의 가정이 아니라, 확실하게 갖고 들어가는 것에, 꼭 그럴까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회에서 오늘날 어떤 영향을 갖고 있는가.
Q: 원초적 근원보다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근데 종교라는 개념, 인간의 형식, 토론을 하면 좋은데- 원초적 종교성을 말하니… 그리고 이 책에, 발제 내용 안에서, 원초적 종교성이라는 말 의 감이 안 잡혀서. 61페이지에 그런 말이 나와서.
A: 이번 수업의 주제이기는 한데요. 글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요.
#) 23페이지. 다른 말. 종교적 감수성이나 시대 속에서 영향을 받아서, 실체화가 되었다는 영 향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캔트웰 스미스가…
교) 굳이 한 마디 한다면- 제가 수업계획서에 그 말을 썼어요. 다른 글에서도 이 표현을 많이 쓰고요.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할 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스미스 버전으로는 종교적인 삶이에요.
인간임으로서 이미 그런 삶. 종교적인 삶이라고 부른 것. 형용사가 먼저야. 어법적으로는 모순 이죠. 어떻게 ~적이 먼저인가. 명사보다. 어법으로는 말이 안 되지. 그런데 굳이 그런, 설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하고자 하는 바는, 개념적으로 물상화, 실체화 전에 이미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라는 형용사를 명사적으로 살려본 거죠. 인간에게는 그런 성질이 있다 성향이 있다.
그걸 삶이라고 한 거고. 그걸 종교적인 삶이라고 봐도 좋아요. 그 감수성을 또- 유한성, 초월지 향성- 감수성이기도 하죠. 뜻은 그렇게 추리면 되겠고요. 이 표현에 대해 수업계획서에 써서, 일 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말합니다.
광) 개념 설명은 해주셨으니까. 교단신학교 다니고, 교회 일 하니까요. 특히 이거 할 때, 당장 설교할 때 고민됩니다. 이렇게 하면 설교가 가능할까? 그리고 현대사회에 대해- 돈과 하나님. 애 들 3학년만 해도 돈을 이야기. 87년, 명시적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명사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쉬웠는데- 배고픔도 명시적인 적도 사라지니까, 명확한 목적이 없어지니까, 불안해하고. 죽음과 연관이 되서- 5.18 폭동-민주화. 파시즘의 재발현. 기준 대신 힘으로. 너무나도 다양한 게 들어 오니까. 너무 많은 것을 얻게 되고. 그러면 어느 삶의 방향으로? 지향을 못함. 방향을 잃어버렸 다고 생각함.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가.
현대사회가 종교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 사회적 조건이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또- 미시적 조건이, 원초적 종교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양 갈래 길이죠. 단순하게 이렇게 보면 안 되죠. 시대적 조건만은 아니죠.
종교적 내용이 다르다고 보면- 너무 거시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봐요.
광) 저는 그게 더 거시적으로. 미시성, 다양성으로 보자면, 다 봐야 하는데.
@) 이 질문에 대해서, 특정 범주를 설정했으니까. 전체적으로 짚으면 거시적으로 되고, 개인적 으로 가면 미시적이 되죠. 저도 그런 얘기했지만, 자기 개인 얘기하면, 미시적인 얘기가 되죠.
&) 유한성으로 인식할 때. 결국 죽음. 근원적 한계 앞에서 넘어가는 지점을 생각할 수 있는데.
여러 합리적인 세계관, 무신론적 세계관- 그래도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은 여전하기 때문에- 유신 론적 세계관과는 다른 뭔가, 종교성은 있지는 않을까. 신 중심적인 세계 속에서 그려졌던 종교성 과는 다르겠지만, 여전히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안) 다음 물음과도 관련될 수 있는데. 종교적 명사화와 관련될 수 있는데. 종교적을 반대하는 게 굳이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패러다임에는 가둘 수 없다는 것이- 명사화, 실체화되면서, 본질적 인 것이 오해됐다는게 스미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라는 제도에 가두는 게 안 되는 거인데 도 그런데. 억누르는데
호)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음. 종교에 대한 반대자들. 분명히 현대사회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 뭔가 차이는 있겠지. 이 책에서는 이야기 안 해서 불만.
