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전작가와 작품세계 7>
다산 정약용과 실학파문학 담당교수 : 하정승
테마학습활동
다산 정약용과 실학파문학
18세기는 조선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였다. 그 변 화의 모습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뤄졌 지만, 특히 실학의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학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 쳤지만, 오늘은 문학적 측면에서 실학파 문인의 시를 살 펴보기로 하겠다. 실학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 은 대개 홍대용, 이익,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이다.
이들 중에서도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역시 박지원과 정약용(1762∼1836)을 꼽을 수 있다. 사실
박지원은 문장가로서의 측면이, 정약용은 학자로서의
측면이 두드러진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박지원은 시보
다는 산문을 많이 썼고, 그러기에 연암의 정신을 탐색할
수 있는 장르 역시 산문에서 찾아야 된다고 본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시를 즐겨 썼기 때문에 다산의 다양한 사
상들이 그의 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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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시세계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 백 성의 현실을 목도하고 잘못된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하 려는 측면이 강하다. 이는 실학자다운 면모라고 해도 좋을 것 이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를 살다 간 그의 시에는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주목하고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 상 당히 많다.
정약용은 경기도 馬峴(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 정조 사후 18년간의 강진 유배 시절을 거쳐 다시 마현 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마현에서의 만년기도 강진 유배기 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18년간이었다. 말하자면 마현은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자 마침표와도 같은 곳이다. ‘수구초심(首丘 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에는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나 다 고향으로 돌 아가서 말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약용의 만년은 평안하고 행복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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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중앙정계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행복은 권력이
나 명예, 부를 누리는 것에 달려있지는 않다. 한적한
시골 생활은 강진 유배 생활에서 시작한 다양한 분
야의 저술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했다. 다산의
엄청난 분량의 저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강진 유배나 마현에서의 만년이 아니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그의 한시 작품 중에
서 한 수를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고심 끝
에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지고 그의 따뜻한 면모
가 잘 나타난, 그러면서도 상당히 서정적인 다음 시
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산 정약용과 실학파문학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과 접하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낡은 집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오랜 비 때문에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窮居罕人事 恒日廢衣冠
敗屋香娘墜 荒畦腐婢殘
睡因多病減 愁賴著書寬
久雨何須苦 晴時也自歎
다산 정약용과 실학파문학
인용한 시의 제목은 「구우(久雨)」이다. 번역하면
‘장맛비’ 정도가 되겠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장마철
을 사람들은 어떻게 보낼까? 요즈음 같으면 하루종
일 집에 앉아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음악
을 들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스마트폰으로 친구와
수다를 떨지도 모른다. 또는 가족과 함께 전을 부쳐
먹으며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산
은 홀로 앉아 탄식을 하고 시를 쓴다. 물론 그 시절
에는 TV도, 인터넷도, 전화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
지만, 만약 있었다 하더라도 다산은 여전히 홀로 시
를 쓰고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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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적한 시골생활을 하고 있 는 중이다. 아니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양반이라 면 갖춰 입어야 할 의관도 제대로 걸치지 않았다. 3-4구는 얼 핏 보면 주변의 들판이나 집에 대한 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시인의 내적 심리상태를 말한 것이다. 낡은 집에는 사 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향랑각시 한 마리가 방바닥에 기어가는 것 뿐이다. 향랑각시는 노래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시선을 돌려 들판을 바라봐도 아무 것도 없다.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팥꽃 밖에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 시 인의 곁에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노래기와 팥꽃이다. 찾아오 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나마 유일한 말벗은-물론 서로 대화 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노래기 와 들판에 홀로 남겨진 팥꽃뿐인 것이다. 이들은 시인의 친구 이기도 하지만, 또 시인을 많이 닮아있다. 홀로이고, 홀로여 서 외롭다는 점이 그렇다.
다산 정약용과 실학파문학
일반적으로 이 시를 벼슬에서 물러난 다산이 시골에서 지내며 장 마철 농민의 궁핍한 생활상을 직접 목도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더 나아가서는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는 잘못된 사회현실을 바로잡는 제도개혁이 필요함을 은근히 내비 친 현실참여적인 성격의 시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어느 면에서는 상당히 타당한 견해이기도 하 지만, 필자는 좀 다르게 이 시를 해석하고 싶다. 궁벽한 시골에서 외 롭게 살아가는 고독한 시인의 자화상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5-6구 는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에 그나마 시쓰기가 유일한 해방구임 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병이 들어 잠도 잘 수 없다고 하였다. 잠을 편히 못 이루니 별별 근심도 따라서 더욱 많아진다. 이때 해결책은 시쓰기이다. 시를 쓰면 모든 수심과 걱정이 넉넉히 해결된다. 그렇 다면 다산에게 시쓰기는 외로울 때의 친구요, 삶의 희망이요,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다산이 2500여수가 넘는 많은 시를 남긴 것 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