^) 지금은 바로 아멘 댓글 다는데. 이런 종교성. 종교성의 차이가 상당히 큰 듯. 심지어 힙합 교회도 있잖아요. 여기에 중생 써놓은 티 입고 랩으로 설교하고. 종교성의 변화.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는 그런 의미로 다가옵니다.
() 지금 스미스는 실체나 대상으로 말할 수 없다. 정의는 다 다르다. 결국 실체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보면 안 된다. 그래서 발제자의 발제물을 보면, 형용사에서 명사로 실체적인 개념 으로 바뀌어서, 잘못된 게 인간의 자리가 사라졌다. 그 자체로 있는 것인 냥- 그러면 그것은 종 교철학, 첫번 수업 연결에서 보면, 전자의 종교철학. 현상사건경험에 관련된 거라면, 방법론으로 서의 종교철학에 대응하자면, 객관적인 방법론. 나를 주체로 놓고 종교를 대상으로 놓는 것은 불 가능하니까, 참여관찰법, 주관적인 것으로 가자는게 아니겠어요? 그건 어때요? 그러면 또 비학문 적이지 않냐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고. 너무 주관적이지 않냐는 질문이 있지 않겠어요?
*) 47쪽에 관한 이야기. 겸손+압도당할 필요는 없다.
A: 종교에 대해서 말한다기 보다는, 종교적인 삶 안에서, 종교에 대해서 알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현대 학문이 세분화, 객관화, 실체적 측면을 얘기… 주목을 해서 나가는 게 아닐까… 분화 되어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스미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그때 문제는 뭘까를 보자는 거죠. 그게 하나님 만나는 체험인지, 두려워서 그런 표현인지. 그런 거를 어떻게 종교. 라는 말로 연결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건 분 명히 느낀 사람 이야기. 신앙인, 어떤 신앙인이 느끼면 그걸 들어야 한다는 건데. 그게 타당한 건데.
안)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해석학- 객관적인 해석학 하이데거, 나치 동조. 가다머 그에 대 한 연구- 나도 관찰자로서 객관이 안 된다. 그러니 안으로 들어간다. 가다머, 주관적이어서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봐요. 어떻게 객관적인 준거를 가질 수 있느냐가 있다면, 주관을 배 제하는 연구는 없다고 볼 수 있죠. 이것도 가능한 방법론의 하나겠죠.
()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필요하죠. 아무리 불교에 대한 지식을 쌓고, 교리 공부하고, 해도 불교 신자의 느낌을 모른다는 거 아니에요. 불충분하다. 대상으로 놓는 연구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신자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서로 다르거든요. 그러면 기독 교는 없어요. 오히려 종우가 있고 문덕이가 있는 거죠. 그런 게 지금- 그 경계가 어떻게- 스님이 훨씬 더 가까울 때가 있어요.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가잖아요. 기존에 스미스가 비판하는 게, 안 되는 거죠. 체험에 근거한 그것의 필요성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게 필요한 거죠. 그런 경우 제도나 교리는 방해가 되는 것은 맞는데. 그 다음은 어떻 게 가냐.
*) 73쪽. 자기 성찰 안 한다. 큰 기독교에 대한 개념도. 총체로서의 내적 실체로서 인식하는
것. 이런 모든 논의가- 빠져나가려는 주지주의적 입장이 아닌가 해요.
광) 스미스의 기본 구도는 따라가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맞냐는 생각은 했어요. 참과 거짓 종 교. 내 종교로 남 종교. 존재론적 우위.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변증서. 우리가 진짜라고 할 때, 자 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건데. 그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것이 실체와 다른 건지. 존재론적 우 위가 등장하거든요. 과연 이 사람들이 원초적인 개념이 발달했을 때. 고대인들이 안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칼뱅의 글, 츠빙글리의 글에서도 다 나오거든요. 너네는 거짓이다. 자기 것은 항상 있어요. 내면 안에 정리된 것도 있는데. 그게 실체는 아니다? 그거는 아니거든요. 말 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진) 그건 아무도 못 말해줘….
문) 3페이지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개인 인격체적 감각. 이게 뭡니까? 잘 모르겠어요.
A: 경험한다기 보다, 역사적인 축적물로서 관심을 갖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 지 않을까요? 52페이지. 예배자 안의 감정. 태도. 그런, 형용사적이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거잖아 요. 신 앞에서의 사람. 인격적인 감각이고, 개방된 감수성- 그런 의미를 그렇게 표현한 거죠.
종교의 의미와 종말2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오후 3:59
뭐… 보시면 다 아실 텐데. 표가 다 말하고 있으니까.
이런 거죠. 인간과 종교의 관계- 는.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라, 모든 것에 앞서서, 가장 원초적 인 출발이야. 신화에서도 원초적인 것, 학문은 말할 것도 없겠고. 모두 말과 글을 가지면서 얻는 파생물들이고. 원초성의 라인이 될 텐데, 그 계기는 분명 죽음이겠고. 죽음 얘기가 되자면, 저 5 만년 역사의 종교와 2500년의 철학, 잽이 안 되도 얽히는 것이 공통 목적이 되겠어. 죽음을 가 지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종교의 관계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고. 철학과 죽음의 관 계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라는 표현도 있어요. 플라톤 버전인데. 우리 맥락에 맞갑게 번역 을 하자면, 철학은 죽음으로부터 비춰지는 삶의 성찰이다. 일상의 왜곡된, 통속적인 사고로부터.
땔래야 땔 수 없는. 원초적인 것으로 만드는 계기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종교… 스미스와 함께.
원초성. 어떤 방식으로 그럴 것이냐. 유한과 초월이죠. 유한과 초월은 반대말이거든? 반대말이잖 아. 유한성은 한계 안이고, 초월은 한계 밖이야. 반대말이야. 그런데- 유한성을 의식한다~ 고 하 면 달라져. 무엇에 의해 가능하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우물 안 개구리- 그냥 우물 안 에 살아. 우물 밖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다인데. 그런 것에 비하여. 이게
다가 아니구나. 한계와 관계될 때 가능한 거야.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면서. 그래서 무한자 가 되는 게 아니지. 몸부림을 해. 그래서 무한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되는 것이지. 무한성에 이르 는 것도 아니고. 무한성에 이르는 것도 아니야. 다만, 동경을 하겠지. 그래서 유한성과 의미롭게 관계 짓는 것이 초월이고. 무한자가 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지만, 한계 너머 저편을 향하고 하는. 이렇게 한계가 지워져있구나 를 의식하게 돼. 유한성 의식을 해석하는 거야. 의식과 지향성 은 같은 말이야.
그럼 도대체- 이게 뭐여. 죽음이라는 말을 살짝 뒤바꾼 거죠. 유한성의 체험. 근데 유독 인간 은 유한을 의식한다. 인간 중심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겠죠. 코끼리가 예배를 드린다. 동물학자들 이 그런 연구를 했다가, 긴가 아닌가 하다가 의미 없는 것으로 처리되기도 했지만, 도살장으로 끌려들어가는 소가, 저 끝에서 등심 안심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보면서 눈물 줄줄. 그건 생명으로 서 당연한 거예요. 근데 되새김질 하면서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생(牛生)은 뭔가(태 진이가 이때 옆에서 우생학 드립을 쳤다). 피조물, 삼라만상 중에서 인간이, 아직까지 유독- 화성 에 생명체가 있었다는데. 그거 추정하기 시작한다던데. 그런 얘기겠지만. 지금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계 의식 내에서 안팎. 넘나들면서. 반대말이 이 단계에 오니까 같은 말이 돼버려.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한계 밖으로 가게 만들어. 그게 종교성이라고 해. 그런 성향.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야. 몸부림이라고, 발악이라고. 이걸 그냥 조금 추상적으로 말할게 추상성이야. 그래서 homo religious.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같이 하지만. 이건 homo erectus와 뗄래야 뗄 수 없다고 자주 합니다. 물론, 아직은 가설이야. 정당성은 여러분이 판단하 세요. 지금 인간. 생명체 중에 파충류 양서류… 조류 포유류. 포유류는 대체로 네 발로 기어. 네 발과 직립 동물인 두 발 인간. 네 발 짐승과 깊이 연관되면서도 다르다. 네 발은 본능에 만족해 요. 유한한 본능에 만족해. 그래서 만족을 알아. 짐승들의 식욕과 성욕을 보면, 충족될 때, 더 이 상 추구하지 않아. 그래서 자손을, 대를 잇기 위해서만 행사해. 근데 인간은 통장과 냉장고를 만 들었어. 고손자에게까지 물려줘. 언제까지? 그런 거 없이. 한이 없어. 네 발 짐승, 유한한 본능에 만족을 하지만, 직립 인간은 한계 저편에, 무한을 직립이라는 코드 속에, 욕망 속에서 배웠어. 한 계가 없어. 무한해요. 직립에 심겨진 욕망이 우리에게 무한성. 무한성에 이르지 못해. 그래도 그 리로 향해 뻗고 싶어 해. 이쁘게 말해서 지향성이지, 발악이야. 그래서 종교야. 요 대목에서 우리 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면-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은 종교를 갖든지 갖지 않던지, 종교적 이에요. 이런 유한성의식을 하고 있다면. 종교 제도가 아니고, 이런 성질이야. 인간은 이미 내뻗 는 발악을 하게 되어있다. 그거 당연한 거야. 그 코드대로, 드라이브 하는 대로 착실히 끌고 가 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도리겠죠. 특별히 고등종교로 분류될, 가르치고 있는 도. 부득불,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하등종교는 이 욕망에 대한 원색적 충족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이 존재이유 야. 욕망에 대한 일차적인 충족. 역현성의 종교. 근데 신현적이든 성현적이든, 힘숭배에 머무르지 않고, 승화해. 힘 추구를 하게 만드는 욕망과 관련해서, 등급이 높아지면, 힘을 승화하라고 해.
물아 사상, 공 사상. 욕망을 넘어설 것을 말하는 고등종교. 종교적 인간과 고등종교는 충동을 일 으킬 수밖에 없음. 이건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계- 종교가. 관계가- 시원적인 종교로 나타나게 되겠죠. 이걸 문명의 문화제국주의적인 표현으로 잠시 원시로 불렀어. 시원이 primasol 원시 primitive. 원시. 저 뒷동네에서 보니까.
그런데 파퓨아뉴기니보다 아메리카가 더 발전했다는 관점이야. 원형적인 표출이 예술이야. 내용 은 종교고, 예술은 표현이야. 첫 표현방식이야. 이게 출현하면서 바로 예술이라는 표현방식을 취 했어. 종교는 이미 예술을 취해. 음악과 미술 등등. 쉽게 말해서 원시 종교를 취하는 원시예술이 에요. 이제는 원시가 아니지만. 하여간, 종교가 원하는 저편을 불러내기 위한 장르들이 발달했잖
아. 거룩함이 여기서 아름다움으로. 그러면 말과 글로 신화로 엮어져. 신화의 여러 틀 가운데, 선 을 주제로 하는 신화를 한 대목으로 잡을 수 있겠지. 이 종교가 substance 인데, 일차적 표출 방식이 예술이라고. 그 도구가 상징이야. 그 상징은 공감 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있어. 그래서 좀 더 상징의 범위가 좀 더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진전이 되지. 이 때 말과 글이 등장해. 저 동네에 서도 할 수 있도록. 여전히 말과 글로 쓰는데. 아무리 그래도, 상징적인 언어야. 엄청나게 풍부 해. 다의적이야. 즉, 모호하다는 거야. 풍부한 것은 좋은데, 모호할 수밖에 없는 다의성이 동전의 양면이야. 그래서 정확하게 하려고 개념이 나왔어. 그게 학문이야. 진. 진선미성. 우리가 알고 있 는 시대인 고대는 학문과 함께. 신화에서 학문으로. Bc5세기. 어떤 세기야. 인류 문명사의 대전 환이 일어나요. 야스퍼스 같은 양반이 하는 말, 인류의 대 스승들. 소크라테스, 싯다르타, 공푸가 등장해. 이러면서 흘러가요. 근데 학문이 출현했으니, 학문의 세례를 받아버린 종교야. Primitive 가 아니라, classic한 종교야. 이 시원 단계는 미분이야. 이것도 횡포야. 미분도 아직 안 갈라졌 다는 건데. 미비불부. 이것도 분리의 눈으로 본거야. 원초적 단일성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걸 분리의 씨앗을 심겨서. 구분과 분리는 어떻게 달라? 구분은 그래도 한 지붕 두 가족이야. 분 리는 딴 살림 사는 거야. 고중세만 해도. 성이 속을 지배했어. 가르기는 갈라도. 종교가 세속을 지배했어. 고대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어요. 중세와 견주어줄 수 있는 회복이다. 르! 네상 스다. 중세를 기준으로 보면, 근세를 예비하는 과정으로 봐서. 얼마나 종교로부터 분리되었을까.
지난 시간에 추천했던 콘포드의 책. 철학이 종교에서 나왔어. 그 모든 것의 뿌리가 종교였다능.
그건 뭐,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거, 신화적 색 채를 씻어내고, 주물로 보게 만든 게 아선생이야. 어쨌든. 아선생에서 고대의 정점을 찍고 붕괴하 잖아. 추락하는 고대. 파닥이는 헬레니즘.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속에 대한 성의 지배. 종교를 빠져나와서 철학이 아니라, 종교를 뿌리로 해서 철학. 그러니까. 구분이 야. 이게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래. 종교의 제주하고, 정치의 황제하고 우리가 남이가 하고.
성이 속을 지배할 사회체제가 이쁘게 마련된 겁니다. 정치는 종교를 십분 활용하고. 주거니 받거 니. 철저히 공분모의 관계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공통음모야. 정치도 종교도 힘을 추 구하는 거야. 죽음을 넘어서는 힘. 그런데 힘은 양날의 검이야. 정치적인 힘, 정의와 폭압 사이.
종교적인 힘- 해방을 줄 수도 있고, 엄청난 억압과 강박의 원천이 될 수도 있어. 알고 그럴 수도 있고, 모르고도 그럴 수도 있고. 한 지붕 두 가족의 관계. 그랬기 때문에. 속에 대한 성의 지배 야. 이 성. 성은 힘 추구에 같이 결탁했던 것이 종교와 정치야. 그런데 여기에 빨간 것이 등장해.
빨간 색의 탈. Ex의 탈. Anti 반. Non 무. De 비. 근데 근세는 과학이 이끄는 시대야. 지금까 지는 종교가 압도적으로 지배했습니다. 근데 이 속을 이끌던 과학이 성에 대해 도전합니다. 탈은 out of 야. 종교의 지배영역,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거야. 종교에서 벗어나. 처음에는 종교재판의 대상이었지.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탈종교의 세력이 커져요. 그게 근대화야. 과학. 18세기, 프랑 스 중심의 정치혁명. 산업혁명 중심의 경제혁명. 다 혁명이 벌어져. 벗어난 지역이 점점 커져. 탈 영역이 점점 커져벼렀어. 그게 근대. 그러니 위에 올라간 관계가 아니라. 성에서 빠져나왔어. 빠 져나온 게 점점 커져. 팽창이 일어나. 16세기 과학혁명. 프랑스 정치혁명. 산업혁명. 계몽주의.
속이 점점 커지는 거야. 성이 게토화되어버리지. 속이 성을 에워싸고. 카톨릭 교회는 노골적으로 그랬어요. 빗장을 걸어잠궜어. 개신교가 종교개혁자들이 같이 호흡하려고 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 도 이전의 종교 패턴으로 돌아가버렸어.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마찬가지야. 모양새는 좀 달라도.
사실 탈은. 성에서 빠져나왔겠지. 조끄매했겠지. 그러니까 가장 일차적인 반응이여. 충돌이었어.
이 과정이 쭉 왔는데. 속이 이렇게 팽창하는 일련의 과정. 세속화라고 할 수 있을꺼야. 이 세속 화는 분리의 방식으로 세속화를 했어요. 분리된 채로, 성은 테두리 안에 갇혀있었어요. 팽창 과
정, 점점 커졌는데. 또다른 시대. 속의 눈으로 성을 봤더니, 근대도 받아들이지 않고 아직도 고중 세야. 탈은 막강한 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과제야. 그래야 탈이야. 근데 이제는 커졌어. 그래 서 속에서 보니까, 아직도 속을 지배할 수 있는 성인냥, 성호 그으면서 아직도 고중세야. 그러니 까 쟤들이 하는 짓이 뭐냐. 그래서 나온 시대정신의 양반들. 맑스. 포이에르바하. 니체. 프로이드.
그래서 이렇게 반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애들이 나왔어요. 일련의 과정인데. 탈이다, 반이다. 어쨌 든 다 종교에 대한 접두어를 갖다붙이는, 속의 입장들인데. 사회가 성에 대해서. 그래서 연장선상 에서 공유하죠? 그런데 탈과 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근데 반종교도 현대의 시작이야. 한 세기 지나가서, 20세기 중엽이 되어서 이 얘 기, 무종교가 시작돼. 이 얘기가 시작된지 반세기가 되더니, 사상계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돼.
이 부류가 본격적인 위치를 갖기 시작합니다. 2007년 미국의 개신교 인구가 53%인데, 5년 만에 48%. 근데 한국도 비슷해요. 개신교는 심각하게 줄어들고. 인구분포로 보면 비슷해. 훨씬 우리가 주목할께 이 무종교입니다. Non affiliate. 이건 무신론과는 달라. 본회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 도, 무신론은 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근데 무종교는 무신론이 아니에요. 관심을 안 갖는 거야.
그래서 반종교와 무종교도 근본적으로 달라. 얼마나 어떻게 다르냐. 반종교는 종교에 대한 지극 한 관심들이야. 포에이르바하,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진한 관심이야. 그런 사람들은 사울 이 바울 되는 거야. 그렇게 될 수 있어. 한 개체 생명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어? 우리가 그렇게 쓰면 되지. 니체의 안티크리스트. 진짜 그리스도 찾는 방법 아니냐. 안티 크리스트가 반 그리스도 인이야. 시중 책도 반 그리스도더라. 황당무계한 번역이야. 반그리스도인이야. 이걸 그리스도인은 마귀라고 하는데, 이건 예언자야. 관심과 열정이야. 근데 무종교는. 전혀 아니지. 얘네는요. 뭐.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니들끼리 해. 나는 이런 초월 지향성 잘 모르겠어. 죽음? 난 그냥 이렇 게 살다 죽겠어. 근데 이 부류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아십니까? 가장 빨리 늘어나는 것은 이들이 야. 어떤 방식으로도 종교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무종교는 종교에 대한 인간이기를 반대 하는 거야.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의식이 달라.
어떤 목적에서는 근세 앞에서, 어디에서는 안티 앞에서 자를 수 있어. 어쨌거나 그래. 이런 종 교가, 학문이 되고. 미분이 구분이 되고. 분리가 되고. 이런 과정 후에 공격을 해대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반과 무 사이에서. 기독교 신학계의 반이야. 그런 의미의 종교라면, 그 종교에 대해서 는 de를 해야 한다. De. De construction 이지. 해체해야해. 그게 de야 . 그게 20세기 신학이.
19세기 반종교에 대한 성찰이 비종교야. 근데 아직 미비하게 기독교 신학 안에 읊어지고 있어.
비종교와 무종교는 대화할 수 있어. 비종교는 반종교에서 나왔지만. 비종교는 무종교와 대화할 수 있어. 아직 더 발전해야하지만. 그걸 우리가 해야 하고. 이 신인류족속들과 오도롷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그런데 지극히 한정적으로만 이야기되고 있어. 반으로 가고, 무로 간 그룹. 그 사 이에서. 시대의 요청에서. 지극한 극소수. 그리고 압도적 고전 패턴의 다수. 그리고 무종교로 가 는 현대인. 이게 오늘날의 그림이에요. 이 지극한 극소수도 선배들의 업적 위에 쌓았어요.
그러면. 지평은 삶이야. 그러니 스미스는 형용사가 명사에 앞서요. 물론. 형용사보다 하나 더 있어. 더 지르고 싶어. 명사보다 동사야. 종교하다. 이런 게 있는데. 어떤 종교학자의 말. "신은 비신앙인에게는 명사지만, 신앙인에게는 동사다." 단순히 형용사가 아니야. 단순히 describe하는 게 아니야. 부차적인 성질이라고 하는데, 마음에 안 들어. 삶의 동사야. 종교하다 해야 해. 그 제 안을 하라고. 종교하라. 이런 말 없지? 안 썼지? 그런데 학문이 등장하면서~ 예술 신화에서 아직 그랬는데. 학문이 오면서 실체화 개념화가 일어났어.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하니까 종교가 필요가 없었어. 신앙으로만 했어. 근데 이거는 시살 신앙과 이성의 관계 사이에서 대리전을 펼쳤는데. 용 어상으로는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요. 그래서 신앙은 스미스식으로만 처리해서는 안 되고요. 그
다음 근세 초기는 경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물상화 경계. 물건으로 만들어버렸어. 물건이야.
근데 이게 중요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이거든. 물건이니까 경계가 가능해. 그리고 이때 와서야 이 그림이 가능해. 물론, 씨앗은 저 앞의 실체화에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의 이런 대안들이 있죠.
슐횽1)이 이미 했죠. 신조 행위 아니라, 마음이야. 신조는 지성, 행위는 의지죠. 마음은 정. 사실 아닌게 아니라. 고중세가. 지가 지배한 시대. 근세는 의. 현대는 정이 의미를 갖죠. 마음, 정에 관한 것. 이런 것이 현대의 도입부의 시작에, 일말의 노력들이 있었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뒤에 나오지만- 신앙과 전통. 이야기하겠다 하잖아. 미리 말씀드리면. 신앙과 전통, 이런 것. 신앙, 공 시적인 것. 전통, 통시적인 거야. 뭔가의 스펙트럼을 잡아보겠다. 싸잡아보겠다.
이런 동기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왜곡이 있다 보니, 안 되겠다. 그래서 다른 말을 쓰겠다.
그런데 어떤 뜻이냐.
하이데거가 Sein und Zeit 에서.
사람들이 존재라고 할 때. 뭐야. 존재. 있음.
근데 너네가 존재라고 하면서 다 쪼개놨는데. 그게 존재와 반대가 아니라, 포함되는 거야. 대 표적으로, 존재와 현상. Sein und Erschein. 존재와 당위sollen. 사유denken. 무nichts. 다 반 대말이지. 사유는 아는 거야. 반대는 있음, 주어지는 거고. Denken과 대조되는 Sein과 Nichts 와 대조되는 Sein은 또 달라. 그래서 존재의 다의성, 존재의 동사화다. 그런데도 하도 못 알아먹 으니, Seyn 이라고 하는 거다.
이것도 비슷해. 하도 다 갈라놓고. 틀이 잡혀있고. 구획이 되어있고. 물상적으로. 그리고 태어 나서 이 종교 공존 혼재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회심하기도 하고. 개종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여간. 그렇게 산다는 거야. 근데 개종이라는게 뭐야. Conversion. 개. 바꾸는 거잖아.
긴 얘기하지 않아도. 오매. Adversion 추가하는 것이다. 가종이야. From A to B, 제끼고 가는 게 아니라. French Christianity와 Korean Christianity와 달라. 한국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유교와 무교로. 사실 한국의 어떤 종교든, 있음교와 없음교로 그득 차있다는 거야.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는 거지. 추가. 그런데 성분분석을 하면, 이만큼이 무고, 이만큼이 유고, 이만큼이 기독교 일 수 있어. 근데 이걸 정직하게 인정하면, 추가하는 거야. 그런데 정직하게 하자면? 유와 무를 줄이는 과정을 가져야겠지. 근데 실상은 이런데 자기는 100%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개선할 길이 없잖아. 그래서 adversion으로 가야지. 삶의 눈으로 보면 그럴 수가 없는 거야. 그게 삶의 논리야. 다 나름대로 역할은 있었지. 그 시대는 역할을 했지. 근데 무언가 망각했어. 그래서 이 책에서 삶이라는 말을 찾아서,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봐. 무지하게 많이 나와. 원래 이거, 삶 이야. 비종교가 다시 시도, 재연합하려는 것. 미분된 성속의 관계를, 구분되었다가 분리된 것을 다시 재연합하려는, 비종교로 재연합하겠다는 거야. 그런 작업이 스미스는 이런 대안을 내세웠고 요. 이렇게 하면 이제- 앞부분의 이야기 + 앞으로 가려는 이야기까지 싸잡아서 할 수 있지 않나 싶겠는데. 5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토론 얘기 중에. 이걸 구상하면서. 이런 저런 맥락에서- 그냥 계속 들었는데. 어 쨌건. 요 시점이, 요 맥락에 이어서 해야 하는 지적을 할 시점이죠. 근데 아직 학기 초다 보니까.
아직 이 정도 깔고. 다음 시간부터. 이런 비중을 줄이고. 진하게. 그러니까 수업이 될 것 같으면, 여러분이 토론 마무리하고, 책을 펼치고, 집어주면서 훑고 나가면 되는 건데. 어쨌든. 그런 과제 가 남아있는데. 그런 걸 교실에서 할 수도 있고, 건너 띌 수도 있고. 건너 띄면 자연스럽게 여러 분의 일로 남는 것입니다. 앞의 얘기, 못한 얘기는 앞으로 하길 바라고요.
1) 슐라이어마허
한 마디 그냥 덧붙인다면.
특별히 이 상황. 탈 반 무. 일련의 종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전개과정에 대해서. 스미스는 이런 걸 막 다 엄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연구하는 자, 생활하는 자에 있어 서 어떻게 자리잡아야 하는가. 부정적, 단계별 구별, 분리. 각각 유형은 오도로케. 종교라는 것이 지칭하고. 뜻을 재정립할 수 있을지. 그러면 이 양반 이야기보다는 우리 이야기로 끌고 올 수 있 지 않을까 싶어서. 지우기 전에 한마디 붙여봅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제 얘기를 줄이고. 재밌는 것이 따끈 따근 하게. 열성적으로 하기를 바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